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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로지 균형과 도시성의 회복

김정혜

에콜로지란 사람들이 함께 잘살아갈 수 있는 물리적, 사회적 서식지(habitats)에 관한 학문으로, 그러한 삶을 조성하거나 좌절시키는 것을 인식하는(knowing) 방식, 그것을 통해 이 다층적으로 실현이 가능한 목적을 달성하게 하거나 혹은 이루지 못하게 가로막는 지식, 행위, 관습, 사회적 구조, 창조적이고 규범적 원칙들을 수립하는 에토스(ethos)와 아비투스(habitus)에 관한 학문이다.

— 로레인 코드, 『에콜로지적 사고(Ecological Thinking)』, p. 25.

자본주의 어버니즘 시대의 도시성

1960년대 이후 (제2차 세계대전 혹은 ‘거대한 가속도의 시대’1 이후) 환경적 에콜로지의 생태 사슬을 일컫는 피드백 루프의 안정성이 눈에 띄게 파괴됐고, 특히 미디어가 지배하는 소비사회 시스템 안에서 환경적 – 사회적 에콜로지를 원활히 작동시키는 동력인 인간 주체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의지는 마비돼왔다. 21세기에 들어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사회 곳곳을 잠식한 이후로는 환경적 – 사회적 – 인간주체 · 정신적 에콜로지의 균형을 복구하려는 노력들이 이미 공고화된 경제체제로 계속 포섭되면서 반복적으로 좌절돼왔다. 이 글은 도시성(the urban)의 핵심 가치를 재확인하고 환경적 – 사회적 – 인간주체 · 정신적 에콜로지 사이의 균형 회복을 역설함으로써, 그 기반 위에서 어번 에콜로지 피드백을 제대로 작동시키고 원활한 순환 고리를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려 한다. 이 논의를 통해 도시성의 해방적 가능성과 에콜로지가 지닌 본래 의미를 상기하고, 결과적으로 능동적인 인간 주체가 만들어내는 인간(human)과 비인간(non-human)이 형평성 있게 공생하는 공간 — 자유공간 — 을 재소환하는 방식을 찾아보고자 한다.

서구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에 걸쳐 신마르크스주의 도시 이론가들(앙리 르페브르, 데이비드 하비, 마누엘 카스텔 등)이 글로벌화되는 자본주의, 그리고 그와 더불어 나타나는 도시화 과정을 분석하는 새로운 시각들을 제시하면서, 기존의 국가주의적(혹은 국가중심적) 도시화 과정의 비전이 위기를 맞게 된다.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 같은 비판적 도시정치경제학자들 또한 1970 – 1980년대 전반기에 도시 재구조화가 글로벌 차원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한다. 이들의 논리는 자본주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본질적으로 글로벌한 차원을 내재하고 있다는 새로운 입장에 입각해 있다. 그러한 논의 중 대표적인 예로 월러스틴의 ‘월드-시스템 분석’(world-systems analysis)을 꼽을 수 있다. 이 분석에서 월러스틴은 글로벌 자본주의하에서 전지구적으로 양극화되는 경제 상황과 그에 따라 변화하는 삶의 조건의 문제를 제기했다.2 한편 르페브르(Henri Lefebvre)와 동시대 학자들과 다음 세대 도시 전문가들을 막론하고 자본과 민주주의, 계층의 문제를 떠나서 도시와 도시성을 논의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르페브르는 초창기 글 「도시 혁명(The Urban Revolution)」에서 글로벌 ‘망’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 도시화가 ‘일반화’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글로벌 자본주의 경제에 기초한 지구적 도시화를 일찌감치 예측한 것이다. 실제 1980년대에 들어서서 자본주의적 어버니즘이 전세계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뒤이어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유사한 현상이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 눈에 띄게 부각됐다. 이렇게 20세기 후반 이후, 보다 정확하게는 신자유주의를 배태한 후기 산업자본주의 이후 도시성(물질적 / 비물질적 환경적 에콜로지)은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물질적 / 비물질적 사회적 에콜로지)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적 에콜로지가 도시 공간의 물리적 형성과 작동 프로세스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르페브르의 ‘도시성’ 개념과 같은 선상에서 하비(David Harvey)는 사회적 · 정치적 · 경제적 작용의 결과를 강조하면서 특히 경제문제와 계층 관계, 그것이 도시 형성에 미치는 경향에 주목한다.3 『저항의 도시』에서 하비는 특히 ‘잉여’(surplus) 개념을 통해 경제적인 것과 공간적 현상 즉 자본주의와 도시화의 관계가 연쇄적 · 순환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도시화가 요구하는 잉여 생산물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자본주의는 그렇게 끝없이 생산된 잉여 생산물을 흡수할(소비할) 도시화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와 도시화의 내적 관계성이 발생한다.”4 이렇게 도시성에 대한 관심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유발된 도시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어떤 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와 사회경제적 상황이 도시화에 미치는 이 같은 영향 관계는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다. 그보다 하비의 이 논의에서 더욱 관심을 끄는 대목은, 도시화가 계층 문제와 연결되는 과정에서, 도시화와 잉여의 생산 · 사용 관계성을 누가 통제하고 조정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점이다. 여기에서부터 도시화의 문제는 해방의 정치를 위한 잠재적 가능성, 즉 ‘가능한 도시 세계’(possible urban worlds)5 — 도시에 내재해 있지만 권력 관계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 로 초점이 맞춰진다. 따라서 특정 지역이 가지는 도시성의 의미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자본주의 시스템뿐만 아니라, 그 사회에서 변화하는 정치적 혹은 기업적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경제 체계를 통제하고 조정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과 같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부분의 (후기 식민주의) 국가들의 경우 독재정권이 들어서고 이들은 산업화를 통해 정치권력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대부분의 자원을 국가의 물질적 도시환경 재건에 투입한다. 물리적 도시경관이라는 측면에서, 또 경제적 · 산업적 여건이라는 측면에서 도시환경 재건은 모두 물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국가들의 산업화는 한편으로는 국가주의적 애국주의라는 기치하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굶주린 대중을 살린다는 명목의 경제 논리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 재건의 과정은 마치 대규모 자연재해 이후 새롭게 도시를 세우는 것과 같은, 말 그대로 백지화 상태(tabula rasa)에서 이루어지는 위로부터의 기획이다.6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제도화된 권력(정부와 개인 디자이너를 포괄)이 도시 공간 기획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에콜로지를 손상시켜 양극화된 도시 구조를 만들어내고, 결과적으로 환경적 · 사회적 에콜로지 사이의 전반적 피드백 루프를 파괴시키는가 하는 점이다. 문화역사지리학자 매튜 갠디(Matthew Gandy)가 주장하듯이 사회적 형평성이 부재하는 어버니즘 혹은 도시화는, 결국 사회경제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인구를 도시 중심부에서 외곽으로 이동시키는 방식의 신오스망주의적(neo-Haussmannite) 환경 개선 프로그램으로 쉽게 빠져들 수 있다.7 이것은 21세기 이후 점점 더 심화되고 있으나 특별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전형적인 젠트리피케이션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21세기 전환기에 글로벌 자본주의는 공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전세계 각 지역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면서 — ‘글로벌 자본주의’와 ‘지구적 도시화’가 상호 관계 속에서 함께 진척되기 시작한 것을 의미 — 환경적 에콜로지와 사회적 에콜로지의 관계적(relational) 영향 또한 글로벌 단위로 확장됐다. 예컨대 1997 – 1998년 동북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1998년 러시아, 2001년 아르헨티나 등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폭발하게 되는 사건은 지역들간 경제적 조건들이(뒤이어 사회적 조건으로 이어짐)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다는 점, 그래서 그 어떤 지역 · 국가도 글로벌 시장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8 이러한 경제적 환경의 글로벌화에 뒤이어 나타나는 사회적 에콜로지 현상(저임금 계층, 실업자, 이민자, 난민의 증가 등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러한 인구를 ‘쓰레기가 되는 삶들’로 표현한다), 그리고 사회적 에콜로지의 변화로 야기되거나 사회적 에콜로지의 변화를 야기하는 환경적 문제들 역시 글로벌 단위의 논의 사안으로 점차 확대됐다. 지난 20여 년 새 한국의 어번 에콜로지는 이처럼 거대한 글로벌 사회경제 조건하에 놓이게 됐다. 그리고 시야를 좀 더 확장해서, 지난 60여 년간 일어난 한국 사회의 (후기)산업시대까지 고려하면, 이 나라의 현재 어번 에콜로지는 정부 · 기업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도시 기획의 잔재 위에 신자유주의 글로벌 사회경제 시스템이 얽혀 있는 모양새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정부 혹은 건설업체들은 더욱 엄격하게 선별된 적합한 시민들(생산 및 소비 능력이 강화된 이들)을 위한 보다 수익성 좋은 고급주택단지를 짓기 위해 기존의 주거 지역을 계속해서 무차별적으로 무너뜨리고 있고, 그렇게 세워진 ‘빗장 도시’는 한층 강화된 감시 시스템으로 무장하고서 적합한 시민과 부적합한 시민의 공존이 점점 더 불가능하게끔 막아서고 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첩된 도시 기획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궁극적으로 이 사회는 환경적 – 사회적 에콜로지의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해서 상실해오고 있다. 지금 우리는 자본이 지배하는 권력과 그것에 의한 통제, 조정 시스템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고, 에콜로지의 균형을 회복 — 어쩌면 지금껏 에콜로지의 균형을 가져본 적이 없을지도 모르므로 이것은 회복이라기보다 창조 작업이 될 수도 있겠다 — 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것은 지역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 과제이기도 하다.

에콜로지의 균형을 향하여

(글로벌) 자본주의와 (지구적) 도시화의 공생 관계에는 역설적인 상황이 존재한다. 둘은 서로를 지탱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는 도시 형성과 존재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도시성, 즉 능동적이고 사려 깊으면서 책임감 있는 개인과 집단적 존재로 구성된 물질적 / 비물질적 공동체를 점차 파괴하고 있다. 이러한 둘 사이의 비극적 상호작용 안에서 환경적 – 사회적 – 인간주체 · 정신적 에콜로지의 관계성은 손상됐고 서로를 잇는 매끄러운 에콜로지 피드백 루프를 상실해왔다. 그러나 사실 모든 요소와 현상들은 대단히 복합적으로 연관돼 있어서, 글로벌 자본주의와 지구적 도시화가 어번 에콜로지를 손상시켰는지, 손상된 어번 에콜로지가 두 가지 현상을 가속화시켰는지도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 에콜로지의 본래 의미와 목적, 서식(inhabiting)의 의미를 되살림으로써 현재 자본주의 어버니즘의 작동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보려 한다.

그리스어로 ‘오이코스’(oikos)는 가구(household)를 의미하고 ‘에콜로지’는 인간이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살 수 있는 물리적, 사회적 서식지를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즉 에콜로지는 자연이나 자연적 환경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경제적 · 정치적 · 미학적 환경, 주체와 타자 사이의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사실 20세기 후반 이후부터 에콜로지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운동가들은 바로 이러한 본질에서 출발하여, 환경적 – 사회적 – 인간주체 · 정신적 에콜로지를 (수평적) ‘관계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점차 악화되어가는 에콜로지의 불균형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해왔다. 이들은 또한 인간과 환경, 인간(성)과 비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급진적인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점을 이 인식론적 대전환 프로젝트의 근원적 기반으로 제시해왔다.

역사적으로 1960년대 후반은 각 분야에서 의식 있는 전문가들이 백인 남성 이성애자 중심의 수직적 지배구조에 저항하는 대안적 세계관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던 결정적인 시기였다. 에코페미니스트 베레나 A. 콘리(Verena A. Conley)는 프랑스 68운동을 에콜로지적 인식의 전환점으로 보았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의 노력으로 얻어진 주체의 탈중심화로 인해 수직적 지배구조가 나란한 형태로 변화하고 수직적 세계관이 보다 수평적이 되면서 다문화주의와 에콜로지가 동일 선상에 놓이게 되었다.”9 또한 콘리는 1968년 프랑스 이후 “에콜로지가 서식가능성(habitability)을 측정하는 데 필요한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보았다.10 경관 건축 분야에서 에콜로지 개념을 공간에 적용한 사례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났다. 로버트 스미드슨(Robert Smithson) 같은 경관 건축가와 미술가들은 자연환경과 다른 존재들이 맺는 관계에 대한 실험을 보여줬다. 이러한 자연환경 – 인공(구축)환경 – 인간 사이의 관계적 측면에 관한 고민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이 같은 개념적 형태 실험을 통해 이어져오고 있다. 한편 환경적 에콜로지와 사회적 에콜로지의 관계성에 관한 실질적인 인식은 그로부터 몇 십 년 후, 도시문제들, 그중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을 비롯한 주거 환경과 그 이면의 구조적 문제들이 극도로 심각해지면서 눈에 띄게 부각됐다. 보다 최근에는 능동적이고 책임감 있는 주체가 만들어내는 공동체 주도의 서식지 회복을 위한 핵심적인 대안으로 ‘개입 · 참여’(engagement)의 논리가 부각되고 있다.

에콜로지, 특히 그것이 지닌 관계적인 측면은 현재 공간(공시적 축)과 축적된 역사 공간(통시적 축)과 관련한 윤리적 책임의 문제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에콜로지가 철학적으로 에토스(ethos) 및 아비투스(habitus)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그리스어로 에토스는 ‘익숙한 장소’ ‘관습’ ‘습관’ 등을 의미하는데, 이는 라틴어의 ‘모레스’(mores)와 상응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에토스는 에티코스(ethikos)의 근원을 형성하면서 ‘윤리, 윤리적 특성을 보여줌’을 뜻하기도 한다. 그 후 에콜로지는 환경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과 비인간의 행동, 즉 인간과 물리적 · 사회적 환경과의 (윤리적) 관계 구도를 그려가는 방식이라는 의미로 확장, 발전돼왔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에톨로지’(ethology) 개념을 발전시켜 “각 대상의 특성에 영향을 주고 받는 능력 · 힘”이라고 정의한다. 이렇게 모든 존재가 관계망 속에서 상호 영향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에콜로지는 ‘사회화 가능성’(sociabilities)의 문제이고, 역으로 사회화 가능성은 에콜로지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조건이기도 하다.11 둘째, 에콜로지적 사고와 접근에 있어서 통시적 축(시간적인 면)을 세우는 점 또한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아비투스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아비투스를 실체화된 역사, 제2의 자연으로 내재화되어 역사라는 것으로 잊혀진 것, 그러나 ‘생생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특정한 시간 – 장소를 만들어내는 권력 구조 관계 안에서 인간이 짊어져온 축적된 문화적·개인적 경험들과 장소성(placeness)을 연결시킨다.12 아비투스 개념은 이렇게 에콜로지에 시간적 차원을 더함으로써 서식지를 특정한 순간의 물리적 공간이 아닌, 개인 및 집단의 역사와 이들의 기억으로 구성된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많은 이들이 도시의 한 부분을 통째로 들어내는 방식의 도시재생 · 재개발을 위해 자신의 낡고 오래된 거주지와 금전적인 보상을 쉽게 맞바꾸려 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이 에콜로지를 윤리적인 시각에서 바라봐야 하는 지점이다.

에콜로지 혹은 에콜로지적 사고는 서식지 자체와 관계될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서 서식하는 방식, 혹은 인간이 서식지와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한 것이기도 한다. 따라서 장소(location)는 단순히 대상이 존재하는 배경이 아니라 주체가 다른 요소들과 지속적으로 관계적 교환 작용을 하는, 서식 과정을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콘리는 에콜로지적 사고에 관해 ‘세계에서 보다 더 잘 서식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정의하고 있고, 철학자 로레인 코드는 ‘서식’을 ‘사회적 · 정서적으로 책임감 있게 개입하는, 능동적이고 사려 깊은 실천’이라고 덧붙인다.13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는 『세 가지 생태학(The Three Ecologies)』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에코소피’(ecosophy, 에콜로지에 관한 철학)라는 개념을 발전시킨다. ‘에코소피’란 세 가지 에콜로지의 구성 요건(환경적 – 사회적 – 인간주체 · 정신적 에콜로지)에 담긴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을 명쾌하게 설명하면서 이를 글로벌 자본주의와 지구적 도시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잠재적 대안으로 제안한다.14 요컨대 현재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식의 문제에 대한 윤리적 인식이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야 비로소 전체적인 에콜로지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전략 구상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듯이 전략에는 주의해야 할 함정들이 존재한다. 첫째, 21세기 전환기에 환경파괴를 인지하고 그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한 이후, 에콜로지라는 용어는 종종 자연 생태계 보존이나 지난 세기 동안 오염돼온 자연환경에 대한 생화학적 청소의 의미로 국한되곤 한다. 사회적 에콜로지나 인간주체 · 정신적 에콜로지와의 관계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 없이 에콜로지는 이렇게 좁은 의미로 해석되면서, 또다시 자본주의 어버니즘에 부합된다고 판단되는 적합한 중산층 시민들을 위한 ‘환경주의’(environmentalism)로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 자연환경에 왜곡된 방점을 둠으로써 ‘환경주의’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도시재생은 친환경 · 생태 중심이라는 표현으로 수식어가 바뀌었을 뿐, 가시적인 도시환경 미화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을 유지하면서 도시환경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인구를 계속해서 외부로 밀어내고 있다. 친환경적인 가시적 도시환경이 에콜로지로 해석되면서 다시 한번 사회적 에콜로지 및 인간주체 · 정신적 에콜로지는 소외되고 마는 현실이다. 둘째, 한국과 같은 중상위 이상의 국민소득을 유지하는 개발국에서 발생하는 에콜로지 불균형의 문제는 저소득 저개발국가의 상황에 밀려 에콜로지 논의에서 주요 관심 사항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의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는 사이 이 사회에서 에콜로지의 불균형과 왜곡된 인식의 문제는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고 가시적인 사회경제적 발전상(특히 한국의 경우 스펙터클한 스마트 도시 건설 등)과 정치적 민주화에 가려 더욱 비가시화되고 만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치적 민주화가 반드시 사회적 에콜로지의 평등한 균형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셋째, 신자유주의 도시 컨텍스트에서는 도시 기획의 주체가 정부에서 기업으로, 혹은 (기업화된) 개인으로 변화하면서 통제와 조정의 힘이 과거보다 한층 더 비가시화되고 있다. 이 같은 비가시화는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에콜로지의 불균형을 한층 더 악화시키면서 최후에는 에콜로지의 피드백 루프를 회복 불능의 상태로 파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아울러, 위로부터의 도시 기획으로 만들어진 공간과 대비되는 공공 · 시민(public · civic) 중심의 공간에 관해 논의할 때 ‘공공’ 혹은 ‘시민’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하는 데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민주적 정치 영역에서 공공은 마치 사회경제적 자격 요건을 초월하여 ‘모든’ 이들을 포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고도 자본주의 도시 시스템에서 공공은 거의 예외 없이 생산 가치 및 소비 가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특정한 계층의 인구를 배제해오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는 기업이 공공영역에 개입 하여 일부 공공 공간(물리적 혹은 비물질적 공간)을 사유화하면서 공공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예컨대 기업 소유의 사유화된 공공 공간은 일반의 접근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공공 공간으로 여겨지곤 하는데, 이것은 (일부) 공공 · 시민의 접근을 허용하고 이들의 활동을 위해 사용될 수 있으면 공공 공간이 된다는 혼란스러운 개념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 공간을 둘러싼 논의에서는 제한된 (모조) 공공만을 위한 공간의 청결과 안전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다른 이들을 어떻게 배제하는가 하는 문제는 가려 있다. 실제 공공 · 시민 공간은 (비실체화된) 공공을 ‘위해’ 사용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체화된) 주체에 기반한 공공의 개입 · 참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망각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정부가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도시 기획의 역사적 잔재를 극복하고 공공의 주체적 권력이 기업적 시스템으로 포섭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에콜로지들의 관계적인 측면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환경적 – 사회적 – 인간주체 · 정신적 에콜로지의 손상된 피드백 루프를 복구하는 작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극심하게 손상된 에콜로지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는 서식하기(inhabiting)라는 행위 —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전체적 관계 혹은 관계 맺는 방식 — 를 수평적으로 인식하는 일(에콜로지적 사고)이 선행돼야 하고, 이에 대해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개입 · 참여를 실천할 수 있는 주체를 되살리는 일 또한 시급하고 중요하다. 그런 후에야 공공 · 시민의 공간 즉 그들이 개입 · 참여하여 만들어내는 공간, 그리고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 배제를 허용하지 않는 (자유) 공간에 기반한 도시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2018 베니스건축비엔날레는 ‘자유공간’(Freespace)을 주제로 제시했고, 각 국가관과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존재 환경에서 주제를 해석하여 각자의 방식으로 이를 재현했다. 한편으로 이는 민주주의 혹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귀결되곤 한다. 예컨대 독일은 ‘벽’을 일종의 상징 구조로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이는 과거 두 개의 독일로 나누었던 이데올로기와 통일독일을 가로막고 있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재현함으로써, 다시 새로운 벽을 허물어 포함적 대화의 장을 제시하려는 일종의 공간적 퍼포먼스다. 미국은 국가 탄생의 근거이자 현재까지 이들의 삶에 일부가 되어 있는 이민자 문제, 특히 국경이라는 경계를 넘는 불법 이주자를 주제로 다루며 민주주의 혹은 그에 대한 비판에 기반한 시민의 영역을 자유공간의 하위 주제로 내세웠다. 또 다른 한편,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환경적 생태와 사회적 생태의 균형을 위한 대화의 장을 만들려는 시도를 보여줬다. 국가관을 전시 기간 내내 대화의 장으로 열어두기도 하고(벨기에), 주체와 객체의 관점을 전도시켜 건축가가 만드는 구축 공간이 아닌, 외적 공간으로 시선을 돌려 자연을 자유공간으로 사유하게 하기도 한다(영국). 또한 표준 사이즈를 벗어난 아파트 공간 — 대부분 세입자를 위한 공간 — 을 아무런 내부 가구나 장식 없이 제시하여, 규범화된 구조에 소유권은 제공하지 않은 채 세입자를 가두는 현재 대다수의 주거 형태를 비판하기도 한다. 이것은 곧 근대건축과 신자본주의 경제의 만남이 만들어낸 현실에 대한 이의 제기이기도 하다(스위스). 나아가 인간세(anthropocene)에 이루어진 모던 이후의 모든 인간 중심 건축을 비판하고, 생태적 균형에 기초하여 인간과 자연이 상호 교류하는 대화의 공간을 인류가 추구해야 할 자유공간으로 제안하기도 한다(노르딕). 전자에 언급한 이데올로기적 자유공간이 지정학적 역사에 기반한 자유에 대한 해석이라면, 후자의 예들은 환경적 · 사회적 공간에 종종 정상 – 비정상이라는 기준을 이분법적으로 적용하여 가르는 이성적 인간 중심의 구축 환경에 대한 총체적 비판이다.

2018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이라는 제목하에 1960년대 기간 설비의 구축을 주도했던 국가기관 즉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역사적 · 건축사적 의미를 짚고, 국가주도의 프로젝트와 건축가들 개인의 유토피아적 상상이 만나 만들어낸 흔적이 현재와 미래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하고 상상한다. 이를 통해 국가가 주도하는 개발중심주의 안에서 건축가 개인이 상상력에 기반한 자유공간을 어떻게 확보했는지 (혹은 실패했는지), 그 연장선상의 역사에서 후대의 개인은 어떻게 자유공간을 확보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려 한다.(현재 급작스럽게 변경된 세운상가 일대 개발계획을 보면 개인의 실험보다 국가권력의 유령이 여전히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국관을 굳이 분류하자면 일차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 의미의 자유공간에 대한 탐색으로 보이지만, 한 층위를 더 들춰보면 이성에 기반한 인류세와 모던 건축에 대한 비판이 저변에 깔려 있다. 다만 도시 공간의 생태적 논의가 수면 위로 부각되지 못하게 만드는 역사적 · 정치적 상황이 무겁게 누르고 있을 뿐이다. 사실 이데올로기 측면에서도 역사적 층이 여러 겹 쌓여 있어서 전시의 메시지를 단선적으로 전달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불가능한 시도를 계속해왔고 앞으로도 기약 없이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전시는 자유민주주의를 논하기조차 어려운 환경에서 자유를 정의해야 하는 난국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래서 전시 공간에서는 다른 어느 국가관보다 복잡한 이야기들을 쏟아내듯 담아낼 수 밖에 없다. 하나의 공간에서 하나의 주제하에 하나의 담론을 명쾌하게 얘기할 수 없는 상태. 이는 경제적으로 제1세계를 꿈꾸며 사회, 정치적으로는 소위 개발국에 위치한, 2차 대전 이후 유일한 후기 식민 분단국가가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이렇게 누적된 역사적 흔적 위에서 도시적인 것과 환경적 · 사회적 생태의 균형을 논하는 것이 어떤 각도에서는 성급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공간 점유자들이 도시 생태의 균형이라는 궁극 목적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만 무차별적인 정치권력 앞에서 오랜 논쟁을 이어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도시 생태 균형의 문제는 이렇게 지역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만, 글로벌 정치 · 경제 틀 안에서 발생하는 전지구적 차원의 도시화 그리고 신자유주의 도시재생 문제에서는 공통적인 현상들이 공유되고 있어서, 글로벌 구조 안에서 우리의 상황을 함께 진단해나갈 필요성 또한 절실하다.

오사카 엑스포70 개막 후 도쿄를 방문한 인간환경계획연구소 스태프(윤승중, 김원 등), 1970 / 자료 제공: 김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여의도광장, 1989 / 자료 제공: 국가기록원

KBS방송국에서 주관한 이산가족 찾기 캠페인, 여의도, 1983 / 자료 제공: 서울시

기공이 설계한 제주 중문관광단지 조감도 설명을 듣고 있는 남덕우 국무총리, 1981 / 자료 제공: 국가기록원
기공이 설계한 제주 중문관광단지를 시찰하는 전두환 대통령, 1983 / 자료 제공: 국가기록원
기공이 설계한 서울 잠실5단지 주공아파트(1978년경), 현재 재개발 추진 중이다. 1978 / 자료 제공: 국가기록원

김정혜

현재 영국 UCL 바틀렛 스쿨 오브 아키텍처에서 건축사 및 이론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시에 도시환경에서 일어나는 건축디자인 및 미술 작업을 논의하는 연구자 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주요 연구 관심사는 도시환경과 정치 · 사회 · 경제의 관계성을 통한 에콜로지의 균형, 트라우마를 내재한 역사적 공간, 장소성 및 비장소성에 관한 것이다. 할 포스터의 『콤플렉스』(원제: The Art-Architecture Complex, 2011 / 2013), 찰스 젠크스 · 네이선 실버의 『애드호키즘: 임시변통과 즉석제작의 미학』(원제: Adhocism, 2013 / 2016) 등을 한국어로 옮겼다.

에콜로지 균형과 도시성의 회복

분량13,874자 / 28분 / 도판 20장

발행일2019년 3월 28일

유형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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