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해석을 통한 에티카의 실천
신형철 × 이경희
분량17,036자 / 35분 / 도판 3장
발행일2015년 1월 15일
유형인터뷰
그동안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수많은 글과 이야기를 통해, 그는 사람과 삶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조짐을 담기 위해 본인이 가진 그릇의 둘레와 깊이를 계속 확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대화를 통해 나의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그는 수많은 삶에 앞서, 하나라도 더 또렷이 보여주는 거울이 되고자 노력하는 듯하다. 처음엔 희미했던 원석을 끊임없이 닦고 또 닦아 가장 명징한 거울이 되어, ‘이성과 감성’, ‘윤리와 사랑’이라는 일견 모순된 명제의 공존을 잘 보여주기 위한 노력 말이다.
신형철 1976년에 태어나 1995년부터 10년 동안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했다. 2005년 봄에 계간 『문학동네』로 등단해 평론을 쓰기 시작했으며 2007년 여름에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2008년에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를, 2011년에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를, 2014년에 영화에 대해 쓴 글을 모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출간했으며, 2013년 여름부터 1년 남짓 팟캐스트 <문학동네 채널1: 문학 이야기>를 진행했다. 2014년 3월부터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비평론을 강의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터뷰어 이경희 본지 편집자
균형과 긴장을 오가는 장르로서의 비평
이경희 평론가님의 대외적인 평론 활동이 올해로 거의 10년이 됩니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문학(문장)과 가졌던 교감의 순간에 대한 기억, 그리고 이후 평론을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신형철 어렸을 때는 주니어용으로 편집된 위인전기나 추리소설 정도를 읽었을 뿐 책을 별로 많이 읽지는 못했고요, 고2 때까지만 해도 국문학과를 갈 생각은 안 했어요. 원래 꿈은 드라마를 만드는 PD가 되고 싶다는 거였어요. 하교하면 어머니가 미리 녹화해 놓으신 드라마, 예컨대 <여명의 눈동자>(1991~92년) 같은 훌륭한 드라마를 보면서 이야기의 힘을 느꼈던 거죠. 그래서 신문방송학과를 가면 드라마를 만들 수 있나, 그러면 신방과를 가자, 그랬어요. 그러다가 고3 올라가면서 입시 준비 때문에 염상섭, 김동인, 이광수 등 옛 한국문학 작품을 닥치는 대로 많이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처음엔 지루하고 따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재미를 느껴 문학에 대한 애정이 막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 진로까지도 바꿨어요. 바탕과 준비 없이 국문과를 들어간 셈이어서 들어가자마자 부랴부랴 책을 읽었죠. 그 이후로는 다른 분야를 기웃거리거나 내 선택을 후회한 적 없이 박사 수료 때까지 딱 10년을 쭉 공부했어요. 박사 수료가 2005년 2월이었고요.
제 연보에 2005년부터 비평을 시작했다고 돼 있는데, 신춘문예나 잡지신인공모로 등단한 것은 아니었고, 굳이 말하자면 추천등단이라고 할 만한 형식으로 『문학동네』에 글을 게재하게 되었어요. 잡지 편집위원 선생님들이 저의 논문을 읽으시고 원고를 청탁해주셨죠. 그래서 얼떨결에 평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경희 평론 대신 창작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나요?
신형철 원래부터 비평이라는 장르를 좋아했고, 그래서 비평가가 되고 싶었어요. 글을 쓰게 된다면 비평 형식의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어요. 언젠가 한번은, 다른 분야에 절대 손을 담그면 안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시를 쓴 적도 있는데, 반응이 썩 좋지 않았어요. (웃음) 주변에서 너는 역시 평론 스타일이 더 맞겠다고 하더군요. 소설은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고요.
창작에 재능이 없거나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평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냐고 알고 있는 분들이 많죠.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저는 이성적인 측면과 감성적인 측면이 같이 가는 글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있었어요. 논리정연하고 똑똑한 글에서도 매력을 느꼈고, 시나 소설의 감성적인 측면에도 끌렸어요. 그래서 평론으로 이 둘을 다 하면 안 되나 했죠. 제가 좋아하는 글의 모델이 그렇기도 하고요.
이경희 『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 그리고 이번 『정확한 사랑의 실험』까지 각 제목에 배치된 단어들의 조합만으로도 평론가님의 글에 나타나는 이성(정확함)과 감성(아름다움)의 균형과 긴장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제목을 붙이는 특별한 로직이 있으신가요.
신형철 정확한 지적을 해주셨네요. 제목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입니다. 과거 7~80년대에 평론집에나 인문서에서 유행한 제목은, 이를테면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이라는 잡지 이름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A와 B’ 형태였습니다. 책의 핵심 키워드 두 개를 동등하게 보여주는 거죠. 그런데 요즘은 ‘A의 B’라는 형태의 제목이 더 유행하는 것 같아요. ‘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도 그 흐름 속에 있는 제목인데, ‘A의 B’라는 타이틀에서 B는 이 책이 탐구하는 주제가 속해 있는 분야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A는 그 분야 안에서 특히 이 책이 조금이나마 새롭게 개척하고자 한 영역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에티카’, 즉 윤리학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고, ‘공동체’도 정치학이나 사회학에서 한 분야로 존재한단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 뭔가 변칙적인, 신형철이라는 사람의 고유성이나 개인성을 보여줄 만한 키워드를 찾아서 기존에 존재하는 분야의 명칭 앞에 붙여보는 거죠. ‘몰락’이라는 것이 윤리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공동체라는 용어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인 것이지만 그 앞에 ‘느낌’이라는 개인적인 층위의 단어를 붙여서 ‘어색한 듯 신선한’ 느낌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거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느낌의 공동체』, 문학동네, 2011
이번 책의 ‘정확한 사랑’이라는 표현에도 어떻게 보면 충돌이 있고, ‘사랑의 실험’이라는 말도 그 사이에 충돌이 있다면 있는 셈인데, 이 둘 중 하나를 택했다면 이전과 같은 길을 택하는 셈이 되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을 택하고 싶었어요. (제가 진행한 팟캐스트 방송에서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한국어 책 제목이 가장 리드미컬해지는 경우는, 그리고 필요한 요소들을 가장 적절한 개수로 집어넣을 수 있는 제목은 세 어절짜리 제목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기형도의 시 중에 세 어절 제목이 많죠. 「기억할 만한 지나침」, 「질투는 나의 힘」, 「바람은 그대 쪽으로」가 그렇고, 평론집 중에는 황종연 선생의 『비루한 것의 카니발』이나 신수정 선생의 『푸줏간에 걸린 고기』 같은 사례가 그렇죠. 이 세 어절 제목은 일단 리듬이 좋고, 아까 말한 ‘A의 B’ 구조에다가 수식어를 하나 더 붙일 수 있는 장점도 있죠. 고유한 수식어를 하나 더 선택함으로써 글쓴이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여지도 생기고요. 이번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경우는 제가 앞서 얘기했던 ‘제목은 세 어절이 좋다’라는 이론을 스스로 실천해본 경우라고 할 수 있어요. (웃음)
바람직한 삶에 대한 계속되는 물음, 에티카
이경희 세 권의 책에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이 ‘윤리와 사랑’이었습니다. 윤리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이니 작품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겠고, 사랑은 직업적 엄정함이나 중립에서는 벗어나더라도 끝까지 지지할 수 있는 관심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평론가로서 그 둘 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되어 ‘사랑’에 방해가 되진 않는지요.
신형철 글을 쓴 10년 전체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찾자면, 말씀하신 대로, ‘윤리’일 수밖에 없어요. ‘사랑’이라는 주제는 ‘죽음’이나 ‘공동체’나 ‘삶의 의미’ 등과 같은 저의 다른 주제들과 함께 윤리라는 큰 주제의 하위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맨 위에 있는 이 윤리라는 것을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확인하고 실천하는 일이라고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 이해를 갖고 글을 쓴다면 분명히 계몽적인 자세를 취하게 될 텐데, 사람들에게 ‘이런 삶을 살아야합니다’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그게 제 글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건 답을 갖고 있는 사람의 글쓰기죠. 저는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게 좋은 삶일까?’라고 질문하는 글을 쓰고 있을 뿐이죠.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면서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가리켜 보여주는 태도와 관련해서는 ‘도덕’이란 단어를 사용하면 좋겠고, 윤리는 도덕과는 다른, 그 자체가 질문을 품고 있는 말이라고, 좋은 삶과 바람직한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게 윤리학이라고 저 나름대로의 규정을 갖고 있어요. 이건 물론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현대의 철학자들이 더러 택하는 구분법을 받아들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윤리학 대신 굳이 ‘에티카ethica’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도 (책에도 나와 있지만) 한국어의 ‘윤리’라는 말이 갖고 있는 뉘앙스를 피해가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소설이든 영화든 그런 종류의 질문을 던지는 작품, 빤한 정답이 정해진 세계가 아니라 그것을 뒤집어버리는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을 좋아해요. 사람들이 윤리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타인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성찰해본다든지, 혹은 악이라고 흔히 비난하는 어떤 태도 안에 우리가 곱씹어야 할 진실은 없는지 찾아본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요. 우리가 갖고 있는 판단의 틀을 흔드는 종류의 이야기들, 도덕적 틀을 부수는 이야기를 ‘윤리학적 이야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그런 영역이 저의 관심사죠. 그러니까 그런 영역에 대해서 탐구하는 글이라면 필연적으로 질문의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겠고요.
제가 쓴 글은 그 질문을 구체화하고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종류의 글이라고 생각하지, 질문에 답을 주는 글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의 이번 책에 실려 있는, <그래비티>에 대한 글도 ‘어떠한 삶을, 왜 살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이러한 질문에 딱 부러지는 대답이란 게 없잖아요. 그 대신 이런 질문이 왜 필요한가, 그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얘기하는 거죠. 평론이란 장르가 그 이상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어요. 평론은 교과서나 경전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정답만 쭉 써 놓은 책들은 위압적일 뿐만 아니라 공허하다고 느껴지는 때가 많잖아요.
좋은 삶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
이경희 이번 영화 평론집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표지인 베르나르 포콩의 사진작업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사랑’이 휩쓸고 간 자리여서요.1 책 제목과 표지는 직접 선택하신 건가요? 책의 내용과도 긴밀한 관련이 있겠지요.
신형철 베르나르 포콩은 맨 처음에 출판사에서 추천해주었는데, 원래 제가 이 책에 어울린다고 생각한 이미지는 더 차갑고 냉정한 종류의 것이었어요. ‘정확’과 ‘실험’에 더 방점을 찍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몇 가지 이미지로 압축해서 최종 결정을 앞두고 있었는데, 막판에 마음이 바뀌었어요. ‘사랑’이 더 중요하단 생각에서요. 그래서 맨 처음에 받아두었다가 제쳐놓은 포콩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사진의 제목 <사랑의 방>이기도 해요. 연작 작품 중 하나죠. 누군가가 사랑의 실험을 하고 떠난 곳이구나, 하지만 그 실험의 결과가 꼭 아름답지만은 않았겠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혹은 그런 이야기가 잠재돼 있다고 느껴지는 사진이었어요.
책의 제목도 원고를 정리하기도 전에 제목부터 먼저 결정해 두었어요. 표지도 궁극적으로는 제가 결정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목도 그것이 책 내용과 얼마나 어울리는지를 제 스스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죠. 의견은 듣지만 책임은 제가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책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전에 제목이 먼저 결정되지 않으면, 글의 배치를 어떻게 할지, 어떤 이미지를 표지로 사용할지 등과 관련된 연쇄적인 진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죠. 그리고 제목도 여러 제목 중에 그 어떤 하나를 골라도 별 무리가 없다는 식으로 느슨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 책에 유일무이하게 어울리는 그런 ‘정확한 제목’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단 하나의 완벽한 제목, 대체 불가능한 제목이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궁리하고 또 궁리합니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동안 제목을 생각해요.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는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이전의 『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 모두 그렇게 붙인 제목들이에요. 제목에 대해서는 집착이 강합니다.
이경희 지금까지의 책들이 한번에 써내려간 글이 아니라, 기존의 글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먼저 책의 제목을 정해야 글의 배치도 가능했겠어요.
신형철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제목이 중요해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글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제목으로라도 통일성을 줄 수 있어야 하고, 핵심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를 설정할 수 있어야 해요. 안 그래도 평론 글이 딱딱해서 접근을 못하시는 경우가 많은데, 거기에다가 가령 ‘계몽과 해방’ 이런 식의 제목을 붙이면 더 어렵게 느껴지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목이 어떤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는, 진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면 좋겠다고 늘 바라죠.
이경희 글을 쓰기로 한 영화들의 선정 기준도 궁금합니다. 연재했던 《씨네21》의 제안도 있었나요?
신형철 전적으로 제가 골랐어요. 개봉하면 미리 영화 정보를 보고 내가 기대해도 될 만한 작품인지 감을 잡고 일단 봤습니다. 보면서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되풀이해서 보면서 구상을 했고, 이야기가 갖춰지면 글을 썼죠. 재밌기는 해도 별로 할 얘기가 없는 영화라면 그냥 버려지는 거죠.
이경희 그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신형철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질문이 남는 영화들이 있는 거죠. 영화 안에서 질문에 대한 해답이 다 내려지고 관객으로 하여금 더 이상 생각을 할 일이 없게 만드는 영화들은, 아 훌륭한 엔터테인먼트다, 하고 박수치고 나오면 되겠죠. 그런데 이를테면 남편이 아내를 죽이는 이야기인 <아무르> 같은 영화를 보고 나면 질문이 남는 거예요. 저 행위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저 행위를 이해해도 되는가, 저런 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면 저 사랑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 이런 식으로 고민이 계속되는 거죠. 그 영화에 대한 제 글을 보고 어떤 분이 ‘그건 명백히 살인인데 왜 사랑이라고 합리화하느냐’고 강경하게 말씀하신 분도 있었어요. 그만큼 논쟁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였다는 증거죠. 이게 넓은 의미에서는 결국 윤리예요. 어떤 선택이 옳은가,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해야 하나, 슬픔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는 방식에는 어떤 게 바람직한가 등, 결국 모든 것이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제가 ‘윤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에요.
이경희 계속되는 질문과 나름의 답을 유추하는 과정에서, 해당 이야기를 직접 경험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이 글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다.
신형철 그럴 수 있죠. 경험과 관련되지 않은 문제일 경우에는 논리적인 방식으로만 접근하게 되죠. 그래서 그런 주제에 대해서는 다른 책을 많이 읽을 수밖에 없고 거기서부터 관점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석이 많이 달리는 글이 되죠. 그런데 작품이 다루고 있는 상황이 어떤 종류의 상황인지를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경우라면 다른 책의 도움을 받아 우회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훅 들어갈 수도 있죠. ‘나 이거 알아’ 하면서요. 아무래도 후자의 경우가 더 좋은 글이 나오기 쉽죠. 그리고 은연중에 후자에 더 가까운, 즉 ‘내가 알 것 같은’ 소재나 주제를 다루는 텍스트를 더 선호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잘 모르는 이야기는 다루기가 매우 조심스럽고 또 오해나 왜곡을 주의하게 되니, 글의 논리는 어떻게든 앞뒤가 맞게 전개될 수 있겠지만 대상과 혼연일체가 되기는 쉽지 않겠죠. 그러나 만약 제가 잘 아는 이야기라면, 예를 들어서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는 잘 쓸 수 있겠죠. 그러나 시인이나 소설가는 잘 아는 이야기를 계속 쓰는 게 허용될 수 있을지언정, 비평가라면 내가 잘 모르는 주제들 속으로 용기 있게 들어갈 필요가 있고 새로운 주제를 개척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를 평생 탐구하는 비평가도 있을 수 있고 그게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요.
이경희 실제 경험을 전후로 글을 수정한 경우도 있으신가요?
신형철 같은 사건을 두고 과거에는 이렇게 썼는데 지금은 태도가 바뀌어서 다르게 쓰게 되는 경우가 있죠. 예컨대 제 경우는 ‘문학의 사회참여’에 대한 글이 그런 경우였는데, 『몰락의 에티카』에 실린 글만 해도 문학의 ‘직접적’ 사회참여에 유보적이고 조심스러운 쪽에 가까웠어요.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 납득할 수 없는 일을 여럿 겪으면서 생각이 바뀌었고, 마침 같은 주제로 글을 쓸 기회가 있었는데, 과거의 제 글을 제가 인용하고 비판하면서 제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했었죠. (이 글들은 아직 책으로는 안 묶였습니다. 두 번째 평론집에 수록되겠죠.)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매우 겸손해져요. 그래서 내가 무언가를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고, 진리는 다면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하는데, 지금도 마흔을 앞두고 이제는 세상의 많은 진실들을 내가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르죠, 10년 뒤 돌아보면 또 다르겠죠.

그런 면에서 문학은 참 정직하다고 생각해요. 삶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들이 비교적 투명하게 드러나는 예술장르라고 생각해요. 다른 장르를 잘 모르긴 하지만, 특히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통찰을 일부러 꾸며내는 것이 불가능한 장르가 문학이고, 특히 산문일 경우에는 운문보다 그것을 감추기가 더 힘들다고 생각해요. 시인 이성복 선생께서도 이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어요. 시로는 몇 명 정도 속일 수 있지만 산문으로는 그럴 수 없다고요. 이때 두 가지를 보고 놀랐는데, 하나는 ‘이런 대가大家도 속을 때가 있는가 보다’ 하는 놀라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와 소설에 대해서 막연하게 그런 비슷한 생각을 저 자신이 하면서도 그런 식으로 대조하는 것은 어쩌면 시를 폄하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겠다 싶어서 조심스러워했던 부분인데, 오히려 시인인 이성복 선생께서 얘기하시는 것을 보고 신선했고 환해지는 느낌이었어요.
직업으로서의 비평, ‘정확한 사랑의 실험’
이경희 이번 책의 서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나는 해석자다, 해석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평론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해석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굳이 ‘해석자’라고 강조하신 것을 보고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신형철 평론가의 역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창작자와 대중 사이의 다리 역할, 즉 ‘매개자’로서의 역할이 있죠. 또 ‘이 작품이 좋다/아니다’를 평가하는 게 중요하다고 해서 평점을 매기는 일을 열심히 하는 분들도 있죠. 그런 이들은 ‘판관’의 역할을 맡은 것이라고 볼 수 있죠. 혹은 텍스트를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사회에 발언하는 것이 평론가라고 보면서 논객과 평론가의 교집합을 중시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평론가가 지식인 혹은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역할에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외에도 더 많은 역할들을 분류할 수 있고, 저는 그 역할들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중에서 다른 것들로 대체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론가는 작품과 함께 이야기 하는 사람인데, 먼저 작품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얘기할 줄 아는 사람이 못된다면 다른 역할, 즉 매개자, 판관, 논객의 역할을 할 때 그 평론가의 권위가 높아질 수 있을까 의문이에요. 작품 해석은 대충 하면서 별점부터 매기고 작가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그들이 갈 방향을 지도하는 일은 별로 매력적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분일수록 해석에 몰두하는 평론가를 소극적인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해석이 1차적인 것이라고,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비평가가 전문적인 직업일 수 있는 것이죠. 직업으로서의 비평이란 곧 해석이라는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읽어내지 못하는 것을 읽어내고 작품을 다시 쓸 줄 아는 역량이 중요하다는 것을 언제나 강조하려고 하고, 또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해석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기 위해서 서문에 그런 말을 썼어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긴데 자주 간과되는 측면이기도 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해본 겁니다.
이경희 이 책의 1부 ‘사랑의 논리’에 소개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사랑을 ‘없음’으로 풀어나간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2
신형철 저의 관심사 중에 하나죠. 사람이 사람에 대해 갖는 관심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거기에 이름을 붙여 서로 분명하게 구별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어요. 구별하기 어려운 감정의 영역들에서 뭔가 논리적이고 명쾌한 구별이 이루어질 수는 없을까. 그러면 사랑이 아닌데 사랑이라 착각하고, 혹은 사랑인데 모르고 넘어가는 등의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정은 다른 감정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하는 물음인 거죠.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란 것은 없고 그것은 단지 변장한 욕망, 잘못된 충동, 미화된 본능에 불과한 것이라고 얘기하잖아요. 아니다, 사랑에는 고유한 논리가 있고, 이 논리를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라고 생각하던 차에 쓴 글이었어요. 아직 충분히 심오하지는 않지만, 저의 생각을 정리한 최근 버전이라고 하면 되겠죠. 시간이 흐르면 같은 주제로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여하튼 사랑에 대한 지금의 제 생각을 요약하자면, 사랑은 ‘없음’(결여)의 상호 교환이다, 라는 것이에요.
상대방의 결여를 서로 알아보고 그 결여가 서로 의지하면서 각자를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런 관계라면, 결여 때문에 부끄러워서 그 결여를 감추는 게 아니라 그 결여 때문에 오히려 서로가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가 되는 그런 관계가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하는 식의 생각입니다. 이는 욕망이나 충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조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 연민과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연민은 ‘나에겐 있고 그에겐 없는’ 우열 관계 속에서 탄생하는 경우도 많죠. 또 서로 비슷한 결여를 공유한다는 것이 늘 긍정적이지만은 않죠. 둘 다 돈이 없다면, 서로 피폐해져서 나중엔 환멸이 커지는, 그래서 같이 있을수록 더 끔찍해지는 그런 관계도 상상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이런 관계들과는 달리, 상대방이 갖고 있는 결여 때문에 서로 헤어지지 못하게 되고 이 세상에는 이 사람이 아니고는 내 결여를 완전히 이해해줄 사람이 없다고 느껴지는 그런 관계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고, 어쩌면 그런 관계를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어요.
이경희 ‘없음’을 발견하는 게 남과 여,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도 적용이 되지만, 문학작품과 평론, 평론가와 독자의 관계 사이에서도 일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자에게는 작품을 끌어주는 평론가가 필요하고, 평론가는 좋은 작품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을 테니까요.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머리말만 보면 결혼할 사람에게만 바치는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말씀하신 의미로도 겸사겸사 쓴 것이에요. 이게 제가 생각하는 해석자의 윤리입니다. 만약 ‘나는 이 텍스트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려면 최대한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는 거예요. 여기서 ‘정확’은 만약 누군가 나를 소개하는데 번지르르하고 화려하게 얘기해주어도 ‘저건 내가 아닌데’싶으면 칭찬이어도 정확한 칭찬이 아니므로 공허하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단어예요. 누군가를 정확히 소개하려면 그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죠. 천재들이 무언가를 슥 보고 외울 순 있겠지만, 제 아무리 천재라 한들 어떤 사람을 슥 본다고 해서 그 사람의 미덕을 캐치한다는 건 어렵지 않겠어요? 나도 모르는 나의 면모를 알고 거기서 매력을 끄집어내주는 사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게 ‘정확하게 사랑받는 느낌’ 같은 것이지 않겠어요? 만약 누군가가 나의 미덕을 사람들에게 칭찬하고 다니는데, 그게 진정한 내가 아니라면, 그가 생각하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게 너무도 힘들지 않겠어요? 정확하게 사랑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통일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이것을 텍스트에도 적용할 수 있는 거예요. 텍스트를 거칠고 부당하게 욕하는 것은 논의할 가치도 없으니 일단 논외로 하고, 비판을 하더라도 정확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비판하면 설득이 있고 당사자에게 상처를 덜 주겠죠. 그리고 잘 모르고 칭찬을 하면 그것은 허방을 짚는 일이어서 창작자 자신조차도 어리둥절해지고 말지요.
가장 좋은 것은 이 텍스트의 장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정확하게 사랑하는 것’이라고 규정해 본 거죠. 텍스트의 본질이라는 것이 있는가, 거기에 정확하게 도달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이런 문제는 사실 현대 문학이론과도 연결되어 있는 어려운 문제인데, 이것을 독자들에게 쉽게 와 닿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했고, 그러던 중 장승리 시인의 시 「말」에서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라는 구절을 발견했죠.
이경희 같은 책 2부 ‘욕망의 병리’에서도 말씀하셨지만, 불행한 인물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 할 땐 예의 “세상에서 하나뿐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고, 또한 “잊히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 “비평가가 용서 받는 유일한 길”이라고도 하셨죠.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감성을 끌어낼 때 평론가가 다지는 마음이 궁금합니다.
신형철 무엇으로 하여금 비평을 하게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꿔 말할 수 있을 텐데요. 저는 근본적으로는 저 자신을 위해 씁니다. 평론가는 작품 없이는 존재할 수는 없지만, 그게 꼭 ‘작품을 위해서’ 쓰는 것만은 아니거든요. 작품이 주는 영감 속에서 특정 문제에 대한 높은 인식에 도달하고 싶다, 라는 것이 목표죠. 가령 그게 사랑이라면, 사랑을 다룬 심오한 작품과 더불어, 사랑이 무언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게 제 목표죠. 그러려면 좋은 작품을 찾아 글을 쓸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비판받아 마땅한 작품을 가지고, 그러니까 작은 사다리를 가지고 어떻게 위에 올라가겠어요. 즉 제 비평의 근본적 목적은 어떤 인식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어서, 단순한 텍스트 해설 작업은 저를 공허하게 만들기 쉽죠. 그 글을 쓰고 나서 제가 변하는 것은 별로 없을 테니까요.
저는 글을 통해서 제가 올라가길 원하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비평도 창작이라고 생각하고 제가 갖고 있는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요. 스포츠로 치면 ‘순위경기’가 아니라 ‘기록경기’인 거죠. 작품을 비교적 정확히 해석하면서 그것이 품은 깊은 인식을 끌어내고 나도 저 높은 경지까지 도달하는 게 제가 생각하는 기준이에요. 이건 계속 올라가야 해요. 나를 자극하는 다른 작품이 있으면 계속 기록을 깨기 위해서, 육상선수나 수영선수의 심정으로, 제 자신을 위해 글을 쓰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창작자에 대해 열등감을 갖지 않아요. 또 어떤 사람은 비평가가 창작자보다 위에 있다는 듯이 고압적으로 작품을 내려다보면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러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고요. 결국은 창작자나 비평가나 같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다만 비평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생기는 효과 중 하나는, (아마도 글쓰기의 두 번째 목표가 될 텐데, 누구나 좋다고 하는 작품을 통해 기록을 갱신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사람들이 별로라고 생각했던 것 혹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으로 그런 작업을 해서, 제 글을 통해 사람들이 설득되고 그 작품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일이 이루어진다면 참 보람 있는 일이 되겠죠. 무슨 프로듀서처럼 신인을 찾아다니는 일을 1차적인 업무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만 이와 같은 발굴과 재평가가 부차적으로 가능해진다면 좋죠.
감정을 전달하는 문학의 힘
이경희 예술의 범주에서 문학은 서사보다 텍스트의 미학적 자극이 문학의 고유성이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이나 작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신형철 문학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결부되어 있는 질문이죠. 소설이 영화나 연극과는 다른 부분이 어디에 있는가. 계속 좁혀 들어가다 보면 결국 문학은 언어예술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죠.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야기’가 없어도 언어예술로서의 문학은 성립될 수 있다는 발상입니다. 주인공의 어떤 기분을 설명하기 위해 20페이지를 사용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사건은 전혀 진행되고 있지 않은데 문장에 (김훈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압’이 흐르고 있어서 그것만으로 작품이 될 수 있는 거죠. 저는 그런 작품도 좋아해요. 그런데 그런 작품을 선호하는 분들이 이를테면 근본주의적인 태도로, ‘문학에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가 많을수록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대중적인 포맷으로 변질되기 때문에 고급문학에서 이야기는 빠져야 한다’라는 식으로, 모더니즘이나 누보로망의 어떤 입장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되풀이할 때면 동의하고 싶지 않아져요. 서사를 왜 포기해야 할까요. 어떤 서사인가가 문제지 서사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세상의 많은 위대한 소설들은 영원히 음미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문학이 갖는 서사성은 문학이나 연극의 서사성과 완전히 똑같지도 않다고 생각하고요. (얘기가 길어지는데) 언어로 작동하는 서사는 영상이나 연기로 작동하는 서사보다 마음의 구조에 대한 설명을 훨씬 깊이 있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언어만큼 마음을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매체가 있을까 싶어요. 뛰어난 배우는 표정 하나로 모든 걸 다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뛰어난 작가가 두 페이지에 걸쳐 한 문장도 뺄 게 없이 써놓은 것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내면성의 해부라는 측면에서는 언어라는 매체가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 힘을 발휘하는 문학의 서사를 다른 장르의 서사와 똑같이 놓는 것은 문학의 서사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문학에서 서사를 표기하는 것은 너무 큰 것을 쉽게 포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물론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는데 문장은 거칠고 상투적인 그런 소설 역시도 견디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죠. 그러나 그 반대의 극단, 일종의 ‘스타일 근본주의’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아요.
이경희 언어의 힘과 관련해 “슬픔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문장이다”라고 말씀하신 게 기억납니다. 미술에서 중세 종교화를 보면 당시에는 성직자나 귀족이 아니면 글을 읽을 수 없으니 그림에 일그러진 미간, 눈물, 핏자국을 사실적으로 그려 슬픔과 고통을 전달합니다. 즉각적인 자극으로 보는 이의 감응을 끌어내는 것이죠. 오늘날에도 매체만 달라졌을 뿐 시각적인 자극을 실험하는 작가들이 있고요.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몇 페이지에 걸쳐 감정을 글로 서술할 때는 두 손 두 발 들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신형철 질문의 인용에 보충 설명이 좀 필요해 보이네요. 슬픔이라는 힘을 전염시키는 것과 슬픔에 대해서 잘 말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전염에 대해서라면, 즉 작품을 대하자마자 바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게 만드는 것은 문장보다는 영상이나 음악의 힘이 더 크지 않을까요?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감정과 내면을 표현하는 역량에 대한 것입니다. 인식하고 설명하고 전달하는 힘이요. 예컨대, 버지니아 울프를 모델로 한 영화, 제가 무척 좋아하는 <디 아워스>에는 세 명의 배우(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가 나와요. 영화를 보면 각 인물이 품고 있는 내적 공허가 어떤 것인지 즉각적으로 전염돼 와요. 그런데 그것은 그들이 느끼는 공허가 어떤 종류의 공허인지를 설명해주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죠. 아, 이런 감정이구나, 이런 감정을 어떻게 이렇게 손에 잡힐 듯이 잘 설명할 수 있지? 이런 감탄을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언어의 힘이고요.
이경희 영화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시면서 영상 예술이 가진 고유한 힘은 무엇이라고 보셨나요? 같은 맥락에서 팟캐스트 방송 <문학이야기>를 통해 글이 아닌 다른 매체로 독자를 만난 소감도 궁금합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로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쓸 때 저는 문학의 연장으로 영화의 서사를 읽는 작업을 한 것이기에 둘이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순 없어요. 실제로 제가 영화의 기술적 측면에 대해서는 잘 얘기하지 못하잖아요. 소설책을 읽듯이 영화를 계속 반복해 보면서 밑줄을 치며 글을 쓴 것과 같아요.
팟캐스트도 라디오라는 매체가 기본적으로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처음 1,2부를 제외하고는) 다 대본을 써서 그것을 앞에 놓고 읽으며 방송을 했거든요. 2시간짜리 방송을 만들기 위해 A4 10장 정도의 원고를 썼어요. 그리고 어떤 속도로 어느 부분에서 끊어 읽을까를 미리 연습하고 녹음을 했어요. 그러니까 저는 기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인 거죠. 즉흥적인 선택이 더 분위기를 좋게 하고 재미있게 할 수도 있겠지만, 부정확한 표현들이 계속 마음에 밟힌다면 못하는 거죠. 그래서 원고를 쓰고 낭독하는 방식으로 전환했고, 제겐 방송이 글쓰기의 연장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저는 제 원고를 읽은 것인데 (물론 읽어야하니 수사적 표현을 줄이고 더 부드럽게 매만졌지만) 듣는 분들은 제가 쓴 글을 읽는 것보다도 이 쪽을 더 편하고 친근하게 느끼시더라고요. 그래서 같은 원고라도 눈으로 읽는 것과 귀로 듣는 것에 차이가 있나보다 싶어 갸우뚱했어요. 만약 그런 차이가 있다면 책보다 오디오북이 어쩌면 한국문학을 더 친근하게 만들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제 말의 요점은 저의 다른 모든 활동도 역시나 문학적 글쓰기의 연장이었다는 거예요.
이경희 나중에라도 선생님을 방송에서 뵐 기회가 있을까요?
신형철 마지막 방송에서도 얘기했지만, 제 마음 속에 얼마간 밑천이 쌓이면, 그러니까 글을 좀 많이 쓰고 나면 다시 해볼 수도 있다고 열어놨어요. 사람 일은 어찌될지 모르는 거니까요.
이경희 고백하건대 문학에 소양이 부족한 저로서는, 작품을 읽고 나름의 이해를 갖기에 앞서 그것을 한번 소화해서 해석해주는 사람의 이야기에 더 끌립니다. 하루에 접하고 처리해야 하는 정보가 너무 많다 보니 더 쉬운 방법을 좇고 취하는 거죠. 그러한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힘든 것 같아요.
신형철 사실 그게 평론의 재미죠. (웃음) 부끄러워하실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 제가 처음에 평론에 재미를 느끼게 된 것도 그런 측면 때문이었거든요. 시나 소설을 읽었는데 알 듯 말 듯, 좋을 듯 말 듯 한데, 이런 애매한 상태에서 작품에 대한 평론을 읽었더니 작품이 명쾌하게 정리가 되는 거죠. 작품을 단순화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작품을 입체적이고 심오한 것으로 끌어올리는 글을 읽고 나면 ‘아 내가 이 부분을 놓쳤구나, 이것을 알면 더 작품이 더 잘 보였을 텐데’ 감탄하게 되더군요. 그러면서 그런 글은 작품과 독자를 동시에 고양시키는 거죠. 그런 평론을 읽으며 저도 감탄을 했는데, 이는 시인이나 소설가한테서 느꼈던 감탄과는 다르더란 말이죠. 시인과 소설가도 대단하지만, 좋은 글을 쓴 평론가도 동경하게 됐어요. 지금도 제가 좋아하는 평론가가 쓴 글을 열심히 찾아봐요. 그런데 내 생각을 한번쯤 정리해보고 나서 평론을 찾아보는 게 더 좋겠죠.
문학 해석을 통한 에티카의 실천
분량17,036자 / 35분 / 도판 3장
발행일2015년 1월 15일
유형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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