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기상관측소 K의 하루
복도훈
분량5,096자 / 10분
발행일2015년 10월 29일
유형오피니언
파국 서사와 비평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K가 종말기상관측소에 근무한 지도 어느덧 8년이 되었다. 종말기상관측소는 위기, 재난, 파국, 종말, 묵시와 같은 가족유사성을 지닌 어휘들이 한국사회의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자주 출현하기 시작한 정세적인 종합국면을 면밀히 탐구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처리하기 위해 설립된 민간자치단체다. 재난을 통제하기보다는 조장하는 정부와 재난으로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기업의 지원은 일절 받지 않는다. 종말기상관측소에 구비된 디지털 휴대장비와 시설은 따라서 대단히 낙후될 수밖에 없겠다. 그래도 낡은 풍향계는 상서롭지 않게 불어오는 비바람, 낙뢰와 태풍을 품고 있는 구름의 종류를 기록하고 있다. 기상관측소이긴 하지만 미진微震을 일찌감치 눈치채는 설치류齧齒類 등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지진계도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태 직후에 구비했다. 최근 1~2년 사이에는 바다에서 전해오는 조난신호가 심상치 않아 모스부호 해독 기구를 마련해 사용하고 있다. 업무량이 증가했지만 뜻을 함께하는 동료도 한둘씩 늘었다. 풍향계와 지진계, 모스부호 해독 기구에는 공통 업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물론 하늘과 땅, 바다에서 전해져오는 파국과 묵시의 전조와 예감, 징후를 포착하고 그와 관련된 기록일지를 작성하는 것이다. K는 때때로 그 기록일지를 위기crisis와 어원을 공유하는 비평criticism으로 부른다. 요즘 들어 신뢰성이 급격히 추락하는 어휘이긴 하지만 딱히 대안이 있을 리도 만무하겠다.
8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늘과 땅, 바다에서 일어나는 징후에 대한 일지를 작성하는 동안 K는 한국소설과 영화에서 그동안 잘 쓰이지 않았던 시제가 작품구성과 캐릭터를 형상화하는 방식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것은 ‘미래’라는 시제였다. 2008년 직후에 쓰이기 시작한 선진화라는 어휘에는 미래마저 식민화하려는 정부와 기업의 음험한 의도가 노골적으로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부 소설과 영화는 근近미래를 조금씩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그 소설과 영화들은 대홍수와 빙하기, 불과 모래 비雨, 원전사고, 농무濃霧 낀 바다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사이보그와 좀비와 같은 유사인간이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으로 더러 등장했다. K는 그 당시에 이러한 징조를 부상하는 최근 서사의 우세종이라고 불렀다. 낙동강 등에 녹조가 끼고 선진화라는 구호가 사람들의 입과 언론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던 무렵에는 근미래의 서사도 잠시 주춤한 듯했지만, 식민화된 미래는 이내 다른 이름으로 부활했다. 이번에는 빚이라는 이름으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에서 드러난 것처럼 있을 수 있는 리스크를 방지하고 미래의 기대이윤을 약속하는 온갖 파생금융상품을 장식하는 예언에 생애를 걸었던 대한민국 주식회사의 소액주주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이내 빚으로 저당 잡혀 있다는 것을 머지않아 깨닫게 되었다. 그 즈음에 상영된 두 편의 한국영화는 부모가 진 빚을 자식이 갚아야 하거나 자식이 진 빚을 이번에는 부모가 갚아야 하는, 뫼비우스띠적인 빚의 대물림과 악순환을 리얼하게 형상화했다. 아울러 근미래를 재현하는 SF와 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서사도 한국문학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K는 온갖 종류의 좀비 아포칼립스 서사를 즐겨 읽고 보는 편인데, 최근에는 <워킹 데드> 시리즈의 번외편인 <피어 더 워킹데드Fear the Walking Dead> 시즌 1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K는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단 한 번의 자산관리의 실패와 빚짐으로도 돌이킬 수 없이 시장으로부터 추방당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좀비에게 물리면 속절없이 좀비로 변해버리고 마는 인간과 빼닮았다고 생각했다. 빚진 자는 빚을 갚기 전에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이 지상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좀비이며, 생존자들은 좀비로부터 쫓기며 각자도생各自圖生해야 하는 잠재적인 좀비일 따름이다. 요점인즉슨 K가 그동안 기록해왔던 종말기상관측일지는 식민화된, 빚진 미래를 재현하는 동시에 그 미래와 단절하려는 서사의 분투를 기록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K의 생각일 뿐이었다. 오늘 K는 출근하자마자 종말기상관측소의 업무와 기능에 대해 이상한 오해를 퍼뜨리는 몇몇 소문을 수집했는데, 이젠 그에 대해 분명하게 대응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소문인즉슨, 첫째, 종말기상관측소의 업무와 기능은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와 혁신 담론 또는 서사와 닮은꼴이라는 것이다. 파괴를 통한 창조적 혁신은 확실히 지난 수백 년 동안 진행되어온 자본주의의 대서사이자 담론이다. 그러나 K의 일지는 묵시록 서사와 담론이 자본주의에 내재적인 동시에 외재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파국과 묵시를 오락으로 취급하는 할리우드 서사는 확실히 종말산업의 일부로, 그러한 산업은 자본주의의 종말을 생각하기보다는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을 훨씬 속편하게 여긴다. 그러나 창조적 파괴 운운하는 자들은 종말기상관측소가 세계의 종말을 상상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종말을 아울러 생각해 볼 수 있는, 미래를 식민화하는 자본주의와 단절하는 다른 미래의 서사와 담론을 적극적으로 평가해온 것은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둘째, 종말기상관측소의 묵시록 서사와 담론은 재난에 수반되는 공포와 불안을 과잉되게 취급하는 ‘엘리트 패닉’의 일종이며, 지배자들이 아나키 상태의 사회와 시민에게 느끼는 사회적 다윈주의의 반응, 만인이 만인에게 늑대나 좀비가 되는 공포와 불안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묵시록 서사와 담론에 다른 정부, 사회, 공동체에 대한 민중주의적 전망이 부재하다는 비판과도 연결된다. 즉시 반박해보자면, 종말기상관측소에서의 K의 작업은 재난을 천국으로 들어가는 뒷문으로 간주하는 견해에 내포된 아포리아에 집중해왔다고 할 수 있다. K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천년왕국 운동의 유구하지만 좌절된 전통을 2012년에 출간한 『묵시록의 네 기사』에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다만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기 위해서는 재난이 필수적인가 또는 ‘은총을 얻기 위해 죄를 지어야합니까’라는 사도 바울의 반문에 내포된 전도顚倒와 도착倒錯에 집중해왔다고 하겠다. 셋째, 종말기상관측소의 역할은 기껏해야 재난이나 파국을 현실에 일격一擊하는 진리의 유일한 계기로 간주하고, 현실의 자잘한 세목을 허위와 가상으로 간주하는 허무주의적이고도 낭만주의적인 메시아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판하는 누군가는 묵시록 서사와 담론을 기각하고 바야흐로 변증법의 낮잠을 깨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냉소적으로 말하는데, K는 오히려 잠든 변증법이 좀처럼 깨어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파국의 서사와 담론으로 따져보고 있다. K는 모르지 않는다. 종말은 쾅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으로 흐느끼면서 다가온다는 것을. K와 함께 근무하는 종말관측사무소의 동료들 가운데 한 명은, K도 그의 작업에 동의하는데, 변증법이 낮잠을 자는 어두운 한낮이라면 파국 서사와 담론은 비(반)변증법이 아니라 변증법이 꿈꾸는 특별한 희망을 품은 백일몽으로 사유하고 있다. 그 꿈이 변증법의 낮잠을 연장시킬지, 기지개를 켜고 마침내 깨어나게 할지는 두고 볼 일이지, 냉소적으로 기각할 필요는 없겠다.
이렇게 오전 내내 쓰고 나니 K는 오후 들어서 급격히 우울해졌다. 누군가가 그에게 조증과 울증이 공존하는 파괴적 성격이라고 불렀다. 그에게는 단번에 절멸을 가져오는 파국의 감각과 점진적이고도 느린 지속의 감각이 오랫동안 공존해왔다. 누군가 K에게 삶에는 원래 상호모순의 감각이 공존하는 것이라고 충고한다면 그로서는 더는 그 사람과 삶에 대해 나눌 말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K에게는 이 두 감각이 심하게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는 식으로. 그렇게 나이 듦과는 무관한 결단과 타협 없는 선택을 K는 종종 강요받기도 한다. 그는 스스로를 내일이라고는 없는 종말의 직전처럼 오늘을 살았던 사도 바울의 충실한 추종자로 여기고 있다. 내일 일은 알 것 없으니 오늘이나 실컷 즐기자와 같은 로마의 쾌락주의 또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열심히 살자와 같은 인생론은 K의 삶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자서전이나 인생론을 쓰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낯설게만 느껴진다.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노라는 스피노자의 격언은 K의 삶과 가장 가까운 것 같아도 실은 가장 거리가 먼 것이다. 오히려 내일 종말이 올지 짐작조차도 못하지만 마치 당장에 종말이 올 것처럼 사는 게 그의 삶이다. 그런가 하면 K에게는 종말의 감각과는 상반될 정도로 나선형螺旋形과 같은 성숙과 각성을 통해 삶이 점차로 나아지는 것에 대한 믿음도 없지 않다.
K의 두 번째 책은 ‘파국과 절멸’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에게 세 번째가 될 책은 ‘젊음과 성숙’에 대한 것이다. 물론 그는 절멸과 파국 속에서도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미한 희망을 꿈꿨으며, 성장과 성숙이 지속하다가 갑자기 벼랑 아래로 뚝 떨어지는 파국을 이야기했다. K가 읽은 어떤 한국의 교양소설들에 등장하는 젊음은 성숙에의 예감조차 없이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이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당장의 파국을 목전에 두고서도 삶이 계속되는 놀라운 기적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삶에의 각성은 더 나은 삶이 아닌 죽음을 갑자기 가져오기도 했으며, 죽음의 충동은 삶을 벼랑으로 몰고 가서도 그 끝에 시퍼렇게 살아 서 있게 했다. 지금까지 파국과 지속의 상반된 감각이 K의 내부에서 충돌해왔음을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히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K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에 종말기상관측소에 출근해 일지를 점검하고, 종일 풍향계와 지진계, 모스기구로 기후와 징조와 예감을 관측하거나 기록하며, 더 나을 것도 없는 내일을 이따금 다르게 꿈꾸면서 저물녘에는 퇴근을 준비한다.
그는 시내의 허름한 식당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어둑한 방의 커튼을 치고 창백한 불빛 아래에서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한없는 공상 속으로 빠져든다. 마치 내일이 정말로 오기라도 할 것처럼 일기를 공들여 쓰지만, K의 일기가 파국과 내일 없음에 대한 것인지, 반대의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리라. 적어도 타인의 희망이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는 것만은 K에게는 분명해 보인다.
복도훈
1973년생. 문학평론가. <1960년대 한국 교양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평론집으로 『눈먼 자의 초상』(2010)과 『묵시록의 네 기사』(2012)가 있다. 현대문학상(평론부문, 2007)을 받았다.
종말기상관측소 K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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