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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공동체 감이당 이끄는 고전평론가

고미숙 × 박성태

공부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감이당>은 중구 필동에 있다. 몇 발자국만 나서면 남산을 오를 수 있어, 토요일 오후면 함께 산에 오르기도 한다. 마침 인터뷰가 토요일 점심 즈음으로 잡혔다. 아니나다를까 인터뷰 장소는 식당이었다. 그날 메뉴는 짜장밥. 점심시간이 되자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숙사 식당 같은 분위기. 빈자리는 채워지고 내 옆자리에도 누군가가 앉았다. “남김없이 깨끗하게 먹고, 깨끗하게 설거지한다”는 간단한 규칙을 숙지하고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날따라 조금 짠 짜장을 남기는 것을 걱정하는 대화가 주로 오갔다. 그 걱정 사이로 고미숙 씨는 옆 사람에게 원고 코멘트를 했고, 다른 누군가의 출판기념 잔치에 대한 이야기를 건넸다. 그날 함께 밥 먹고 공부하며 우정을 쌓는 공동체의 일상을 잠시 만났다. 설거지까지 직접 하고 다시 마음 다잡고 일상 전체를 던져 온몸으로 공부하는 ‘호모 쿵푸스’들에 둘러싸여 오늘날 공부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의 공동체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강원도 정선군 함백 광산촌에서 자랐다. 춘천여자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쳤다. 공부 복 많은 것은 공부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신 부모님 덕. 지난 십여 년간 <수유+너머>에서 활동했고, 2011년 이후 인문의역학연구소 <감이당>에서 ‘공부와 밥과 우정’을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감이당>의 모토는 몸, 삶, 글의 일치다. ‘아는 만큼 쓰고, 쓰는 만큼 사는’ 길을 열어가고자 한다. 지금까지 낸 책으로는, 열하일기 삼종세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전2권)와 달인 삼종세트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동의보감 삼종세트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근대성 삼종세트 『계몽의 시대: 근대적 시공간과 민족의 탄생』, 『연애의 시대: 근대적 여성성과 사랑의 탄생』, 『위생의 시대: 병리학과 근대적 신체의 탄생』 그리고 『윤선도평전』,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다산과 연암 라이벌평전 1탄』,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등이 있다. 최근에는 『로드클래식』이라는 책을 냈다. 

인터뷰어 박성태 본지 편집인


박성태 도시 공동체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 간극이 큽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안에서 일정 정도의 교류나 공유가 생기지만, 기대한 것만큼 협력과 연대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미숙 알겠어요, 무슨 얘기인지. 그런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해요. (웃음)

박성태 동네 골목의 공용 공간에서 지식이 교류되고, 공용 주방에선 나눔이 일상화되고, 이런 과정을 거쳐 협력과 연대의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왔죠.

고미숙 공동체를 하기 전에 가지는 전제들은 막상 사람들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 대부분이 깨집니다. 제가 의학과 역학 공부를 하게 된 이유죠.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전제는 대게 사회과학적으로 구성됐잖아요. 예로 서양의 담론 중엔 유토피아주의, 마르크스주의, 공동체주의 등이 있는데, 이것을 가로막는 게 자본주의이고 파시즘이라고 보죠. 그런데 사실 왜 자본주의가 번성하냐면 우리가 자본주의를 욕망하기 때문이고, 왜 끊임없이 권위적인 권력이 등장하냐? 우리가 파시즘을 원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서양의 사회과학적인 틀에서는 ‘그런 것조차도 다 자본의 전략이다’ 이렇게 하면 그 차이를 보기 어려워요. 그래서 조건만 맞는다면 사람들이 다 연대를 하고 굉장히 서로 촉발하고 교류해서 새로운 생산이 이루어질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동양적 사유, 즉 몸과 사유를 일치시켜보는 공부를 다시 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의 존재, 신체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계속 어떤 망상 속에서 삶을 구성하게 되죠. 사회과학도 일종의 망상이거든요. 사람들이 연대하고 협력하는 공동체는 굉장한 고도의 훈련과 수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망상의 사회과학

박성태 『동의보감』 서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요.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과 마주치다 보니 몸이야말로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고스란히 담지하고 있는 ‘보고寶庫’임을 깨닫게 되었다”며 “습관의 거처가 몸이고, 공동체란 이 몸들이 자신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격전지”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한다고요.

고미숙 우리 몸에 밴 습관이 존재의 심연이에요. 우리의 몸은 공동체를 거부하죠. 그런데 이게 본성이 아니고, 본성을 잊어버린 거예요. 몸은, 생명은 교류를 끊임없이 하는 거잖아요. 메르스의 생명력을 보세요. 정말 먼 거리까지 엄청 최선을 다해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특히 자본주의 이후의 인간은 고립되어 사는 게 더 편리하고 더 자족적이고 공유하는 것보다 내 것이 훨씬 나를 즐겁게 해주는 거죠. 이런 것에 몸이 완전히 절었다고 해야 하나? 이걸 버리길 싫어해요. 그러니 생명이 본래 갖고 있는 것과 어긋나니까 병이 들고 아프잖아요. 아프고 괴로우면 대안으로 공동체를 찾는데, 살만해지면 다시 혼자의 삶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동의보감』(허준)의 <신형장부도身形藏府圖>는 해부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체내에서 정기신의 흐름과 오장육부의 운행을 그린 일종의 개념도이다. 고미숙은 그의 저서 『위생의 시대: 병리학과 근대적 신체의 탄생』에서 몸과 사유의 일치를 위해 신체성의 이해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박성태 공동체에 대한 엄청난 담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답이다, 협력과 연대만이 우리의 미래다 등등.

고미숙 살려고 그러는 거죠. 앞으로는 그나마 자본주의가 주는 자족적인 영역도 깨질 거고, 대부분의 직업도 사라지고 산업 자체도 예측할 수 없잖아요. 우리는 그동안 늘 3차 대전만 걱정했는데 그게 아닌 거죠. 미세먼지, 바이러스, 그리고 저출산으로 산업과 시장의 소멸은 생각도 못 했던 거죠. 그러니까 이제 연결되지 않으면 살 수 없구나, 이런 생각은 너무 자연스러운 거예요. 사실은 새로 발견된 담론이 아니죠. 그냥 그동안은 이걸 무시하다가 이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거죠. 그러려면 여기에 있는 전제들이 자본주의가 어떻게 소외시켰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해요. 이것에 대해서는 서양 학문에는 이념의 배열만 있지 수행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박성태 혁명, 변혁, 변화 등 큰 담론만 있다는 말씀이신 거죠?

고미숙 그래요. 당연히 혁명을 해야 하고, 체제를 바꾸어야 하고, 연대를 해서 싸워야 하는데, 그런데 실제의 현장은 몸과 몸이 부딪히잖아요. 그럼 이 몸은 평소에 뭘 하고 있어야 되느냐? 이게 없어요. 막상 싸워서 뭘 쟁취를 하는데, 만들어 놓으면 완전히 서로를 소외시키게 되죠. 다시 소유의 욕망이 작동하는 거예요. 그래서 공동체가 1년이 지나면 지옥이 되죠. 그래서 저는 사회적인 변화, 변혁, 혁명 같은 걸 안 믿어요. 그런 건 소용이 없어요.

박성태 앎의 궁극적 목표가 “우주 혹은 천리를 내 안에 품는 것, 신체의 분포도를 바꿈으로써 우주의 역동적 흐름과 접속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습관을 바꾸고 본성을 발휘하기 위한 수행의 첫걸음은 무엇일까요.

고미숙 내 몸이 자연의 산물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거죠. 그런데 이 말이 ‘자연으로 돌아가라, 좋은 경치 찾아가라’는 뜻은 아니에요. 움직인다, 연결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유동한다, 이게 자연이죠. 그러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거잖아요. 아무리 편하고 좋아도 거기 머무르면 안 돼요. 그리고 소유를 많이 하면 할수록 뚱뚱해져서 움직일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소유를 덜어내야 해요. 이것이 정말로 자기를 이롭게 하는 거예요. 양생이라는 게 이거죠. 그런데 현대인들의 삶은 몸에 해로운 것을 계속하도록 돼 있어요.

박성태 한국은 도시화율이 굉장히 높은 나라 중 하나에요. 그리고 서울과 수도권에 전체 인구의 절반이 삽니다. 앞으로도 도시화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라고들 하고요. 그러나 한편에서는 다른 삶의 형태, 즉 함께 살기와 모여 살기가 시도되고 있어요. 과거의 공동 주거와 앞으로의 공동 주거의 다른 점이 있을까요.

고미숙 우리의 공동 주거, 특히 아파트는 공동체적 흐름을 끊는 곳이죠. 집합을 해놓는 거지, 옆의 집도 보이지 않는 닭장이죠. 닭이 일단 서로를 볼 수 있어야죠.(웃음) 몇 마리가 있어도. 닭장이 있다는 거고 대량생산을 위한 거지 공동체라고 볼 수 없죠. 항상 시끌벅적하니까 자기가 뭔가 섞여 살고 있다는 착각만 있지 사실 자기가 능동적으로 관계 맺는 영역을 자기가 개척을 안 하는 거죠. 그런데 시골에 가면 떨어져 있는데도 연결감을 느낀다고요. 전혀 멀다고 안 느껴요. 연결은 전면적이어야 돼요. 그게 뭐든. 내 감각 전체를 만나는 거죠.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 만나면 전면적이기 되기 어렵죠. 매일의 일상이 공유되어야 감각의 교환이 가능하거든요.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는 감각끼리 부딪침이 있기 위해서예요. 부딪쳐야 내가 내 습관을 바꾸고 욕망의 회로를 바꾸는 거죠.

박성태 감각이나 감흥의 공동체를 말하는 건가요?

고미숙 그러니까 수행이 전제가 안 되면, 공동체도 유지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 강렬하게 이미 자본주의적인 영토성을 갖고 있어요. 여기서 아무리 좋아져 봐야 소용없어요. 그러니까 이곳의 백수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자기 생활이 없는데도. 여기서 공부를 하러 왔고. 그러면 공부를 할 수 있는 조건으로 밥을 먹고, 관계에서 내가 책임져야 하는 영역이 있잖아요? 그럼 현실 세상에서 벗어나게 돼요. 싫대요, 그게. 그냥 가서 쪽방에 살더라도 그렇게 살겠다. 그러니까 복지의 문제가 아닌 거예요. 복지가 왜 끝없이 서로, 주는 사람은 짜증 나고 받는 사람은 적다고 해서 끝나지가 않아요. 영원히 안 끝나요. 왜냐하면 받은 것을 바로 자기 식으로 소비하고 나면 또 모자라는 거예요. 꼭 필요한 데 쓰고, ‘아, 내가 받았으니까 나도 언젠가는 순환을…’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주는 주체라는 것도 애매하지만 실무를 담당하는 경우에도 전혀 내가 연결되어 있다고 못 느끼거든요. 복지 수준이 좋아진다고 사람들이 잘 살 거라는 생각, 저는 안 해요.

박성태 “우리는 이미 주어진 배치를 자명하게 받아들인 다음, 그 주변을 빙빙 맴돌 뿐, 그 배치 자체를 의심하거나 전복하지는 못한다”고 말씀하셨죠. 그 주어진 배치 중 정말 답답하다고 느끼시는 것이 있다면요.

고미숙 필요 없이 큰 건물을 아주 혐오해요. 대학 캠퍼스마다 큰 건물이 들어서고 있어요. 시설도 엄청나요. 매일 수백 명의 학생들이 오가죠. 어떨 것 같아요? 다 좀비들이에요. 그냥 완전히 다 얼빠진 채로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핵심이 뭐에요? 건물이에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천막치고 하는 게 낫지. 인간이 결국 원하는 것은 소유가 아니에요. 지금도 대학교에 맨날 백골단이랑 전경들 와있고 그러면 학생들이 나와서 싸우지 않겠어요? 있는 힘껏 목소리를 내겠죠. 그런데 모든 걸 다 해주고 조건을 만들어주니까 자기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고민해야죠. 왜 사람은 이렇게 자기를 이롭게 하는 능력이 없는가? 이렇게 싸울 때는 목숨을 걸고 싸우고 어마어마한 일을 해놓고, 그걸 막상 누리라고 하면 당황해요. 그리고 사람이 움직여야지 공간이 의미가 있잖아요. 그런데 지방에 나가보면 사람의 동선은 전혀 아랑곳없이 지어놓은 건축이 너무나 많아요. 그러고는 사람이 안 온다고 빚더미에 올라앉는다고 엄살을 부리니, 얼마나 어리석어요? 그런데 개인도 그렇게 살거든요. 도대체 왜 필요 이상 큰 집이 필요할까? 그런데 대부분은 그렇게 살고자 하는 욕구와 그렇게 사는 게 몸에 절어 있어요.

함께 공부하고 밥 먹고 친구가 되는 공동체

박성태 <감이당>의 시작과 현재가 궁금합니다. 몇 분이 시작했고, 지금은 몇 분이나 함께 공부하고 있나요. 점점 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지요.

고미숙 4명이 시작했어요. 지금은 주말에는 거의 100~200명이 함께 밥을 먹죠. 관련된 사람들까지 하면 단과대학 정도는 될 거예요. 그런데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나요? 그래 봤자 한 줌도 안 돼요. 1만 명이면 많나? 사실 뭘 해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그래서 3명이면 충분하다고 봐요. 3명이 길을 열고, 이것만 해도 관계에 질적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네트워크로 연결되면 길이 되는 거예요. 부처의 공동체도 6명이고, 예수도 12명의 제자가 있었어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단서에요.

<감이당> 기획세미나 <불교, 지금 그리고 여기>를 위해 모인 사람들. / 사진 제공: 감이당

박성태 어떤 분들이 모이나요. 대부분 잘 적응하는지요.

고미숙 연령과 학벌을 떠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요. 공부방에 상주하는 청년 백수들은 주변에 모여 살고 모여서 밥을 먹죠. 그래야 생활비가 뚝 떨어지거든요. 한 40~50만 원이면 한 달을 살 수가 있어요. 그러면 공부에 집중하는데, 근데 이 모든 것 중에서 자기 욕망의 습관이 제일 바꾸기 어려워요. 돈 문제도 아니고 공부의 진척도, 학벌도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어떤 장벽도 없는데, 유일한 장벽은 자기 자신의 습관이에요. 근데 그게 너무 유혹적이고 끊기도 힘들죠.

박성태 그러니까요. (웃음)

고미숙 그동안 자신의 습관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되면 사유가 좁아지니까 자기 글쓰기가 되겠어요? 우리는 글을 써서 먹고 사는 곳인데요? 글을 생산해야 우리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건데, 글이 생산이 안 되겠죠. 그 지점에서 다 부딪히는 거예요. 노후가 불안하다고 하지만, 나중에 내가 그런 능력이 생겨야 자유롭게 가난의 자유도 누릴 수 있고 어디 가도 떳떳할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걸 못 넘고 그냥 주류 안에 꾸깃꾸깃 들어가려고 해요. 상품에 너무 쉽게 노출되어 있어서 그렇겠죠.

박성태 사실은 도시가 커지면 커질수록 쇼핑몰과 테마파크화는 더 많이 진전될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도 마찬가지예요. 다 몰shopping mall로 바뀌고 있잖아요. 쇼핑몰은 한 번 들어가면 상품만 보이는 공간이잖아요.

고미숙 그것이 우리를 상품귀신으로 만드는 거잖아요. 만약에 모든 사람을 얼빠지게 하는 독재자가 있다면 용서를 하겠어요? 옛날에는 이데올로기를 세뇌시킨다고 이념에 오염됐다고 막 분개했잖아요. 그런데 그런 상품을 만드는 데는 동의를 한다는 거죠. 일자리 많아지고 다 서로서로 얼빠지는… 사실 거기 필요한 물건이 뭐가 있겠어요? 안 필요한 걸 계속 사게 만드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걸 부러워하죠. 게다가 지방에 가면 서울하고 다 똑같아요. 다 모조품이에요. 대한민국 자체가 그냥 서울이에요, 서울. 그건 삶에 굉장히 해롭죠. 사람들이 삶의 질을 포기하지 않는 거죠. 도시인들은 그걸 못 견디는 거예요. 이게 신체가 중독돼서 그래요. 우리가 상품과 닮아가는 거예요. 그러니 이런 식으로 하면 무슨 결정권이 있어요? 더 강렬하게 날 어떻게 해줘, 라고 밖에 더 하겠어요?

박성태 공부가 소비로부터 자기를 구원하게 한다는 말씀인가요?

고미숙 소비가 주는 쾌락, 그 리듬에서 빠져나오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금욕이면 도루묵일 테고, 금욕이 아니려면 자기가 자기 몸을 돌보는 것이 되죠. 그러면 의식주의 소비 행태가 바뀌어요. 그러니까 그걸 바꾸는 게 공부이고 수행이에요. 그러면 몸이 회복되고, 얼굴이 밝아지고, 몸이 날렵해지는 거죠. 그리고 자립을 해야죠. 빚을 먼저 갚고, 자기가 조금 벌더라도 자립을 한다. 부모가 잘살든 못 살든 부모한테 손 벌리지 않는 것, 이런 식으로 감각을 바꾸어야 해요. 그렇게 되면 여기서 자기 인생을 도모하죠. 자유로운 글도 쓰고요. 그러면 모든 사람이 글을 쓴다는 행위, 이것이 길이라는 걸 알아요. 인간은 뭔가를 알아야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수행인 거죠. 그렇게 받아들이면 공부가 정말 자기 삶과 섞여요. 거기까지가 이 공동체가 줄 수 있는 선물이고, 그다음에는 뭘 할 것인지는 본인이 알아서 하면 되는 거죠. 정규직을 잘 다니다가 중년에 온 분들도 문제는 백수들이랑 똑같아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해요. 그러니까 공동체가 아름답지가 않죠. (웃음) 맨날 서로 마구 대들고, 엄청납니다.

박성태 공동체가 갖는 선입견 가운데 하나가 서로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거잖아요.

고미숙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되죠. 그런 게 의미가 없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게 됐어요. 우리가 서로를 대등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서로 맞장을 뜨는 거예요. 나이나 학벌에서 다 떠나야죠. 우리가 학벌이나 사회적 권위가 아닌 것에 있어서는 그냥 맞장을 뜨면 되는 거예요. 자기가 책임을 지면 되는 거고. 배워야 할 것은 배우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이렇게 하는 게 중요하지. 그게 서로 자유로워지는 거지. 서로 아껴주고 보듬어주고 이건 아무짝에 쓸모가 없고, 어떤 사람도 그걸 좋아하지 않아요. 호의를 베풀어서 여기서 공부를 한다. 이런 사람은 전혀 없어요. 그래서 글을 쓰고 자기가 자유롭게 사는 것을 인생에 비전으로 삼느냐? 그것이 척도예요. 그런 사람은 어떤 난코스도 다 거쳐나가요.

박성태 공동체 안에 있지만 자기 존재에 대한 비전을 가져야 한다…

고미숙 그래야 해요. 그렇지 않고 남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것에 주눅이 들죠. 늘 요리도 잘하고 뭐도 잘하고 그런 사람은 금방 공동체의 적이 돼요. 왜냐하면 자기 비전이 아닌 채로 살면 계속 인정을 받으려고 하니까. 그러면 감정의 불통이 일어나요.

박성태 그러니까 좋은 공동체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서도 어떤 역동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죠.

고미숙 네. 역동성이 있어야 해요. 자기 삶을 자기가 완성한다기보다는 구현하는 것이 비전을 수행하는 거예요. 완전히 자기 삶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끼리 만나야 지성의 공동체가 되죠. 그러면 생산이 일어나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우리는 어떤 학벌이나 스펙 전혀 상관없이 지식과 글을 생산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요.

박성태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싫은 타자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고미숙 그건 분리될 수 있어요. 비전이 무엇이냐가 핵심이죠. 이 사람이 단지 싫다가 아니라 뭐가 싫은가? 그래서 맞장을 뜨고요. 그런데 누군가가 리듬을 만들겠다고 하면 그 리듬을 분리해서, ‘아 저 리듬은 안 되겠어’ 라며 계속 분화하는 거예요. 바이러스 분화하듯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구성해서 계속 가는 게 아니에요. 계속 인연들이 어긋나야 해요. 그걸 서로 보고, 서로 터놓고 말하고 하는 게 수행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보통 공동체에서는 이런 걸 아주 극도로 싫어하죠. 지금 우리는 자기 사생활이 아주 중요하잖아요. 그리고 그걸 침해당하면 대단히 화를 내고요. 그런데 사생활 따위는 사실 없어요. 다 조작이 된 거에요. 사생활이 어디 있어요? 뻔한데. 그런데 그 영역까지가 삶의 변화라고 말하는 사회과학이 없죠. 다 제도와 시스템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런 식의 정치담론에 아주 완전히 질려서 어떤 희망도 갖지 않아요. 제도 변화만으로 사람을 절대 바꿀 수 없어요.

박성태 공동체 생활을 <감이당>도 그렇고 그 전에 <수유+너머>도 하셨잖아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밥을 함께 먹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미숙 <수유+너머> 때는 밥을 하고 청소하는 게 왜 중요한가를 설득하는 데 진짜 오래 걸렸어요. 정말로 핵심이 그거였어요. 청소하고 약속을 지키고 밥을 하자, 그것을 경제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잘난 사람들이 대부분 몸을 잘 안 움직이고 그런 것은 별로 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이 있어요. 그걸 깨버려야 해요.

박성태 가난한 청춘들이 모여 살면 연애는 어떻게 하나요?

고미숙 연애도 해요. 능력껏 하는 거죠. 20~30대는 연애가 최대 관심이잖아요. 공동체 안에는 삼각 사각관계 있고, 짝사랑도 많고, 이 사람 저 사람 하는 경우도 있고, 오만 가지가 다 있어요. 다 드러나요. 그런 것들은 숨길 수도 없고, 숨기지 않는 것, 그런 게 또 하나의 윤리라면 윤리죠.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지침 같은 것도 전혀 없어요.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하는 것이고, 전체 리듬을 깨면 그게 큰 문제가 된다는 정도죠. 동성애를 하든 양성애를 하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든 그건 상관이 없는데, 공부의 리듬을 깨면 안 되죠. 왜냐하면 그 사건 자체를 우리가 선악이나 시비로 나눌 수는 없잖아요. 인간에게 일어나는 아픔을 선악 시비로 나눌 수 없듯이요. 그런데 그게 전체의 리듬과 같이 가야죠. 그래야 내가 아프다 할 때 공감을 얻고 도움을 받을 수 있지, 그걸 숨기고 어긋났는데 변명을 한다, 이런 것은 수행이 전혀 아니에요.

박성태 연애마저도 공부하는 수행 속에서 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고미숙 네. 일단은 그렇죠. 그래야 글이 생산되니까. 우리는 수도원이나 사찰처럼 전체 프로그램이 짜여있지는 않아요. 자율성에 맡기고 몇 개의 리듬이 주어지는데, 나머지는 자기가 자율적으로 운용하는 거죠. 그런데 보통 수행공동체는 글을 쓴다든가 세속의 공부를 한다거나 이런 건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세속적 공부로 그런 수행의 영역을 탐구하는 거죠.

박성태 그렇게 집중해서 공부하려면 직장과 병행이 힘들지 않나요?

고미숙 그게 필수 조건은 아닌데, 여기 기본 멤버들은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20~30대는 자립을 해야 하니까 아르바이트를 하죠. 그리고 40~50대 정규직이 있어요. CEO도 있고 한데, 이렇게 오다가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요. 교사들도 연금이 적당히 나오면 바로 그만두고. 그런 일들이 우리가 보기에는 대단한 정규직인데 전혀 자기의 삶에는 어떤 삶의 의욕조차도 별로 일으키는 게 아닌 거죠.

박성태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가장 큰 쾌감 같은 것이 있는 거네요.

고미숙 엄청난 제일 큰 지락至樂, 지극한 즐거움이라고요. 보통 화폐로 인해 만들어지는 쾌락은 굉장히 짧고, 자극을 계속 높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공부를 통해서 얻는 게 왜 지극한 즐거움이냐 하면, 다른 것을 더 보충할 필요가 없어요. 그것 자체로 충분하고 오히려 쾌락으로 가는 것을 비우게 하니까 자연스럽게 살아지는 거죠. 그 맛을 알면 절대로 딴 것과 안 바꿔요.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보통 못 알아듣는데, 공부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금방 알아들어요. 그래서 그만두는 거예요. 이것이 내 인생을 절대로 보장해주지 않는구나, 하는 것도 일종의 종교적 각성 같은 건데, 그런 것을 많이 발견하고 겪고 있어요.

‘낭송Q시리즈’는 동양 고전의 낭송을 통해 양생과 수행을 함께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사진 제공: 감이당

공부하는 공동체 감이당 이끄는 고전평론가

분량10,721자 / 20분 / 도판 3장

발행일2015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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