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적 대면 없는 기계와의 전쟁
심보선
분량5,944자 / 10분
발행일2015년 7월 2일
유형오피니언
고통을 받는 자와 고통을 주는 자
최근 건물주의 일방적인 통고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예술/ 카페공간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포럼이 있었다. 발표자와 토론자들은 하나같이 ‘빚’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공간을 운영할 때 빚은 시종일관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테이크아웃드로잉 뿐만 아니라 다수의 상가세입자들은 입주 시 내부공사, 권리금 등에 초기투자를 할 수밖에 없고 이 비용은 많은 부분 빚으로 충당되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건물주의 일방적인 퇴출통보는 초기투자비용을 회수하고 빚을 갚을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최악의 상황을 세입자에게 강요하게 된다.
빚진 자로 살아가기, 이는 상가세입자에게만 해당되는 존재양식은 아니다. 현대사회의 거의 모든 이들이 채무자로 살아가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4년 4분기 기준으로 가계신용 잔액은 1,089조 원이었다. 특히 4분기 들어 가계부채는 29조8천억 원이 늘었는데, 이는 분기 기준으로 사상 최대치의 증가액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통계는 국민의 절대다수가 빚진 자로 살아가는 사태를 잘 보여준다. 빚진 자가 있다면 당연히 수금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채무자가 있다면 당연히 채권자가 있을 것이다. 나는 <빚과 수금>(《한겨레 21》, 1062호)이라는 제목을 붙인 어느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제자와 추종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했다. 빛이란 타인에게 본보기가 되는 존재를 뜻할 테고, 소금이란 타인에게 쓸모 있는 존재를 뜻할 터이다.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을 반드시 기독교의 도덕률로만 볼 필요는 없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모범을 보이고 도움을 주는 이를 칭송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극히 보편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규범이 과연 ‘빛과 소금’일까? 나는 ‘빛과 소금’이 아니라 ‘빚과 수금’이라는 규칙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방식을 지배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말하자면 이제 이 세상의 사람들은 빚진 자와 수금하는 자로, 고통을 받는 자와 고통을 주는 자로 나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홉스가 말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라는 상태가 채무자-채권자 관계라는 형식을 빌려 현대사회에 도래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더 나쁘다. 왜냐하면 현대사회의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사람 대 사람 사이의 관계를 훌쩍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만약 현대사회의 채권자-채무자 관계가 모종의 인격적 관계, 그러니까 얼굴을 마주 보면서 고통을 주고받는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면 상황은 그리 최악이 아닐 것이다.
얼굴을 가진 자
김현경은 주장한다. “우리는 얼굴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사람이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얼굴이 있는 듯이 행동하고, 우리의 얼굴에 대해 존중을 요구함으로써 얼굴이 실제로 거기 있게 해야 한다.” (『사람, 장소, 환대』, p. 87) 얼굴과 얼굴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에는 이처럼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의례규칙이 작용한다. 상대방이 내 돈을 갚아야 하는 자라고 하더라도 그/그녀는 채무자라는 존재양식과 무관한 사람으로, 얼굴을 가진 자로 내 앞에 서 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는 두 채권자가 나온다. 바로 착한 채권자(안토니오)와 나쁜 채권자(샤일록)이다. 그렇다면 착한 채권자가 타인을 향한 선의 때문에 나쁜 채권자의 채무자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안토니오는 자신의 신체를 저당 잡히면서까지 샤일록에게서 돈을 꿔서 친구에게 빌려준다.
인격적 관계에서 어떤 이들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타인에게 호의를 베푼다. 인격적 관계에서는 호의가 발휘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사회는 어떤가? 현대사회에서도 채무자를 사람으로 존중하는 착한 채권자들이 존재하는가? 나는 위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들은] 이렇게 대꾸할 수 있다. 뭔 소리야, 나는 수금을 하지 않는데? 내 빚 갚느라 혀가 빠지게 살고 있는데? 하지만 이 불평등한 세상에서 누군가 더 돈을 받는다는 사실은 누군가 덜 돈을 받는다는 사실과 불가분하게 연결돼 있다. 한 직장에서, 아니 한 사회에서 남성의 임금은 여성의 저임금으로, 정규직의 임금은 비정규직의 저임금으로 보장된다. 실제 이런 일도 있었다. 직장에서 누군가 정리해고됐다. 남은 동료들이 괴로워하자 직장 상사가 말했다. “해고된 이의 임금으로 당신들의 임금을 올려주겠노라!” 여기서 나는 ‘간접적 수금’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자신을 빚진 자라 여기며 괴로워하는 와중에 우리의 통장에는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로부터 수금한 돈이 입금되고 있다.”
모두가 간접적 수금자
‘간접적 수금’이라는 용어는 자신도 모르게 채권자의 지위를 갖게 되는 현대자본주의의 불평등 기제를 지시한다. 나는 여기서 인격적인 채무자-채권자 관계를 매개하고 배치하는 비인격적 시스템을, 소득을 분배하고, 빚을 분배하고, 기회를 분배하는 비인격적 시스템을 언급하고 싶다. 이 시스템은 상대방과 나의 얼굴을 지워버린다. 이 시스템은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나에게 속삭인다. “당신 앞의 존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그녀는 하나의 환경이자 요인입니다. 존중이 아니라 SWOT 분석과 비용-혜택 분석을 행하세요.”
대출업체, 기업, 정부라는 이름의 기관들, 경제 행위와 복지 정책을 금융 행위로 전환시킨 이 시스템은 국민 전체를 실질적인 혹은 잠재적인 채무자 집단으로 만든다. 소비는 실제로 기업에게 돈을 꿔서 갚아가는 일이 돼버렸다. 늘어가는 공공부채와 복지예산에 대한 논란 속에서 복지수당을 받는 일은 더 이상 권리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아니다. 대출업체들은 광고에서 “무능해도 돈 꿔줄게요!”라고 선심 쓰듯 외쳐댄다.
무엇보다 이 시스템은 갚을 능력이 있는 채무자(채권자)와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를 구별해서 관리한다. 이 시스템은 갚을 능력이 있는 채무자에게는 자산관리 서비스와 투자기회를 제공하면서 당신도 채권자가 될 수 있다고 꼬드긴다. 그러나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에 대해서 시스템은 냉혹하기 짝이 없다. 이 무능력한 채무자들은 빚을 갚아야 한다는 강박과 빚을 갚으려는 노동에 평생을 시달리게 된다. 심지어 빚을 지지 않은 자들 또한 자신이 언제 빚더미에 오르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로 빚진 자들과 동일한 예속 상태에 처하게 된다.
마우리치오 라자라토는 모든 인간이 빚을 진 자, 즉 ‘부채인간’으로 전락해버린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행동과 창조적 행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라자라토는 한나 아렌트를 따라 행동을 “‘알 수 없는 것’ 안에서의 도약”이라고 정의한다. 이 도약에서 ‘신뢰’는 핵심적인 조건으로 작용한다. “불확실한 조건 아래에서 행동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신뢰, 세계에 대한 신뢰, 타인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부채인간』, pp. 104~105) 행동하는 주체는 자신의 행동이 스스로의 존엄에 합당하며, 세계가 자신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 또한 타인이 자신을 존중할 것이라 믿어야만 감히 행동할 수 있다.
금융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이미지
그러나 금융은 자아와 자아의 관계, 자아와 세계의 관계, 자아와 타인의 관계를 채무자-채권자 관계로 축소시킨다. 이 부채 경제 속에서 현재는 빚을 갚아야 한다는 강박과 빚을 갚으려는 노동으로, 빚이 탕감된 머나먼 미래를 위한 희생물로 바쳐진다. 신뢰는 신용으로 왜소해졌고, 한 사람의 주체적 역능은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으로 측정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불이익을 무릅쓰고 타인과 공통의 문제를 향해 행동을 감행하는 일은 지극히 예외적인 사건이 되었다. 라자라토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부채의 논리는 우리의 행동 가능성을 질식시킨다!” (『부채인간』, p. 108)
금융경제라는 시스템이 정치적이고 창조적인 행동, 아렌트가 공적 행동이라고 지칭한 종류의 행동을 질식시킨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행동에 대한 이미지가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금융은 특정 종류의 행동 이미지를 강화해왔다.
어빙 고프만은 “사후영향이 있고 문젯거리이며 그 자체가 목적인 활동”을 운명적 행동이라고 정의한다. (『상호작용 의례』, p. 197) 사후영향이 있다는 것은 현재 행동의 결과가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고 문젯거리가 있다는 것은 행동이, 객관적으로 또는 주관적으로, 미결정 상태를 결정 상태로 이행시킨다는 뜻이다. 사실 고프만이 내린 운명적 행동에 대한 정의는 아렌트가 내린 공적 행동에 대한 정의와 유사점을 갖는다. 특히 행동 주체가 불확실성이 높은 조건 하에서 자신의 행동을 하나의 모험처럼 감행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공공성을 강조하는 아렌트와 반대로, 고프만은 사적 보상의 측면에서 행동의 특징을 탐색한다. 고프만에 따르면 행동의 정의가 가장 잘 적용되는 경우는 바로 ‘도박’이다. 도박이란 운을 걸면서, 그에 따른 불이익이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인식하면서, 그 행동 자체가 영웅적이고 매력적이기에 감행하는 운명적 행동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금융의 투기적 성격은 한때 운명적 행동의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고프만에 따르면 도박과 같은 운명적 행동을 감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핵심적 캐릭터들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용기, 불굴의 투지, 성실성, 정정당당함, 침착성 등이다. 금융경제의 역사에서 이러한 캐릭터를 잘 구현한 인물 -실제 그의 본성이나 실체와 무관하게- 은 소위 투자의 귀재라 불리는 워렌 버핏일 것이다.
한때 개미 주식투자자들은 자신의 자아 이미지를 버핏의 캐릭터에 조율한 채 스스로를 예술가라 상상하며 투자행위에 골몰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도래와 함께 금융 경제는 자기도취적인 주체의 게임과 무관한 기능적 조직으로, 기계적 시스템으로 진화했다. 모험과 놀이의 논리를 내장했던 운명적 행동으로서의 투자 행위는 이미지도, 캐릭터도, 윤리도, 미학도 없는 노골적인 약탈행위로 변모했다.
워렌 버핏은 힘주어 말한다. “계급전쟁이 진행 중이다. 이 전쟁을 만드는 자는 나의 계급, 부자계급이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자는 바로 우리이다.”
기계와 싸우는 재난공동체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이 자신에게 저당 잡힌 안토니오의 살을 칼로 자르려 하자, 판사는 샤일록이 증서에 적힌 대로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 외에는 피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고 명하고 이 명을 어길 시에는 샤일록의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나에게 이 장면은 착한 채무자(채권자)와 나쁜 채권자 사이의 결투를, 그리고 이 결투에 사람을 고깃덩어리로 취급할 수 없다는 윤리가 개입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위와 같은 인격적 대면과 윤리적 개입을 봉쇄한다. 현대 금융자본주의와 부채 경제는 홉스가 말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보다는 차라리 제임스 카메론이 <터미네이터>에서 묘사했던 “만인에 대한 기계의 전쟁” 상태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이 전쟁에서 악인으로 등장하는 인격적 존재들은 실은 금융기계의 에이전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금융기계와 그 에이전시들이 터미네이터의 눈알로 사람들을 바라볼 때 모니터 상에 나타나는 것은 수치화된 형태의 지불 능력, 빚을 갚을 능력, 세를 낼 수 있는 능력, 이윤을 증식시킬 수 있는 능력뿐이다.
우리는 이미 기계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우리는 이미 재난 상태에 돌입했다. 용산, 대한문, 강정, 밀양, 공장 굴뚝, 광화문광장, 두리반, 테이크아웃드로잉, 이 모든 것들은 기계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장소의 이름들이자 재난 공동체의 이름들이다. 우리는 곳곳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서로를 사람으로, 오직 사람으로 대하며, 대화하고, 노래하고, 절규한다. 이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의 메시지, “여기 사람이 있다!”로 수렴한다.
심보선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과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사회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문예술잡지 F》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눈앞에 없는 사람』(2011), 『슬픔이 없는 십오 초』(2008)가 있다.
인격적 대면 없는 기계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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