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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공단>의 위로 공간

조은

지독한 혹은 따뜻한 위로 _ <위로공단>은 지난 50여 년에 걸친 우리 산업화와 압축발전의 시간을 여성 노동자들의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그들의 억압적 삶을 단순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공간으로 성찰한다. “선택할 것이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처럼 가족을 위해 자신을 삶을 바친 여성 노동자들의 현장은 임흥순의 즉흥적이고 따뜻한 시선의 비판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폭압성과 더불어 여성적 위로를 떠올리게 한다. 미학자 양효실의 인터뷰와 사회학자 조은의 크리틱을 통해 임흥순의 세계를 다각적으로 살펴본다.

<위로공단>을 세 번 보았다. 첫 번째는 극장이 아니었다. 서울시청 8층 다목적 홀이었다. 광복 7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의 프로그램에 들어있던 <풀밭극장>의 첫 상영작으로 시청 앞 광장에서 보게 되었는데 그 시간 하필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 상영장소가 실내로 옮겨졌다. 극장 개봉에 앞서 선보인 국내 첫 상영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나의 다큐멘터리 촬영을 맡은 스태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떻게 저토록 집요한 시선을 화면 하나하나에 꽂았는지 모르겠다’면서 임흥순 감독은 데이트하면 스토커로 오해받았겠다고 중얼거렸다. 두 번째는 《건축신문》의 원고 청탁을 받아 제대로 한 번 더 보려고 상영관을 찾아갔다. 인디스페이스가 상영관이라 해서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신문로의 가든플레이스에 10분 전 도착했는데 상영판에 <위로공단>이 없었다. 서울극장으로 이사한 지 꽤 됐다고 했다. 마침 나처럼 <위로공단>을 보러 거기로 온 분과 택시를 타고 함께 서울극장의 인디스페이스로 갔다. 10분 늦었다. 서울시 다목적홀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음향과 함께 시원한 화면을 즐길 수 있었다. 앞의 몇 장면을 놓친 게 아무래도 아쉬워 사흘 뒤 다시 갔다. 볼 때마다 임 감독이 스토커 같다는 내 촬영 스태프의 표현에 느낌표를 더했다. 정말로 화면 한 컷, 한 컷이 치밀하고 집요하게 계산되어 있고 그림 같은 화면과 현실의 화면이 서로의 경계를 흡입하며 넘나든다. 팍팍한 현실에 묘한 쉼표를 찍는다. 빗소리와 기계음 사이, 사유와 노동 사이, 일터와 숙소 사이, 비행기와 크레인 사이, 감추기와 드러내기 사이, 그리고 다큐멘터리와 비디오아트 사이에서 숨을 고르면서 ‘위로 공간’을 찾아 나선다.

<위로공단>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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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의 제목은 때로 우리를 배반한다. <위로공단>이 그렇다. 다의적으로 배반한다. ‘위로공단’이라니. 뭘 위로하는 공단일까 아니면 무슨 위로를 주는 공단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보러 간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에서 은사자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면서 생각한다. 위로공단이 아니라 문제공단 아니면 문제적 공단이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다가 영문제목은 무얼까 호기심이 일었다. 수식어 없는 그냥 ‘공단factory complex’이다.

‘위로 공연’ 같은 단어에 익숙한 우리에게 <위로공단>은 ‘위로’의 의미를 전복시킨다. 이 다큐에서 위로라는 단어는 딱 한 장면에 나온다. 어느 공장의 복도 위에 걸린 표어인데 “위로하는 말 한마디 힘이 되고….” 위로는 이런 표어에서 찾는가 생각하고 있는데 클로징 멘트가 자막에 깔린다. “평생 노동현장에서 내 어머니와 여동생처럼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온 모든 이들에게 바친다.” 작가 임흥순은 이 작품이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거기에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할 수 없다. 정치적 의미를 배제하고 보라고 말한다. 거기에도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할 수가 없다. 힘든 노동자들의 삶이지만 서로 위로가 되고 따뜻한 공동체가 있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딴지를 걸고 싶다. 아니 사실 영상은 이미 딴지를 걸고 있다.

2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배반할 때가 있다. 시적 다큐멘터리라는 광고 멘트를 보면서 다큐멘터리의 한 형식임을 떠나 그 조합을 궁금해했다. 영상은 시작하면서 운무가 낀 숲과 빗소리로 귀와 눈을 사로잡는다. 나이를 알 수 없는 여성들의 종아리가 보인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여성들의 하체는 너무 단정하고 깨끗하다. 화면은 시적이면서 그림 같다. 빗방울 머금은 잎사귀에 기어 다니는 벌레, 그리고 빗물에 젖은 바위를 미끄러지며 기어가는 개미들의 안간힘에 카메라가 멈춰있는 듯했는데, 어느새 텅 빈 사무실의 의자 하나에 한 중년의 아줌마가 앉아 지독했던 지난날의 여공 생활을 웃으면서 털어놓고 있다. 바로 이어진 여공 연극의 장면들과 겹쳐진다. 그때 그림 같은 자연 풍광이 불쑥 삽입해 들어온다. 잠깐 서정적 화면에 빠져있는데 공장의 기계음이 귀를 때린다. 여성 노동자의 현장과 시적 풍광은 수시로 교대하고 교차한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다시 참혹한 노동현장 이야기가 생생한 인터뷰로 나온다. 노동현장에서 투쟁을 마다치 않았던 여성 노동자는 웃음일 수 없는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고, 젊은 시절 여성노조 간부는 안경으로 냉철함을 가린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카메라는 안경테에 멈춘 채 침묵한다. 그리고 어느새 카메라는 수없이 많은 재봉틀 앞에 앉아 기계처럼 움직이는 여성 노동자들의 손놀림으로 옮겨가 있다. 동일방직 여공들의 누드 데모 장면은 바랜 사진으로 잡혀 나온다. 여공들의 사정으로 한밤중에 불려 나가 기록을 남긴 사진사는 평생 사진을 찍고 있지만 그렇게 순수한 얼굴을 여태껏 본 적이 없다는 인터뷰 끝에 눈시울을 붉힌다. 그리고는 곧 가발공장 여공들의 머리를 벗기는 손놀림에 이어 유해물질에 노출된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탈모 이야기가 화면을 채운다. 잠시 서정적 풍광이 지나고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한 크레인이 등장한다. 크레인 농성장에서도 웃었던 당찬 여성 노동자는 신산한 삶의 역정을 담담하게 인터뷰하면서 눈물을 닦는다. 그리고 그런 삶의 도정을 후회는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선택이란 게 있는 삶을 한 번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떤 철학자도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사색의 옆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 장면이 끝나기 무섭게 크레인에 대롱대롱 매달려 옮겨지는 수출 50주년 기념 <수출의 여인상>이 설치미술처럼 등장한다. 산업역군의 동상제막식에서 염을 한 듯한 보자기를 벗겨낼 때 현실과 비현실은 경계가 없다. 실밥이 날리는 노동조건에서 폐결핵 진단을 받아 술집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여공 이야기에 가로수처럼 도열한 흐드러진 벚꽃의 구로공단 디지털단지 역사가 덮이고 짙은 초록의 잔디에 한 송이 하얀 매그놀리아가 툭 떨어져 있다. 화면 한 컷 한 컷이 한 폭의 그림이구나, 생각한다. 자연주의나 극사실주의 화가의 그림인가 하다가, 현실고발 설치미술 작가의 그림이어도 되겠다 싶은 화면까지 모든 화면의 배치는 자로 잰 듯 계산되어 있다. 지독한 현실에 비현실감을 입힌다. 다큐멘터리는 기록물이라는 가장 간단한 전제를 날려버린다. 그래서 비디오아트구나! 인서트 장면들은 역설의 미학을 십분 활용하기로 한듯하다.

3

다큐멘터리에서 때로 텍스트 밖의 텍스트를 만날 때가 있다. <위로공단>이 그렇다. 여성 노동자들이 지지고 볶고 살아온 낯익은 공간에 대해 이만큼 낯설게 마주침을 유도한 텍스트도 없을 것 같다. 《건축신문》이 <위로공단>을 통해 여성 노동자의 공간에 대해 써줄 필자를 찾다가 내게 왔다는 청탁 이유 때문일까 생각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위로공단>은 1970년대부터 50여 년에 걸친 우리의 산업화와 압축발전의 시간을 공간화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폭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공간으로 성찰한다. 여성 노동자의 공간을 드러냄으로써 <위로공단>의 위로에 대해 묻는다. 매우 낯익은 공간을 낯설게 하고 낯선 공간을 낯익게 한다. 가발공장과 봉제공장에서 시작해 조선소 용접장으로, 그리고 대형마트에서 콜센타로 종횡무진 공간이 움직인다. 경공업 시대에서 중화학공업 시대로, 그리고 정보화시대로 공순이에서 콜순이가 되기까지 시대를 단숨에 공간화한다. 벌집 숙소와 눈 오는 새벽 노동자 동네의 골목을 거침없이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자가 취조받은 대공분실의 빨간 방도 보여준다. 크레인 농성의 배경이 된 하늘의 공간도 보여주지만 단정한 제복을 입은 날씬한 스튜어디스의 하늘 공간도 보여준다. 수백 명의 일터였다가 체불임금도 안 주고 야반도주한 텅 빈 사무실 공간도 보여주고, 밤 12시가 넘어 퇴근해서 함께 라면을 끓여 먹은 쪽방이 도열한 닭장집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흔적도 보여주고 네온이 휘황한 쇼핑몰과 고층 빌딩의 숲도 무심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가난한 아시아 국가로 진출한 우리 기업들의 포악함과 폭압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전장戰場과 시장도 보여준다. <위로공단>의 반反위로 공간에 순간 당황한다. 그들이 살아낸 공간, 살고 있는 공간, 살아야 할 낯선 공간을 사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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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다큐멘터리와 비디오아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영상물을 보는 동안 생생한 인터뷰들만 이어 붙이고 그림 같은 화면들만 따로 이어 붙여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이 작품에서 보이지 않는 노동의 가치는 사유와 노동 사이를 부유한다. 감독인 임흥순 작가는 노동의 가치를 사유하게 하고 싶었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여성 노동자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품이 던진 질문은 무엇일까가 아직 숙제다. 눈 가린 여성 노동자가 제사 공장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포스터로 쓰인 화면과 일제강점기 최초의 대중가요라는 클로징 음악 <희망가>가 강렬한 여운으로 남는다.


조은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페미니스트 사회학자로 학문간 경계와 장르 간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과 연구를 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당동 더하기 22>(서울 국제 여성영화제, 2008 / 전주 국제 영화제, 2009 초대 상영)를 제작 감독했고, 문화기술지 『사당동 더하기 25』로 제53회 한국 출판문화상(학술부문)(2012)을 수상했다. 장편소설로 『침묵으로 지은 집』(2003)이 있다.

<위로공단>의 위로 공간

분량4,794자

발행일2015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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