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search close
https://archnews.manualgraphics.com/vol14-cover/
문단구분
글자크기
  1. -
  2. +
배경
  1. 종이
글꼴스타일
출력
  1. 출력
목차

한 음악가의 자립음악 연대기

한받 × 정아람

제작과 자립 _ 자본주의에 굴복했던 보이지 않는 이들이 온라인과 거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다. 이들의 연대는 두리반에서 보란듯이 원하는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성취는 계속될 수 있을까? 방구석에서 음악으로 자신을 위로하던 한 음악가는 사회적 이슈가 있는 곳에 나와 거리행진 퍼포먼스를 펼쳤고 직접 음반을 만들어 리어카를 끌고 다녔지만, 연이은 실패에 좌절도 크다. 제작은 곧 자립으로 이어질 거라는 순수한 결의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일까. 각자도생 세대의 자립을 위해 그 명확한 의미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받 1996년 ‘제7예술’이라는 영화단체를 조직해 대구 최초의 지역시네마테크를 결성하려 했다. 97년에는 ‘VVF, 바다 비디오 전사들’이라는 비디오영화제작 단체를 만들기도 했고, 99년 벤처회사 ‘지구에서 살아남는 법(JSB)’ 을 창업해 상경했다. 닷컴열풍에 기대어 산울림의 김창완 씨를 사외 이사로 영입하여 야심차게 주식공모를 시도했으나 실패 후 중국으로 떠났다. 상해에서 클래식 기타를 구입해 인민광장 등에서 잠시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다. 2003년 이대 후문에 있는 클럽빵에서 원맨포크밴드 ‘아마츄어증폭기Amature Amplifier’로 데뷔하여 2008년까지 활동, 2010년 2월 두리반 농성에 합류하여 <사막의 우물 두리반 자립음악회>와 <두리반51 + 뉴타운컬쳐파티>를 기획했다. 이후 두리반에 모인 음악가들에게 ‘자립음악생산조합’을 제안하고 함께 결성했다. 현재 EDM(Electronic Dance Music) 뮤지션 ‘야마가타트윅스터Yamagata Tweakster’로 주로 활동한다. 공연장 등의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거리와 열린 광장에서 공연하며 관객들이나 일반 시민에게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선사하고 있다. 한편 집회나 문화제, 시위현장 등에서 ‘민중을 위한 엔터테이너(민중 엔터테이너)’로 거듭나고자 한다. 프로필 사진은 한받과 그의 아들 선율. 

인터뷰어 정아람 2014년 <00그라운드> (기본소득 청‘소’년네트워크 주관) 기획에 참여, 교육 라운드테이블을 진행했다. 현재는 서점이자 프로젝트 공간인 ‘더북소사이어티’에서 매니저로 일하며 제작자와 독자가 책을 통해 만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연대로서의 대화의 장을 만드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정아람 최근에 예술인협동조합형 공공주택으로 이사하셨죠. 만리동예술인협동조합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된 건가요?

한받 처음엔 이런 게 있는 줄 몰랐는데, 다큐멘터리 <파티51>을 만든 정용택 감독님이 “내일까지 예술인마을의 입주자 지원을 받는다”고 연락을 주셨어요. 그래서 그날 밤에 서류를 준비해 지원했죠. 그게 2년 전이에요. SH공사가 1차로 45세대를 뽑았고, 2차 선발을 거쳐 마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2차에서는 이 공동체를 어떻게 꾸밀 것인가부터 구체적인 것까지 여러 주제를 토론했어요.

정아람 과거 아마츄어증폭기에 투영된 한받 씨는 청년기의 남자가 자기 자신을 음악에 반영해 홀로 노래를 부르며 ‘자신을 위로’ 했는데, 지금의 한받 씨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원하는 사회를 그려나가는 구성원으로 성장하신 것 같아요. 스스로 정립한 ‘자립’의 개념에 삶이 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받 ‘자립’이라는 것은 연대 속에서 굴러가는 느낌이 있어요. 또한 땅을 딛고 굴러가는 것이죠. 먼지를 계속 묻혀 가면서요. 요즘은 ‘먼지가 민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단어의 초성이 ‘ㅁ’, ‘ㅈ’으로 같고요. 요즘 초미세 먼지가 화제인데, 저는 ‘초미세 민중’과 연대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풀뿌리 민중’보다 더 어렵게 홀로 싸우는 분들과 연대한다고 생각해요. ‘초미세 민중’과 ‘초미세 먼지’를 함께 호흡하는 음악가가 아닌가, 지금의 자립음악이 그런 단계에 와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합니다.

정아람 ‘자립음악’이라는 개념은 2010년 2월 두리반에 연대하면서 싹튼 건가요?

한받 그전부터 생각했죠. 2009년 초반 ‘아워타운’ 이라는 음악 커뮤니티가 저를 인터뷰할 때 이런 질문을 했어요. “한받 씨는 ‘인디’라는 말이 지금의 홍대앞 음악씬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데, 그렇다면 ‘인디’라는 말 대신에 어떤 말, 단어, 개념을 말하겠느냐.” 당시 잘은 몰랐지만 ‘소작농’이라는 말을 했어요. (아마츄어증폭기 노래 중에 <소작농>이라는 노래도 있었지만요) 인디 음악 씬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들은 ‘자작농’이 아니라 ‘소작농’ 같다고 말이죠.

그 이후에 저는 프랑스 릴Lille에 있는 예술학교로 영화 유학을 시도했어요. 그 전에 제가 만든 단편영화와 아마츄어증폭기로서 만든 음악을 첨부해서 포트폴리오 심사를 위해 학교에 보냈거든요. 1차 심사는 통과했고 2차 면접을 위해 프랑스로 날아갔습니다. 면접 날 조교수를 따라서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어디선가 많이 듣던 노래가 들리더군요. 제가 포트폴리오로 보낸 아마츄어증폭기의 <경극>이었어요. 뭔가 심상치 않았어요. 면접실 통유리창으로 까만 뿔테를 낀 프랑스 교수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고 제가 면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노래는 끝났어요. 그리곤 그 분이 영어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Your music is so unique (당신 음악은 매우 독특해요).” 그때 절감을 했죠. “아, 영화를 붙잡을 게 아니라 음악을 해야 되는구나.”

인터뷰에서 떨어지고 절망적인 마음이었는데 (나이 제한으로 그때가 마지막 응시였습니다) 제가 만든 음반을 많이 갖고 왔기 때문에 어떻게든 팔아야 했어요. 다음 날 그 예술학교 정문 앞으로 가 좌판을 깔고 앉아 기타를 꺼내 들고 노래했어요. 종이에 “Aidez-moi!”라고 써서 옆에 두었어요. 도와 달라는 뜻이거든요. 그렇게 적은 종이를 펼쳐놓고 기타 치고 계속 노래했어요. 예술학교가 있던 곳은 릴에서도 조금 더 들어간 깡촌이었어요. 한참을 노래하다 보니 제가 불쌍해 보였는지 어느 콧수염 난 동네 할아버지 같은 분이 돈을 주고 음반을 사가시더라고요. 거기서 ‘자립’이란 게 시작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아마츄어증폭기의 <수성 랜드>를 2009년 8월 8일에 냈는데 그즈음 ‘자립음악가’라는 것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수성 랜드>를 낸 게 저의 첫 번째 자립 행위였던 거죠.

정아람 <수성 랜드> 이전에 낸 <극좌표>도 직접 제작하고 유통한 게 아니었나요?

한받 <극좌표>의 자켓 디자인 이미지는 구글에서 다운받은 거고요 (웃음), 음반 레이블은 ‘핑퐁사운드’에요. 그래서 그 앨범의 권리는 제가 갖고 있지 않아요. 그게 불리한 점이죠. 자연적인 저작권은 음악가가 갖지만 법률적인 권리는 레이블이 갖는 난점이 있어요. <수성 랜드> 이후로 제 모든 작업에서 저는 자연적인 저작권만 인정하고 판매를 중개하는 경로나 사업체는 전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자립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SNS나 블로그처럼 제가 갖고 있는 채널은 쓰지만 외부의 채널은 쓰지 않죠.

음원 또한 플랫폼에 유통하지 않고 제가 직접 CD를 만들어 판매합니다. 저는 저작권이란 상업적으로 수익을 발생시키기 위해 개발된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미국 음악산업이 음악을 상품화하면서 만든 개념으로요. 제작자를 산업 시스템 속으로 끌어들여 산업의 주체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개발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저는 그와 반대로 자연적인 저작권만 주장하고 그것을 상업적으로 맡기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요.

저에겐 레이블 문제가 상당히 컸어요. 어떻게 보면 레이블이 결정적이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느 순간부터 레이블과 소통도 안 되고, 심지어 레이블 대표와도 전혀 연락이 안 되었어요. 레이블이 도산하고 저의 저작권이 다른 레이블로 옮겨졌다는 것을 제3자에게서 전해 들었을 정도였지요. 소통이 안 되니까 버림받은 느낌이 들어 힘들었고 의기소침해졌어요. 그렇게 작은 음악씬임에도 불구하고 거대 자본주의와 시장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죠.

정아람 산업의 규모가 작은 만큼 그 안에서 구성원들의 관계는 더 긴밀해질 수도 있는데, 관계에 기반한 시스템이 아니라 기존의 자본주의 시스템에 입각해 있던 것이군요. 음악가 입장에서는 직접 피해를 받는 사례가 되고요.

한받 선택과 배제라고 해야 할까요. 레이블 입장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장성이 있는 음악가들과 계약을 하게 돼요. 클럽에서도 마찬가지죠. 어느 정도 관객이 있는 음악가들 위주로 공연 스케줄을 짜게 됩니다. 음악가 입장에서는 그런 레이블과 클럽의 눈치를 보고 어느 정도 종속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것을 어떤 측면에서는 레이블과 음악가가 함께 간다, 클럽이 음악가를 키워 준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레이블과 클럽은 90년대 중반에 홍대앞에 발흥한 음악씬의 중심이라고 생각해요. 드럭DRUG이라는 클럽에서 커트 코베인 추모공연을 시작으로 인디밴드들의 공연이 시작되었고, 인디레이블을 통해 씬이 형성되고 외부로도 많이 알려졌어요. 그래서 클럽과 레이블이 쌍두마차처럼 인디음악씬을 이끌어왔죠. 그러나 음악가가 정말 열심히 공연했지만 결국 클럽과 레이블에 선택받지 못하거나 그들의 기획에 참여하지 못하면 독자적으로 생존할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었어요. 한편으론 홍대앞의 치솟는 임대료와 클럽의 유지비용으로 공연의 모든 수익을 써야 했고 음악가들 자신의 몫을 받기는 힘든 상황이었던 겁니다. 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로 오면서 음악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노력들의 사례가 개별적으로 있었어요. 하지만 하나의 흐름으로 나타나진 않았죠. 저 자신도 두려움이 있었어요. 레이블이 도산하고 개인적인 음악가의 힘만으로 계속 음악활동을 할 수 있을지 생각했던 거고요.

그런데 당시 클럽이나 레이블에서는 저의 비판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시에 제가 함께 했던 친구들은 박다함, 벌룬앤니들, 아워타운의 몇몇 친구들, 또 불길한저음이라는 밴드의 멤버이기도 한 김곡, 김선(감독) 친구들까지 연결되어 있었어요. 저희들이 ‘마니페스토’라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클럽을 돌아다니면서 인디음악씬을 비판하는 구호도 외쳤지만 어디까지나 퍼포먼스로 느껴질 정도였고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어요.

정아람 그런 흐름에서 ‘서교 지하보도’는 어떤 공간이었나요?

한받 클럽이나 레이블에 소속되지 않은 음악가들의 해방구라고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음악가들이 자율적으로 모여 합주를 했고 공연을 기획했고, 지하보도를 다니던 행인들이 자연스레 관객이 되었으며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어요. 저도 공연을 기획해서 머머스룸 외에 스트레칭져니,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갤럭시익스프레스 등 아는 친구들과 축제처럼 열기도 했죠. 클럽과 레이블이 줄 수 없는 어떤 자유로움을 만끽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정아람 운영하셨던 ‘레이디쉬 팝홀’도 독립된 공간이 아니었나요?

한받 훨씬 전이었죠. 레이디피쉬라는 음악가가 운영하는 공간이었어요. 제가 있었던 레이블의 대표와도 아는 사이였고 아마츄어증폭기로 그곳에서 공연을 몇 번 했죠. 그런 저를 눈여겨보다가 어느 날 제게 공간을 운영해보지 않겠냐며 매니저 직을 제안했어요. 그래서 2006년 1월부터 8월까지 매니저로서 다양한 공연을 기획하고 음악가를 섭외했죠. 음악가들의 몫을 중심으로 책정해 수입을 배분했지만 관객이 워낙 적었기 때문에 힘들었어요. 지금의 김일두 씨가 속해 있던 서스펜스라는 밴드가 부산에서 왔는데 관객이 아무도 없었어요. 음악은 좋은데 당시엔 지금처럼 트위터나 페이스북도 없었고요. 그래서 홍대앞의 음악씬에 절망감을 많이 느꼈죠.

그런 와중에 재미있게도 박다함 씨를 여기서 만났고요. 유병서 씨와 즉흥 밴드를 결성해서 공연도 했어요. 자립음악생산조합의 맹아도 나오기 직전에 관련 개념들이 그곳에서 많이 표출되지 않았나, 인디씬에 대한 문제점들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연결들이 막 생겨나지 않았나 싶어요. 마지막에는 월급도 못 받고 안 좋게 끝났어요. 그렇게 끝나니까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이렇게 절망적인 음악씬 안에서 계속 활동할 건데 그렇다면 이걸 한번 연구해보자’ 했고, 그래서 블로그를 만들어 홍대앞 인디음악씬에 대한 단상들을 올렸죠. “음악가들의 협동조합을 해볼까” 라고 쓰기도 했고요. 논리적인 생각 없이 떠오르는 대로 아이디어를 올렸고, 거기에 박다함, 홍철기, 진상태 씨 등이 공감하기도 했어요. 제 블로그에 공감한 친구들이 많았던 아워타운 홈페이지에 저도 글을 쓰고, 그 글에 공감한 친구들이 모여서 살롱 바다비에서 회의도 했지요. 요기가 사장님도 오셔서 같이 이야기 나누고. 그런 네트워크가 그때부터 만들어졌어요.

정아람 ‘자립음악가’로서 강의와 같은 교육활동도 하시죠. 음악을 생산하는 창작자의 입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발효음악’이라는 개념을 알리고 계신데, 발효음악은 삶으로부터 나오는 거라고 들었어요. 이러한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나온 건가요?

한받 저도 딱히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발효를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개념이 만들어지더라고요. 음식과 음악의 상관관계라고 할까요. ‘발효음식이 육체의 장운동을 촉진한다면 발효음악은 영혼의 장운동을 촉진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어요. ‘장’이라는 개념을 총 네 가지 차원으로 확장해볼 수 있어요. 물리적 차원의 공간인 장, 상품으로서 시장 속에서 운동하는 시장의 장, 사회에 일으키는 파장으로서의 장, 영혼의 장운동으로서의 장.

또한 시간을 생각할 수 있어요. 발효라는 것이 일정한 시간을 거쳐 썩고 부패하면서 순기능으로 작용하기도 하거든요. 개인의 경험에서 즉각적으로 나오는 음악도 있지만 일정한 시간을 들여 부패, 노화의 과정을 겪어 성숙하게 숙성되어 나오는 음악도 있잖아요. 저는 실패와 절망처럼 안 좋았던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경험을 바로 끄집어내긴 어렵지만 일정한 시간을 보내며 풍화를 겪고 나면 음악으로 꺼내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실패와 절망의 경험이 노래로 발효되어서 나왔는데 다른 사람에게 전해져 그의 영혼의 장운동을 촉진했다면 공감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공감을 통해서 위로를 받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제 노래 <황홀경>은 저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이것을 듣고 위로 받았다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이 노래는 제가 절망 속에서 깨달았던 것을 토해냈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공감을 일으키고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츄어증폭기로 돌아가면, 물론 그는 가상의 인물일 수도 있지만 그 인물이 노래를 하면서 저 자신이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어요. 제 자신에게는 그때 받았던 힘이 근원으로 있는 것 같아요. 그 생각이 지금도 야마가타트윅스터의 공연이나 연대 활동에서 큰 동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어요. 역시 자립이라는 것은 음악의 그런 힘, 음악이 줄 수 있는 공감과 위로의 힘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아람 그것이 음악이 가진 본연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받 소리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진동인데, 이 떨림이 일단은 힘이 되는 것 같아요. 만약 제가 침울하다고 가만히 있으면 더 침울해질 것 같은데, 그 상황에서 기타를 들고 현을 쳐서 울렸을 때 그 떨림이 나를 떨리게 하고 일어설 수 있는 에너지를 주는 것 같아요. 음향적인 차원에서 얘기하는 거예요. 야마가타트윅스터는 이런 성격에서 많이 발전해왔을 수 있어요. 비트를 계속 발생시키는 ‘개러지 밴드Garage Band’라는 기술과 구호로 전해지는 메시지가 저의 춤과 퍼포먼스와 결합해 투쟁의 공간에서 다층적으로, 하나의 힘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아람 야마가타트윅스터는 주로 사회적 갈등이 첨예한 투쟁 현장에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음악에 현장 상황이 반영될 수밖에 없을 텐데요. 이런 음악은 발효음악보다 더 긴박하게 만들어지기도 하고, 부르는 사람의 해소가 목적이기보다는, 듣는 사람에게 힘을 주려는 게 아닌가요?

한받 그래서 다른 개념들이 나오는 것인데요, ‘발효’가 개인적 차원에서 겪은 상처와 절망을 딛고 나서 천천히 나오는 것이라면, 야마가타트윅스터의 음악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현장의 즉흥성, 즉발적인 상황을 음악에 반영한 것이기에 ‘발효음악’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발효음악’과 또 다른 차원에서 제가 얘기하는 것이 ‘실천음악’이에요. 음악을 세 가지로 구분해보면, 실험음악, 실용음악, 실천음악이 있다고 생각해요. 실험음악이라는 것은 도대체 음악이라는 것을 어디까지로 볼 수 있는가, 음악 자체의 미학적인 면을 실험해보는 것이죠. 실용음악은 쉽게 말해 대중음악, 개인적인 차원에서 쾌락이나 즐거움, 재미를 만족시켜주는 목적으로 만든 음악이에요. 실천음악이란 민중과 연대하면서 자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도하는 실천으로서의 음악을 말해요. 집회나 시위의 현장에서 즉각적인 상황을 받아 만들어내는 것이 실천음악의 일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아람 야마가타트윅스터로 연대 현장에서 공연한 것 외에 여러 행사를 기획하기도 하셨는데요.

한받 우선 <구루부 구루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주, 정착한다는 것이 이제는 어렵겠다, 건물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홍대앞 상권에서 정주는 힘들어졌으니 음악처럼 유동적으로 흐르면서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리어카를 구해서 음반과 책을 싣고 판매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힘든 선택이었어요. 사람과 사람이 일대일로 만나서 판매하고 알릴 시도이자 실험이었는데, 하면서 계속 절망했거든요.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음반을 구매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런 활동 자체에 관심이 없더라고요. 두리반은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어서 사람들이 응집할 수 있었지만 저의 시도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퍼포먼스로서 다가가지 않았나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실패가 충분히 가치 있다고 봅니다.

두물머리 지키기 유기농 대행진. / 사진 제공: 한받

작년에 했던 <당인리선>은 무전음악 합창행진 퍼포먼스였어요. 사람들을 이끌고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예전의 홍대앞을 지나가던 기찻길을 행진했죠. 기차가 상징하는 개발의 의미를 되묻고 핵발전 이후의 묵시록적인 세계에서 축제란 어떤 것일까,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상의 절망 속에서 우리의 축제를 실천해보려고 했어요. 기업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는데, 문제는 주민을 구하지 못했어요. 마포평생학습관의 노래교실에 가서 설명하고 홍보 했는데도 안 됐고, 마포소년소녀합창단을 이끌던 피아노 선생님께도 팜플렛을 보여드리고 설명했지만, 제 노래 중 <빛나는 노숙자>를 보고 승인을 안 해주시는 거예요. “노숙자가 빛나면 안 된다. 이런 것을 노래할 순 없다” 하시면서요. 결국 신청이 저조해서 어떻게든 제 주변 사람들과 예술가들을 모아 행진을 했지만, 소통하기 힘들다는 것을 경험했어요. 시대 흐름 같기도 하고요.

무전음악 합창행진 퍼포먼스였던 <당인리선>(2014)은 홍대앞의 기찻길을 행진하며 기차가 상징하는 개발의 의미를 되묻고, 핵발전 이후의 묵시록적인 세계에서 축제란 어떤 것일까, 도래하지 않은 가상의 절망 속에서 우리의 축제는 무엇인가를 실천해보려 한 시도이다. / 사진 제공: 한받

<당인리선>부터 벌인 기획은 우리가 어떻게 이 절망적인 상황을 헤쳐나가면서 즐기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실천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당인리선 또한 일체의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그 상태로 우리가 어떻게 노래를 하고 서로를 챙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지 실험했던 거예요. 최근에는 ‘장소와 국경을 초월한 영원한 젊음의 연대’를 줄인 <장.국.영>이라는 걸 했어요. 한강을 횡단하면서 그 밤을 어떻게 같이 보내고 위로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실험한 것인데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벌인 여러 시도들이 실패를 거듭하고 있어요. 어디까지나 현재에 도래하지 않은 가상의 절망이기 때문일까요? 저 혼자 기획했기 때문에 연대의 정신이 부족하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정아람 ‘자립음악’이 음악가의 투쟁 방식이라면, 음악으로서 갖추어야 할 성격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한받 홍대앞이 제 음악 활동의 시발점이지만 저는 투쟁의 현장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데모꾼이냐, 음악가냐 하는 얘기를 최근에 많이 들어요. 특히 아내가 요즘 하는 노래들은 못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데모꾼이 구호 외치는 것 같다, 노래라고 보기 힘들다고요. 저 자신은 음악의 힘을 믿고 계속 해 나갑니다. (잠시 집중하며) 음악의 그 힘, 비트만 있다 하더라도 진심이 담긴 저의 몸짓과 호소가 함께 한다면, 그것이 설령 음악으로 들리지 않더라도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아, 제가 계속 얘기하고 싶은 건 이거네요. ‘그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간절함이 무엇보다도 강하게 다가옵니다. 두리반이 용산 참사처럼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두리반에 간 것이었어요. 거기 있는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자립음악’이란 음악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현장에서 투쟁하는 분들이 저에게는 창작의 파트너죠. 그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이 저에게 와서 음악으로 나오니 음악의 원동력인 것이죠.

정아람 ‘자립음악가’로서 견지하는 게 있나요?

한받 홍대 두리반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파티51> 마지막에 누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이제는 두리반에 돈 내고 칼국수 먹어야겠네.” (웃음) 저에게는 이 말이 ‘우리가 자본주의로 다시 돌려보냈잖아’라는 뜻으로 들렸어요. 자본주의 바깥에 있는 분들을 다시 자본주의 안으로 보낸다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아요. 두리반 터에 대기업 자본이 개입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자본이 비껴가는 곳을 더욱더 크게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게 하나의 블랙홀이 되어 자본주의가 멸망할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주 초미세한 블랙홀은 두리반을 통해서 나왔다가 다시 자본주의로 귀환하고요. 그것을 어쩌면 큰 블랙홀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한 음악가의 자립음악 연대기

분량10,318자 / 20분 / 도판 2장

발행일2015년 7월 2일

유형인터뷰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모든 텍스트는 발췌, 인용, 참조, 링크 등 모든 방식으로 자유롭게 활용 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의 출처 및 저자(필자) 정보는 반드시 밝혀 표기해야 합니다.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이미지의 복제, 전송, 배포 등 모든 경우의 재사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