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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예술의 잠재성

조전환, 김남수

무용평론가와 목수는 지난 10월 만주로 유랑을 다녀왔다. ‘유라시아 뇌과학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대흥만령산맥과 흑룡강을 다녀온다는 계획이었다. 서구 중심의 예술 논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색 중인 이들은 인간의 좌뇌와 우뇌 같이 유럽 문명과 아시아 문명의 상보적 관계를 주목한다. 마음은 남쪽에 있었으나 몸은 북방으로 향했다는 이들은 대화의 주제를 동서남북으로 거침없이 오고가며 끊임없이 엮어냈다. 


김남수 안무비평가. 미술과 공연예술 사이를 연결하는 다원적 비평을 하고 있다. 2000년대 초 등단하여 무용지 『몸』에서 평론활동으로 시작했고, 무크지 『판』, 『옵신』 등의 편집위원이다.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원, 국립극단 선임연구원, 아시아문화개발원 팀장을 역임했고, 공저로 『백남준의 귀환』이 있다.

조전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창조원 제작팀장. 본업은 대목수. 한옥호텔 <라궁>을 지었으며, 3D로 한옥 공간을 짓는 HIM 프로그램을 최초 개발했다.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아트디렉션, 백남준아트센터 전시공간 디자인, 연극 <3월의 눈>의 실제 한옥 아트디렉션을 했다. 현재 유라시아 문화를 연구 중이다.


북방의 수직적 사고 남방의 수평적 사고

김남수 무릇 집을 짓고자 하면 자연의 재료를 상대해야 했고, 특히 나무가 결정변수였습니다. 『환경은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를 보면, 문명의 영고성쇠가 나무의 생장과 고갈이라는 리듬과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또한 숲은 지역 기반의 생명적 순환을 가능하게 하고요. 그래서 다소 시대착오적인 감각인지 모르나, 나무와 숲을 ‘유라시아 뇌과학(유라시아=뇌)’이라는 지식-예술의 연결 차원에서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좀 더 설명이 좀 필요하겠죠.

조전환 그렇게 된 것에는 승현준 씨의 『커넥톰, 뇌의 지도』에서 천억 개의 나무를 가진 숲이 지구 상에 70억 개가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느냐고 반문한 것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즉 70억 인구의 뇌를 숲에 비유한 것과 실제로 저 유라시아에 거대한 숲이 묘한 아날로지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성해온 것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소위 아프로유라시아Afro-Eurasia 네트워크를 나무와 숲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김남수 숲은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동쪽은 시베리아와 대흥안령大興安嶺 산맥 안팎으로 숲이 형성돼 있고, 서쪽은 헝가리의 카르타피아Carpathian 산맥 쪽이 있다고. 이 숲이 아시아와 유럽의 대륙적인 인터페이스인 셈입니다. 그러면서 전쟁과 정복, 제국의 건설, 상업활동, 문명의 교류가 일어났고, 그것이 뇌과학적 아날로지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근대를 중심에 둔 유럽은 좌뇌의 역할을, 뭔가 유동적 종합적 인지를 중심에 둔 아시아는 우뇌의 역할을 해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8세기부터 13세기 알타이산맥과 사마르칸트 일대는 세계의 모든 지식을 수용하고 검증하고 축적해온 바, 뇌과학적 차원에서 좌뇌와 우뇌를 연결짓는 ‘뇌량腦梁’에 해당된다고 봅니다. 이것이 근대보다도 더 완벽한 모델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근대화 과정에서 극도로 좌뇌적인 성격을 많이 갖게 되었지만 지금은 우뇌의 시대에 대해 의식하고 있습니다. 좌우간 유목 담론을 이야기할 때 불가피하게 좌뇌와 우뇌를 왔다갔다 해야 하는데, 사실 인지고고학에서는 인간의 거대한 진화가 좌뇌와 우뇌가 연결되는 ‘뇌내혁명’에서부터 결정적이었다고 하죠. 그래서 뇌량과 같은 일종의 장치가 중요하고, 지금 건축적인 관점에서 뇌량을 재발명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라시아 뇌과학’이라고 명명한 프로젝트의 한 가지 단서입니다.

얼마 전까지 유라시아 좌우의 횡단축에 관해서 몰두했다면, 조전환 목수는 최근 유라시아의 수직축을 화두로 던졌습니다. 원래 타이가(taiga, 유라시아 대륙에서 북아메리카를 동서방향 띠 모양으로 둘러싼 침엽수림의 총칭) 숲이든 헝가리 숲이든 다 같은 나무로 구성된 숲이라고 전제했는데, 베트남에 다녀온 후 숲이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북쪽 지역의 침엽수림은 목구조의 집을 짓기 딱 좋지만, 남쪽 지역은 이와 달리 나무들이 덩굴손을 내밀고 서로 얽히고설켜 하늘이 보이지 않는 정글입니다. 남한에 살 때, 우리의 세계관에는 정글을 상대하는 것이 거의 누락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중요할 수도 있다고 조 목수께서 이야기했습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황당했고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이야기가 신화를 중심으로 한 코스몰로지 구도와 너무 잘 맞는 것이었습니다. 북방에서는 천손강림형, 즉 하늘에서 내려온 영웅이 하늘과 땅을 연결짓는 수직적인 인식구조가 있는 반면, 남쪽은 신체화생형, 즉 이름없는 사람이 죽어서 신의 몸이 되고, 그 몸으로부터 식물의 싹들이 자라나서 밀림이 만들어지는 수평적인 인식구조가 강합니다. 북방의 수직적인 리더십이 독재로 흐르기 쉬운 반면, 이 남방의 수평적 신화는 민주주의와도 연관됩니다.

조전환 제가 말레이시아에 갔을 때 영국 AA스쿨Architectural Association School of Architecture 출신의 한 건축가와 대화를 나눈 바 있습니다. 문화적 차이에 대해 그분은, 인도는 ‘6’이고 중국이 ‘5’인데, 자신들은 ‘3’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3’이라고 했더니, 그분이 ‘3’을 우리와는 다른 세계관으로 이야기했어요. 소위 삼계인데, 우리가 해수계, 지상계, 천상계인 반면, 그쪽에서는 해수계, 지상계, 그리고 밀림계라는 구도라는 겁니다. 일단 천상계가 없다는 것에 놀랐고, 수평적이란 것이 신선했어요. 바다와 땅과 밀림이 수평적으로 펼쳐지잖아요. 이렇게 깨닫고 나니 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에 가서 26개 민족의 얼굴들이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 얼굴들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니 재미있었습니다. 그곳은 서로 다른 부족에서 각각 아들이 생기면 그 아들을 다른 부족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낯선 부족민이 그 아들을 따르면 그냥 섬에 들어가서 살거나 또 다른 곳에 진출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부족이 옆으로 펼쳐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쪽은 아직 성씨가 많이 없고 이름만 부르는 방식입니다. 성씨를 갖는다는 것은 ‘내림의 혈통’, 즉 수직의 계보 과정을 강조하는 것인데, 인도네시아는 이와 다르게 옆으로 퍼지는 관계였습니다. 자연히 사고방식으로 인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밀림’이라는 것과, 그 전에 김남수 씨와 북방 유라시아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왔던 타이가 숲을 대치시켜보니 남방은 색달랐습니다. 타이가 숲에서는 나무가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위로 쭉 올라가서 햇빛을 받고 잎을 펴는 반면, 남방의 정글에서는 온도나 햇볕의 차이가 크게 없어서 늘 존재하는 방식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두 가지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집이 된 배, 수레가 된 배

김남수 조전환 목수께서 한때 “수레로부터 집이 나왔다”는 과감한 가설을 발표했습니다. 북쪽은 초원, 사막, 고원 등 평평한 곳을 달려가기 위해 수레를 사용했고, 그 수레의 역학에서 집이 나왔다는 것이었지요. 석학 마쓰오카 세이고 선생이 관여하고, 일본 교토 시에서 발행하는 『나라시아 21』에 이런 가설을 발표하셨어요. 그 후에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남부 아시아를 다녀와서 이번에는 또 “집은 배로부터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묘하게도 집의 기원을 수레냐 혹은 배냐, 하는 질문을 두고 유라시아의 수직축과 수평축을 살펴보다가 갑자기 북마남선北馬南船을 건축적인 모델과 은유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려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인지… (웃음)

조전환 시작은 이렇습니다. 답사를 다니다 보니 남쪽인 전라도의 지붕의 용마루가 다른 곳보다 유난히 깊이 욱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부지방의 용마루 곡선이 팽팽한 현수곡선懸垂曲線이라면, 전라도 쪽은 푹 꺼진 곡선이라는 거죠. 일부러 키치처럼 과장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되었는데, 이번에 남아시아에 갔다 오면서 해결이 되었어요. 남아시아 쪽의 지붕선들이 대부분 전라도의 것과 비슷했던 것입니다. 일본이나 남쪽에서 온 것들은 지붕선이 바람을 맞아 힘을 받고 있는 즉 힘을 쓰고 있는 돛의 모양으로 깊이 욱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체감비도 달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깎아 끼워 맞추는 방식도 남쪽으로 가면 달랐는데, 남쪽마루 짜는 방식을 보면 기둥을 세워놓고 앞에서 따서 여모귀틀을 기우는 방식을 씁니다. 내가 경복궁에서 배운 방식은 안쪽에서 따서 밖으로 걸리게 끼웠었는데, 이와는 다른 방식들이 이었죠. 왜 그렇게 만드는 지를 여쭤 보았더니 선목(배 만드는 사람)이 집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한옥에 남쪽과 북쪽에서 온 두 가지 감각이 존재하는 것이죠. 그 전에 김남수 씨와 함께 ‘말탄 한옥’이라는 개념을 정리할 때 한옥을 일곱 가지 코드로 정리했는데, 그중에 횡력을 받는 구조로서 사개맞춤(부재를 가공해서 서로 끼워 맞추는 목조이음의 하나)을 이야기했죠. 두 바퀴로 가는 수레가 땅의 리듬을 타고 가며 그것을 버티기 위해 발달한 구조들이 내려앉아서 만들어졌다는 가설이었습니다. 수레로 전해진 감각과 배로 전해진 감각, 이 양자가 한옥에 존재합니다.

김남수 목수님이 주장하신 것은 문화적인 관습을 기반으로 하는 이질적인 테크놀로지가 종합될 때 집의 형태를 띠게 된다는 것 같습니다. 수레를 돌릴 때 축을 보면, 옛날에는 타이어가 없었기 때문에 편안한 승차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레바퀴의 형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차축과 연결되는 것들이 아주 견고해야 했는데, 그 구조의 역학이 한옥에도 적용되었다는 것입니다. 한옥의 사개맞춤은 기둥부분과 보, 도리 이 세 가지가 마주치는 ‘관절’이 지나치게 견고해서 과잉은 아닌가 할 정도인데, 그런 구조역학이 결국은 수레를 만들던 기술에서 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조 목수께서 최근 배로부터 집이 만들어졌다 하셨죠.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리철학적인 맥락, 즉 주어진 땅과 기후의 조건이 주는 환경상의 맥락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북방에서는 죽음을 받아들일 때도 조장鳥葬, 즉 새에게 인간의 몸을 날고기로 주고, 새는 그것을 먹고 영계의 울림을 즉각 하늘로 올리는 반면, 남쪽은 그렇게 할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에 땅이든 물이든 섬이든 조장과 형태상으로는 비슷한 풍장風葬을 지냅니다. 그러나 풍장은 날것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육탈을 하기 위해 삭히는 시간을 허락합니다. 풍장을 할 때 영계의 울림은 기본적으로 1년이 걸립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시각적 유사성에서 오는 문화적 착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내막을 보면 북쪽은 금속성의 감각을 합금하여 단단하고 쨍한 것을 만들어내는 반면 남쪽은 시간적인 발효를 통해 시김새(표현기법)의 내공을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남도의 문화 키워드가 ‘발효’잖아요. 나아가 한국 식문화의 70%가 발효라고도 합니다. 점점 이 이야기가 건축뿐만 아니라 문화학의 부분으로도 좀더 개방되는 것입니다.

조전환 사실 몽골에서 먹었던 음식을 보면 발효 음식이 없었어요. 그리고 우리나라의 함경도나 황해도 음식도 맛이 깔끔합니다. 북쪽은 발효시키는 것보다는, 좀더 세분화시켜 다른 물리적인 방식으로 연결시키는 음식, 신선한 음식이 주가 됩니다. 남쪽으로 오면 음식 재료들을 세분화시키지 않고 섞어서 발효시킵니다. 이 두 가지의 방식이 같이 존재하고 있고 이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을 것입니다.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백두산의 기운이 뻗치는 정도가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한옥의 맛이 나는 건축들이 있는 곳입니다. 전에 중국을 몇 번 오가면서 보니 신양 넘어서, 옛날 의무려산을 넘어가면 건축들의 맛이 달라지는 것 같았고 그 범위를 중점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만주에 갔을 때 흥안령 산맥까지는 못갔고, 또한 만주지방의 전통가옥촌을 한 곳밖에 가지 못해서 자세하게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남쪽의 경우, 배로부터 만들어지는 건축이 섞여서 만들어지는데, 일본과 그 근처 지방에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북쪽은 자료가 많이 없어서 계속 공부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문화는 가운데에 정점, 즉 하나의 핵이 있고 그것이 여러 갈래로 펼쳐진 가지들이 있습니다. 그 가지들과 다른 문화와의 접점들이 생겨 또 다른 것들을 만드는 것이지요.

김남수 그런데 앞서 남도 건축이 좀 다르다고 하셨는데, 발효라든가 시김새와 관련해서 언급하실 부분이 있습니까?

조전환 북방 계열의 건축이 가장 밑으로 내려온 곳이 안동 또는 경주까지로 볼 수도 있습니다. 경주를 지나서 울주를 넘어가면 건축이 좀 달라지고, 그 선까지가 북방계열의 건축이라고 봅니다. 북방 계열의 집을 보면 선명하고 각이 딱 잡혀있고 높낮이의 위계가 정밀한 데 반해, 남쪽으로 오면 집의 형태가 수평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짜입니다. 북방은 위계를 물리적으로 형성하지만, 남방의 집은 그 집에 누가 지내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특히 누정(누각과 정자)에도 나타나듯이, 위치도 중요하지만 그곳에 걸려있는 편액, 그리고 거기에 얼마나 많은 글이 쓰여 걸려있느냐에 따라 그 집의 값어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지점들이 발효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안동 지방의 건축에도 이러한 점들이 나타나지만 남도의 누정 만큼 그 특징이 확연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가령 독락당獨樂堂(경북 경주에 있는 조선시대 중기의 주택으로 보물 제413호)의 경우에도 이언적李彦迪이 중심이 됩니다. 그런데 남도 쪽은 그곳에 살았던 사람뿐만 아니라 그곳에 들렸던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와 그 시간이 더 중요해집니다. 남도 건축과 북방 건축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만주, 집단적 신명 샤머니즘이 시작된 곳

김남수 저희가 10월 하순에 ‘유라시아 뇌과학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만주를 갔습니다. 하얼빈 공항으로 입국해서 열흘 정도 있었습니다. 원래 계획은 대흥안령 산맥을 한번 만져보고, 흑룡강 물을 접해보자는 것이었으나, 이 숙원 계획은 여러 이유로 좌절되었습니다. 우선 강에 대한 탐문을 해보려고 했습니다. 하얼빈 시에 걸쳐진 송화강이 있는데 이 강은 우리 민족의 영적인 강입니다. 그 위에 눈강, 또 그 위에 흑룡강이 있습니다. 그 세 개의 강이 마치 한자 ‘川’ 모양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눈강은 공식적인 명칭인데 ‘눈’은 봄에 “나무의 눈이 움튼다”는 뜻의 그 눈입니다. 만주에서 어느 정도 조선 말의 언어적인 헤게모니가 있는 셈입니다. 송화강도 송홧가루가 날리는 것을 뜻합니다. 계절적으로 아마도 송홧가루가 날리고 나서 나무에 새순이 돋는 것이겠죠. 이것이 뭔가 봄이 북상하는 계열로 되어있어서 좋았어요. 그리고 송화강과 눈강 사이의 송눈평원, 눈강과 흑룡강 사이의 동북평원은 예맥족 역사의 무대였다고 봅니다. 현재는 사실상 우리의 인식 범위에서 멀어진 곳입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곳을 좀 탐냈었는데 그 이유는 ‘발효’의 북방한계선이 어디인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대흥안령 산맥이 호弧를 그리고 있는데 그곳에 있는 평원에 숲이 주는 환경적인 영향이 ‘발효’라는 권능으로 미쳤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확인된 바가 없는 순전한 가설이었습니다. 미학자 조요한 선생이 “우리 민족의 샤머니즘이 본디 북방의 숲을 거치며 지금처럼 되었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참 묘하게 다가왔었습니다. 숲이라는 환경 속에서 ‘발효’된 것이 아닌가. 또한 흥안령이라는 말도 묘합니다. 흥興은 ‘신명’이고 안安은 ‘편안하다’인데, 굉장히 샤머니즘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작은 단서들을 가지고 무작정 만주여행을 갔습니다.

지도는 흥안령산맥과 흑룡강 그리고 눈강이 만드는 동북평원의 ‘황금의 삼각주’. 이곳에서 둥근 호 모양의 숲에 둘러싸여 샤머니즘과 한옥이 ‘발효’되었다는 것.

조전환 기원전 10세기경, 스키타이가 동진하면서 마차와 쇠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왔습니다. 당시 그들은 마차에 살았었습니다. 그 후 기원전 7세기 몽골, 기원전 6세기 만주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주로 오기 위해서는 흥안령 산맥을 넘고 숲을 지나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옥의 원류가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목구조를 정확히 짜기 위해서는 탄소강이 필요합니다. 청동기로도 간단한 것은 만들 수 있지만, 나무의 옹이를 치고 끼워 맞추고 짜 맞추는 기술은 탄소강이 와서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흥안령에 오기 전까지는, 타이가 숲보다는 주로 아래쪽 초원으로 다녔는데, 그때의 마차 안에 모든 기술이 응축되어 있었고 흥안령을 넘으면서 새로운 기술이 발현된 것입니다. 마치 효소가 되어 흥안령, 만주의 숲을 발효시킨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몽골의 샤먼들은 의식을 혼자서 치르는데, 만주의 샤먼들은 무천이나 영고 등의 집단적 신명으로 의식을 치릅니다. 이 분기점도 흥안령입니다. 개인으로서 하늘과 통하는 방식에서 집단적 신명으로 바뀐 것이 바로 흥안령을 넘으면서 시작된 것이라 생각하며 신나게 만주로 갔습니다.

김남수 만주에서 다월족達斡爾族 거주지를 둘러봤는데, 그들은 유라시아를 연결짓던 탁월한 상인종족 소그드족Sogd이라고 합니다. 역사라는 것은 칭기즈칸이나 티무르 제국 같은 볼드체로 쓰인 것만 다루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는 연결의 신경선神經線도 다룰 때가 되었습니다. 소그드인은 몽골세계제국 건설의 첨병이었고, 유라시아 대륙이 글로벌 네트워크가 되도록 수많은 신경선들을 종횡무진 설치한 위대한 종족이었습니다. 그들의 역사를 읽다 보면 수많은 신경의 미시역사를 다시 검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느낍니다. 그리고 조 목수님이 다월족의 주거지역에서 위쪽이 집의 형태로 결합된 수레가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준비된 일장연설을 하셨어요. (웃음)

중국 북부의 치치하얼 시 다월족 주거지에서 “수레 위에 얹힌 집”을 설명하는 조전환 목수.

조전환 수레가 변해서 집이 되었다고 한참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그곳에 수레 모양의 집이 있었던 겁니다. 관광지로 만들려고 그런 집을 만든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그 지역의 문화적 형태 안에는 수레와 집을 한가지로 보는 사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집을 정자처럼 만들어 놓고 바퀴를 붙여 놓은 것입니다. 이규보의 『사거정기』를 보면 정자를 한 곳에 두지 말고 바퀴를 달아서 끌고 다니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실제로 눈앞에 형태로 나타나 신이 났었던 모양입니다. (웃음) 수레가 내려와서 집이 되는데, 그곳이 평지이기 때문에 집을 집기 위해서 흥안령에서 300~400km 정도 이동하여 나무를 가져와야 했고 그래서 수레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 옮기거나 짐을 싣고 평지를 달리기 위해 굉장히 큰 바퀴로 만들어진 수레가 중요했을 겁니다. 어쨌거나 집과 수레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하는 것을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김남수 (다월족의) 주거형태가 우리와 많이 다른가요?

조전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가운데 마당을 두고 삼면에 집을 배치하고 입구가 있는 방식입니다. 사실 이런 방식은 중국 황하 문화라고 생각했는데 스키타이의 묘장지에서 이런 형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원형에 ‘井’자를 만들고 거기에 다른 부장품들을 따로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갤 안에서의 보이지 않는 영역구분, 그리고 바이칼의 요트 안에서도 가운데의 신성한 공간은 들어오지 못하는 것, 하늘과 이어지는 무당집의 경우 자작나무를 아예 꽂아놓고 하늘과 연결하는 곳으로 여기는 것 등, 이런 식의 보이지 않는 공간들을 나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원형 안에서 ‘井’자로 나눠서 입구를 동남쪽에 둠으로써 방위가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이러한 구분들이 팔괘八卦로 발전합니다. 여기에서도 보면 큰 가운데 집이 중심에 있고 양쪽으로 집이 있고, 앞에 문이 있는 방식, 그리고 가운데 마당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기본적인 구조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옥의 경우는 중심이 한 개인지 두 개인지에 따라 다르지만 말입니다.

김남수 리처드 도킨스가 제창했던 문화복제자 ‘밈meme’을 좀더 밀고 나가서 유전자 경쟁처럼 감흥 있는 문화코드가 끈질기게 경쟁하면서 마치 무의식처럼 현재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에 주목합니다. 여행을 가면 밈의 생생한 생명적 감흥 능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예맥족도 한반도에서는 지나가는 ‘교차로 문화’를 구성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섬이나 대륙처럼 아카이빙이 되는 문화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이나 일본보다 우리는 밈에 대한 의식이 매우 약합니다. 특히 일본은 문화 아카이브를 통해 밈플렉스의 힘이 아주 강합니다.

밈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봅시다. 만주여행이 지금은 자동차의 힘을 빌리지만, 과거에는 말을 타고 갔습니다. 후자는 대륙의 무한 개방된 영역을 질주하는 감각, 만주벌판을 달리면 대지가 주는 감각이 밈의 일부가 됩니다. 물론 밈은 사라져버리기도 하지만, 무의식화된 밈은 잠복했다가 나타났다가를 반복합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대평원보다 만주벌판은 형태상 유사하나 단순히 평원의 시간이 아니라 감각적 기반 위에 서 있는 밈의 역사라는 현실이 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암묵적인 차원이 된 것 같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수레에서 유래한 집이라는 모티브도 계보학적인 조사를 해보니,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에 나타납니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이나 몽골의 암각화에도 수레와 집이 결합한 형태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천 개의 고원』의 12장의 표지를 보면 ‘알타이 전차’라는 이름으로 아주 허약한 수레 위에 집이 그려져 있는 삽도가 있습니다. “이동야금술”의 상징이 되겠죠. 중국에 이르면 차車를 뜻하는 갑골문이 본래 수레 위에 집이 있는 형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 벽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티브의 연속성을 보면 끈질긴 밈의 스펙트럼 또는 흐름을 아주 도도한 역사적 현실로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타이 전차,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중 제12장 삽도

조전환 만주에서 들었던 생각은, 조선의 문화가 위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개인의 마음속의 스펙터클이 밖으로 나와 건축적으로 표현됩니다. 지금 남아있는 당시 양식의 건축들, 가령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등을 보면 서로 공통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건물 자체가 자기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건물의 물적 형태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 안의 공간구조가 굉장히 다양해집니다. 이러한 건축을 처음 시작했던 사람들의 시도를 보면 분명하게 자기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내적 구조가 공간으로 반영되는데, 이는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속의 스펙터클에 의한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공간배치와 문화들이 조선시대에서 드러나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두문동에 갔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자들이 자신의 기준을 외부에서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배운 것을 기준으로 두면서 다르게 성장하게 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60년 넘어 중종 때부터 다시 모여들어 차이에 대해서 인식하면서 다양체를 형성하는 과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서 북쪽의 형태를 중시하는 부분과 남쪽의 관계를 중시하는 부분들이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한옥을 온돌과 마루가 만난 것으로 주로 이야기하지만, 바라보는 생각, 즉 북쪽과 남쪽 이 두 가지의 가옥 문화를 다루는 마음 자체가 만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점인데 우리는 단지 집주인의 성향에 따른 것으로 가볍게 보는 면이 있습니다. 좀 더 세밀하게 바라보면 밈적인 차원에서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식과 문화의 토대 공작인의 태도 중요

김남수 저는 예술이 종교적인 깨달음보다 더 상위의 차원이라 봅니다. 공작인 또는 편집자가 도인보다 더 위상이 높다는 것입니다. “학문은 나날이 더해가는 것이지만, 도를 닦는 것은 나날이 덜어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내부에는 여전히 후자의 지향이 강한 게 사실입니다. 백남준 작가조차도 “우리는 학문을 하면 안돼. 살아있는 진실을 추구해야지.” 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유럽의 헤게모니가 지난 300년 동안 지속되어 오면서 무너진 상보성의 원리를 다시 균형잡히게 세우는 것이야말로 매우 긴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예술이 우선 주도해야 하는 일입니다.

역사는 장구한 시간의 모멘텀을 특이점으로 만드는 게임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근현대사에는 그런 전환을 불러오는 특이점이 없습니다. 물론 1960년대에 근대화를 통해서 박정희라는 특이점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미우나 고우나 좌우간 특이점”이라는 식의 관점입니다. 거대사 혹은 지구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1751~1772년까지 제가 질투하면서도 분노하는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와 디드로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개별적인 지식을 모아 35권의 『백과전서』를 냈습니다. 이것이 모태가 되어 1910년 독일에서는 바르부르크 연구소와 도서관이 만들어집니다. ‘생각의 도서관’으로 생각을 끊임없이 현실화시켜주는 ‘바벨의 도서관’의 전 단계가 됩니다. 이후 1960년대 미셀 푸코가 중국의 백과사전을 비유로 가져오면서 ‘지식의 고고학’이라는 작업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일어납니다. 지식의 고고학은 사실 지식을 재료로 하는 브리콜라주bricolage 예술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90년대에 탈근대 논쟁을 하면서도 『백과전서』를 읽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마치 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도 『자본론』을 완독한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처럼. 한국 근현대의 지성사에서 이러한 허약성을 느낍니다. 성철스님께서 한국에는 도를 아무리 닦아도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읽는 한국의 학자는 아무도 없다고 통탄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토대가 없는 것입니다. 백남준 작가의 아까 그 말을 저는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지식과 문화의 편집 없이, 지금 이 시대에서 문화에 대한 『백과전서』가 없이 과연 유럽의 헤게모니를 전복시키는 특이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아무리 같은 반복은 없는 역사라고 해도 역사가 주는 일정한 교훈이 있습니다. 어떤 특이점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만드는 토대가 필요합니다.

조전환 우리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스키마schema,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 지식의 추상적 구조가 짜여야 합니다. 우주를 바라보는 우리만의 기본 잣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100% 동의합니다. 저 또한 이것이 어떻게 짜여야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한옥에 있어서도 우리의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 방식으로 유럽의 건축들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계속 고민을 할 것입니다. 유럽에 갔을 때 만만하게 느낀 것은 유럽의 건축은 형태로써 그냥 드러나있지만 그 뒤의 모습이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의 건축을 보면 건물 안쪽의 뒤에 맺혀지는 선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유럽건축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김남수 이쪽의 건축으로 유럽 건축에 대해 비평하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비평적 태도보다 조 목수께서 말씀하신 시베리아 타이가 숲을 배경으로 한 동북아시아의 목구조 건축과 헝가리를 중심으로 한 목구조 건축을 서로 연결하려는 작업에 특이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없었던 것을 만들고자 하는 공작인의 태도입니다. 레일을 깔아서 지식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대담무쌍하고 증명되지 않은, 푸코가 이야기하는 비지식과 암묵지暗默知의 반란은 아직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구나 시기상조라고 합니다. 그럼 언제 할거냐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기’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끊어진 채 널려진 단편적인 지식뿐인데 이것을 최대한 교차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유럽을 부러워하는 것보다, 일국의 사회를 향해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고 불평불만하는 것보다 떨기나무처럼 타오르지는 않지만 환하게 빛나는 개념의 지식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개념이 크리스탈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게으름이고 종종 느끼는 권태와 심드렁 증후군입니다. 일본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이런 것들을 백년 전부터 해왔고, 우리는 그런 작업의 일부를 번역해서 읽을 때는 지적인 쾌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는 그런 작업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생각하지 못하고 번번히 값싼 비평적 태도로 돌아가는데, 저는 이런 점들이 가장 불만입니다. 조 목수께서 가장 먼저 이야기한 것, ‘유라시아 뇌과학’은 창작적인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도인은 이렇게 사고하지 않습니다.

질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rhizome과 나무라는 형태가 있는데 나무는 사실 뿌리의 지혜를 받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화두가 된 것이기 때문에 리좀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리좀은 북방의 형태이고 나무는 기본적으로 생명을 존중하는 남방의 형태 아닌가요.

조전환 반대 아닌가요? 나무 구조는 북방의 타이가 숲처럼 한 가지 방향을 가지는 것일 뿐이고, 오히려 들뢰즈의 리좀은 사실상 “밀림의 재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북방의 수목 구조에서 밀림의 관점을 통해 나무 구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엉켜있는 과정으로서, 덩어리진 것을 발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남수 백석이 함경도와 만주를 많이 유랑 했었는데 「함주시초咸州詩抄」의 시편 중에 <북관>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북관이 함경도를 뜻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시를 제가 이번에 마음으로 품었습니다. “명태 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 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 에서 ‘뷔벼 익힌 것’은 정말 절묘한 표현입니다. 분절된 것을 비벼서 익힌다는 것, 이는 다시 ‘발효’를 시킨다는 것입니다. 만주에서 이 시를 생각하는데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 투박한 북관에서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에서 ‘끼민다’는 것은 계속 깨문다는 것이고, 눈앞에서 마주보면서 그 맛을 계속 음미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란젓은 미끌거리기 때문에 계속 씹어야 합니다. 뷔벼 익힌 것을 그냥 삼키는 것이 아니라 깨물면서 계속 음미를 하는데,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니 내음새 속에 여진女眞의 살내음새를 맡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여진은 계집 녀와 진실 진입니다. 우리 민족인 동시에 여성성을 내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니 내음새’라고 하니 한반도에 두고 온 자신의 여인의 속살에서 나는 냄새, 혹은 추억이 배인 온갖 냄새이겠죠. 더 할 수 없이 관능적입니다. 요즘 글이란 형용사를 배제한 주어와 동사 위주의 문장이 기본 아닙니까? 그런데 이 형용사의 향연이란 정말 놀랍습니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후각적 표현에 완전히 감동받았습니다. 이 뒤에 미각적 표현도 나오는데 “비릿한, 얼근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新羅 백성의 향수鄕愁도 맛본다”에서 신라의 백성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얼빈에 갔더니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복권시킨 것이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阿骨打입니다. 아골타는 “나는 신라 왕족으로써 망명한 김보(김함보)의 후예다”라며, 한반도와 만주가 연결되어 있는 이 거대한 역사 단위를 시사한 바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테제에서 ‘아我’라고 하는 우리, 즉 문화복제자 밈이 같은 이들은 신축적으로 작동하면서 민족 단위를 넘어서 포괄할 수 있다고 천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극 시대는 인정하면서도 금과 고려의 남북극 시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선을 긋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얼빈에서 신라백성으로서 아골타와 그 후예는 향수를 느낍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마음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 생각에는, 아직 막연하지만, ‘뷔벼 익힌 것’이라는 표현이 발효와 합금을 모델링 할 수 있는 방법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전에 백남준 선생님이 문화의 비빔밥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이보다 백석은 더 진전된 것입니다. 비비다-비빔밥을 만들어서, 익힌다–발효시킨다는 것인데, 이 ‘비비다’와 ‘익힌다’의 결합이 아직 그게 실행적으로는 무엇인지 좀 더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조전환 그것은 안동에서 먹는 가자미식해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게 (함경도) 젓갈과는 좀 다르죠.

김남수 그런데 그런 사항들을 『백과전서』 형식으로 쓰지 않으면 말짱 헛것이라고 봅니다. 감각의 고수인 시인 송수권, 문학평론가 고 천이두 선생, 살아 있지만 약간 비틀린 김지하 선생이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후학들이 꺼내어 쓸 수 있는 정전正傳화된 미학이 아닙니다. 절반은 공식적인 상태고 절반은 암묵지 상태입니다.

조전환 한마디로 하늘에서 영감을 받아서 떠드는 것입니다. (웃음) 그런데 김남수 선생은 그것을 눈을 똑바로 뜨고 구조를 짜자는 뜻이죠.

김남수 서양에서는 그렇게 해서 우리가 깜짝 놀라잖아요.

조전환 밑으로 지식의 군단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웃음)

아시아 예술의 잠재성

분량15,804자 / 30분 / 도판 3장

발행일2015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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