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환대의 불가능성과 윤리
김장언
분량4,390자 / 10분
발행일2015년 7월 2일
유형오피니언
사라진 노숙자와, 노숙자를 찾는 작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2011년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사진과 더불어 실린 짧은 기사를 보았다. 서울역 구름다리가 있는 곳에 관리인들이 화분을 놓았고 노숙자가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사진은 밥그릇 모양의 화분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서울역 주변의 어느 빈 공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강력한 서울역 노숙자 퇴거 조치 이후에 시행된 추가 조치에 대한 기사였지만, 나는 이제 꽃이 사람을 추방시킬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집이 없는 자들에게 ‘꽃’으로 그들의 장소를 지워버렸다.
작가 배영환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에 <노숙자 수첩: 거리에서>를 제작, 배포했다. 검붉은 색에 가까운 인조 가죽 커버로 장식된 이 작은 수첩에는 노숙자 생활에 필요한 유용한 정보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몇몇 유행가 악보와 가사가 같이 수록되었다. 배영환의 프로젝트는 경제적 위기를 통해서 타자가 되어버린 내부의 이방인에게 예술이 내건 소박한 손이었다. 그 수첩에는 자신들의 현재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 정보들과 더불어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정서적 장치들이 배열되어 있다. 그 수첩이 구체적인 효과를 가시화시켰는지 알 수 없지만, 소수자에 대한 절대적 환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환대는 상황적이라기 보다는 절대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문제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근대적 의미의 통치 대상으로서 ‘사회적인 것’과 환대는 나와 너의 경계 사이에서 쟁점을 돌출하지만, 이제, 사회적인 것의 종언을 매일 경험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환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모두 이방인임을 혹은 방문자임을 확인케 하는 사건으로 변화된다.
나는 광화문 광장에 서서 다양한 소리를 듣는다. 누구는 이곳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누구는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한다. 작가 윤주경은 <가족을 찾습니다>(2008~2009)라는 작업을 통해 공간의 정치학을 소리로 보여준 적이 있다. 작가는 2008년 6월 북파 공작원 위령제에서 사망 처리된 공작원의 가족을 찾는 목소리를 중심으로 당시 광장의 소리를 뒤섞었다. 우리의 귀에 들리는 공명되는 그 소리들은 어떤 유령의 출현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소리는 자신의 현재 자리를 지키기 위해 광장으로 나온 우리의 목소리와 과거에 지워진 자신의 자리를 조건부로 확약받은 기록되지 않은 또 다른 우리의 목소리가 충돌되어 무엇으로도 의미화될 수 없는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선택된 자와 선택되지 않은 자 혹은 허가된 자와 허가되지 않은 자의 목소리를 충돌시킴으로써 동시대적 삶에서 ‘사회적인 것’의 불가능성을 출현시킨다. 왜냐하면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목소리는 모두다 하나의 공동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공동체는 임의적으로 규정되고, 우리는 운명적으로 서로를 적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환대의 불편함
절대적 환대는 늘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것은 자크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방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가 방문할지 모르며, 그 방문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지 모른다. 늦은 밤 초인종이 울리면 느끼는 공포는 바로 그 벨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방문의 환대가 아니라 초대의 환대를 통해서 자신을 보호하게 된다. 주인은 이방인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영토와 규칙을 유지한다. 그래서 초대의 환대에서 타자는 결코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는 공간을 박탈당하고 언어라는 의미를 생성시킬 수 없다.
건축가 위진복은 2012년 <영등포 컨테이너>를 제작 설치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매우 반가웠다. 노숙자의 임시 숙소로 관에서 제안되고 건축가에 의해 설계 시공된 이 프로젝트는 통치 시스템이 경계에 놓여진 내부의 타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집단적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도가 배제된 자들, 지워진 자들, 오염된 자들이 야기한 ‘환대의 문제’에 다가서기 위한 작은 한 발자국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소위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으로 표상되는 ‘착한 디자인’의 하나의 예로 보고 싶지 않았다. 착한 디자인은 결코 질문을 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를 성찰하게 하기 보다 오히려 우리에게 다른 유형의 위안을 제공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영등포 컨테이너>가 설치된 그 현장에 도착했을 때, 매우 사소한 부분에서 의아해졌다. 임시 숙소 주변에 둘러쳐진 녹색 펜스를 보면서 이 구획의 표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절대적 환대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것이 타자의 윤리에서 출발하는 까닭에 그것은 초월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구도자와 같은 절대적 타자에 대한 언어는 종교적이기 까지 하지만, 그것은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것 처럼 불가능한 경험으로 유지되고 현재를 성찰하는 윤리적 태도를 발명하게 한다. 녹색 펜스를 설치한 제도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방인에 다가서는 그 발자국은 내부가 훤히 보이는 펜스에 의해서 가로막히고, 집 없는 자들은 허가된 그 영역 내부에 고립된다. 그 상태는 (선택적) 환대의 어떤 상황을 드러내고, 나는 다시 한번 그 불가능한 절대적 환대의 가능성에 대해서 상상하게 된다.
모두가 손님
나는 오래 전 한 프로젝트를 위해서 가리봉동의 쪽방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방의 주인은 없지만 문이 활짝 열린 방 앞에서 주인을 한참 기다렸다. 인터뷰나 해볼까 하는 심사로 주인을 기다리는 나에게 지나가는 아주머니는 그 방의 주인은 늦은 밤이 되어야 돌아오고, 여기는 훔쳐갈 것도 없어 방을 잠그지도 않는 사람이 많다고 이야기하며 지나갔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방의 거주자는 공간에 대한 지배와 소유에 스스로 관여치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상당히 놀랐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나는 후암동 ‘빈집’에 대한 현장연구서를 읽으며 절대적 환대를 향하는 실천의 과정을 접하게 되었다. 일종의 게스트 하우스인 ‘빈집’은 출발부터 자신이 받은 환대를 나누기 위해서 모든 손님에게 열린, 말 그대로 비어있는 집을 열게 되었다. 그곳을 유지시키는 법칙은 있지만 그것은 주인의 언어를 닮아 있지는 않았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주인은 내부에 타자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환대의 권리를 친교의 가능성으로 충전된 현상학적 공간에 들어갈 권리로 이해한다. 그에게 있어 환대는 어떤 사람이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로 귀속된다. ‘빈집’에서는 모두 다 손님이고 손님으로서 서로 친교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한 공간으로써 ‘빈집’을 이용한다. 그들은 결코 ‘손님으로서의 자격’을 모두 다 손님이기 때문에 박탈하지 않는다. 언뜻 이상적인 것처럼 들리는 이 과정은 수많은 갈등과 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삶의 형식으로 환대를 실천하기 위해서 친교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명하고 있다.
불가능한 환대를 가능으로 쓸어내는 예술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서 바베트는 전쟁의 화마를 피해 덴마크의 외딴 바닷가 마을로 들어간다. 청교도적 삶을 살아가는 두 자매는 그녀의 방문을 받아들인다. 이질적인 삶의 형식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복권 당첨금 전부를 가지고 준비된 바베트의 만찬을 마쳤을 때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각자의 삶에 대한 불화를 받아들이며, 달빛 아래서 같이 춤춘다. <바베트의 만찬>은 환대의 낭만적 결과를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에게 보상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적 환대의 순간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은 충만해졌다.
나에게 현대미술은 이러한 환대의 순간을 경험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환대 혹은 그 무엇이 표상되고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나’이자 ‘타인’인 우리의 현재를 본질적으로 질문케 하는 어떤 치명적 순간을 발생 시키는 그 공간에 흥분했던 것 같다. 그것은 유럽 대륙을 중심으로 부상된 90년대 미술의 움직임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겠지만, 비단 그들의 움직임들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언제나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정치체제로서 ‘사회적인 것’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사회는 그 위험한 이방인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해 주기도 했다.
환대의 공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디자인될 수도, 구현될 수도 없다. 만약 그것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영화 <메트로폴리스>의 지상세계이거나 혹은 애니메이션 <총몽>의 자렘과 같은 허약한 구조체에 의해서 유지되는 폐쇄적 장치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유연하게 우리의 현재에 스며들고, 우리를 관리하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예술가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장치에 봉사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더 이상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외부의 질문을 거부하지 않는다.
의미의 발생이 예술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한다면 의미는 경계에서 출현하고 그 경계는 다양한 치명적 질문들 속에서 만들어진다. 절대적 환대, 그것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윤리를 발명하게 한다.
김장언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절대적 환대의 불가능성과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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