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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냐 혁명이냐

정지돈 × 홍수영

올해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은 작품 <건축이냐 혁명이냐>에 대해 정영문 작가는 “사실들을 허구와 잘 조합해 지적 소설의 모범적인 전형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작가의 방대한 사전 조사가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데, 이를 유쾌한 호흡으로 풀어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작가 정지돈이 한국의 근현대사라는 큰 캔버스에 미국의 근현대 미술과 동시대 한국 건축의 지점을 교묘하게 그려 넣은 배경을 들어본다.


정지돈 1983년 대구 출생. 2013년 <문학과 사회> 신인상으로 등단. 후장사실주의자.

인터뷰어 홍수영 황두진건축사사무소 오피스 큐레이터 


홍수영 이번 단편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쓰면서 건축 공부를 많이 하셨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건축가나 건축이 있는지요.

정지돈 소설에도 잠깐 나오는데, 오랜 친구이자 한때 룸메이트이기도 했던 김현기가 건축학과를 다녔습니다. 그 친구 덕분에 건축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여러 이야기를 들어 건축은 친숙한 편입니다. 물론 이번 작품을 위해 따로 공부도 했습니다. 건축 용어를 활용해서 보고서 같은 느낌이 나게 쓰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건축은 공간을 직접 경험해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저는 가본 곳이 별로 없습니다. 사진으로 접하고 좋아하는 건축은 꽤 있는데, 그중 처음으로 ‘좋다!’고 느낀 곳은 카를로 스카르파의 <브리온 가족 묘지>입니다. 학교 후배가 좋아할 것 같다며 이메일에 첨부해준 사진을 보는 순간, 그냥 좋더라고요. 직접 가본 곳 중에서는 종묘를 좋아합니다.

홍수영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李玖라는 인물 자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구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왜 끌렸는지 궁금합니다.

정지돈 이구를 만난 과정은 소설에 쓴 그대로입니다. 조규엽이라고, 디자인을 전공하고 인테리어 사무실에서 일하는 친구와의 대화 중에 나온 아이디어예요. ‘가상의 건축가’에 대한 전기를 써보자, 내가 글을 쓰고 친구가 건축가의 도면을 그리는 방식으로. 일종의 페이크 다큐처럼. 서울에는 이상한 건물이 많으니까 사진 찍어서 ‘그 사람이 만든 거다’, 그렇게 거짓말도 하고요. 그러다가 둘 다 게을러서 실제로는 못하고 있다가 우연히 이구를 발견했습니다. 박길룡 선생님이 쓴 『한국 현대건축 평전』(『한국현대건축의 유전자』의 개정판)에 굉장히 짧게 나오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황족皇族인데 건축을 했으나 알려지진 않았다는 점이요.

고종황제의 왕자인 영친왕의 아들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태손 이구. 그는 MIT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아이엠 페이 회사에서 일했으며, 한국에 와서는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 사진 출처: 《내셔널지오그래픽》 한국판, 1969

홍수영 <건축이냐 혁명이냐>에 대한 문학평론가나 선배 소설가의 엇갈리는 심사평이 흥미로웠습니다. “소설적인 어떤 것을 체험하는 것을 방해하는” 면이 있다고 보는 분이 있는가 하면 (권희철), “괴물 같은 작품이다 (중략) 역사와 허구의 협간에서 실로 현락한 곡예를 펼치고 있다”고 평가하신 분도 있습니다 (황종연). 문제작입니다.

정지돈 작품에 대한 의견이 갈리는 건 좋다고 생각합니다. 쓰면서 ‘이렇게까지 써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요. 저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소설적인 어떤 것’이 없으므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수문학에서 ‘순수’라는 단어 때문에 사람들이 오해하는데요, 사실 소설이라는 형식은 비균질적입니다. 소설은 시와 평론 기사 산문 에세이 희곡 등 모든 것이 섞일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시작부터 그랬다고 볼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1532-1564) 같은 소설은 완전 잡탕이거든요. ‘이건 소설이 아니다’, ‘정신없다’ 같은 평도 있는데,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건 자유지만, 소설이다 아니다, 식의 생각은 웃긴 것 같습니다. 그런 기준 자체가 허무맹랑합니다. 제가 이런 소설을 썼다고 기존의 소설이나 독자들이 좋아하는 소설이 지키고 있던 기준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요. 마음을 열고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홍수영 소설에서 독특한 형식을 선택하셨는데, 그러면서 받을 수 있는 오해를 피하지 않고 부딪혀 나간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지돈 처음에는 ‘이구가 비운의 인물이니까 드라마틱하게 쓰면 사람들이 좋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까 그러기 싫더라고요. 정확히는 이구의 삶을 드라마 형식에 욱여넣거나 기승전결의 틀에 끼워 맞추는 게 부정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챕터, 챕터 넘어가는 동안, 과연 이걸 누가 소설이라고 생각할까, 앞의 내용과 연결이 되기는 할까, 다음 챕터에는 뭘 쓸까 등 저도 모르는 상황에서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어렵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습니다만 쓰다 보니 뭔가 잡히는 게 있고 뚫고 나가는 지점이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연약해도 중심 서사나 줄기 같은 게 있었는데 이 소설은 ‘모티프’ 정도로만 연결됩니다. 저에게도 새로운 종류의 글쓰기 경험이었습니다.

홍수영 짧은 소설 안에서도 한국은 물론 세계 건축의 근대화 과정을 촘촘하고 풍성하게 드러냅니다. 건축에는 개인 혹은 국가 권력의 욕망이 투영되기 때문에 그 문화를 들여다보면 어떤 본질이나 삶의 태도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정지돈 질문에 맞는 답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과거 60, 70년대 김현옥 시장의 서울 개발 과정을 비난하고 우습게 보거나 얕잡아 봅니다. 저 역시 문제가 많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추앙받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라고 해서 그런 지점에서 자유로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건축이냐 혁명이냐”라고 묻고 “혁명은 피할 수 있다”고 대답했는데요, 질문에 그의 욕망이나 의지가 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의지나 욕망이란 ‘건축으로 세상을 바꾸겠다’인데, 이런 생각이 과도해지고 실현 가능한 힘을 얻게 되면 처음 의도가 순수하건 바르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결과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프루이트 아이고나 뉴욕 개발, 밤섬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의지를 가진 이들 때문에 일어나는 일, 그에 영향 받고 움직이는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김현옥 시장이나 개발 과정에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나 태도를 비난하기 위해 글을 쓰고 싶진 않습니다. 소설은 그런 이유로 쓰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칼럼이나 기사가 할 일이죠. 개인이나 국가 권력의 욕망 뒤에는 복합적인 지점이 있고 그것들과 세계가 움직이는 모습, 그것 자체가 본질이 아닐까 합니다.

홍수영 “건축이냐 혁명이냐. 혁명은 피할 수 있다”는 르코르뷔지에의 대답과 정지돈 작가의 대답은 다른 것이라 짐작됩니다.

정지돈 제 소설 <눈먼 부엉이>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장은 어리석은 질문이야말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질문이라고 믿었다. 어리석은 질문에는 답이 없거나 틀린 답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이로써 질문은 질문이 아닌 의지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일한 이유로, 나는 그런 질문이 세계를 망쳤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므로 질문을 가장한 의지는 사라져야 한다고) 장은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질문만이 세계를 구원할 힘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 이런 이분법적인 질문 자체가 틀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답을 어떻게 하든 틀린 답만이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그런 질문은 무조건 폐기되어야 하냐면, 그렇진 않습니다.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면 세계는 변하지 않죠. 중요한 건 대답이 아니라, 위에서 말했듯 질문(이자 의지)을 통해 움직이고 변화하는 사람과 세계를 그리고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홍수영 이 소설을 위한 준비는 꽤 오래 하셨을 것 같습니다. 리서치를 방대하게 하셨을 텐데 쓰면서 분량 때문에 드러낸 부분이 있나요?

정지돈 2013년부터 건축 관련 책을 읽어오며 준비하고 있었는데 안 들어가져서 그냥 두었어요. 건축 관련 폴더가 2년 넘게 쌓여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건 2014년 봄부터고 탈고하는 데 6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단편치고 상당히 오래 걸린 편이죠.

분량 때문에 뺀 부분은 없습니다. 각 단락은 거의 한 호흡에 썼는데요, 고민과 자료 조사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 순간 글이 쭉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나온 이야기가 아니면 좋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굳이 다시 넣지 않았습니다.

홍수영 소설에 도움을 받았던 시, 소설, 영화 등의 자료를 두 페이지에 걸친 후기로 남긴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정지돈 미술에선 작품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작품이 되는 경우가 꽤 있는 것으로 압니다. 건축 전시에서도 설계도부터 참고 자료 등이 포함됩니다. 책을 일종의 전시회로 생각한다면 작가노트 역시 전시회에 포함되는 작품 중 하나이고 그 안에 과정으로서의 작품이 포함되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순히 인용 출처가 아니라 작품 목록 자체가 하나의 문장이자 미로, 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홍수영 정지돈 작가의 다른 작업들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요. <여행자들의 지침서>에 대한 황정은 소설가와의 인터뷰에서, 비트 소설은 좋아하지 않지만 “어떤 기존의 것을 무너뜨리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의 싸움을 제대로 한번, 해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트 세대의 애티튜드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정지돈 작가의 여섯 편의 단편을 읽으며 그런 비트 세대의 태도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지돈 태도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의 완성도나 글솜씨와 같은 것은 일정 기간 이상 노력하면 대부분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각자 스타일은 다르겠지만요. 그 이후에 중요한 것은 자기 작업에 대해 가지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태도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용어로는 ‘용기’, 마르셀 뒤샹의 용어로는 ‘무관심(무책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도, 용기, 무관심 모두 다른 말 같지만 비슷한 지점이 있는데요. 볼라뇨의 용기는 작가가 자기도 모르는 곳에 고개를 들이밀 줄 아는 것, 뒤샹의 무관심은 기성 미술계가 뭐라 하든 관심 없다, 나는 그냥 내가 하는 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단순히 훌륭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 이상의 어떤 매력이나 힘을 더해준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완성도나 재미를 따지면 비트 세대 이후 그보다 훌륭한 작품들이 무수히 쏟아졌습니다. 재미있고 슬프고 감동적인 책은 많죠. 그렇지만 비트 세대의 용기나 태도 같은 강렬함은 다른 영역에 존재합니다. 그런 것들이 예술에서 특히 중요하지 않나 합니다.

홍수영 <창백한 말>에서 “어느 날은 시를 썼고 어느 날은 소설을 썼으며 어느 날은 영화를 찍었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좋아하는 영화나 시가 궁금합니다.

정지돈 좋아하는 시인은 많은데, 최근 읽은 시집 중에는 이탈리아 시인 체사레 파베세의 <피곤한 노동>이 좋았습니다. 국내 시집으로는 박상순의 <6은 나무 7은 돌고래>를 좋아합니다. 시는 꾸준히 썼고 공모전에 낸 적도 있습니다. 영화는 소설처럼 어린 시절부터 늘 함께 했습니다. 좋아하는 감독은 장 뤽 고다르와 알랭 레네입니다. 최근 감독으로는 요아킴 트리에를 좋아합니다. 노르웨이 감독인데 두 편의 장편 영화를 찍고 얼마 전에 헐리웃으로 스카웃되어 제시 아이젠버그, 이자벨 위페르 등과 신작을 찍었더라고요.

홍수영 정지돈 작가의 소설에서는 일면 다큐멘터리 영화 같은 부분도 보입니다.

정지돈 다큐멘터리 얘기를 하시니까 아네스 바르다의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가 생각나네요. 다큐이면서 시적 에세이 같은 형식의 영화인데 제 소설에도 그런 느낌이 스며들었으면 합니다.

홍수영 꼭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쳐야만 작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혹은 덜 알려진 작가가 작품을 처음 써나가는 과정이 어쩌면 그의 삶에 가장 가까운 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습작 시절은 어떠셨나요?

정지돈 스물여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4~5년 만에 등단했는데, 특별한 습작 시절의 추억은 없고요, 첫 소설을 썼을 때 정도가 기억나네요. 친구 셋이서 투룸에 같이 살았는데, 작업실 같은 건 당연히 없었고 한 방은 옷방 겸 창고, 다른 한 방은 침실로 썼습니다. 새벽이었고 친구들은 TV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설이 쓰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책상도 없는 좁은 방에 박스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노트북을 올리고 썼습니다. 친구들이 바로 옆에서 TV를 보며 떠들고 있는 데도 집중이 잘 됐어요. 한달음에 거의 원고지 60매 정도 쓴 것 같습니다. 그게 첫 단편인데 너무 형편없어서 누가 볼까 두려운 소설입니다.

홍수영 지금까지 쓰신 여섯 편의 소설에는 자살한 작가들, 혁명가, 망명자, 시인 등 이상 세계를 꿈꾸지만 현실에서는 날지도, 땅에 발을 딛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앞으로의 작품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인물들이 궁금합니다.

정지돈 소설 쓰면서 저도 몰랐던 애정을 확인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종류의 인물이 나오지 않는 소설도 쓴 적이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완성을 못 하거나 완성해도 수준이 못 미치더라고요. 실패한 이상주의자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냥 좋고 웃기고 슬프고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그들에 대해 쓸지는 모르겠습니다. 관심이 어느 쪽으로 옮겨갈지 모르니까요.

홍수영 이전의 작품들 중 <눈먼 부엉이>, <미래의 책>, <창백한 말>은 각각 사데크 헤다야트, 모리스 블랑쇼, 보리스 사빈코프의 문제작이 소설 속에 등장하고, 심지어 그들의 작품과 제목이 같습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도 르코르뷔지에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소설의 제목으로 가져왔습니다. 소설의 제목을 결정하는 것 자체가 대화하기 위해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소설 속 소설’과 교감이 흥미롭습니다.

정지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제목을 그대로 쓰는 것이 가장 정직한 방법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소설들을 읽지 않았다면, 제 작품도 쓰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읽는 과정 자체가 쓰는 과정이고, 쓰는 과정은 읽는 과정 아닐까요. 느끼지 못할 뿐 글을 읽을 때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글을 쓰는 과정이 수반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글을 쓸 때 그 글의 첫 번째 독자는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 생각이 글의 형식에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홍수영 등단 작품인 <눈먼 부엉이>에는 세계를 떠돌며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판본을 찾으러 다니는 에릭이 나옵니다. 그는 글을 읽던 사람에서 어느새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됩니다. 실제로 어떤 책들을 탐독해 오셨나요? 혹은 반복해서 읽는 ‘베갯맡의 책’도 궁금합니다.

정지돈 어릴 때는 추리소설이나 무협지, 판타지를 봤고, 이십 대 초반에는 존 파울즈, 아고타 크리스토프, 장 주네를, 이후에는 누보로망 계열의 작가나 유럽 현대 작가들 위주로 본 것 같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입니다.

최근에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를 하루에 한 챕터씩 보고 있습니다. 롤랑 바르트가 죽기 직전에 한 강의를 정리한 책인데, 그는 한계에 닿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소설을 쓰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강의로 전달하며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를 하는데요, 마지막 강의가 끝나는 날 세탁소 트럭에 치여 세상을 떠납니다. 결국 소설은 못 쓴 거죠.

홍수영 <뉴욕에서 온 사나이>에는 “동료 작가들과 매주 일요일마다 비밀 모임 가지며 시를 낭독했고 소설 속의 대사를 연극배우처럼 소리쳐 외웠다”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후장사실주의자에 속한 동료들과는 어떤 일들을 벌이시는지 궁금하네요.

정지돈 보통 만나면 산책을 하거나 술을 마십니다. 최근에는 책이나 잡지를 만들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끝내주는 해외 단편 소설이나 각자의 작업을 실을까 고민 중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꼴이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책의 제목은 『analrealism』(vol. 1)입니다.

홍수영 앞으로 쓰고 싶은 글에 대한 계획을 마지막으로 들려주세요.

정지돈 제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홍수영 아직 잘 모르는 이야기인가요? 보통 잘 아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나요?

정지돈 잘 아는 이야기는 제가 재미없으니까. 데이비드 실즈는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서 “작가가 무언가를 알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작품”이 좋다고 했는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플롯이 지배하는 작품은 재미가 없습니다. 쓰는 사람도 그 뒤에 어떤 내용이 나올지 예상 못 하고 쓰는, 그런 이야기가 좋습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

분량7,881자 / 15분 / 도판 1장

발행일2015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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