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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를 위한 건축가의 일

유걸

건축가의 일이란 대부분 상위 1%의 건물주를 대상으로 한다. 매번 다른 조건과 이에 따른 특수한 해법을 찾는 것이 건축설계다. 그 과정과 결과에 큰 비용이 들어가는 게 당연하다. 건축가 유걸은 99%를 위한 건축을 제안한다. 그는 지금까지 건축가가 집중해 온 특수한 해결에서, 보편적인 공간 제공과 사용자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이러한 생각을 구체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많은 건축가가 비싼 취미들을 갖고 있다. 대중에게 흔치 않은 비싸고 특이한 것을 취미로 삼는 이들이 많은데 아마도 이는 건축가가 상대하는 건축주의 대부분이 일단은 경제적으로 성공했거나 경제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건축가는 그들의 생활을 담는 환경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취미일 것이다. 또한 특이하고 흔치 않은 생각을 하다 보니 취미도 특이해진 것일 수 있는데, 비용이 많이 드는 경우도 많다. 건축가의 이런 취미는 실무 작업을 통해 생기기도 하지만, 이미 교육 과정에서 습득하기도 한다. 건축을 배우며 논의되는 대부분의 건축이 일상의 수준을 떠난 것들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수의 사람이 누리는 삶이나 환경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건축가들이 사회로부터 쉽게 유리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가 보다.  이런 중에 소위 좋은 건축으로 선정되고 알려진 건축들은 건축가의 비싼 취미를 더 부추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취미와 현실의 괴리에 불만스럽고, 낮은 가격에는 좋은 건축을 만들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크게 좌절한다. 교육을 통해 의식화된 학생들이 건축 산업의 현장에 막상 들어가 이 괴리를 체험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99%는 건축가의 서비스가 필요하지 않은가? 

건축가에게 설계를 의뢰하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 중 극히 소수이다. 그리고 건축가가 설계했다고 이름이 붙은 건축물은 세상에 지어진 모든 건축물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건축가를 찾는 건축주는 시장 원리에서 흔히 표준이 되는 2:8의 2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신문지상에서 빈부의 차를 문제 삼아 흔히 나오는 상위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도이다. 그것이 건축가의 실제 시장이다. 할 수 있는 일은 적고, 일을 하려는 건축가는 넘쳐나다 보니 건축가가 바라는 것은 늘 현실이 되기 힘든 희망사항이고 수요 공급의 원칙은 건축가를 갈수록 저렴한 소모품으로 만든다. 수천 명의 응시자 중 선별된 수백 명만이 국가가 공인하는 건축전문인이 될 수 있는 세계에서 꽤 어려운 선발 과정을 거쳐봐야 희소한 건축주의 절대 결정권에 운명을 거는 을의 신세가 될 뿐이다. 이러다 보니 이제 건축가는 없어지고 건축주는 더 저렴한, 심지어 무료의 디자인 서비스를 찾는다. 

그러면서도 건축가는 왜 상위 1%에만 자신의 운명을 거는가? 나머지 99%는 건축가의 서비스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인가? 

땅에 뿌리내린 무거운 건축, 부동산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모든 건축의 기준과 방법은 이 상위 소수가 원하는 건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고비용이 필요한 것은 당연해 보이고 문제로 삼을 이유도 없다. 지금 건축의 기능성은 99%가 필요로 하는 보편적인 것이기보다는, 소수 건축주의 특수한 필요로 이해되고 있다. 내구성은 용도보다는 시대를 넘어서는 오랜 수명으로 간주한다. 또한 아름다움이 건축가의 취미와 혼동될 때도 있다. 이렇게 이해된 건축은 자연스럽게 무거워질 수밖에 없으며 건축이 무겁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무거운 건축은 무게 만큼이나 땅에 깊이 뿌리내려 부동의 것이 되어 ‘부동산’으로 불리는데, 정작 건축가는 자신의 건축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극히 혐오하며, 대신 여러 가지로 미화한다. 가령 건축의 지역성 혹은 맥락적이라는 것으로 정당화하려 한다. 하지만 소수의 특수 용도를 위한 것, 기념적이고 선택된 소수의 취미를 반영한 건축은, 앞서 미화하기 위해 가져온 지역성이나 맥락성과는 잘 맞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에서 건축가는 희소한 일을 차지하기 위하여 피나게 경쟁하고 가난하게 일할 수밖에 없다. 

소수의 사람을 위하고 특수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매번 다른 해법을 찾아야 하는 건축설계는 그 과정과 결과물 모두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그래서 건축가는 매번 받은 비용이 부족하며, 그 부족한 비용마저도 건축주는 낮추려 한다. 건축가에게 야근과 철야는 일상이고 간혹 밤샘 근무를 자랑하기도 한다. 언제까지 소수를 위한 고비용의 건축에 집중해야 하는가? 99%가 범용할 수 있는 건축의 일반해一般解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일까? 

특수해에서 일반해로 

건축가 없이 만들어진 토속 건축은 대체로 지속 가능하다. 한옥만 보더라도 방과 마루가 있고 기능적으로 특화된 공간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는 집과 창고의 구분이 있을 뿐 집은 방과 방 그리고 마루뿐이다. 공간의 개폐나 통합 분리가 자유로워 사용상의 융통성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융통성을 중심으로 한 범용성은 여러모로 연구되고 시도도 되었다. 사용자 중심 범용성의 또 다른 형태는 소위 DIYDo it yourself 같은 형태가 있다. 사용자에게 다양한 선택이 제공되고 또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사용자가 선택의 자유를 갖고 또 각자의 창의적인 상상력으로 원하는 것을 구현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하는 것은 바람직한 건축적 모형이 아닐 수 없다. 건축가 없는 건축들은 다들 일종의 DIY이다. 건축 재료는 자연에서 공급받고 일반 사용자가 건축 구축의 방법을 습득해 스스로 그리고 지역 공동체가 협업으로 환경을 유지 보수해 나가는 것이다. 

건축가의 관심 밖에 사는 99%의 사람들도 경제 발전과 아울러 향상된 생활환경에서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마련된 환경에서 경쟁적으로 더 편하고 더 좋은 환경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 좋은 환경의 배후에는 비싼 대가를 이미 지불했다는 사실이 있다. 건축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 주거의 소유자와 사용자는 모두 무거운 경제적 부담을 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자기 결정권도 부재하고 남과의 비교경쟁으로 만들어진 환경은 만족을 주지 못한다. 주거비를 위해서 산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다. 1%를 위해 일하는 건축가나 이들 건축가의 관심 밖의 99%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공통이다. 누구든 자신의 일이나 삶에서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선택이 없이 필요에 의해서 (혹은 필요로, 필요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다해석 공간이 가져오는 능동성 

나는 내 성격 때문에 비롯되기도 하지만, ‘열린 공간’을 열심히 주장해왔다. 열린 공간은 무엇보다도 일단 시원하고 속박하지 않는 공간이다.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결정된 프로그램 속에서 특정 기능이 없는 시원한 열린 공간을 극대화하는 것은 내 작업의 중심이기도 했다. 이 공간은 같이 일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다목적 공간’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요즘 나는 이것을 ‘다해석 공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공간을 자기식으로 해석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다목적 공간이 중성적 성격이 있다면, 다해석 공간은 사용자들이 그 성격을 자기가 원하는 식으로 다양하게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새로운 기술이 급속히 보급되는 요즘 나의 생각은 사용자가 공간을 자기에게 맞게 사용하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그것을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첨단 기술로 가능해진 99%를 위한 범용의 건축 

건축계획은 건축물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그것이 세워지는 방법까지도 포함한다. 건축가는 건축의 전 과정을 관장하는 사람이다. 건축계획에서 건축물을 짓는 일이 건축설계에서 따로 분리될 수 없는 일이고, 건물을 짓는 기술은 건축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하다. 오늘날 비약적으로 발전한 각종 기술은 건축가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첨단 기술은 건축가들이 건축의 전 과정을 다시 관장할 수 있게 해주고, 동시에 99%를 위한 범용의 건축을 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준다. 이는 건축 과정에서 불필요한 중간 공급자의 비용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건축 자재의 비용까지도 낭비 없게 하여 사용자들의 비용 지급 부담을 일반 소비재를 구매하는 수준으로까지 낮추어 준다. 그때는 건축이 하나의 소비재가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환경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결정권을 갖고 원하는 삶을 스스로 창의적으로 만드는 세상을 상상이 아닌 현실화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건축의 수요자에게만 바람직한 삶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99%를 위한 일을 통해 건축가의 일은 99배도 될 수가 있는 것이다. 1%를 위하여 생존을 위협받으며 경쟁하던 건축가들에게 시장은 99배까지는 아니더라도 9배는 넘게 확장될 것이 분명하다. 특수해를 위해 헌신했던 시간과 정력이 범용을 위해 쓰일 때 그 보상은 쉽게 배가할 것으로 생각된다. 건축가가 99%를 위해 바빠지면 1%는 건축가를 초청하기 위해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자기만을 위한 맞춤 서비스를 원하는 건축주는 지금의 9배는 지불해야 원하는 건축가를 찾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건축가의 서비스가 자동화나 전자제품 설계자 서비스 이상의 보상을 받길 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구하는 일이 아닐지라도, 최소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여건에서 일하고 싶다. 


유걸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했고 미국건축사(AIA)인 건축가 유걸은 지난 40여 년간 미국과 한국에서 건축설계 활동을 했다. 1998년부터 3년 연속 미국 건축사 협회상을 수상하였고, 김수근건축상과 건축가협회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아이아크의 공동대표이며 그가 설계한 <밀알학교>는 KBS 선정 한국 10대 건축물이며 미국 건축사 협회상, 김수근 건축상 그리고 한국건축가협회상 등을 수상하였다.

99%를 위한 건축가의 일

분량4,812자 / 10분

발행일2015년 10월 29일

유형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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