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과물, 화이트 노이즈, 부정성
문강형준
분량5,414자 / 10분
발행일2015년 10월 29일
유형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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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이란 우리 시대가 당면한 가장 거대한 부정성negativity이다. 우리는 말한다. ‘재난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지하철 배기판에서부터 세월호까지, 쓰나미에서 원자력 누출까지, 재난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재난을 극복해야 할 어떤 것으로 호명한다. 마치 우리가 목욕을 하면 때를 벗겨낼 수 있는 것처럼. 마치 우리가 돈을 벌면 반지하 방을 떠날 수 있는 것처럼. 한 번 벗겨내고 떠나면 그만인 것일까. 한 번 극복하고 나면 다시는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재난은?
재난에 대해 사유할 때 우리가 극복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장애물은 바로 재난을 극복으로 보는 시각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부터 아프리카까지, 재난은 어디에나 있으며 언제라도 있다. 점심을 배불리 먹은 후 몇 시간 만에 찾아오는 배고픔처럼, 재난 역시 그렇게 우리를 반복적으로 찾아온다. 그것이 자연적인 것이든, 인공적인 것이든 마찬가지다. 그것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이다. 현대의 재난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 체계 자체다.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위험’ 분석에서 말하듯, 근대의 위험이란 그렇게 모든 것을 통제하고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인류로 인해 탄생한다는 점에서 전 시대의 위험과 달라진다.
우리 시대의 재난이 가진 특이성은 재난의 ‘규모’와 관련된다. 재난의 반복성이나 우연성은 과거와 동일하지만, 우리 시대의 재난은 한 번 발생하면 엄청난 스케일로 퍼져 나간다. 일본의 쓰나미는 국지적이지만, 그 영향은 국지적이지 않다. 쓰나미로 인해 원자력발전소가 붕괴했을 때, 한국인들은 유출된 방사능이 바다를 통해 물고기를 감염시키고 결국 한국의 횟집에서 나오는 모듬회 접시 위까지 퍼져있을 거라고 의심했다. 방사능의 유출이 거대하게 일어났다면, 그래서 한국에 피폭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한국의 질서는 분명 흔들렸을 것이고, 그 여파는 북한 중국 소련 미국을 아우르며 세계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인공재난의 대표격인 전쟁은 어떤가. 2010년 이후 시리아의 내전과 그로 인한 난민 이동은 이제 유럽 전역을 긴장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은 시리아의 난민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난민이 아니라 전염병이라면? 사스나 메르스의 진원지는 한국이 아니었지만, 한국인은 마스크를 쓰고 가게 문을 닫으며 공포에 떨었다. 자본과 문화의 세계화를 찬양하는 인류는 재난의 세계화라는, 그로 인해 방대하게 커진 재난의 규모라는 부작용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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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자이자 생태철학자인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은 ‘초과물hyperobjects’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초과hyper-’라는 접두사가 지칭하듯, ‘초과물’이란 시공간에 걸쳐 광대하게 퍼져 있는 물체들, 그래서 도무지 인간의 지각으로는 그 정확한 실체조차 파악할 수 없는 물체를 의미한다. 인간은 초과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의 ‘초과성’은 인간의 통제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지구 위에 퍼진 원자력 물질의 총량, 플루토늄이나 우라늄의 총량, 스티로폼이나 플라스틱 백은 초과물의 예이다. 태양계, 우주, 자본주의 체계, 지구 온난화 등도 초과물이라 칭할 수 있다. 인간은 초과물을 만들어내기도 하고(원자력), 그것 속에 살지만(자본주의), 그것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 초과물의 개념은 따라서 합리성과 이성에 바탕을 둔 근대적 사유 체계 바깥에 존재한다. 인간은 더 이상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인간은 세계의 주체가 아니며, 인간의 역사는 부분적 역사일 뿐이다. 초과물은 인간이 결국 수많은 물체들objects 속의 하나이며, 물체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모튼이 기존의 인간중심적anthropocentric 사유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을 -한계가 있다는 식의 차원을 넘어- 천명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쓰나미는 초과물이다. 기상관측소는 모니터를 통해 쓰나미의 예상경로를 보여주지만, 그렇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쓰나미를 완전히 알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쓰나미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할 수 있고, 완전히 놀라운 피해를 안겨줄 수 있다. 쓰나미는 우리의 통제와 감각을 ‘초과’한다. 방사능도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만들어낸 방사능의 총량은 인간의 지각뿐 아니라 인간의 역사마저도 ‘초과’한다. 인류가 모두 멸종해도 지구에는 방사능이 남아 있을 것이다. 현대의 재난은 그래서 ‘초과물로서의 재난disaster as hyperobjects’이라고 부를 수 있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것과 방사능이 유출되는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가 되었다. 만약 우리 시대의 재난이 초과물적인 재난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재난의 초과물적인 성격은 쓰나미와 전염병이나 방사능 유출과 같은 특정한 ‘사건’의 발생과는 반대 방향으로부터도 생겨날 수 있다. 누구나 알 수 있고 명명할 수 있는 재난이 아닌, 어떤 미세하고 소규모인,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방식의 재난. ‘일상적인’ 재난.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이 일상적인 재난은 뭔가 심리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갉아먹는다. 묵시록적 감정, 파국적 신호의 감지, 폭력과 혐오의 창궐, 전망을 상실한 미래, 사랑을 포기하는 육체. 마치 우울증과도 같이 주체를 파고들어 외부가 아닌 내부 속에 모든 혐오와 폭력을 투사하는 방식, 세계 자체는 그대로지만 주체는 스스로를 파괴해버리는 단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모든 일이 일어난 사건이라 부를 수 있는 사건. 도무지 ‘정상’이라 부를 수 없는 이 파괴적인 주체의 모습은 ‘제 자리를 벗어난dis- 별자리-astro’라는 재난disaster의 원래 정의와 공명한다. 재난은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이탈해가는 상황이니까. 이 일상의 재난은 자연적인 차원이 아닌 사회적인 차원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이 재난이야말로 인류가, 문명이 만들어낸 새롭고 독특한 심리적 재난이자 가장 특유한 ‘당대의’ 재난이다.
돈 드릴로Don DeLillo의 소설 『화이트 노이즈White Noise』(1985)는 이런 식의 재난을 뛰어나게 포착한다. 미국의 한 평화로운 칼리지 타운에 있는 중산층 가정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모두가 어떤 강박증적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히틀러학과를 만들어낸 학과장 교수인 화자 ‘나’는 ‘곧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 있고, 그의 부인 역시 죽음의 공포 때문에 힘들어하다 그런 공포를 극복한다는 신약의 실험대상을 자처한다. 이 부부의 십대 아이들은 각기 사물의 이면에 대한, 재난에 대한, 질병에 대한 강박증적 흥미를 가지고 있다. 금요일마다 중국음식을 사가지고 와서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이 가족은 코미디 시리즈물이 아니라 홍수, 지진, 산사태, 화산분출 장면에 열광한다. “우리는 조용히 집들이 바다 속으로 쓸려 들어가고 밀려드는 용암덩어리에 마을 전체가 뿌지직 부서져 불타는 장면들을 계속 시청했다. 재난장면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더 크고 더 장엄하고 더 압도적인 것을 원했다.” 이들이 원하는 텔레비전의 재난 이미지는 실제로 이들이 사는 마을에 닥쳐온다. 검은 먹구름이 마을 위 하늘을 뒤덮은 ‘유독가스 공중유출 사건’이 발생하고, 모두가 대피하지만, 아무도 피해를 입지는 않는다. 어떤 ‘실체’도 없었던 이 유독가스 공중유출은 이 가족들의 강박증을 더 깊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끊임없이 정보를 전하고, 슈퍼마켓의 상품들은 매번 진열대를 바꾸고, 재난을 대비한 당국의 시뮬레이션 훈련은 계속된다. 어떤 재난도 발생하지 않지만, 모두가 어떤 공포의 소리pana- sonic를 듣는다.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주체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가족은 연대하지 않으며, 부부는 각자의 비밀을 가진다. 평화롭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동체로 보이는 이 공간의 내부는 완전히 무너져 있고 파편화되어 있다. 질서는 어긋나고, 주파수는 맞지 않는다. 화이트 노이즈.
드릴로의 소설이 그리는 현대적 ‘재난’이란 사건이 아니라 공포 자체다. 죽음과 몰락의 공포는 실체가 없지만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규정한다. 공포를 없애주는 약의 정보도, 내 몸에 담긴 유독가스 성분도, 내 아이의 특이한 행동의 원인도 나는 알 수 없다. 이 문명 속의 모든 것은 나의 통제를 ‘초과’해 존재한다. 미디어와 상품과 감정 속에 샅샅이 퍼져 있는 불안과 공포는 모니터로 계측할 수 없고, 콕 집어내 보여줄 수 없으며, 그러므로 치료할 수도 없다. 불안은 ‘초과적’이다. 이 초과적인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 가장 미세한 것이 나를 갉아먹고, 결국 나를 무너뜨린다. 드릴로는 여기서 어떤 희망도 찾으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3
우리 시대의 초과적 재난은 안에서, 밖에서 몰려온다. 아니, 이미 우리를 점령하고 있다. 재난은 극복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며, 어쩌면 관념에 더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 나는 재난의 관념적 성격을 ‘부정성’에서 찾는다. 그것이 방사능 유출이든 죽음의 공포든, 공히 재난은 인류를, 우리를, 나를 몰락에 대면하게 만든다. 살고 싶은 존재인 인간은 어떻게든 몰락을, 부정성을 거부하고 극복하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죽어 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부정성을 궁극적으로 넘어설 수 없으며, 종국에는 그것과 하나가 될 뿐이다. 부정성을 넘어설 수 없다면 부정성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현명하다. 부정성과 함께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재난이 발생해도 ‘세상이라는 게 그렇지’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라는 말인가? 위험은 언제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진보를 향해 전진하면 된다는 말인가?
부정성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인간이 사실은 그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세상은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고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가 아님을, 인간의 역사만 역사가 아님을, 세상은 인간의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다. 재난이 가진 ‘초과물’로서의 성격이 말해주는 바가 이것이다. 인간은 인간-아닌-것 속에 있으며, 그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초과물로서의 재난은 인간이 인간을 초과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재난은 인간 중심적인 모든 담론체계를 해체할 것을, 그리고 그로부터 기존의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포스트-휴먼)로 탈바꿈할 것을 구약의 신처럼 우리에게 명령한다.
이제 우리는 부정성과 함께 살아야만 한다. 인간은 재난을 극복할 수 없다. 재난이 인간을 극복한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화과학』, 『해시태그』 편집위원, <한겨레> 칼럼니스트이며, 중앙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 『파국의 지형학』,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등이, 역서로 『비평가의 임무』, 『광신』 등이 있다.
초과물, 화이트 노이즈, 부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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