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남한 사회의 SF적 상상력: 재앙부조, 완전사회, 학생과학
임태훈
분량23,896자 / 48분 / 도판 11장
발행일2019년 3월 28일
유형논문
혁명 이후 영년(1960년)의 SF
4 · 19혁명으로 독재자를 쫓아내긴 했지만 사회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운 놈 하나 물러나게 했다고 분단과 냉전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고, 가난과 피폐로 얼룩진 인민의 일상 또한 여전했다. 곧이어 들어선 민주당 정권은 무능하고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었다. 이들은 이듬해 닥칠 쿠데타와 그 후 18년간이나 이어질 박정희의 시간을 예감케 하는 전조에 불과했다.
1960년 『자유문학』 제1회 소설공모전 당선작인 김윤주의 「재앙부조(災殃浮彫)」에도 파국의 징후가 여실히 감지된다.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가 이 소설의 무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잔해를 헤집고 다니고, 방사능에 피폭된 몸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간다. 다음은 이 소설의 첫 장면이다.
버섯구름의 재앙은 압도적이고 순간적이었다. 사진(沙塵)인지, 재인지, 연기인지 분간할 수 없는 황적색의 안갯속에서 이 문명도시는 해체하였다. 빌딩들은 채석장의 돌무더기가 되었다. 아스팔트는 화산의 용암처럼 녹아 흐르다가 아무렇게나 굳어버렸다. 역전 광장에는 엿가락 모양 흰 레루들이 뒹굴었다. 전차는 버스를, 버스는 전차를 박살하였다. 가로수가 어쩌다 타다 남아, 새까만 말뚝이 된 것이 오히려 기이(奇異)하였다. 공원의 못에서는 잉어의 내장이 썩어 났다. 물론 분수함은 빠개졌다. 개선문은 주춧돌만 남았고, 박물관의 높고 넓던 돌계단은 무너지고, 오랜 역사의 유물들이 재가 되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종말이었다.1

혁명 이후 영년의 SF는 이렇게 시작된다. 작가 김윤주는 평안북도 태천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경성제국대학 출신이었다.2 당선작을 냈음에도 그는 소설가로서의 삶에 큰 미련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유문학』 심사위원들(안수길, 김이석, 이어령)의 심사평도 썩 호의적이진 않았다. 이후 그는 『신약성서』 번역과 출판 활동에 전력했다.3 훗날의 성서 작업과 연관 짓지 않더라도,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 「재앙부조」를 묵시록의 현대적 메타포로 읽어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의의는 핵폭발이나 폐허에 대한 음울한 묘사보다는, 정신이상을 일으킨 절름발이의 일장 연설 장면에 있다. 그는 한때 돈만 믿고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다가 번번이 떨어진 인물이다. 핵전쟁의 폐허에서도 이런 인물은 어떻게든 살아남은 것이다.
… 에 여러분 만약 내가 국회의원이 되어 내 사리사욕만 채운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말입니다. … 에 여러분 나를 끌어다가 동네몰매를 주십시오. 아니 차라리 이 대갈 통을 밧아버리십시오. … (중략) … 아 하나님 아버지시어, 이 죄 많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 하나님 아버지시어 나를 건지소서 … 나를 한번만 용서하소서.4
1960년은 2012년과 마찬가지로 대선과 총선이 모두 치러진 해였다. 그것도 대선만 두 번에 총선이 한 번이다. 부정선거로 밝혀진 3 · 15대선은 이승만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고, 혁명 이후 7월엔 국회의원선거가, 8월엔 대통령선거가 다시 치러졌다. 거듭 반복된 선거에도 사회는 달라질 게 없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청산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4 · 19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기에 민주당은 자유당 못지않게 보수적이었다.
「재앙부조」의 주인공 창수도 조만간 아사(雅士) 아니면 병사(病死)할 절망적인 상황이다. 함께 무리를 지어 식량을 구하러 다니는 동무들도 하나둘 미치거나 죽어가고 있다. 창수는 간절히 기적을 바라지만 하늘에선 방사능비가 추적추적 쏟아진다. 희미하게나마 창수에게 용기를 북돋아준 것은 개미떼의 행렬이었다. 개미떼는 그가 뚫길 포기하고 있던 지하실에서 음식물 쪼가리를 주워 오고 있었다. 창수는 다시 기운을 내 지하실을 파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미래는 아무래도 암담해 보이기만 한다. “밤은 가고 아침이 왔다. 그러나 빛은 없고 죽음의 초토 위에 음산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5 소설은 여기서 끝나버린다. 심사위원 안수길은 이런 결말을 심심하다고 평했다. “이 작품은 수척하다는 느낌이었다. 살이 꼈으면 싶었다. 무슨 말이야 하면, 폐허가 된 도시의 위기라든가, 작중 인물들의 언동이 다이나믹 했으면 싶다는 뜻이다.”6 또 다른 심사위원 김이석도 결말에 아쉬움을 표했다. “「재앙부조」는 쓸 것을 다 쓰지 못하여 작자의 의도가 분명히 표현되지 못한 감이 없지 않아 있으나, 어떤 세계를 창조하겠다는 그 의욕은 크게 사고 싶다. 그만했으면 인물 설정도 좋았고 필력도 있는 편인데도 독자에게 감명을 줄 수 없는 것은 워낙 소재가 벅찬 때문이 아닐까. 그 때문에 작자는 손해를 본 것 같은 감도 없지 않아 있다.”7
그러나 심사위원들의 바람과 달리, 1960년대의 첫번째 겨울을 앞두고 발표된 「재앙부조」는 필연적으로 이런 결말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은 김이석이 평하듯 다루기 벅찬 소재에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혁명도 미완, 민주주의도 미완, 전후의 재건도 미완인 현실에서 그 모든 만연한 결핍을 반영하는 증환(症幻)을 이 작품이 그대로 앓고 있다고 진단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해석에 따른다면 심사위원들이 꼬집은 그 대목이야말로 다가올 1960년대의 사회 문화적 현상을 꿰뚫어볼 수 있는 가장 적나라한 지점이 아니었을까.
『완전사회』가 당선됐을 때
1953년부터 1971년 사이에 발표된 전후 한국 소설의 소재와 제재(題材)를 분석한 이명재의 「한국 전후 소설의 영역」에 따르면,
시대적인 배경의 고찰에서 시간의 기준으로 검토하면 현재가 86%, 과거가 13.7%에 비해 미래는 0.3%뿐이다. 60년 자유문학에 당선된 김윤주의 「재앙부조」 한 편이 고작 미래 소설이다. 구미의 경우 오웰의 『1984년』,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웨일즈의 『월세계의 첫 인간』 등으로 성과가 컸음에 비추어 다가올 새 세기를 관망하며 미래에의 지향은 필요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8
그러나 이 조사는 『자유문학』을 비롯해 문단에서 발행하는 문예지만을 대상으로 한 통계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1971년까지 발표된 미래 배경 소설에는 「재앙부조」만이 아니라 김종안(필명 문윤성)의 『주간한국』 장편소설공모 당선작 『완전사회』 (1966)도 있고, 『학생과학』에 게재된 수 편의 본격 SF 중 · 단편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셈법을 달리해도 한국 소설에서 SF 장르의 절대적 비중이 미미했다는 사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1960년대 들어 SF물이 가장 먼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영화계와 만화계였다. 이미 1950년대 말부터 SF영화의 수입은 꾸준히 이뤄졌다. 개봉 시기는 미국보다 대개 1 – 2년 정도 늦은 수준이었다. 1961년까지 〈우주수폭전(This Island Earth)〉(평화극장, 1957년 3월 개봉), 〈우주정복〉(단성사, 1958년 3월 개봉), 〈킹콩〉(평화, 1957년 12월 개봉), 〈타임머신〉(대한, 1961년 6월 개봉), 〈지저탐험(Journey to the Center of the Earth)〉(청계, 1961년 4월 개봉) 등이 많은 관객을 끌어모았다.
김산호의 SF만화 『라이파이』 첫 권이 세상에 나온 것도 1959년이었다. 『라이파이』는 제1부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를 시작으로 제2부 『피너 3세와 라이파이』, 제3부 『녹의여왕과 라이파이』, 제4부 『십자성의 신비와 라이파이』 등으로 시리즈가 이어졌다.
소설계에서 SF소설이 화제를 모은 것은 주로 외국 작가의 작품을 통해서였다. 『경향신문』은 1963년 7월 8일부터 필립 와일리(Philip Wylie)의 『개선(Triumph)』을 연재했다. 핵전쟁으로 북반부가 전멸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당시 중국은 1950년대 후반부터 대약진정책으로 핵 개발을 강행해왔고, 미국과 소련에 이어 핵실험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독자 대중도 이 소설을 SF물이라기보다는 근미래에 닥칠지 모를 사태를 예기하는 보고서쯤으로 받아들였다.

한편에선 적잖은 이들이 일본에서 유입된 각종 잡지와 책을 통해 SF의 표상과 서사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다만 그렇게 축적된 창작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좀처럼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1965년 『주간한국』이 20만 원의 고료를 내걸고 제정한 추리소설 공모전은 한국의 예비 장르소설 작가들의 창작 역량을 들여다보는 분기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당선작 『완전사회』뿐만 아니라 최종심에 함께 올랐던 작품들의 면모도 남은 자료에 기대어서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제1회 『주간한국』 추리소설상의 응모작은 총 39편이었고, 그중 12편이 예심을 통과했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네 편으로, 각각 김종안의 『완전사회』, 박이헌의 『미로』, 김진영의 『흑화』, 김현우의 『운명이여 통곡한다』였다. 공모 타이틀은 추리소설이었으나 응모 규정에 공상과학소설도 포함된 터라, 『완전사회』는 최종심까지 실력껏 올라갈 수 있었다. 심사위원은 정비석, 조풍연, 한운사 세 사람으로 이들의 평을 추려보면9 『흑화』는 “공산비밀조직과 경찰의 활동에 대한”(정비석), “다분히 007적인 무드도”(조풍연) 있는 소설이다. 『미로』는 “과학경찰” 이 등장하고 응모작 가운데 “추리소설의 맛을 내기는”(조풍연) 가장 잘 된 작품으로 꼽혔다. 『운명이여 통곡한다』는 “새디즘 마조히즘”(한운사)까지 불사하는 “괴기소설”(조풍연)이라 한다. 그리고 최종심에는 속하지 못했지만 『완전사회』와 함께 예심을 통과한 정해일의 SF소설 『네안데르탈인의 별』도 제목이 언급돼 있다. 첫 추리소설 공모에서 SF소설이 두 편이나 예심을 통과해 수위를 다퉜던 것이다. 심사위원의 글을 통해 제시된 응모작들의 키워드도 흥미롭다. ‘007’ ‘괴기소설’ ‘SF’ ‘과학경찰’ ‘새디즘 마조히즘’ ‘공산비밀조직’ ‘세계대전’ ‘냉동인간’ 등은 1960년대 대중문화의 수면 아래 잠재돼 있던 상상력의 다채로운 발현을 예고한다. 하지만 그러한 역량은 당선작 한 편에만 주목하는 문학상 시스템보다는 지속적으로 지면을 제공함으로써 독자 평가와 작품성 향상이 선순환되는 매체를 통해 육성되기 마련이다. SF소설에 한정할 때, 1960년대에 이런 역할을 실제 담당한 매체는 『학생과학』이 유일했다. 이 잡지에 대해선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한운사는 당선작으로 『완전사회』를 선정하면서 “하여간 이것을 쓴 사람은 굉장한 천재가 아니면 엄청난 도적일 것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의 독서 체험에 대한 궁금증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올더스 헉슬리나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을 제일 먼저 떠올렸을 법하다. 두 작품이 이 계열에서 SF적 상상력의 최고 걸작이자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가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것은 1973년이었다. 조지 오웰의 『1984』(1949) 역시 『멋진 신세계』보다는 빨랐지만10 『완전사회』가 당선되고 2년 뒤인 1968년에야 정식 번역됐다. 다만 두 책 모두 일어판으로는 오래전부터 유통되고 있었다. 『멋진 신세계』는 1933년 개조사(改造社)에서 나온 와타나베 후사부로(渡邉二三郎訳) 번역본이 있고, 『1984』는 1950년 요시다 켄이치(吉田健一)가 번역해 문예춘추사에서 간행됐다. 그리고 김종안은 스물두 살에 일본의 학생종합잡지 『신약인(新若人)』의 소설 현상응모에 가작으로 뽑힌 경험이 있다.11 물론 일본 서적을 통한 SF 체험에 대해 작가 자신이 밝힌 적은 없기에 짐작해볼 따름이다.
『완전사회』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161년 동안 수면캡슐에서 동면을 취하던 우선구가 깨어난 미래사회는 최첨단 기술에 기반한 문명사회다. 그사이 세 차례의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남성이 지구에서 모두 멸종하는 성(性) 전쟁까지 있었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8000명의 남녀들은 화성으로 이주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했다. 지구는 여성들의 ‘진성(眞性)사회’, 즉 ‘완전사회’가 됐고, 화성은 ‘남성사회’로 유지되고 있다. 두 세계는 언제라도 쌍방을 절멸시킬 수 있는 광자포를 겨냥하고 있다. 그런데 ‘진성사회’는 조금씩 분열되고 있었다. 께브주의(동성애)와 홀랜 정책(자위)이라는 새로운 성 문제가 심각한 사회갈등으로 번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자위행위를 권장하고 인민들은 동성애를 원한다. 양쪽으로 우파와 좌파의 지지가 갈리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사회는 일대 위기에 처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성 갈등처럼 보이지만 근저에는 계급 갈등이 깊게 박혀 있었고, 해결책을 고민하던 정부는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 작품 공모전을 연다. 우선구는 자신만이 ‘완전사회’의 치유책을 제시할 수 있다는 사명감에 불타 「미래 전쟁」이라는 소설을 쓴다. 채식주의자와 육식주의자의 전쟁을 통해 ‘께브’와 ‘홀랜’, ‘남성’과 ‘여성’의 대립을 은유적으로 환기하는 내용이었다. 그의 작품은 놀랍게도 ‘진성사회’를 감복시켜 적대 관계에 있던 화성의 남성사회와 교류를 시작하게 한다. 그런데 정작 소설은 이 지점에서 느닷없이 끝나버린다. ‘께브’와 ‘홀랜’ 사이에 화합이 이뤄졌는지, 화성과 지구 사회의 교류가 어디까지 진전됐는지 더 이상 이야기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짐짓 이분법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이분법적인 대결 구조를 몇 겹으로 덧붙이며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이야기 속 소설에서도 이 구성은 반복된다. ‘께브’와 ‘홀랜’이 서로를 문제 삼지 않게 되더라도, 화성과 지구가 평화적인 교류를 지속하더라도, 사회 갈등은 수백 수천의 대극(對極)을 그리며 얼마든지 생겨난다. 문제는 그 수많은 갈등과 화합의 카오스모스(chaosmos)를 이분법으로 환원해버리는 논리의 폭력성이다. 파시즘이란 절대적인 단수성(單數性)을 신봉하는 태도가 아니라, 적대하는 둘 사이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고 믿는 자들의 편집증이다. 가령 한 사회의 계급 갈등이 고작해야 『완전사회』가 보여주는 것처럼 소설의 메시지 하나로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가. 애당초 이 소설은 영원히 계속되거나, 당황스럽더라도 느닷없이 끝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 소설을 심사위원들은 입을 모아 ‘재미’있다고 말하고 있다. 과연 이 ‘재미’의 정체는 무엇일까? 혈맹 미국이 소련을 이기고, 007이 러시아에서 온 악당을 이기고, 남한이 북한을 이기고, 빨갱이는 어쨌거나 무찔러 박멸해야 하는 세계의 ‘재미’다. 『완전사회』의 작가는 파시즘의 이분법을 이야기로 풀어 재밌게 만들 순 있었지만, 그 ‘재미’의 본질을 고민하는 대신 이야기를 멈춰버리는 쪽을 택했다. 이것이 「재앙부조」에 이어 『완전사회』가 실패한 자리다.
『학생과학』의 ‘SF 기계들’
1965년 11월, 과학세계사에서 월간 『학생과학』 창간호가 나왔다. 정가는 80원이었고, 반년이나 1년치 정기구독을 할 경우 각각 360원과 650원으로 할인해줬다. 같은 시기 판매량 1위 잡지였던 『신동아』는 권당 100원이었다. 이듬해엔 물가가 전년 대비 11.6%나 상승하면서, 출판계도 책값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신동아』는 130원으로 인상됐고, 잡지 분야 베스트셀러 2, 3위를 다투던 여성지 『여원』은 150원으로 올랐다. 창간 1년이 안 된 『학생과학』 역시 150 원에 팔기 시작했다. 물가 수준을 고려해 당시 화폐가치를 현재의 1/100로 환산하면, 애초 8000원 하던 잡지가 15000원으로 오른 셈이다. 가뜩이나 신생 잡지를 꾸려나가기 불리한 상황에, 중고생을 주 독자로 둔 매체로서는 책값을 올리는 게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학생과학』은 창간 이후 별다른 부침 없이 절찬리에 팔려나가며 국내 유일의 학생과학잡지로 자리매김한다. 그 기세는 1970년대 초반까지도 꾸준히 유지됐다. 당대 독자 대중의 요구에 맞춰 적실하게 등장한 매체이기 때문에 가능한 선전이었다.


이 잡지의 사장 겸 발행인은 남궁호(現 메트로신문사 대표이사 회장)였다. 그는 연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24세에 과학세계사를 설립했는데,『학생과학』에 앞서 『과학세기』(1964년 8월 창간)라는 월간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과학세계사는 미국 공보원의 협조를 받아 1964년 12월 부터 공보원 2층 영사실을 빌려 ‘월례과학기술강연회’를 열었다. 이때 자주 초빙되던 강사가 박익수(1924 – 2006)다. 그는 『학생과학』의 초대 편집위원으로, 여러 매체에서 활발한 기고 · 강연 활동을 펼치던 과학평론가이자 정부의 원자력위원회 소속 위원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과학기술처 원자력 발전계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한국 원자력산업회의 설립을 주도한다. 그의 대표 저서 중 하나가 『한국원자력창업비사』(1999)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학생과학』은 원자력 관련 기사를 창간 후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매달 다뤘다. 특히 창간호에 실린 「운하건설을 수소탄으로」에 주목해보자. 이 기사는 미국의 대중과학잡지 『포퓰러 메카닉스(Popular Mechanics)』 1960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출처도 없이 옮겨 쓴 것이다.12 물론 완전한 도용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사진을 가져왔고, 텍스트의 상당 부분을 번안해 끌어다 쓴 수준이다. 이는 비단 『학생과학』만의 흉이라기보다는 1990년대 들어서야 겨우 고쳐지기 시작한 당시 잡지 출판계 전체의 관행이다. (『학생과학』에는 기사 작성자 이름이 지워져 있지만) 수소폭탄으로 제2의 파나마 운하를 파자는 과격한 글을 쓴 사람은 악명 높은 수소폭탄의 아버지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였다. 그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에 등장하는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실제로 에드워드 텔러는 이 영화의 원제(Dr. Strangelove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 그대로 핵무기가 인류를 파멸로 몰아갈 것이라는 걱정을 멈추고 수소폭탄의 비군사적 이용 방법을 열심히 떠들고 다녔다. 1957년 7월, 그는 파나마 운하뿐만 아니라 빙하에 뒤덮인 알래스카 포인트 호프의 유전 개발에도 수소폭탄을 이용하자고 제안했다. ‘쟁기날’(Plowshare program)로 명명된 이 프로젝트는 미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실행에 옮긴 사업이다. 1961년 일반에 공개된 지중폭발 실험 ‘땅속요정’(Gnome)은 ‘최초의 핵폭발 평화적 이용 실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전세계에 대대적으로 홍보됐다. 1962년에는 지표굴착 실험인 ‘세단’(Sedan)이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심각한 방사능 오염이 우려되면서 쟁기날 프로젝트는 전면 취소된다.
따라서 「운하건설을 수소탄으로」 기사는 이미 3년 전 취소된 미국 뉴스의 뒷북이었다. 『학생과학』은 창간 이래 반핵이나 탈핵의 포지션을 취한 일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이는 이 잡지가 곶감 빼먹듯 기사를 베껴 썼던 『포퓰러 메카닉스』의 논조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핵이야말로 조국 근대화의 절대적인 이기(利器)라는 인식은 당시 한국 정부의 입장이기도 했다.
이 잡지에서 전개된 ‘과학’의 개념과 서사는 언제나 냉전 반공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얽혀 배치됐다. ‘이런 과학’의 창달(暢達)에 힘을 보태는 일엔 『학생과학』에 연재된 수 편의 한국산 SF소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서광운의 『우주함대의 최후』(1969년 연재)에서 이만석 박사는 우주여행의 역사적인 대의를 성공리에 완수하기 위해 성욕 따윈 참아야 한다고 대원들을 다그치고13, 로켓에 오르기에 앞서 조국 동포에 바치는 눈물의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조국이여, 그리고 동포들이여 우리는 기어이 성공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우주 공간에는 갖가지 마력이 숨어 있을 것으로 압니다. 밤하늘에 은하수가 반짝거리는 것을 보면서 한국 원정대의 안전을 빌어주십쇼. 우리는 늘 동포의 뜨거운 성원이 있는 것으로 믿고 떠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쇼.”14 이 시기 한국인들은 이와 비슷한 목소리와 정조(情調)를 월남 파병 용사, 파독 간호사와 광부, 그리고 중동 근로자로부터 되풀이해 듣게 된다. 1960년대 남한 사회의 SF적 상상력은 당대 사회 문화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한계성을 키치적으로 폭로하는 만성 결핍증이었다.
『학생과학』의 편집위원 가운데, 국가주의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다른 과학’에 대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과학은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과학이란 단어는 적의 위협에 맞서 국가와 국민을 구하는 ‘국력’(國力), ‘전력’(戰力)으로 그 의미가 전도(顚倒)됐다. 세계대전 시기 미국의 과학잡지들이 전쟁 무기 표상으로 온통 도배되다시피 했던 것도 당연한 현상이었다.15 식민 수탈의 역사를 겪은 한국에선 ‘국력’과 ‘전력’으로서의 과학이 갖는 의미가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광수의 『무정』에서 민족에게 주어야 할 빛으로 ‘과학’을 외치는 세 젊은이의 구호는 해방 후 20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항시 강조했으나, 변죽만 울릴 뿐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이 시기 ‘과학’은 대한민국의 일상적 현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이 제시하는 국가 비전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개념어이자 당의정화한 정치적 상상력의 서사였다. ‘지금은 없지만 앞으로는 생긴다.’ ‘지금은 못하지만 앞으로는 할 수 있다.’ ‘지금보다 미래가 더 나을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런 명제를 무조건 긍정하고 지지하게 하는 ‘국민됨’의 정동(情動) 전략이 1960년대까지 박정희 정권의 ‘과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 남한 사회의 ‘과학’은 연구소나 실험실보다 공보부와 대중매체에서 가장 활발히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이 또한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국가와 대중매체야말로 1960년대 남한 사회의 SF 기계들이었다.
『학생과학』 역시 이 기계 집단의 일원이었다. 앞서 소개한 박익수를 포함해 『학생과학』의 편집위원은 다음과 같다. 문교부 편수관 최영복, 서울대 사범대학 교수이자 생물학자인 최기철, 휘문고등학교 화학교사 전광일, 경북대 물리학 교수 이우일 등이다. 정부 기관에서 두 명, 교육계에서 세 명이다. 필진으로는 일간지 과학기자뿐만 아니라 정부 기관의 공무원, 심지어 공군본부 정보국의 소령까지 참여했다. 국립원자력연구소 연구원 이창건(現 한국원자력문화진흥원 원장)이 『학생과학』(1965년 12월)에 기고한 「원자로와 원자력 발전소」라는 글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나라에도 조그만 원자로나마 설치된 것이 1959년이고, 1970년대 초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우리도 열심히 공부하여 남의 나라들처럼 잘살아보자.”16 한국 정부의 핵개발에 대한 의지를 함축한 문장이다. 남들처럼 잘살아보는 데 필요한 일. 그것이 과학이고, 그 정수(精髓)는 다름 아닌 원자력이라는 인식이다.
핵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1940년대 말부터 미국 정부와 기업이 전세계로 확산시킨 담론의 결과물이다. 제너럴일렉트릭(GE)과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는 핵에너지 홍보에 가장 앞장섰던 기업이다.17 두 회사 모두 대형 일간지와 유력 잡지,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등 거의 모든 매체에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중 웨스팅하우스는 미국과학진흥회(AAAS)의 과학 보도상(AAAS Science Journalism Awards) 후원사이기도 하다.18 덕분에 1960년대까지도 핵 산업에 대해 부정적인 목소리를 내는 매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광고주 앞에서 감히 누가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우익 성향이 다분했던 『포퓰러 메카닉스』 같은 잡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미국발 과학 기사를 채집해 국내에 소개할 때, 당대의 전문가 – 지식인들로 구성된 『학생과학』 편집위원들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학생과학』의 ‘과학’, 나아가 당대 남한 사회의 ‘과학’을 이해하는 데 빼놓아선 안 될 절대 변수다. 참고로 1969년 1월 한국의 첫번째 원자력발전소 건설사로 선정된 회사가 웨스팅하우스라는 사실도 기억해주기 바란다.19
앞서 언급한 ‘월례과학기술강연회’의 예에서 보듯 과학세계사는 미 공보원과 상당히 협조적인 관계였다는 걸 알 수 있다. 『학생과학』의 창간사에도 인상적인 인사말이 등장한다. “그동안 이 책을 꾸미고 펴내는 데는 우리 사의 여러분 외에도 많은 분의 격려와 도움이 있었습니다. 서울대 사대의 최 교수님 외 여러 편집위원님들, 문교부의 과학교육과의 여러분들, 그리고 우리 사의 사업취지에 전폭적인 이해를 갖고 여러 면으로 도와주신 미 공보원 당국과 미 대사관의 출판과 여러분들, 그리고 공보부 당국에 깊은 감사의 뜻을 우선 표합니다.”20 미 대사관과 공보원의 한국 출판계 지원은 미군정 시기부터 있었던 일이긴 하다. 그들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매체 제작을 지원하거나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주요 도시에 문화원을 설립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학생과학』이 창간된 1965년 말은, 그들이 예전처럼 한국의 미디어 환경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야 할 단계는 지난 상황이었다.21
따라서 남궁호의 감사 인사는 두 가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학생과학』에 미국 과학 잡지를 보급하는 정보 제공처로서 미 공보원과 대사관 출판과의 도움에 대한 감사라는 짐짓 당연한 해석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추후 사실관계를 더 확인해봐야 하지만) 재정적 지원까지를 포함하는 감사일 수 있다는 것이다. 후자의 해석이 과도한 의혹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학생과학』의 창간은 한국의 원자력발전소 건설 계획이 한창 추진되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정부의 원자력 위원과 물리학과 교수, 문교부 편수관이 편집위원으로 있는 잡지에 미 대사관과 공보원이 어떤 식으로든 지원해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뿐만 아니라 핵발전소의 실제 공사와 운행은 해당 국가의 정치 상황에 따라 길게는 10년 이상 지연될 수 있기 때문에, 핵발전에 대해 국민의 긍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킬 장기적인 플랜이 필요하다. 그 전례가 다름 아닌 미국 사회였다. 이 문제는 글의 논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안이기 때문에 이쯤에서 멈추지만, 한국의 핵 담론 역사를 추적하기 위해서라도 『학생과학』은 진중히 논의될 가치가 있는 매체라는 것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핵’만큼이나 『학생과학』이 열정적으로 소개한 주제는 ‘우주개발’이었다. 특히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 경쟁에 관한 뉴스는 여타 미국발 과학 기사와 비교해 시차가 거의 없었다. 창간호에서부터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박사의 우주개발사가 연재됐고, 루나 9호(1966년 3월호)와 서베이어 1호(1966년 7월호)의 달 착륙 그리고 아폴로 계획의 성공과 실패가 매달 중계됐다. 폰 브라운은 에드워드 텔러와 함께 미국의 과학기술을 전세계에 홍보하는 명사였다. 『학생과학』에 연재된 폰 브라운의 이야기는 1961년에 발표된 저서 『퍼스트맨 투 더 문(First Men To The Moon)』을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김재관이 옮긴 것이었다. 폰 브라운의 연재물과 대비해 읽어볼 만한 기사로 1966년 10월호에 실린 「소련의 유인 우주비행은 전혀 가짜다」가 있다. 이 기사는 『학생과학』이 출처를 제대로 밝힌 몇 안 되는 사례로, 『사이언스 메카닉스(Science Mechanics)』에 로이드 앨런이 발표한 글(1966년 1월호 – 3월호)이었다. 참고로 『학생과학』에 실린 폰 브라운의 글에는 저자 이름은 나와 있으나 출처가 없다. 로이드 앨런은 이 글에서 1961년 당시 소련의 기술 수준을 고려할 때, 유인 우주비행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분석한다. 사실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이 글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수용될지는 명약관화했다. ‘우리는 우주개발에서 소련에 진게 아니다.’ 말하자면 이런 메시지가 대량소비되는 것이다. 그런데 저 ‘우리’ 에 남한의 독자 대중도 포함될 수 있을까? 『학생과학』의 의식과 감정 체계(mentalites)에서, 이것을 근본적인 수준에서 구조화하고 있는 1960년대 남한 사회에서, ‘미국’은 혈맹(血盟)으로 합일된 ‘우리’였다.

『학생과학』 1967년 6월호에 연재를 시작한 오민영의 「화성호(火星号)는 어디로」에도 한미관계를 연상케 하는 상징적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화성으로 향하는 우주 로켓의 승무원 선발에서 한국 소년 강성일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1등으로 뽑힌다. 하지만 이 한국 소년은 2등을 한 미국 소년 찰스 재크에게 기회를 양보하려 한다. 1등을 했지만 우주에 가든 안 가든 별 미련이 없는 자신과 달리 모험심에 불타는 재크야말로 우주여행에 훨씬 더 어울리는 적임자라는 이유였다. 미국 소년에게 승무원 자격을 양보하기 위해 강성일은 일부러 급성맹장염에 걸리기까지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재크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참 훌륭하다. 한번 결심하면 그대로 실행하니 나는 네 정신을 본받겠다.”22 두 사람 사이에 어이없지만 훈훈한 우정이 깊어지고,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 모두 화성행 로켓 승무원이 돼 대모험을 겪는다는 줄거리다.
이 소설의 배경은 당시로선 근미래라 할 수 있는 1990년의 봄이다. 1975년 인류가 달을 정복하고, 1980년대에는 달에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설정이다. 미국이라면 그 시기에 그런 일들이 가능하리라는 상상이 기본 전제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세계에 어떻게 한국인을 출연시킬지가 문제다. 1960년대의 한국과 한국인은 SF 서사의 무대와 주인공이 되기엔 형편이 궁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무리 미래의 일이라 해도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은 것이다. 『학생과학』에 보내온 어떤 학생의 독후감을 빌린다. “아폴로 8호가 달 선회 여행에 성공했다니 매우 기쁩니다만 한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달에는 못 가더라도 방송국 송신탑만큼이라도 솟아오를 수 있는 로켓조차 만들지 못하는 우리네 현실을 생각하고 말입니다.”(1969년 3월호) 한국 독자들에게조차 화성행 로켓 승무원에 걸맞은 주인공은 금발의 미국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분히 억지스러운 우정의 서사가 도입됐고, 한미의 소년들이 함께 화성에 가는 것으로 어떻게든 수습이 되긴 한다. 한국인이 등장하는 데다가, 무려 우주여행까지 떠나는 SF 서사에 독자가 납득할 만한 최소한의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선, 미국 – 미국인과의 우호 관계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한국이 우주에 가기 위해선 로켓뿐 아니라 미국인도 필요한 셈이다. 이런 전개는 자기 상상력이 작동되는 이미지의 출처에 대해 작가가 자문해보는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학생과학』은 출처 없이 기사를 마구 가져다 써도 태연할 수 있었지만, 한국산 SF를 쓰려는 작가로서는 ‘미국’이라는 상상의 다양체(多樣體)를 외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독자들 역시 소설이 그리는 우주 모험을 미국산 영화와 만화, 신문과 잡지를 통해 익힌 SF적 표상을 동원해 상상할 테니 말이다. 더군다나 이 작품이 연재된 『학생과학』이야말로 미국발 SF 표상의 가장 밀도 높은 매개이지 않은가. 이 때문인지 1966년 7월호부터 같은 해 11월호까지 연재된 강성철의 「방랑하는 상대성인」에서는 한국인이 아예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듯, 아메리카나제이션(Americanization)의 장력 안에서 한국산 SF는 간접 경험, 모방된 감각으로서의 키치(kitsch)를 면하기 어려웠다.
우주개발만큼이나 『학생과학』에서 잦은 빈도로 기사화된 주제는 ‘베트남전쟁’과 ‘전쟁 무기’였다. 물론 이 역시 상당수는 미국 잡지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그중 추적 가능한 출처를 정리하면, 「초인을 만드는 기계」(1966년 4월호)와 「폴라리스 미사일 잠수함을 따라서」(1967년 4월호)가 각각 『포퓰러 메카닉스』 1965년 11월호와 1960년 2월호의 기사에서 옮겨온 것으로 확인된다. 베트남전에 대한 논조 또한 철저히 미국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미군의 화학무기 사용 의혹에 대해, 미국은 도덕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월남에서 벌어지는 가스전쟁」(1967년 5월호), 월맹(북베트남)의 SA02미사일을 ‘암세포’에 비유하는 「미군기를 괴롭히는 월맹의 SA02미사일은?」(1968년 4월호) 등이 그 전형이다.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이 터지면서 원산만으로 미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배치됐을 때는 예정에 없던 엔터프라이즈호 소개 글을 싣기도 했다. 편집후기에 당시 사정이 밝혀져 있다. “버릇없는 북괴 놈들 때문에 세상 어수선할 때 편집실로 마지막 손질에 정신이 없다. 거기다 편집계획에 없었던 엔터프라이즈호를 갑자기 소개하느라고 지(池)선생님이 바쁘다.”(1968년 3월호), “원산만으로 출동한 엔터프라이즈호. 미소 양대 세력을 긴장케 한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이들을 독자들에게 해설해 주려 부랴부랴 원고를 들어 놓고 보니 편집후기 쓰기를 잊었었다.”(1968년 3월호),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가 북괴에 납북된 사건은 세계적인 물의를 일으켰으나 아직도 만족할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미소 양국의 첩보망에 대해선 지난 호에 조금 실린 바 있다. 좀 더 치밀한 내용까지는 이야기하지 못하였다. 이들 정보전쟁에 과연 어떻게 사용되는지?”(1968년 4월호)
미국과 소련 그리고 중공(중국)의 핵무기에 대한 기사 역시 단신으로라도 매달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흥미로운 점은 중공의 핵무기 기술에 대한 보도는 「중공과학자 190명 사망, 실험 중 핵폭탄 오발로」(1969년 3월호) 같은 제목에서 보이듯, 그들의 기술력을 과소평가하는 내용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과학』이 창간된 1965년부터 닉슨 행정부의 데탕트 정책이 실행되는 1970년까지, 핵무기 증강의 전력질주 시대를 이 잡지는 기민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학생과학』은 핵무기에 대한 공포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다룬 매체였다. 「남대문 상공에 원자폭탄이 떨어진다면?」(1966년 12월호)에서는 서울시 지도를 동원해 구체적인 피해 반경을 설명한다. “원자폭탄이 떨어져 폭발하면 1.2km 떨어진 용산의 어느 곳에 있든지 살아남는 비율은 반반보다 적다. 폭탄이 폭발하는 지점 바로 아래에만 있지 않았다면 땅속에 있는 경우가 살아남는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폭발 지점에서 800m 이내는 거의 완전에 가까운 황폐를 가져오게 된다. 0.8km에서 1.6km 범위의 콘크리트나 철근 건물은 부서지지 않고 서 있게 된다. 그 이내 지역 건물들은 내부가 완전파괴가 되어 버린다.”23 이와는 반대로 「제2의 불, 원자력의 발견과 이용」(1968년 4월호)에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가져올 이로움을 역설한다. 핵무기는 인류를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핵발전은 쾌적하고 편리한 미래를 위한 기술이라는 바보 같은 이분법. 『학생과학』은 끝없이 ‘핵’을 동어반복 하는 프레임의 전형을 보여준다. 바로 이 프레임에서 냉전 이데올로기의 온갖 억압적 기제와 핵 자본주의의 알파와 오메가가 모두 작동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프레임을 꿰뚫을 수 있는 불온한 SF적 상상력은 1960년대 남한 사회에 부재했다.

그렇더라도 그게 어디 한 줌도 안 되는 SF 작가들의 역량 부족 때문이기만 했을까. SF를 직접 표방한 작품은 아니지만, 남정현의 「분지」(1965)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미군의 최첨단 무기에 포위돼 성미산과 함께 잿더미가 되기 직전인 남자가 주인공이다. 홍길동의 10대손인 이 남자는 미군 상사 스피드의 아내를 강간했고, 미국은 그를 징벌하기 위해 2 – 3억 불에 달하는 군비를 지출하려 한다. 「분지」의 반미소설로서의 가치를 알아본 북한은 이 소설을 노동당 기관지 『조국통일』에 무단 전재했고, 남정현은 졸지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다. 이것은 단순히 한 소설가의 문학적 상상력이 꺾이고 짓밟힌 사건이 아니다. 「분지」는 1960년대 남한 사회에서 상상할 순 있으나 이야기해선 안 될 것, 이야기할 수 없어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의 비루한 경계선을 가장 외설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결국 1960년대 남한 사회에서 SF 작가든 소위 주류 문단의 문인이든 그 한계를 넘어선 이는 아무도 없었다.
1960년대 남한 사회의 SF적 상상력
앞서 지적한 여러 한계에도 불과하고, 1960년대를 통틀어 『학생과학』만큼 국내의 SF 창작 인력을 집중 – 집합시킨 매체는 없었다. 이는 과학세계사의 주간이었던 지기훈의 수완 덕분이었다. 그는 『학생과학』을 통해 인연을 맺은 서광운 · 윤실 · 오민영 · 강승언 · 이동성 · 서정철, 그리고 『완전사회』의 작가 김종안과 함께 1969년 4월 3일 ‘SF 작가클럽’을 조직하기도 했다.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과학세계사 편집실이 이 모임의 산실이었다.24 비록 열 명도 채 안 되는 조직이었지만 소설가와 만화가, 평론가가 ‘SF’를 향해 뜻을 모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한국 SF소설사와 한국 만화사의 교차점에 『학생과학』이 놓여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만화가 신동헌과 신동우 형제는 『학생과학』에 실린 SF소설과 기사의 삽화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제각기 「꾀돌이의 박사 면담기」(1965년 12월호 – )와 「5만 마력 차돌박사」(1968년 5월호 – )를 연재했다. SF 작가클럽의 동인이면서 이들 형제와 함께 삽화가로 활약한 서정철은 사실주의적 그림체로 『태자검』 『성난 횃불』 등의 걸작을 남긴 전설적 만화가다.
『학생과학』에 소재(所在)한 만화와 관련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이 「원폭소년 아톰」이란 제목으로 — 이 역시 라이선스 계약을 맺지 않은 무단 전재였지만 — 국내에 최초로 소개됐다는 것이다. 연재가 시작된 1966년 7월은 일본 후지TV에서 『철완 아톰』의 TV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막 종영될 무렵이었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신동우의 「5만 마력 차돌박사」는 아톰의 영향이 적잖게 배어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아톰뿐만 아니라 해외 SF소설도 여러 편 소개됐다. 창간호에선 H · G 웰즈의 「도둑맞은 세균」(창간호)이 번역됐고, O · E 해밀턴의 중편소설인 「육체환원기」(1966년 2월호), 월리엄 샘브로드의 「달로케트 실종사건」(1965년 창간호)도 신동우의 공들인 삽화와 함께 게재됐다. 그러나 『학생과학』이 무엇보다 각별한 애정을 갖고 지면을 할애한 것은 한국 SF 작가의 작품이었다. SF 작가에게 불모지나 다름없는 당시 한국 문화계에서 『학생과학』은 일반 독자에게 작품을 노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창간호에서부터 이동성의 「크로마뇽인의 비밀을 밝혀라」가 연재됐고, 그다음 호에선 서기로(서광운)의 「북극성의 증언」이 합류했다. 매체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독자들의 반응이었다. 이 잡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면은 SF소설도 아니고, 핵폭탄이나 우주개발을 알리는 기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생과학』은 ‘특집화보’ ‘흥미교양’ ‘실험관찰’ ‘공작 사용법’ ‘사이언스 뉴스’ ‘과학 소설’ ‘우리의 과학활동’ ‘총천연 화보’의 체제로 출발했다. 이 구성은 매호 조금씩 조정되다가 1967년부터 ‘화보’ ‘고정난’ ‘흥미교양’ ‘교양소설 · 만화’ ‘공작’ ‘실험 · 관찰’ ‘독자들의 교환대’ ‘합본 부록’으로 재편된다. 이 가운데 창간호에서부터 독자의 호응을 꾸준히 받았던 건 ‘공작’이었다. 특히 인기 있는 소재는 라디오 조립이었다. 매호마다 각종 라디오 조립법이 설계도와 함께 실렸다. 편집후기에서도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공작기사의 충실과 증면을 요구하는 독자들의 호소가 안타깝다. 어떻게 하든 그 호소에 보답해 주고 싶다.”(1967년 7월호)
‘공작’ 면의 인기에 비해 SF소설을 향한 반응은 덤덤한 편이었다. 독자들이 보낸 독후감을 살펴보자. “이 소설을 보고 새롭게 배우거나 느낀 점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너무 과학소설이라는 점에 치중하여 우리의 수준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이 많이 나왔고 대체로 소설의 길이가 너무 짧아 다 읽고 나면 섭섭한 감이 적지 않았다. 처음에 소설이 전개될 때에는 내용이 매우 폭이 크고 흥미로워서 독자들이 많은 기대를 걸지만 계속적으로 그 흥미를 끌어주지 못하기 때문에 곧 실망을 주는 일도 있다.”25 “저는 과학기술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인데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이 저희 학생과 같은 소년이 아니고 어른들이란 점에 불만이 있습니다. 또 내용이 아무리 공상과학소설이라고는 해도 우리와 같은 학생에게는 너무나 차원이 높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실감이나 공감을 느끼는 것이 크지 못합니다. 저희 같은 학생이 주인공이 되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활동하는 내용으로 엮어주셨으면 합니다.”26
『학생과학』의 주 독자층이 중고생이기는 했지만, 이 잡지에 소설을 발표하는 작가들이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필력을 집중한 건 아니었다. 가령 서광운의 소설을 보면, 어떤 대목은 조악한 아동물마냥 유치하기 짝이 없다가도, 또 어떤 대목은 철학서나 전문 과학서에 육박하는 난해한 설명으로 일관하기도 했다.
이렇듯 독자 반응이 지지부진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학생과학』의 SF 소설가들은 ‘한국’과 ‘한국인’을 SF 서사의 대상으로 가공해내는 방법을 실험하는 데 더 열중했다. 이 목표를 향해 수준 이상의 성취를 이루지 못한다면 독자의 호응도 사실상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예로 들었던 오민영의 「화성호(火星号)는 어디로」의 경우에서처럼, 이것은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현실성을 마련하기 위한 고투이기도 했다.
이동성의 「크로마뇽인의 비밀」에선 이야기의 첫 무대가 한라산이다. 이곳에서 주인공과 그의 일행은 비행접시(UFO)를 보게 되는데, 그들의 첫 반응은 (SF소설이라기보다는) 방첩물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 수상한 물체는 중공에서 날려 보낸 간첩 풍선인가, 어떤 특수임무를 띤 모국의 비행선인가, 아니면 외계에서 온 비행접시인가,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신기루 같은 어떤 기상 현상인가?”27 여기서 1960년대 남한 사회 구성원들의 신경증적 반응의 한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은 비행접시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 뒤에도 외계인에 납치됐을 거라곤 좀처럼 상상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선생님, 우리가 지금 소련이나 중공의 포로가 되었단 말씀이에요?”28 적성국가 중국과 소련 그리고 괴뢰 북한에 포위된 채, 한반도의 겨우 절반에 갇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이 UFO처럼 수상하고 낯선 대상과 조우할 때, 간첩부터 상상하고 공포에 질리는 장면은 당대의 리얼리티이자 일상의 망탈리테(mentalites)였다.
서광운의 「관제탑을 폭파하라」(1968년 10월호 – )는 식물 자력선을 소재로 한 SF소설이지만, 전개 방식은 러시아 공작원과의 쫓고 쫓기는 방첩 서사를 택하고 있다. ‘간첩’ 또는 ‘007’이라는 소재는 이 시기 장르 작가들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해결사 노릇을 했다. 1960년대 남한의 독자 대중에게 우주여행과 외계인은 도무지 공감할 게 없는 비현실적인 대상이지만, 간첩이 등장하면 아무리 과장된 상황에서도 현실감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도 SF는 전면에 내세워지지 못하고 방첩 서사를 통해 우회적으로 반영되는 데 그친다. 서광운은 소설의 결말에서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강조하기에 이르는데, 그가 과연 투철한 민족주의자라서 이런 결말을 선호했을까? ‘한국’과 ‘한국인’이 등장하는 SF에서 애국심과 민족주의는 당대 독자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가장 통속적이면서도 효과가 보장된 정서였다. 이 선택은 그의 다음 연재작인 「우주함대의 최후」에서도 반복된다. 하지만 이런 전략이 남발돼 일단 유형화돼버리고 나면, 한국산 SF소설은 키치의 수준에서조차 한 단계 더 아래로 전락하게 된다. 국내용으로 기묘하게 변주한 SF 서사의 흉내 내기를 다시 모방하는 패착은 창작의 지속성 자체를 회의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이런 악순환을 끊어낼 방법은 작가의 능력에만 달린 게 아니었다. 시대가 구조화한 사회 문화적 한계 속에서 전형적으로 유형화된 독자와 구별되는 새로운 독자층이 대거 등장할 때, 뜻밖의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법이다. 미국의 경우 다양한 장르의 판타지를 수용할 수 있는 중산층이 폭넓게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 남한은 빈곤한 저개발국의 형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1960년대 말까지도 이른바 서구식 근대화를 추동할 중산층은 규모로든 비중으로든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학생과학』에서 실험됐던 SF소설을 중고등학생 외에 누가 또 읽었을지도 회의적이다. 냉정히 말하면 이 잡지의 중고등학생 독자들조차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그것이 비록 한국 작가의 SF소설이 아니더라도) 수준 높은 SF소설을 읽고 경이감을 느끼는 독자의 풍경을 이 시기에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런 독자의 모습을 시인 김수영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다.
「벽(壁)」(1966)이라는 짧은 수필에서 그는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의 「마지막 밤(The Last Night)」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노먼 메일러가 『에스콰이어』 1966년 11월호 특집 ‘카니발과 기독교인’(Cannibals and Christians)에 발표한 소설이다. 앞서 언급한 김윤주의 「재앙부조」가 핵전쟁에 의해 파멸된 도시를 그렸다면 「마지막 밤은」에선 아예 지구가 끝장나버린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미국 대통령과 소련 수상이 공모해 거대 우주선으로 지구를 폭파하고, 전세계의 특권 계급에 속한 백여 명만 데리고 우주로 떠나버린다는 이야기다.
김수영은 이 작품을 일본 잡지에 번역된 것으로 읽었다고 한다. 아마도 일본판 『에스콰이어』였으리라 짐작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잡지는 해외판과 미국판이 메인 특집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김수영은 이 소설을 읽고 “눈앞이 아찔”해지는 감화를 받는다.29 그가 보기에 이 작품은 노먼 메일러 식의 “김일성 만세!”임이 분명하다. 김수영은 이 소설을 곧장 우리말로 번역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분지 필화 사건이 있은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저어되는 게 한둘이 아녔다. 검열에서 “반미적 운운”을 이유로 트집 잡을 게 뻔하고, 영문 원전이 아닌 일본말 텍스트를 중역(重譯)해야 한다는 점도 마뜩찮았다.
「벽」에서 김수영은 르 클레지오(Le Clezio)의 소설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하고 있는데, 이런 유의 구라파식 아방가르드는 이미 면역이 돼 흉내 내기도 만만하다는 혹평이다. 김수영은 르 클레지오에게선 느낄 수 없는 「마지막 밤」의 풍자적 상상력을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있었다. 중언부언하지 않고 현실 문제의 중핵을 예리하게 타격해 독자의 폭소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상력이 자신에게 없음을 깨닫고, 김수영은 작가로서의 ‘벽’을 절감했다. 이것은 비단 김수영만의 ‘벽’이 아니라 1960년대 남한 문화계 전체에 결핍된 문화적 상상력 · 표현력에 대한 진단이기도 했다.
「재앙부조」에서 『완전사회』를 지나 『학생과학』에 실렸던 SF 중 · 단편 소설의 면모를 검토하면서 이 글이 내리는 결론 역시 김수영의 한숨과 다르지 않다. ‘SF’는 한 사회의 사회 문화적 상상력의 임계점을 지시한다. ‘SF’라는 개념은 그저 장르 용어의 하나쯤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증환을 읽는 척도일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너와 나는 무엇을 상상할 수 없는가? 게다가 무엇을 표현할 수 없는가? 어떤 표현의 어색함, 어떤 작품에 대해 느끼는 견딜 수 없는 저속함은 어느 틈에 내 몸에 새겨진 반응일까? 우리의 정동은 시대와 피드백 하며 구조화된다. 그 연쇄 반응은 작품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엉망진창이라면 작품도 엉망진창인 게 당연하다. 그걸 애써 펴고 다려서 번듯하게 만드는 게 제일 시급한 일일까? 오히려 구겨지고 찢기고 결핍된 그 자리에서 우리의 실패를 분명히 지각하는 일이야말로, 지난 시대 먼저 실패해본 자들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교훈이다.
임태훈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융복합대학 기초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문학협동조합 미디어기획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주요 저서로 『우애의 미디올로지』(2012), 『검색되지 않을 자유』(2014),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2017, 공저),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2017, 공저) 등이 있다.
1960년대 남한 사회의 SF적 상상력: 재앙부조, 완전사회, 학생과학
분량23,896자 / 48분 / 도판 11장
발행일2019년 3월 28일
유형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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