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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빌리온의 문화·사회적 가능성

AnL 스튜디오, SoA, 염상훈, 최춘웅 × 박성태

파빌리온 프로젝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이다. 건축이 특정 공공장소를 매력적인 곳으로 각인시켜 목적하는 상징성을 극대화하거나, 작은 공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해 기능성을 충분히 충족시켜줄 거라는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양한 성격의 파빌리온 프로젝트를 진행한 건축가들이 모여 파빌리온의 건축적, 문화적, 더 나아가 정치적 가능성을 이야기 나누었다.


AnLstudio(신민재, 안기현, 이민수) 도시, 건축, 인테리어와 같은 공간디자인부터 다양한 미디어를 이용한 테크놀로지를 공간에 구현하며 물리적 환경의 구축만이 아닌 내부의 새로운 프로그램과 스토리텔링에까지 작업하고 실험하는 스튜디오이다. 2012년부터 신민재, 안기현, 이민수의 협업을 바탕으로 다양한 스펨트럼과 새로운 퍼스펙티브를 추구하며 지속적으로 작업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SoA(강예린, 이치훈) 건축의 사회적인 조건에 관한 분석을 통한 다양한 스케일의 구축환경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염상훈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조교수로 재직하며 도심밀도, 재개발 및 재사용에 대한 연구와 함께 기술의 변화를 이용한 건축 작업과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건축작업과 함께 전시, 문화기획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최춘웅 최춘웅은 현재 서울에서 활동 중인 건축가다. 아티스트 김범, 김소라와 협력하여 상하농원과 소행정 G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독립적으로는 기무사, 문화역서울, 그리고 일민미술관에서그룹 전시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진행: 박성태


파빌리온 정의의 의의

박성태 지금 진행 중인 파빌리온에 대한 이야기를 하셔도 좋고, 우리 사회에서 파빌리온이 가진 건축적, 문화적, 정치적 가능성을 이야기 하셔도 좋습니다. 먼저 파빌리온의 일반적 정의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 보면 어떨까 합니다.

강예린 궁금해서 찾아본 파빌리온의 사전적 정의는 ‘임시구조물’입니다. 그런데 ‘임시’라는 것이 시간을 특정하기가 어렵더군요. 한 달 혹은 일 년? 과연 어디까지가 임시인지 궁금했습니다. 이 관점으로 나대지에 적치된 컨테이너를 파빌리온으로 볼 수 있나 생각해보았는데, 그보다 더한 의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사회 안에서 공공적 기능을 가진 무엇’으로 정의된 것이라 봐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치훈 파빌리온은 단순하게 임시 구조물일 수도,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장소적 특성과 규모에 따라 구축되는 방식의 임시성이 다를 것 같고, 시간의 임시성 또한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때문에 물리적인 요건만으로 파빌리온을 정의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파빌리온과 비슷한 형태로 종종 이야기되는 폴리folly는 유럽 저택의 정원 안에서 장식적인 기능을 가진 구조물인데, 지금 우리가 쓰는 파빌리온이 그런 의미도 아니고요.

최춘웅 2000년대 이후 ‘파빌리온’이라는 이벤트가 생기면서 바뀐 것 같습니다. 건축의 방법이 여러 가지가 된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파빌리온의 지금의 방향에 더 관심이 가기도 합니다. 별장 같은 것, 또는 정자를 만들어서 파빌리온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비조형화되고 더 임시적인 건물이 사회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요.

염상훈 파빌리온이 일시적인 구조물만을 말하지는 않지만 근래의 파빌리온은 ‘임시성’이라는 DNA를 지닌 구조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그 ‘임시’라는 기간이 얼마만큼인지 애매합니다. 변화가 일상화된 시대에 과연 임시적인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파빌리온은 재미있는 작업이지만 정의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런던의 서펜타인 갤러리의 경우, 임시로 전시했던 파빌리온이 판매되어 다른 곳에 영구적으로 설치되었고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도 애초에는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영구적인 보존으로 바뀌었죠.

박성태 요즘 파빌리온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많습니다. 건축을 건물로 소비하는 수요와 건축을 문화로 소비하는 수요 중 최근에는 후자의 성장세가 눈에 띕니다. 그러다 보니 건축을 문화로 소비하는 것 중 하나로 파빌리온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시도를 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생기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국제박람회에서 한 국가의 정체성을 입힌 파빌리온이 두세 달 후 없어지기도 했는데, 요즘은 동네 단위에서 파빌리온이 만들어지고, 아주 작은 행사에 맞는 건축공간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이치훈 파빌리온은 어느 정도의 해석이 가미된 대상 같습니다. 엑스포 안에 들어가 있는 파빌리온들은 사실 굉장히 앞선 디자인과 기술을 반영한 것인데 그것을 건축, 혹은 빌딩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파빌리온’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느 정도 목적에 부합한 해석이 가미된 구조물이라는 차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강예린 제가 OMA에 있을 때 <프라다 트랜스포머PRADA Transformer>(2009) 팀에 있었습니다. 프라다 측에서 임시적으로 그 구조물에서 전시와 영화 상영 등을 한다고 이야기 했음에도 저는 그 작업을 막구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때만해도 파빌리온이라는 것이 입에 잘 붙지 않았습니다. 상업적인 목적에 부합한 해석이 가미된 구조물이지요.

박성태 그런데 파빌리온을 짓는 목적은 상업적이든 공동체를 위한 순수 메시지 전달이든, 공통적인 것은 메시지 전달 같습니다.

이치훈 메시지 전달 측면이 특히 강한 것 같습니다. 작년에 심사자였던 피포 초라의 심사평 중에 “YAP(Young Architects Program)가 젊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지만 건축을 대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는 기회이고, 그런 면에서 의미 있는 이벤트다”라고 했는데, 저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건축을 할 때는 장소 또는 그 안에 들어가는 사람 또는 그 구조물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경험을 할지를 고민 할 수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저희가 가장 다루고 싶었던 주제는 건축적인 요소에 대한 나름의 해석과 제안이었습니다. 그래서 건축을 대중적으로 이해시키거나 경험하고 소통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 국가의 상징을 투사하는 것, 건축을 대중과 소통하는 매체로 삼는 것 등, 모든 파빌리온 구조물에는 강한 해석들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안기현 소위 ‘건축’이라고 불리는 대상이 대중들이 생각하기에는 어렵고 다루기 어려울 수 있는 반면, ‘파빌리온’이라는 대상은 그에 비해 가볍고 쉽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건축가에게도 파빌리온은 건축처럼 영구적인 대상(지속성/기능성)으로 생각하기 보다, 새로운 실험의 대상 (아이디어에 근거한 새로운 구축물)으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건축가에게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창작 대상이고, 대중들에도 고정적인 건축과 다르게 선뜻 다가갈 수 있는 문화적인 혹은 시대적인 코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이 건축가와 대중을 이어주는 접점으로서 역할하는 것 같습니다.

최춘웅 건물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으로 소비될 수 있는 것으로서 굉장히 바람직한 방향이 있는가 하면, 마치 비싼 가구를 못 사기 때문에 미니어처 가구를 수집하듯이 건축물 대신 파빌리온을 소비하는 것 같습니다.

이민수 파빌리온의 정체를 누가 만들었는지 역추적해보면 어떨까요? 건축가 뿐만 아니라 설치예술가들 또한 파빌리온 작업을 합니다. 최근 예를 들면, 아니쉬 카푸어, 토마스 헤더윅 등도 작품 스케일을 확장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빌리온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파빌리온이 예술의 영역인지, 혹은 구축술이라는 건축 영역에 속하는 것인지 구분짓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요? 더불어 지금의 파빌리온은 어느 예술가가 폴대 하나를 세우고 그 예술적 영역과 의미에서 그것을 파빌이온이라고 한다면, 그런 해석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더불어 구축의 기술이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무엇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 일반인들이 만든 무엇도 파빌리온으로 불릴 수 있나, 하는 질문도 할 수 있고요. 이런 연유에서 파빌리온이란 대상을 물리적으로 제한해서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반대로 만드는 사람이 아닌, 실제 파빌리온을 발주하는 사람/기업을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파빌리온은 발주자가 원하는 이벤트적인 공간에 임펙트를 가미시켜, 해당 이벤트 공간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려는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령 샤넬의 <모바일 파빌리온>과 앞서 언급한 프라다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런 면에서 파빌리온은 일시적이지만 응축성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하나의 미디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최춘웅 파빌리온을 조형적으로 보면 ‘아무나 못 만든다’는 태도가 성립이 되지만, 사실 파빌리온의 장점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광화문광장에 천막을 치면 그것이 파빌리온이면서 더 효율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민수 공감합니다. 하지만 소위 ‘파빌리온’으로 행해지는 것들 대부분을 미술관, 페스티벌 등에서 이벤트나 텍토닉 실험을 위해 자체적으로 만들거나 기업브랜드 광고를 위한 구조물이 대부분입니다. 지금은 시간적 측면에서는 일시적이고 사라지는 것이지만 그 구조물을 경험하고 소비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강렬한 무언가를 전달하는 미디어/이미지로 형성이 되는 것 같습니다.

최춘웅 그런 곳에 초청되는 소수의 주류 건축가들에게는 그렇겠지만, 많은 참여예술 작가들이나 젊은 작가들의 작업은 지극히 소외된 미디어를 통해서 전혀 다른 유형, 즉 구조적으로도 조형적으로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보이는 작업을 합니다. 저희의 초점 밖에 있는 건물입니다.

염상훈 두 분이 말씀하신 것 모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치가 ‘조형성’일 수도 혹은 ‘장소성’일 수도 있습니다. 한 예로 서도호 작가의 <틈새호텔>(2012) 프로젝트는 1인용 이동 호텔인데, 호텔이 이동한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작가의 또 다른 의도는 그 이동식 차량이 호텔로 기능하는 동시에 주변의 세탁소, 피씨방, 음식점을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침대보를 근처 여관에서 갈아주기도 하는 거죠. (웃음) 이렇게 일시적으로 생기지만 잠재적인 가능성을 가진 장소가 파빌리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펜타인 갤러리, 뉴욕 MoMA의 PS1 모두 파빌리온의 새로운 ‘조형성’에 대한 의미도 있겠지만, ‘같은 장소에 지속적으로 다른 파빌리온이 만들진다’라는 장소성이 갖는 힘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춘웅 예를 들어, 장영철 소장님(와이즈건축)의 <포이동 원두막>(2011) 같은 작업이 있죠.

파빌리온의 의미 확장

박성태 장영철 소장이 재건마을에서 했던 활동이나, 사카구치 교헤가 우리나라에 와서 노숙자의 집을 만들었던 것 등 이와 같은 임시구조물을 모두 파빌리온이라고 한다면 개념이 훨씬 확장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자리하신 분들 대부분 소위 ‘확장된 의미로서의 파빌리온’에 직간접적으로 개입을 하셨는데, 이에 대한 전망이나 한계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치훈 그 전망이나 진단이 쉽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가, 그 용어의 의미가 다양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미술관에 파빌리온이라는 것을 설치하면 그 곳에 오는 관객들은 ‘이 임시구조물은 뭘까?’ 내지는 ‘이 작품은 뭘까?’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파빌리온이라는 단어 자체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단 파빌리온에 대한 경험이 많아지면 이후 ‘쓰임’에 대한 고민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광화문이라는 굉장히 권위적인 구조로 짜여있는 정치적인 공간 한가운데 세월호 유족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물리적으로 보호도 받고 개인적인 공간으로도 느끼게끔 하는 구조물 작업을 의뢰받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당시 저희는 이것을 파빌리온이 아니라 임시 거처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요구하시는 분들은 저희와 생각이 달랐습니다. 강력한 메시지를 갖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파빌리온을 원하셨던 것이지요.

염상훈 1960년대에 노마디즘이 이탈리아 미술계에 한참 전파되었는데, 이는 그 당시의 정치, 경제, 전쟁 등의 상황에서 비롯된 기존 체제에 저항하는 태도였습니다. 기존 체제를 정지된 건물이나 영구적인 것으로 본다면, 그 반대를 움직이는 것으로 봤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정치적인 발언을 할때 임시성을 사용했고 파빌리온 작업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이 저항성을 띄는 것을 예술가 사이에서는 공감할 수 있었겠지만 비예술가들에게까지 공감을 얻기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사회의 눈과 예술가의 시각은 확연히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기현 파빌리온의 제작의도를 보면 모뉴멘트로서의 역할을 원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요? 혹은 만들어진 이후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았을까요? 지금 말씀하신 경우나 이후 60~70년대 실험적인 메가스트럭처, 혹은 기념비적 건축에서 나타나는 어떤 상징성/ 조형성처럼, 파빌리온을 만드는 행위는 물론 그 안에 담기는 내용은 일반적인 건축이 아니라 그 자체의 독창성과 고유 의미로 전달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건축이 아니라 파빌리온으로 구별해 칭하는 것 자체가 공간적이나 조형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이민수 그런데 이런 이벤트를 위한 구조물은 일시성을 감안해 만들었는데, 그 수명을 벗어나서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저희 작업 중에 파빌리온으로 볼 수 있는 <오션스코프>(2010)는 기획 당시 2년 정도의 수명을 생각하고 이벤트성으로 제작했는데,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디자인한 저희로서는 녹슨 컨테이너 사진을 볼 때마다 불안합니다. 이 파빌리온(조형물)을 누가 관리하고, 언제까지 설치해둘 것인지도 궁금하고요. 대부분의 파빌리온은 1~2개월, 혹은 10~20일의 수명을 갖고 만들어졌어도, 생존해서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모뉴멘트 개념이 더해지면 별도의 관리가 따릅니다. 그런데 <오션스코프>는 인천 시장이 바뀐 뒤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습니다.

안기현 비슷한 예로, 서울시가 주관하는 <도시생생프로젝트>를 위해 홍대에 무대를 설치한 적이 있습니다. 버스킹을 하는 음악가들이 무대로 사용할 수 있는 구조물을 만들자는 합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행사를 마치고나니 결과물은 마포구청의 공원녹지과로 이전되었고, 시청의 요구에 따라 영구적인 시설물이 되기 위해 그에 수반되는 여러 행정철차를 거쳐 완성했음에도 이 구조물은 이관된 구청에게는 주변 상권에서의 민원은 물론, 구청의 다른 문화행사의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이치훈 이벤트성이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기업브랜드에서는 지속 기간이 길지 않아도 목적이 명확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발주한 파빌리온은 정치적으로 복잡하고 같은 부서 안에서 싸우기도 합니다.

최춘웅 오히려 설치 형태의 파빌리온 작업은 더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제가 예전에 기무사에 전시할 땐 파빌리온 형식에 스쾃squat 개념을 도입해 철거될 나무들을 족쇄처럼 묶어놓는 형상으로 무단점거를 위한 설치물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이치훈 길을 걷다 보면 어딘가를 점유해 쉴 수 있는 공간이 점차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건물 밀도가 높아지고 상업적인 공간이 되는 상황에서 말씀하신 스쾃squat 개념으로 들어갈 수 있는 틈새를 찾는 것도 파빌리온이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무엇이라고 파빌리온을 정의했을 때는 또 다르겠지만, 전문적인 구축술이 어느 정도 개입되어 좋은 구축물이나 문화적 분위기를 만드는 모든 것이 사유화된 도시 어딘가에 문화 체험을 일으키는 요소로 들어갈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이번에 만든 YAP에 제안했던 <지붕 감각>도 그러합니다. 이 프로젝트의 의무 사항은 ‘쉴 수 있는 그늘과 공간’을 건축적인 요소로 만드는 겁니다. 과거 오래된 건축양식들에 있는 천장이나 지붕의 감각 같은 것들이 파빌리온에 적용되면 좋을 것 같아 과장된 형태로 만들었지만, 재료 자체는 가볍고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지붕을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아래쪽 공간을 비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둥으로 나머지를 띄워서 큰 지붕 아래에서 사람들이 널부러 질 수 있는 공간입니다.

건축과는 다른 구축술로서 파빌리온 작업

박성태 과거 공공적 성격을 띈 구조물들이 스트리트퍼니처, 폴리를 거쳐 현재의 파빌리온으로 넘어온 것 같습니다. 일단 공공미술에서의 스트리트퍼니처는 대부분이 비판을 받았고 광주의 폴리도 성과는 있지만 광주라는 지역적 맥락 또는 도시 스케일과 맞지 않는다고 비판 받았습니다. 향후 건축계에서 파빌리온 작업을 할 때 어떤 지점을 고민해봐야 할까요?

염상훈 모든 것이 지나치게 눈에 보이는 실적 위주로 판단하는 게 일차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장소의 ‘전후 사진’만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것 말이죠. 건축가에게도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가 없어 보이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도시와 맞물리면서 장소로서의 파빌리온으로, 또는 무형의 파빌리온으로 끝나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의 도시나 골목에 맞지 않는 조형물 대신 도시의 조직에 파고드는 작업도 가능할 것같습니다.

최춘웅 파빌리온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파빌리온적인 건축도 가능하다’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건축문화가 흡수될 수 있는 다양한 방향 중 하나가 파빌리온이라고 생각한다면 조형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참여적인 것으로도 보게 되면서 해석을 점차 확장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강예린 파빌리온이 다루는 시간성이 ‘임시’라고 한다면 사실 그 자체가 임시적이라는 것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2013년 참여한 서울시립미술관의 《종합극장: Interspace Dialogue》 전시에서는 저희 말고도 다른 4팀이 실험영화제를 위한 파빌리온 형식의 극장을 제안했습니다. 기성재료를 재활용해서 존치 시간을 고려해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를 가지고 극장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의자들을 임대해서 전시 기간 동안 쌓고 다시 반납하는 방식이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임시성’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구조체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치훈 의자를 해당 기간 동안 임대하는 비용이, 의자를 구입하는 비용과 비슷했는데, 의자를 사서 다시 파는 방식으로 임대를 했었죠?

강예린 네. 처음에는 의자를 쌓아 올리는 것만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시간 동안 저희가 건축에 응대한 방식이 더 재미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모든 시간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같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안기현 같은 의미에서, 건축이 설계하는 사람과 구축하는 사람이 분리되어 있다면, ‘파빌리온’은 대부분의 경우 ‘설계하는 사람이 직접 구축한다’는 의미도 담겨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보면 건축은 시공자와 엔지니어와 같이 작업하기에 상호보완적인 부분이 있다면, 파빌리온은 제한된 예산과 시간으로 인해 외적으로 소요될 수 있는 부분을 최소화하고,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재료부터 접합방식, 시공시간까지 여러 조건을 견딜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야 하기에 결과적으로 직접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민수 사실 저희는 파빌리온을 굉장히 가볍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장난치듯이 재료를 엮어 구조를 만들어 보면서 파빌리온을 만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건축의 이전 단계, 초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안기현 보통 파빌리온에는 예술적인 측면이 더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갖게 할수 있는 ‘임팩트’를 만들어야 하고, 이런 점이 가장 도전적이고 어려운 부분입니다.

염상훈 <놀이를 위한 구조체-파빌리온씨>(이하 ‘파빌리온씨’) 프로젝트의 경우, 이동형 공연무대라는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형태는 사실 선거유세 차량입니다 (웃음). 차량의 측면 덮개만 열면 완벽한 이동식 무대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다른 시도를 하는 이유는 말씀하신 것처럼 단순히 기능 외의 또다른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민재 시도는 새로운데 마감 날짜는 다가오고 샘플은 다 쓰러지는 상황에서, 설치를 해야 하는 마지막 날까지도 ‘이것이 과연 서 있을 수는 있나’ 하는 걱정을 합니다. 구조계산을 맡기려고 해도 재료가 난방에 쓰이는 파이프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계산을 해야될 지 모르시는 경우도 있었고, 공장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직접 조여가며 만들기 때문에 이럴 경우 데이터 값이 반영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계산을 통해서도 알 수 없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단 만들어 보고 쓰러지면 좀 더 작업하는 방식이었고, 파빌리온이 세워졌을 때는 서로 부둥켜 안고 돈을 다시 돌려줘야 된다는 걱정이 사라지니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웃음)

이치훈 샘플만으로는 안 되고 목업mock up을 해봐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YAP 작업도, 구조 자체는 풍하중에 충분히 견디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늘어져 있는 갈대를 보통 막구조로 보는데 이 막구조가 실제로 바람에 저항하는지 테스트하기 위해서는 평평하게 당겨 단단한 골조에 고정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작업에서 갈대의 형태는 늘어진 형태이기 때문에 이를 테스트 할 수는 없었고, 대신 면이 바람에 닿는다는 전제 하에서 풍하중을 계산했습니다. 보통 구조를 만들 때 풍하중을 견디게 하는 재료는 한정되어 있죠. 데이터를 입력해 역으로 계산을 해볼 수 있는 재료는 금속인데, 저희는 X자로 네 개의 기둥이 매듭으로 연결된 형태였습니다. 이 구조 검토를 하신 터구조의 박병순 소장님의 경우 목구조에 대한 데이터만 있기 때문에 구조의 스펙이 정해져 있어도 실현이 가능한지 판단할 수가 없다고 하셨어요. 결국 가장 다루기 쉽고 정보가 많은 재료인 금속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성태 어쨌든 곧 결과물을 볼 수 있겠네요. 3개월을 견디면 되는 거죠?

강예린 올해는 태풍이 많을 거라는 기사를 전달해주는 친구들이 있어요. (웃음) 갈대의 속성을 알기 위해 순천만의 갈대밭에 가서 그곳에서 생활하시는 할아버지께 갈대가 물에 괜찮은지 물어보기도 했었습니다. 다행히 갈대는 늪에 살아서 곰팡이가 생기지는 않는다 하셨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갈대발을 만드는 사람이 더 이상 없어 아무도 만들 줄 모른다 하더군요. 그래서 또 알리바바에 검색을 해서 중국에서 몇 대째 갈대발을 만드는 갈대장인의 집을 찾아갔어요.

최춘웅 비용이 제법 들 것 같습니다.

강예린 우리나라에 오는 모든 갈대발이 중국 OEM이기 때문에 비싸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균 갈대발 보다 5배 정도 비싸게 만들어도 여기서 주문한 가격과 똑같았습니다. 재미있었던 점은, 그 분이 스스로 갈대로 집을 만들어 테스트 중이었어요. 비닐하우스 위에 갈대를 치거나 닭장을 갈대로 만들어보기도 하고, 압착한 갈대로 물건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전체가 갈대로 만들어진 움집이 있기도 했습니다.

파빌리온의 객관적 상징과 건축가의 주관적 입장

박성태 파빌리온을 만들다 보면 건축가로서의 욕심과 담아야 하는 콘텐츠가 항상 부합하지는 않습니다. 이럴 때 콘텐츠를 담기 위한 노력과 욕심 간의 갈등을 어떻게 조절하시나요?

염상훈 이번 ‘파빌리온씨’에서는 일반적인 파빌리온과 달리 이동식이라는 조건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담아야한다는 요구에서 까다로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콘텐츠를 담는 기능만을 생각하기 보다 공간감에 집중해서 작업을 진행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기능만 따진다면 다소 불편한 구조물처럼 보일 수 있지만 파빌리온 자체는 그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서 괜찮았던 것같습니다. 동시에 지금 문화순회사업의 프로그램이 공연 위주로 단편적이라, 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콘텐츠에 대한 제안을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위해 가변적인 공간을 만들어 다양한 테스트를 했고, 그렇게 기능적 실험과 함께 공간적인 느낌과 이동성을 고려해서 지금의 단순하지만 형태가 자유로운 텐트 형태를 선택했습니다.

박성태 AnLstudio 세 분은 어떠신가요?

안기현 저희는 이미 선행되었던 파빌리온의 경험(직접 제작하고, 이동하고 설치/해체해야하는 상황)을 고려했을 때 ‘어떤 방식이 가장 합리적일까’라는 큰 전제로 시작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형태를 자유롭게 그려보면서 합리적인 형태/기능에 대해서 의논한 것 같습니다. 즉, 주어진 시간과 한정된 자원, 그리고 사용자의 측면이 디자인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었습니다.

이민수 왜냐하면 제한 사항이 생기면 담으려 했던 콘텐츠를 결국 못 담아내는 경우가 생기니까요. 이런 경우 재료적인 측면 또는 아주 간단한 기능을 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하면서 스타일이 정해지고, 그에 대한 의미는 하나로 단정짓기 보다는 이런 저런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저희에게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박성태 유닛의 개수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질 수 있도록 한 이유가 어떻게 보면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확정하도록 유도하신 것 같습니다.

안기현 일정 부분 맞습니다. 그런데 ‘파빌리온씨’ 디자인 과정에서는 ‘이동성’과 ‘설치/해체의 용이성’을 조건으로 하나의 유닛을 만든 후에 이것을 복제하면 스케일도 함께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큰 것은 항상 사람이 만들 수 없으니 누군가가 와서 어렵지 않게 파빌리온을 설치하고 다시 분해해서 이동할 수 있는 구조라면, 사용자의 측면에서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저희가 지금까지 작업한 파빌리온을 생각해보면 ‘어떻게 구축할수 있을까’라는 전제를 항상 동시에 생각해야 했고, 기능적인 부분은 당연히 따라다니는 필요조건이었습니다. 기능을 어떤 재료로 어떻게 경험하게 해줄 것인가에 포커스를 맞췄기 때문에 이를 위한 재료를 찾는 것에서 시작해, 그 대상이 의미가 생기고, 저희가 살을 계속 덧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이민수 어떤 대상을 다룰 때 어디에서 시작할지에 대한 문제가 저희들의 스타일에 대한 문제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전반적인 취지는 처음의 의도가 중간에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막지 않고, 중간에 생기는 여러 가지의 요소들을 받아들여서 의도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유연하게 대처하자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박성태 워커아트센터의 3~4년에 걸친 프로젝트에 대한 책, 『Open Field: Conversations on the Commons』를 읽고 있습니다. 미술관 밖 공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무언가를 만들고 노는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람들은 최소한의 구조물만 있어도 공간으로 인식합니다. 다양한 콘텐츠에 대한 수요와 공간에 대한 요구도 많은데, 새로운 공간이 아니어도 이미 있는 공간에서도 충분히 행할 수 있는데, 오히려 공간의 성격이 너무 강해 프로그램이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픈된 공간을 파빌리온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차를 마시고 꽃을 가꾸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이 또한 파빌리온이 아닐까요.

최춘웅 지금 말씀하신 방식이 콘텐츠를 나중에 찾는 것이 아니라, 요구가 있어서 나중에 파빌리온을 만드는, 그런 태생의 시초는 사실 60년대라 생각합니다. 발파라이소Valparaiso에서 조성한 <Ritoque Open City>라는 작업이 있습니다. 기존 사회에서 살 수 업기 때문에 주류에서 벗어나는 것이 큰 내용인데 그 콘텐츠 자체가 워낙 저항적이고 반항적이고 비이성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를 볼때 저는 패션 브랜드에서 만든 상업적 파빌리온은 약간 변질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전투적이고 비주류적인 성향을 가 도용한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강예린 크게 집을 짓고도 충분한 돈이 왜 임시적인 구조물을 위해 쓰이는지 궁금했습니다. <프라다 트랜스포머>의 경우 임시적인 구조물에 드는 예산이 어마어마했습니다. 파빌리온이 무엇인지 개념도 안 잡힌 상태에서 그 구조물로 뭔가를 야기시켜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약간의 반발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전에 쌓인 관련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소 헤맸던 것 같습니다. 장소와 관련해서, 해당 도시와의 관계가 이야기 되었다면 장소 특정적으로 작업했겠지만, 파빌리온이 벌어지는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 어디든 선택할 수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 자체가 사실 의존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뭔가를 만든다는 것은 재미있기도, 또 힘들기도 했습니다.

사회적 발언의 거점?

박성태 최춘웅 교수께서 이야기하신 파빌리온의 정치적인 부분을 좀 더 이야기 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파빌리온은 임시구조물이면서 그 안에 콘텐츠도 담을 수 있어 사회적발언의 장소로도 충분히 작동 가능한 것 같습니다.

최춘웅 제가 집중했던 부분은 건축가의 역할이 과연 건물만 만드는 것인가, 그리고 건축이 문화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창조될 수 있는가, 등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질문 들입니다. 건축가가 건물을 만들면 클라이언트가 그 건물을 점유하는 형식이나 공공적인 건물을 대중이나 시민들이 이용하는 것까지는 지극히 건축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건축가가 장소를 만드는 목적이 프로그램이나 의뢰를 받은 것이 아닌, 기획자로서 발언하고 싶은 내용, 전달하고 싶은 어떤 정치적인 것이거나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 곳에 사람들이 와서 마음껏 발언하고 점유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 자체가 된다면 그것이 가장 원초적인 건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건축은 ‘월가 시위Occupy Wall Street’가 월가라는 장소가 가진 의미가 이미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더할 것이 없는 것처럼, 물리적 건물이나 조형성이 없어도 되고 장소만 발견해도 되는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는 사람들이 어떤 장소에 모여서 특정 행위를 하도록 고안하는 것도 건축설계의 작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는 건축가가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받아서 해석하거나 각본을 받아서 그것에 맞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본을 쓰는 것에 참여해서 실제로 행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거나, 어떻게 보면 지도자 역할 혹은 장소를 제공하는 호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이치훈 그런 상상을 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최춘웅 건축가들은 과거보다 미디어를 잘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출판 또는 다양한 미디어에 등장하는 건축가들은 예전처럼 건축물을 발표하기 보다는 오히려 출판물을 내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건물은 오히려 웹진이나 잡지 등의 미디어에서 과잉으로 생산되기 때문에 어떤 멋진 건물을 만들어도 별 의미가 없어보이는 것 같습니다. 대신 이제는 건축가가 적극적으로 기획자, 사회운동가, 또는 에이전트의 역할을 할 때 힘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요즘의 경제구조와 잘 맞물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부각되는 건축물들도 작가보다는 그룹 위주이고, 작가의 ‘작품’보다 그의 ‘행위’가 어떠한지에 더 주목하는 것 같습니다.

이치훈 파빌리온이 정해진 필지에 들어가는 건축물이 아니라 어디에나 들어갈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한다면 분명 정치적인 함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도시에서 눈에 띄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것들이 대부분 통치와 연결되어 있고 그 틈새로 이질적인 무엇을 가지고 가면 분명 그것의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나눠보니 계속 미묘한 지점들이 있는 것 같고 게임 하듯 줄타기를 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월호 시위를 할 때 보면 우리나라의 치안과 경찰은 정말 수준 높은 것 같고, 오히려 이 사람들이 파빌리온을 만드는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웃음)

강예린 저는 컨테이너에 관심이 있는데 오늘 다녀온 현장에도 서울시 관련 출연재단에 주어진 땅에, 2017년에 어떤 건물이 완공될 예정인데 그전에 2년동안 청년허브센터 중에 하나로 ‘무중력 청년 지원센터’가 6억 정도가 들어서 컨테이너 박스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북동 한성대입구역 앞에도 성북구에서 시공유지에 컨테이너박스를 놓고 1인 기업지원센터를 만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시유지, 공유지를 모아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작업이 컨테이너박스라는 점입니다. 프로젝트를 예술가 지원센터나 사회적기업 또는 다른 이름을 붙이건 가장 쉽게 임기 내에 끝낼 수 있고 별로 부담도 안 되고, 2년만 적치하고 그 후에는 간단하게 치울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파빌리온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파빌리온의 문화·사회적 가능성

분량15,564자 / 30분

발행일2015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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