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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게 살이

김지은

이번 《건축신문》의 <이슈>는 ‘무장소성의 시대’를 주제로, 자본주의라는 모순 위에 지어진 현대도시의 배척성에 대한 이야기를 모았다. 필자로 김현경, 심보선, 김장언, 장이지, 함성호의 글을 소개하고, 이와 함께 아티스트 김지은의 작업을 실었다. 이미 서울이라는 복잡한 도시가 수많은 법규에 의해 관리되고 감시되는 도시풍경의 제도적 측면에 주목했던 그는, 2년 동안 미국 내 6개의 레지던시를 다니며 스스로가 집을 짊어지고 다니는 ‘소라게’로서 체류했다. 그러면서 각 지역에서 느꼈던 지역적 특성과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동시에, 타자를 이해하는 과정을 작품으로 발표하고 책으로 엮기도 했다. 이번 <이슈>에는 그의 작업 다섯 편을 소개한다. 

김지은, <엽서 프로젝트Postcard Project for Local Community (Downtown Skowhegan)>, 엽서, 10.8x14cm, 2009, 메인
<엽서 프로젝트>의 판매 모습
메인에 위치한 스코히건Skowhegan에서 레지던시를 참여할 때 다 쓰러져가는 흉물스러운 건물 한 채를 만났다. 1881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과거 다운타운 상권의 중심이었고 왈라스 라디오 상점Wallace’s Radio Shop이 있던 1945년엔 지나던 사람들이 건물 밖에 달린 스피커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흉물스러움과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이 건물은 보존과 철거라는 이견이 충돌하는 가운데 하루하루 더 낡아가고 있었다. 나는 잠시 스치는 이방인이지만 이 건물을 통해 이 지역의 역사와 경제에 대해 알아가게 되었고, 이 건물을 위해, 별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마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관광지에서 파는 전형적인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엽서보다 마을의 현재 이슈를 담은 엽서가 이 커뮤니티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콜라주 작업으로 엽서를 만들고 스코히건 역사박물관, 동네 유일한 책방인 미스터 페이퍼백Mr. Paperback, 옆 동네 박물관인 베이츠 박물관L.C. Bates Museum 등 세 곳을 방문해 판매를 의뢰했다.
김지은, <커버드브릿지Covered Bridge in Vermont>, 무늬목 시트지, 마스킹 테이프, 유포지에 유채, 종이에 아크릴릭, 366x305cm, 2009, 버몬트.
버몬트 스튜디오 센터 근처에 있는 커버드브릿지는 멀리서 보면 지붕 때문에 허공에 매달린, 물 위를 가로지르는 집처럼 보인다. 이 다리는 눈이 많이 오는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19세기에 주로 지어졌고 사적史跡 보존운동가들에 의해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역사적인 건축물 중 하나라고 한다. 내 눈앞에 서있는 이 다리는 그냥 이곳에 남아 있게 된 것이 아니다. 오래된 건축물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철제나 콘크리트로 대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구조물이다. 하지만 지금 이 다리는 그런 노력들로 살아남아 나에게 자신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박물관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다리로서의 기능을 하면서 살아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에 익숙한 나에게 버몬트 시골 구석에서 발견한 전통을 지키고 있는 구조물과의 만남은 지금도 얼마든지 기능할 수 있는 오래된 것에 대한 잊혀진 기억을 불러 일으켰다. 오래된 것을 사용하는 것은 더 오랜 역사와 현재의 삶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커버드브릿지는 이렇게 세월보다 먼저 행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오래된 것을 사용하는 것의 가치를 체험하게 해주었다.
김지은, <산미구엘 교회San Miguel Church Choir Loft>, 무늬목 시트지, 라인테이프, 488x732cm, 2010, 뉴멕시코
뉴멕시코의 산타페 레지던시에 머무는 동안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어떻게 ‘산타페 스타일’이라는 것이 만들어질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도비adobe 스타일 (벽돌을 쌓아올려 회반죽을 바른) 건축 양식과 인테리어 디자인, 다양한 공예품뿐만 아니라 이제는 삶의 한 양식이라고 불리는 산타페 스타일이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요 철도망이 산타페가 아닌 이웃 도시에만 깔리게 되자 관광객 유치를 위해 산타페 주민들은 도시의 옛 모습 보존을 통해 다른 도시와의 차별성을 꾀했다.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이러한 제안을 한 사람들은 1900년대 초중반 이곳으로 이주한 동부의 예술가들이었다. 이는 커뮤니티가 어떤 꿈을 같이 꾸느냐에 따라 도시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산미구엘 교회는 산타페 스타일의 방향을 결정짓는 데에 가장 주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건축물 중 하나로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푸에블로족의 어도비 건축과 스페인 교회 건축 문화가 혼합된 이곳은 이름 없는 장인들의 목공 솜씨로 소박하고 거칠게 다듬어진 질박한 성가대의 발코니가 인상적인 장소이다.
김지은, <옥수수 저장소The Stadium of Corn>, 유리창에 무늬목 시트지, 마스킹 테이프, 223x793cm, 2010, 네브라스카
가축의 사료로 쓰이는 옥수수 농사가 주산업인 이 지역에서 옥수수 저장소는 필수적인 시설이다. 드브루스사社 소유의 이 저장소가 주는 첫인상은 거대한 스타디움 같았는데, 옥수수를 담는 거대한 그릇 같은 구조물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버팀목들이 열 지어 있었다. 이 지지대들은 공사장의 버팀목과 달리, 그 안에 있는 옥수수의 무게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것이어서, 지금까지 본 어떤 구조물보다도 힘이 느껴졌다. 월마트 때문에 상권을 잃은 다운타운에는 쇼윈도가 텅빈 상점들이 많았는데 레지던시 중이던 킴멜 하딩 넬슨 센터의 도움으로 법원 건너편에 있는 건물에 설치를 할 수 있었고, 작업은 시의 요청으로 그 자리에 남겨두었다.
김지은, <와이오밍 스노우 펜스Wyoming Snow Fences>, 무늬목 시트지, 330x737cm, 2010, 와이오밍
와이오밍에 있는 젠텔 레지던시에 가는 동안 고속도로에서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Christo & Jeanne-Claude의 <러닝 펜스Running Fence>를 연상하기에 충분한 광활할 들판을 달리는 펜스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스노우 펜스’라 불리는 이것은 들판에 별 이유 없이 세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형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바람의 방향을 조절해 도로 위에 눈이 많이 쌓이지 않게 한다고 한다. 나무라는 재질 때문에 투박한 느낌을 주지만 아주 과학적인 원리에 의해 크기와 각도가 정해지고 설치될 위치가 정해지는 것이다. 혹독한 겨울 날씨를 가진 와이오밍에 맞게 설계된 것은 ‘와이오밍 스노우 펜스’라는 명칭이 따로 있다고 한다. 펜스 뒤로 쌓인 눈은 천천히 녹으면서 주변 동물들에게 식수를 제공한다고도 하니 일석이조의 구조물이다. 겨울이 유난히 길고 눈도 많이 오고 바람도 많이 부는 와이오밍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던 이곳 사람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구조물이다.

김지은

서울대학교 서양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외곽에 있는 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페인팅을 전공했다. 두산갤러리 뉴욕, 대안공간 루프, 브레인 팩토리, 인사미술공간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2013년 레지던시 기행문 『소라게 살이Hermit Crab-ism』 (미디어버스)를 출간했다.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거주하며 작업 중이다. 

소라게 살이

분량576자 / 3분 / 도판 6장

발행일2015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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