『0,0,0』과 『산책론』으로 독립출판 구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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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4,714자 / 10분 / 도판 2장
발행일2016년 1월 26일
유형오피니언
독립출판이란 무엇인지 한 문장으로 그럴듯하게 정의하는 일은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독립출판의 범위를 그려보고 각자 어디부터 어디까지 독립출판이라 생각하는지 구분해보는 일은 꽤 흥미로워 보인다. 물론 그 범주는 무척 허약하고, 새로운 서적에 따라 쉽게 허물어지거나 좁아지기도 한다. 오히려 그렇기에 독립출판의 테두리를 설정해보는 일이 중요하다. 곧 형태가 변화할 범주를 그려 ‘2015년 지금의 지형도’를 만들어두는 것이 역으로 2014년을 쫓거나 2016년을 내다볼 때 유효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0,0,0』과 『산책론』이라는 두 권의 책을 통해 2015년의 독립출판의 요소들을 구분해보려고 한다. (이 원고가 《건축신문》에 수록되는 것과 두 책 모두 건축과 관련된 사실은 지극히 우연이다.)
0,0,0
2015년 상반기에 발간된 『0,0,0』은 신지혜라는 개인이 지금까지 살아온 11개의 집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짧게 요약하자면 개인사에 대한 에세이쯤 될 것이다. 하지만 『0,0,0』이라는 명료하지 않은 제목처럼 이 책을 짧게 요약하면 할수록 그 중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요약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지 말고 ‘집이라는 공간을 핵심으로 하는 개인의 역사’라는 점을 유별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몇 채의 집과 별장까지 보유하고 있는 부유층이 아닌 이상, 개인은 어떤 집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지 못한다. 즉 그가 서술하고 있는 11채의 집은 지금 2015년에 나란히 배열된 건축물이 아니라, 지금껏 ‘이동/이사해온’ 공간의 목록이다. 현재 열한 번째 집에 사는 그는 앞서 거주했던 열 채를 기록하면서 최대한 꼼꼼히 그 형태와 도면을 그려냈다. 과장을 섞어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조훈현 9단이 7년 전 두었던 대국을 홀로 처음부터 끝까지 복기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처럼 느껴진다. 태어나서 처음 살았던 집을 2015년 현재의 기억과 개인적인 사료로 복원하는 일이다. 마치 『일본 고서점 그라피티』의 이케가야 이사오, 『작업실 탐닉』과 『유럽낭만 탐닉』의 세노 갓파, 『여행의 공간』의 우라 가즈야처럼 이 작은 책에서 개인의 집중력을 집요하게 펼쳐낸다. 위 열거한 작가들보다 끈덕지게 구현하는 디테일의 측면에서는 다소 약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처럼 체험과 기록이 동시에 이뤄지지 않았고, 오래된 역사를 어떻게든 지금으로 끌어올린 점이 강한 장점으로 작동한다.
제목 ‘0,0,0’은 자신의 집을 자신의 원점으로 빗댄 뜻이다.(“누군가는 고향을 자신의 원점으로 여기고, 누군가는 가족을, 누군가를 연인을 자신의 원점으로 여긴다. 나의 삶 좌표계에서의 ‘0,0,0’ 점은 언제나 집이다.”) 핵심이 되는 꼭짓점으로서 그 점을 중심으로 확장하거나 뻗어 나가는 좌표. 그 11개의 원점이 이동해온 선은 생각보다 많은 개인상과 시대상을 동시에 드러낸다.

우리는 그 옛집이 현재 존재하는지 아닌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태로 타인의 기억을 집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염탐한다. 여기에서 독립출판의 테두리를 만들기 위해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한다. 그렇다면 이 책과 개인의 자서전은 다른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자비출판’이라는 방식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자서전은 개인에서 출발해서 개인으로 끝난다. 나의 감정과 나의 역사를 문장으로 기록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욕망과 장치와 기술이 없다. 그러므로 숱한 자서전에서 책은 곧 그 글의 무덤이다. 그 삶의 총합이 종료되는 곳. 개인으로 종료되는 책이라면 단 한 부 만들어져야 아름다울 것이다. 그런데 『0,0,0』처럼 자신이 원점으로 여기는 집이라는 공간 외에는 눈 돌리지 않고 서술하게 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개인에서 출발해서 개인으로 끝나지 않는다. 개인으로 출발해서 개인이 만든 괴팍한 ‘장르’로 끝나는데, 그 장르는 기존의 분류법에 의한다면 어디 속할 곳이 없고 새로운 분류를 만들어내기에는 유사한 예가 많지 않다. 기존의 나열과 묶이지 않아 외롭지만 그만큼 대체 불가능한 이름이 될 수 있다면, 자연스러운 기획이 된다. 굳이 ‘자연스러운’이라 쓴 이유는 1인 기획회의가 프로페셔널하게 진행되었을 리 없는데도 작가 개인의 가지치기를 따라가 보니 결국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건축적 소사小史라는 장르라 한다면, 80년대부터 현재까지 사람들은 어떤 환경과 재료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지, 독립하였으나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공간에 사는 지금 세대들은 어떤 불안정함에 처해 있는지, 그는 그토록 개인적으로 서술했지만 우리는 그토록 전체와 개인을 순환하며 읽을 것이다.
산책론
『산책론』은 2015년 하반기에 발표된 책으로, 라야raya 씨가 거주 지역인 잠실의 건축물들을 3년간 탐방하고 탐구하고 탐사한 기록이다. 이 역시 자연스러운 기획이기에 실현 가능한 선택이 되는데, 잠실이라는 지역은 한 권의 서적을 만들기 위한 공간적 소재로 최우선시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잠실의 건물을 소재로 삼은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까닭도, 반드시 다뤄야 하는 건축이 있는 까닭도 아니다. 우선 작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기운 빠지는 선택이 될 테지만 강력한 접근성은 곧 놀라운 집중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집중력은 중첩된 양으로 ‘왜 하필 잠실인가’를 끝내 설득하는 단계까지 확보한다.

그러니까 놀랍도록 몰입된 측면과 놀랍도록 헐거운 측면이 혼재된 책이다. 한국, 서울, 잠실이라는 지역으로 한정하면서 이 책에 수록된 건물의 총합이 잠실 전체의 인상이 될 정도로 두터운 반면, ‘왜 이렇게 묶었는가’라는 목적이나 당위는 거의 느껴지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학문적인 위치나 시대적인 명분이 없다. (그 점에서 위에서 이야기했던 『0,0,0』과도 이어진다.) 그 ‘이유 없음’이 바로 잠실의 건물들을 기록하면서 자료나 도판이 될 자격이 없다고 여겨졌던 이미지를 지면으로 풀 수 있는 힘이다. 특별히 학문적/역사적/사회적으로 도달해야 할 곳을 상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기록할 수 있다. 계속 기록하면서 자신만의 방법론과 작은 고지들에 도착하여 거대한 건물을 예측하고 구획할 수 있는 (개인적인) 경지에 다다르는 일. (“땅으로만 걸어 다니던 동네 전체를 지도처럼 보게 되고, 지금 걷고 있는 거리를 위에서 상상할 수 있게 된다. 단순히 풍경 속 불특정 다수로 인식되던 건물 무더기들도 하나하나의 개체로 보인다.”) 그간 하릴없다고 여겨진 것, 쓸데없다고 여겨진 것을 이만큼 모아 펼칠 때 그것을 즐길 수 있는 태도를 지닌 소집단에게는 굉장한 ‘쓸모’, 시간을 쓸 가치, 그러니까 충분한 독서의 대상으로 작동한다.
『산책론』을 통해 독립출판의 또 한 가지 요소이자 방향인 지금 젊은 세대의 창작방식을 짚을 수 있다. 현재 왕성하게 무언가 만들어내고 있는 세대는 ‘완성하여 발표’하지 않고 ‘발표하면서 완성’해나가는 방식을 보인다. 스스로 만족하는 특정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그 이면에서 갈고 닦은 뒤 그 실력을 검증받고 비교적 안전하게 세상에 나타나는 방식이 기존의 큰 규모의 문화에서 실행되었다면, 이 작은 문화에서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발표물을 내고 그 반응과 성공/실패를 통해 다음 레벨로 이동한다. (실패 역시 ‘감당할 수 있는 실패’이기에 효과적인 응용 내지는 영리한 망각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라야 작가 역시 건축이라는 지식을 더 얻을 시간조차 현장에서 건물들을 기록하는 데 쏟는 것이다. 프로가 되기 위해 길고 긴 무명의 학습 상태로 등장을 유예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무슨무슨계의 프로가 될 구분 없이 개인이 실현 가능한 활동을 이어나가는 것. 그리고 그 활동들이 모여 무슨무슨 계의 프로가 미처 보지 못했던 뾰족한 구석을 찌를 수 있다. (앞서 ‘신지혜라는 개인’, ‘라야 씨’라고 표기한 것도 같은 의도다. 그들은 모두 작가인 동시에 개인이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유독 작가로서 모든 어휘를 구사하고 모든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와 달리 스스로 개인 겸 작가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있다.)
소형 깃발로서의 독립출판
자신이 이동해온 11채의 집을 신지혜라는 작가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잠실에 살면서 시간 날 때마다 온갖 건물을 탐방하고 기록하는 라야라는 작가보다 그 지역 건물들을 잘 서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드문 것은 그 내용들이 ‘유의미한 컨텐츠’ 내지는 ‘지금 뜨는 무언가’ 내지는 ‘대박 기획’일 리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때 『0,0,0』과 『산책론』은 각 작가에게 소형 깃발로 기능한다. 프로필에 열거할 대형 목록이 아니라 그때그때 나만이 몰두할 수 있는 지점에 꽂는 깃발로. 선점하여 그곳에 눌러앉는 것이 아니라 한 지점과 시기를 (발표함으로써) 잘라 다음 지점과 시기로 움직일 수 있게 한다.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음악가의 내한공연에서 모두가 숨죽여 그가 대표곡을 부르길 기다린 적이 있다. 그리고 끝내 대표곡의 전주가 흘렀을 때 터진 사람들의 환호성을 기억하고 있다. 그 대단한 시대의 증인들은 영향력 있는 시간을 살면서 대표곡에 짓눌린 삶을 보내지 않을까. 작가에게 가장 큰 명예를 안겨준 곡이 작가가 가장 혐오하는 곡이진 않을까. 뒤틀린 기운으로 가득한 무대를 보면서 우리는 굵직한 대표작을 가질 수 없을 거라 직감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았나. 앞서 이야기한 『0,0,0』과 『산책론』처럼 한 사람만이 탐사 보도하듯 파고들어 갈 수 있는 소형의 작업을 이어나갈 때 전진인지 후진인지 제자리걸음인지 관계없이(관계없이!) 자기-갱신의 이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무명의 쓰는 사람. 책방 ‘유어마인드’와 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 운영자이며, 『책등에 베이다』(2014)를 썼다.
『0,0,0』과 『산책론』으로 독립출판 구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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