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계획: 모더니즘 유토피아, 또는 관료주의 계획
조현정
분량11,519자 / 23분 / 도판 25장
발행일2019년 3월 28일
유형논문
들어가며
1967년 서울시는 한강 개발의 일환인 윤중제 건설(1968년 2월 준공)로 확보한 여의도 부지의 개발계획을 김수근에게 위임했다.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설계(1959) 당선으로 건축계에 데뷔한 이래 김수근은 자유센터(1963), 부여박물관(1967) 등 전후 한국의 대표적 상징물들을 설계하며 ‘국가 건축가’로 부상하고 있었다. 정계와의 긴밀한 인맥을 바탕으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설립을 주도하고 종로3가 재개발 프로젝트(1967) 같은 대규모 도시계획을 이끌어온 그가 여의도 개발계획을 맡게 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김수근 팀으로 알려진 기공 도시계획부 소속의 건축가들은 비행장으로 사용되던 한강 하중도의 나대지를 국회의사당 · 시청 ·대법원 · 외국 공관 등 주요 정부 시설과 초고층 상업지구, 현대식 주거단지가 들어설 서울의 새로운 중심으로 변모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1 1968년 2월 초안이 나온 데 이어, 그해 8월 중간 보고서가 작성됐고, 1969년 5월 여의도의 토지이용과 교통계획을 상세히 서술한 약 250쪽에 이르는 두툼한 학술용역 보고서 『여의도 및 한강 연안 개발계획』(이하 여의도 계획)이 서울시에 제출됐다.2 이들이 선보인 것은 기능주의 토지이용, 입체적 공간 활용, 체계적 도로망과 충분한 녹지를 특징으로 한 모더니즘 건축의 유토피아 비전이다. 김수근 팀은 정식 보고서 제출 외에도, 건축계 안팎의 관심을 고취하기 위해 건축지와 일간신문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미묘하게 논조를 달리하며 작업의 진전 상황을 소개했다.3 그러나 정작 실제 개발은 김수근 팀이 배제된 1971년 수정안에 근거해 진행되면서 이후 여의도의 모습은 김수근 팀의 원래 구상에서 상당히 멀어지게 된다.4



여의도 계획을 둘러싼 기존 논의의 갈래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 프로젝트를 권력의 갑작스럽고 자의적인 결정 또는 당국의 영리추구로 인해 왜곡되고, 결국 실패에 이른 안타까운 건축적 사건으로 간주하는 견해다.5 이는 1960 – 1970년대 박정희 정권하의 여러 건축적 사건을 이해하는 주요 방식이기도 하다. 실제로 모더니즘 건축의 이상을 보여주는 김수근 팀의 원안은 1971년 수정안에서 대폭 삭제 · 변경됨으로써 실제 여의도 개발에 반영되지 못했다. 특히 여의도 중심부에 북한의 김일성광장처럼 군사 행진이나 각종 동원 행사가 가능한 대광장을 만들라는 청와대의 일방적인 요구는 동서축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조직된 원래의 디자인이 좌초한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날을 기념해 5 · 16광장으로 명명된 대광장의 존재는 여의도를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프로파간다이자 냉전 시대의 체현으로 논의하게끔 만드는 지배적인 내러티브를 제공했다.
한편 건축가의 유토피아적 열망이 권력에 의해 오염되고 변질됐다는 식의 해석은 정치와 경제 논리로 훼손되기 이전, 순수한 아방가르드 건축 실험으로서 김수근 팀의 원래 비전을 복구하려는 접근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러한 입장은 여의도 계획의 실험적인 측면인 선형도시나 인공대지의 도입 등을 강조하며, 이 작업을 1960년대 전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유토피아 건축운동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려 한다.6
그러나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이러한 두 가지 입장은 모두 김수근 팀의 제안 자체가 건축의 직능적 전문성을 통해 도시문제를 해결코자 한 기술관료적 해법이라는 점에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다.7 김수근 팀의 건축가들은 국제 건축계의 첨단 동향을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도입한 한국 건축계의 아방가르드인 동시에 국가 건설의 과제, 보다 정확히는 도시 인프라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기술관료이기도 했다. 이들은 인구 급증에 따른 도시 팽창과 교통난을 겪고 있는 서울의 문제점을 면밀하게 진단하고, 각종 인구학적 통계와 경제 지표 등 실증 자료를 토대로 해결 방안을 제시했으며, 나아가 이를 실현하기 위해 5년 단위로 구체적인 개발계획을 수립했다. 1968년 초안 작성 직후 서울시장을 위시한 정부 관료들 앞에서 여의도 계획의 구상을 열정적으로 브리핑하는 김수근의 사진은 이 프로젝트가 가진 관료주의 계획(plan)으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여의도 계획의 의의는 아이디어로만 존재하는 이상적인 비저너리 건축(visionary architecture)이 아니라, 권위주의 정권의 지원 아래 현실화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고, 부분적으로나마 실제 도시 공간에서 실현됐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건축가의 이상과 권위주의 정권의 비전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교차하고 충돌 · 타협하는 공모 관계를 갖는다. 필자는 김수근 팀이 제안한 여의도의 청사진을 당시 사회 전반과 건축계에 팽배했던 미래에 대한 열망과 연결 지어, 이들의 비전을 1960년대 말 한국 사회의 시대적 조건과 제약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여의도 계획이 자동차 시대의 도래를 맞아 전례 없는 이동성과 속도감을 촉진할 수 있는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려는 시도였음을 환기하고자 한다.
1960년대와 미래주의 열풍
1960년대는 한국 건축에 모더니즘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전개된 시기이자, 건축에서 한국적인 게 무엇인지에 관한 모색, 이른바 ‘전통논쟁’이 부상하던 역동적인 시기였다. 한편, 모더니즘과 전통논쟁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건축과 도시계획에 만연했던 유토피아적 열망이다. 미래에 대한 관심은 한국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전후의 호황과 기술 진보, 우주 시대의 개막과 맞물린 세계적 유행이었다. 다니엘 벨(Daniel Bell),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 허먼 칸(Herman Kahn) 같은 미래학자들은 후기산업사회, 정보화사회, 원자력 시대 등 다양한 개념으로 미래 사회를 전망했다. 이는 당대 건축계에도 영향을 끼쳐 미래 도시와 주택을 제안하는 ‘비저너리 건축’ 붐이 일게 된다.
김수근은 누구보다도 미래주의 열풍에 깊이 관여한 건축가였다. 1962년 『한국일보』에 실린 김수근의 「미래의 도시상」은 여의도 계획의 원형이 된 아이디어들 — 공간의 입체적 활용과 충분한 녹지 확보, 보차분리 원칙에 근거한 입체 도로망 등의 구상 — 을 담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Radiant City)를 연상시키는 미래 도시는 그가 모더니즘적 유토피아 도시 비전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8 1966년 창간된 『공간』은 마셜 매클루언, 콘스탄티노스 독시아디스(Constantinos Doxiadis), 벅민스터 풀러(Buckminste Fuller), 메타볼리즘(Metabolism), 메가스트럭처 등 1960년대 서구와 일본의 미래주의적 담론과 비저너리 건축 디자인을 국내에 소개하는 창구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의 미래주의 열풍은 단순히 서구의 미래학 담론이나 유토피아 건축운동의 맥락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정치적 특수성을 갖는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풍요로운 내일에 대한 장밋빛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5년, 10년, 20년 후 한국의 밝은 미래상은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과를 선전하는 효과적인 기제로 작동했다. 특히 도시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는 도시계획 분야는 관료주의적 계획의 비전을 홍보하는 데 전략적으로 활용됐다.
1966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시청 앞에서 성황리에 개최된 ‘도시계획전시회’는 도시의 미래상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대표적인 예이다. ‘불도저’라는 별명에 걸맞게 대규모 건설 사업을 정력적으로 추진했던 서울시장 김현옥은 “보다 희망에 찬 내일과 의욕적인 삶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도록 서울 도시계획의 전모를 공개한다고 밝혔다.9 전시장에 마련된 스펙터클한 도시 모형과 조감도는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추진된 개발 사업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공감과 동의를 끌어내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기공의 여의도 종합개발계획 모형, 1968 
『공간』 21호 표지에 실린 여의도 종합개발계획 모형, 1968 / 자료 제공: 공간
여의도 계획은 한국 사회의 미래 시제를 선도했던 두 인물, 김현옥과 김수근의 합작품으로 볼 수 있다. 김수근 팀의 디자인은 김현옥의 관료적 구호와 딱딱한 통계 자료에 근사한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여의도 개발을 도시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희망이자 당위의 과제로 제시했다. 기흥성과 송경화가 제작한 정교한 모형은 흙먼지 자욱한 거대한 공사판이 앞으로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를 손에 잡힐 듯 실감 나게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여의도 계획의 비전은 무엇보다도 속도와 이동의 레토릭으로 강조됐다. 김수근은 이 프로젝트의 전모를 신문 지상에 소개하며 “꿈을 달린다” “청사진을 따라 미리 달려본 꿈의 서울” 같은 표제를 사용해 ‘질주’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10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내달리는 질주의 메타포는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압축적 근대화와 산업화를 추진했던 1960년대의 시대상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동차가 논스톱으로 달리는 탁 트인 아스팔트의 고속도로는 단순한 길이 아니라 미래와 연결된 통로였으며,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속도가 주는 자유와 해방감은 미래 그 자체로 여겨졌다.11 실제로 여의도 계획은 메타포의 차원을 넘어 혁신적 교통 인프라를 구축함으로써 끊임없이 이동하는 고속화 시대의 도시상을 구현하고자 했다. 김수근 팀이 여의도에서 시도한 것은 일개 지역 단위의 개발계획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국가적 질주를 가능케 할 국가적 인프라 구축이었다.

여의도, 자동차 시대의 도시 모델
여의도 계획은 자동차 시대의 도래에 맞게 도로망은 물론 도시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구축할 필요에서 등장했다. 여의도 계획의 서문에서 김수근 팀은 “현대 도시의 시공간 구조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새로운 도시성(urbanity)을 창조한다”라는, 다소 추상성이 강한 목표를 제시했다.12 좀 더 구체적으로 이들은 현대 도시가 당면한 문제의 근본 원인을 도시의 시간 체계인 교통과 공간 체계인 형태 사이의 부조화에서 찾았다. 실제로 자동차 수의 급증은 1960년대 도시 시공간의 질서를 흔들어놓은 결정적인 사건으로 꼽혔다. 자동차가 가져온 새로운 속도감과 이동성이 기존의 인간적 스케일을 무효화시키고 메가스트럭처나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 같은 전례 없는 규모의 건축과 도시의 출현을 요구한 것이다.



물론 1960년대 말 한국 사회에서 자동차 시대는 불확실한 미래의 일이었다. 1968년 전국의 자동차 보유 대수는 7만 대에 채 못 미쳤고, 자동차 생산량 역시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산업 구조를 중공업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자동차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면서 자동차 시대는 당위이자 당연한 미래가 됐다. 그 미래의 서막을 연 것은 박정희 정권이 총력을 기울인 고속도로 건설이다. 1968년 12월 경인고속도로가, 1970년 7월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묶이는 고속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자동차 보급률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서울에서부터 도시 구조가 자동차 중심으로 재조직되기 시작했다. 1966년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김현옥은 ‘도로 시장’으로 불릴 정도로 도로 건설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군인 출신으로 수송 전문가였던 그는 부임 4일 만에 「서울특별시 교통난 완화책」을 내놓고, 아직은 미미하나 증가 일로에 있는 자동차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지하도 및 보도육교 건설, 간선도로 확장, 노면전차 철거 등의 사업을 의욕적으로 시행했다.13
자동차 시대의 도래가 도시계획과 건축 디자인에 끼칠 영향은 당시 건축계에서도 주요한 관심사였다. 정부의 자동차 중심 도시 정책에 대한 건축가들의 주된 반응은 일단 우려와 비판이었다. 1967년 대한건축가협회는 자동차 전용 고가도로 건설을 반대하며 대중교통의 확충을 주장한 성명서를 발표했다.14 김수근 팀도 1969년 4월 『공간』에 수록된 여의도 계획 특집에서 “도시가 차와 도로만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며 자동차만을 위한 도시계획을 경계했다.15 그러나 적어도 이들은 ‘마이카 시대’가 근미래임을 전제하고 있었고 이에 대비한 새로운 도시 구조의 중요성 또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김수근 팀에게 여의도는 자동차 시대의 도시 모델을 실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이는 자의적 판단이 아니라, 인구 통계와 국민총생산 · 소득 지표 등 실증 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다. 요컨대 여의도의 소득 수준이 서울 평균보다 2배, 전국 평균보다 4배 높을 것으로 예측하고, 이에 비례해 자동차 보유율이 다른 지역의 평균치를 훨씬 상회하리라는 전망에서 도출된 계획이었다.16
여의도 계획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속화 시대의 새로운 도시형을 제안한다. 첫째, 도로를 따라 도시가 선형으로 성장하는 ‘선형도시’의 도입이다. 선형도시는 1882년 스페인 도시계획자 소리아 이 마타(Soria y Mata)가 간선도로를 축으로 성장하는 도시 모델을 제안한 이래, 대안적인 도시 구조를 고민하던 건축가와 도시계획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17 특히 전세계 인구 증가와 도시 팽창이 가속된 1960년대에, 기존의 방사형 도시를 대체하는 질서 있고 계획적 성장이 가능한 도시 모델로 재소환됐다. 단게 겐조의 ‘도쿄계획, 1960’이 그러한 선형도시를 도입한 대표적 도시계획으로, 여의도 계획이 참조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게의 안이 도시의 중심축과 선형도시의 축선을 일치시킨 것과 달리, 동서로 긴 여의도의 지형 조건을 고려해야 하는 여의도 계획은 동서 방향의 중심업무지구와 별개로 이와 직교하는 남북 방향의 관통 도로를 선형도시의 축으로 삼았다. 여의도 계획에서 척추 역할을 하는 남북 논스톱 고속도로는 원래 여의도 내부 교통에 영향 받지 않도록 지하 도로로 구상됐으나,18 이후 지상 도로로 변경돼 당시 막 완공된 경인고속도로와 연결된다.

이렇듯 선형도시를 내세운 여의도 계획은 여의도를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 메갈로폴리스의 중심 지역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수도권 개발이라는 보다 큰 맥락에서 논의될 수 있다. 메갈로폴리스는 프랑스 지리학자 장 고트만(Jean Gottmann)이 보스턴 – 뉴욕 – 필라델피아 – 워싱턴을 잇는 미국 동북부 산업벨트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개념으로, 메트로폴리스 이후 출현할 도시의 미래상이었다.19 특히 국가주도의 경제 발전을 추진하던 한국에서 고속도로와 철도망으로 연결된 도시군(群)인 메갈로폴리스는, 집적의 이점을 최대화할 수 있는 산업 발전의 전략적 거점으로 간주됐다. 여의도 계획에 관여했던 서울시 도시계획 담당 공무원 손정목은 1968년 발표한 「교통수단의 고속화와 국토공간의 재편성」이라는 글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메갈로폴리스를 구축함으로써 국가 경제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20
한편, 여의도 계획의 초기 단계에서 김수근 팀은 경인 메갈로폴리스의 축을 휴전선 너머 북한 영토까지 확장시켜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하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1968년 광복절에 발표된 「한국의 미래상, 꿈을 달린다」라는 글은, 자동차 도로와 고속철도로 인천(생산 공간) – 서울(주거 공간) – 금강산(재생 공간)을 연결하는 통일한국의 국토 구상을 담고 있다.21 이 야심찬 국토개발 비전은 일본과의 교역을 염두에 두고 경부축을 강조한 실제 국토개발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1969년 최종 보고서에서 휴전선 너머의 금강산에 관한 언급이 빠졌고, 1971년 수정안에서는 메갈로폴리스 구상 자체가 사라진 채 여의도만의 개발 계획으로 축소되고 만다.
고속화 시대를 앞두고 여의도 계획이 제시한 두 번째 어젠다는, 원활한 차량 통행과 보행자 보호라는 대원칙하에 공간 계획과 교통 계획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먼저 목적과 기능에 따라 속도를 달리한 위계적 도로망(관통 – 간선 – 분지 – 진입)을 도입해 차량의 중단 없는 흐름을 도모하고, 자동차의 장점인 ‘도어 투 도어’(door-to-door)의 접근성을 극대화하도록 했다. 동시에 자동차의 위협으로부터 보행자를 보호하고, 시민 생활을 활성화하기 위해 보차분리에 근거한 보행자 데크, 차 없는 오픈 스페이스, 공원과 녹지의 확보 등을 제안했다. 특히 보행자 공중데크는 입체적인 보차분리를 통해 자동차와 보행자 간의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창출하는 자동차 시대의 대표적인 디자인으로 볼 수 있다. 지상 7m 높이에 세워진 여의도의 보행자 데크는 지상 주차장과 연결돼 섬 외부에서 방문한 사람들의 접근로 역할을 하는 동시에, 공중 다리를 통해 차량 없이 여의도 내부의 다른 지역으로 도보 이동할 수 있게끔 한다. 세운상가에서 이미 도입된 바 있는 보행자용 공중데크는 여의도 계획의 초기 구상에서부터 존재했고, 이후 다섯 개의 고리가 연결된 형태로 구체화돼 여의도 계획에 강렬한 시각성을 부여하게 된다.22

자동차의 중단 없는 흐름을 강조한 전전(戰前) 세대와 달리, 자동차와 보행자의 공존 문제는 김수근뿐 아니라 팀텐(Team X)으로 대표되는 전후 세대 건축가들의 주된 관심사였다.23 특히 보행자의 안전과 권익은 당시 교통공학자와 정책 입안자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여의도 계획의 참조 대상이기도 한 콜린 뷰캐넌(Colin Buchanan)의 베스트셀러 『도시 교통(Traffic in Towns)』(1964)은 자동차 시대의 도시 디자인에 관한 영향력 있는 연구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24 영국 교통부의 의뢰로 작성된 이 보고서는 자동차 시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각종 사고 · 공해 · 교통체증 등 자동차의 위협으로부터 보행자를 보호하고 도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환경 영역(environmental area)’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제안했다.25 여의도 계획에 도입된 보행자 데크를 비롯해 오픈 스페이스와 녹지 역시 당시 도시계획 분야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환경에 대한 배려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생산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자동차 중심으로 도시문제에 접근한 당국의 입장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운다. 그 현실화 여부와 별개로 여의도 계획이 당국의 도시 정책에 대한 개입이자 비판, 때로는 대안으로 작동했으며, 자동차 시대의 새로운 공적 공간을 제안했다는 점은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이후 국가 프로젝트에서 손을 뗀 개인 김수근에게 보행자와 환경은 보다 중요한 문제가 된다. 1979년 그는 「나에게 서울시 교통문제를 맡긴다면」이라는 글에서 서울 사대문 밖에 주차장을 설치해 도심의 자동차 진입을 전면 금지하고 자전거와 대중교통을 활성화함으로써 수목이 우거진 금수강산을 조성한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철저한 보차분리의 원칙을 도시적 규모로 확장한 이 주장은 1990년대 중반 이후에나 유행한 ‘차 없는 거리’를 예견케 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상이다. 자동차 없는 도시 공간에 대한 김수근의 구상은 자동차 도시의 모델로서의 여의도 계획에서 한참 멀어진 듯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맹아는 여의도에서 싹텄다고 할 수 있다.26
나오며
1969년 김수근이 기공을 사직하고, 이듬해 김현옥 역시 와우아파트 붕괴의 책임을 지고 시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여의도 개발계획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여의도 중심부에 대광장을 만들려는 박정희 정권의 지침과 더불어 여의도를 둘러싼 정치 · 경제적 조건과 서울시 도시 정책에 변화가 있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하고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축의 비중이 감소한 것이다. 따라서 서울의 새로운 중심이자 경인고속도로를 축으로 한 수도권 확장, 더 나아가 국토개발의 거점으로 여겨졌던 여의도의 중요성 또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실제로 당초 계획된 시청과 대법원, 외국 공관의 여의도 이전이 무산되고 국회의사당 하나만 건립되는 데 그쳤다. 이에 따라 한강 개발이라는 큰 그림의 핵심 프로젝트는 여의도에 국한한 개발계획으로 축소되고, 여의도는 재정난에 빠진 서울시를 위한 자금원으로 여겨져, 기존의 기능주의적 분리 원칙 대신 매각에 용이한 방식으로의 자의적 토지이용이 계획됐다. 무엇보다도 김수근 팀의 원안과 비교해 1971년 수정안에서 그 중요성과 분량이 현격히 줄어든 부분은 교통계획이다. 공간과 도로의 통합적인 접근과 도로의 위계적 분리 원칙이 무시됐고, 원안의 혁신성을 드러내는 보행자 데크가 기술적 · 재정적 문제로 백지화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의도 계획을 손쉽게 실패로 규정하거나, 국가권력에 희생된 아방가르드의 운명으로 애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변화하는 외부 조건에 끊임없이 적응해가며 수정을 거듭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 작업이 건축가의 이상이 그대로 투사된 비저너리 건축이 아니라, 실제 도시 공간 속에서 작동한 유기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국가의 강력한 개입과 이로 인한 갈등, 타협의 과정을 겪으면서 김수근은 기술관료로서의 역할에 적잖은 피로와 환멸을 느낀 듯하다. 여의도 계획을 끝으로 기공을 떠난 김수근은 인간환경계획연구소를 설립하며 “타의 아닌 자의로 시간을 마음껏 써보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한편,27 연구소가 주최한 미래학 세미나의 개회사에서 “무책임한 건축가와 자유로운 예술가가 함께 미래를 디자인”할 것을 제안한다.28 이 언급은 그가 1960년대를 대표하는 국가 건축가이자 기술관료로서의 복무를 더는 지속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들린다. 실제로 1970년대 들어 김수근은 도시적 규모의 국가 프로젝트를 기꺼이 중단하고, 주택이나 종교 시설 같은 비교적 소규모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건축 언어를 모색하게 된다.
조현정
현재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문사회과학부에서 미술사와 건축사를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에서 일본 전후 건축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과 일본 건축의 영향 관계 및 건축가와 미술가의 협업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Metabolism and Cold War Architecture」(2014), 「Tange Kenz’s Tokyo Plan, 1960, A Plan for Urban Mobility」(2018), 「예술로서의 건축, 작가로서의 건축가: 김중업과 1950년대 한국 건축」(2018) 등이 있다.
여의도 계획: 모더니즘 유토피아, 또는 관료주의 계획
분량11,519자 / 23분 / 도판 25장
발행일2019년 3월 28일
유형논문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모든 텍스트는 발췌, 인용, 참조, 링크 등 모든 방식으로 자유롭게 활용 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의 출처 및 저자(필자) 정보는 반드시 밝혀 표기해야 합니다.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이미지의 복제, 전송, 배포 등 모든 경우의 재사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