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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건축에서 국가, 아방가르드, 유령

박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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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Avant-garde)는 20세기 예술사에서 가장 남용된 단어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아방가르드’를 설정해보려는 이 글은, 결국 아방가르드에 대한 최소한의 논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현대건축을 이해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 베니스의 역사학자 만프레도 타푸리(Manfredo Tafuri)는 아방가르드의 역할을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가 야기하는 충격을 피할 수 없는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아방가르드는 근대가 불러온 전대미문의 충격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예방접종 같은 것이었다.

짐멜(Georg Simmel)의 대도시 이론과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따르는 타푸리에게 예술(그리고 건축)은 자율성을 지닌 것이라기보다 사회적 총체의 한 부분이었다.1 반면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아방가르드를 키치(Kitsch)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는 모더니즘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했다.2 이른바 비재현성(Non-representation)을 통해 사회로부터, 매체 특정성을 통해 다른 장르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한다는 설명이다.

20세기 후반 아방가르드에 대한 논의를 다시 촉발시킨 페터 뷔르거(Peter Burger)는 예술 제도 그 자체를 비판한 초현실주의와 다다(dada) 등 1920년대의 실천을 ‘역사적 아방가르드’(Historical Avant-garde)로 명명하며 특별한 위상을 부여했다.3 그에 따르면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자율성을 추구한 모더니즘은 물론이고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반복하면서 이를 제도화해버린 1960년대 네오 아방가르드와도 구분돼야 했다.4 반면 네오 아방가르드의 복권(復權)을 꿈꾸고, 이를 통해 지금도 부정성을 담보한 예술의 기획이 가능함을 입증코자 한 할 포스터(Hal Foster)는, 네오 아방가르드를 통해서 비로소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하려 한 바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알게 됐다고 진단한 바 있다.5 이 밖에도 아방가르드를 둘러싼 역사적 해석의 목록은 길게 이어질 것이다.

이들의 논의는 정치적 입장과 역사적 해석에 따라 양립할 수 없는 듯 보이지만 암묵적인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우선 아방가르드의 변증법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예술을 규정하는 제도와 기관, 산업사회와 대도시가 야기한 소외와 충격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 헤겔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정적인 규정’(fixed determinacy)이 ‘부정적으로 이성적인 측면’(negatively rational side) 이전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6

또 20세기 초 유럽의 아방가르드는 국경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예술의 공동체, 네트워크를 통해서 가능했다. 1930년대 들어 국경이 배제와 차별의 경계로 기능하면서 유럽의 아방가르드가 소멸해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요컨대 특정한 예술적 흐름을 아방가르드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정치 · 경제적 조건이 선재해야 한다.

2

개념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아방가르드는 지극히 유럽적인 현상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아시아나 제3세계 국가에서는 위무가 필요할 만큼의 충격적인 산업화나, 자율 – 타율을 논할 수 있을 정도로 공고히 제도화된 예술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7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여러 프로젝트들은 앞서 언급한 아방가르드의 변증법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없거나 부족한 가운데 역설적으로 생겨난 아방가르드였다. 기공의 작업은 일견 1960년대 유럽과 미국 일본 등지에서 다채로운 양상으로 나타난 공상적(visionary) 건축, 도시계획과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기공의 작업이 디디고 선 역사적 배경은 그것들과 사뭇 달랐다. 결정적인 차이는 국가의 역할에 있었다. 대개 국가는 극복해야 할 제도이거나 대타자(the Other)나 현대예술을 억압하는 반동적 기제로 그려지곤 하지만, 지난 세기 한국에서 국가는 예술과 건축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agent)였다. 더군다나 1960년대 중후반의 한국은 도약이 필요했다. 북한과 체제 경쟁을 벌이는 한편 국민국가(nation-state)를 문자 그대로 ‘건설’해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조 – 식민지 – 미군정을 거쳐 탄생한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은 반세기 가까운 국가의 부재를 극복해야 했다. 제도적 · 법적 · 행정적 장치와 기관은 부재하거나 미흡했고, 사회 공동체를 구성하고 이끌어나갈 가치와 이념을 뚜렷한 상으로 그려내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8

산업화로 표상된 한국의 근대화, 정부 제작 포스터, 1971 / 자료 제공: 국가기록원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경제개발을 통해 국민국가가 당면한 여러 문제(대표적으로 탈식민성, 정권의 정당성 등)를 일거에 해소하고자 했다. 탈빈곤은 공백에서 돌아온 아버지(유교적 전통에 따라 국가와 동일시된)가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로 설정됐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달러화 확보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을 비롯한 해외 원조에 의존하던 경제에서 차관경제로 전환기를 맞은 당시에 외화벌이는 무엇보다 중요한 국가적 목표였다. 1964년 봄부터 추진된 한일국교 정상화 및 대일청구권 협상, 베트남파병 등이 대외적으로 추진된 달러 확보 수단이었다면,9 1965년부터 시작된 일련의 국영기업체 설립은 내부적 방편이었다. 대내외 정책들이 긴밀하게 얽혀 있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생겨난 대표적 기업이 바로 기공과 한국해외개발공사이다. 한국해외개발공사는 베트남 · 독일 등으로 건설노동자와 간호사와 광부를 내보내는 일을 주관했다. 인구가 늘고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던 1960년대, 노동자들의 해외 진출은 국내 취업난 해결과 외화 획득을 동시에 노릴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기공은 그렇게 벌어들인 달러가 외국 기술용역 기업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전략적으로 만들어졌다. 일종의 수입대체를 위한 회사였던 셈이다.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의 도약을 꾀하던 한국에서 항만 · 고속도로 · 상하수도 등의 도시 인프라스트럭처와 석유화학단지 · 제철소 등 산업시설 설계 수요는 늘어났지만 공급은 여전히 외국 기업에 의존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 지점서부터 건축은 국가의 경제개발계획과 낯선 동거를 시작한다.

니혼코에이(日本工營, 일본공영)의 쿠보다 유타카(久保田豊) 사장 방문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김수근, 쿠보다 유타카, 1968년경 / 자료 제공: 백대현
기자와 인터뷰 중인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 1962 / 자료 제공: 국가기록원
기공이 설계한 베트남 사이공의 상수도 물탱크, 1969 / 자료 제공: 국가기록원

3

현대건축의 역사에서 건축이 산업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게 낯선 일은 아니다. 산업화와 전쟁이라는 세계적 격변 국면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20세기 초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산업화, 특히 미국의 대량생산 시스템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쟁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주도하는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가 유럽 곳곳에서 진행됐다. 전자는 주로 표준화와 기계화에 대한 미학적 태도를 낳았고, 후자는 산업생산 일선의 도시 임금노동자를 위한 공공주택(social housing) 생산을 주도했다. 그런데 기공의 역할은 이런 유의 프로젝트 수행과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10

사실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전이 다루는 몇 년간을 제외하면 기공은 건축과 별 상관이 없는 회사였다. 애초 설립 목표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11 건축은 한국의 경제개발을 추동할 만큼 기술적, 산업적으로 앞서 있지 못했다.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경제 정책을 결정하는 고위 관료들은 건축을 ‘산업화’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기공이 설계한 포항제철은 1973년 준공되지만 건축 생산에 필요한 철강 제품은 생산 목록에서 오래도록 빠져 있었다. 철저한 내수산업(외화와 무관한)이었던 건축은 발전국가(development nation)의 전략적 선택에서 언제나 배제됐다. 그만큼 기공의 역사에서 건축은 대단히 예외적인 존재였다.

기공이 설계한 소양강 다목적댐, 1974 / 자료 제공: 국가기록원
기공 초기의 주요 프로젝트인 윤중제, 1968

토목 엔지니어링 업체에 가까웠던 기공에 건축가를 연루시킨 인물은 김종필과 석정선이었다. 두 사람은 1926년생 동갑내기이자 육군사관학교 동기(8기)로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석정선은 5 · 16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아 권력에서 밀려나는 듯했으나, 쿠데타를 주도한 김종필이 중앙정보부를 창설하면서 석정선을 제2차장에 앉힌다. 이후 3공화국 시기에 청와대와 정부 차원의 여러 정책이 이들의 손에 추진된다. 육사 입학 전 각각 대전사범학교와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김종필과 석정선은 국가 요직을 장악한 군인들 가운데서 드물게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텔리겐치아로 통했다. 대통령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던 김종필이 정책의 방향을 정하면 석정선은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일을 맡았다. 석정선은 한국전쟁 당시 대구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 박정희 소령 아래에서 김종필과 함께 상황장교를 지냈으며, 이후 중앙정보부 행정차장 겸 보안차장보로 있으면서 워커힐호텔 건설사업의 총책임을 담당하기도 한다. 김수근이 워커힐호텔의 힐탑바와 더글라스호텔의 설계를 맡으면서 형성된 김종필 – 석정선 – 김수근 커넥션은 1960년대 내내 지속됐고, 이는 기공의 설립으로까지 이어진다.

외국 제휴사와 계약 체결 후 축하파티에서 관계자와 악수하는 박창원 초대 기공 사장(맨 오른쪽), 1967 / 자료 제공: 백대현
기공을 방문한 정일권 국무총리(사진 가운데)와 김수근 당시 부사장, 1966 / 자료 제공: 국가기록원
전통과 산업화의 조화를 강조한 홍보이미지, 1955년 6월 미군 극동사령부에서 창간한 월간지 『자유의 벗』, 1966 / 자료 제공: 시간여행

1964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국영 기술용역업체 설립이 추진됐다.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은 “김수근의 조언을 참고하여 건설기술의 획기적 발전을 통해서 국가경제 발전을 가속화시킬 목적으로 건설기술용역업체를 설립하려는 구상”을 세웠고, 이에 따라 “석정선은 합동발전기획위원회를 설치하고 남산도서관에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를 비롯한 한국경제개발협회, 한국해외개발공사 등을 발족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했다.12 기공은 1965년 5월 25일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 대한석탄공사 등 상공부 산하 9개 업체가 투자한 자본금 25만 원을 기반으로 공식 출범했다. 초대 사장은 경기도지사를 역임한 육군 준장 박창원이었으나, 손정목에 따르면 “실권자는 김수근”이었다.13 이는 사장 재임 기간뿐만 아니라, 1963년부터 1969년까지 김수근의 작업 전체를 기공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966년 정일권 국무총리가 기공을 시찰했을 때, 총리를 응대한 이 역시 김수근이었다. 채 완공되지 않은 부여박물관 모형을 앞에 두고 김포공항 계획안을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서 드러나듯 김수근연구소와 기공은 같은 장소에 뒤섞여 있었다. 더 나아가 김수근은 1968년 4월 9일부터 이듬해 7월 22일까지 기공의 2대 사장을 지냈다. 그는 서울대 토목과를 졸업하고 훗날 포항제철 사장을 역임하는 테크노크라트 정명식(3대 사장)과 더불어 기공역사에서 유이한 비군인 출신 대표였다.14 게다가 김수근은 1963년 기공의 전신인 국제산업기술단이 김수근건축연구소가 있던 종로구 송현동 60번지에서 발족할 때 이사로 이름을 올렸고,15 1964년 4월 13일 상호가 ‘코리아 퍼시픽 콘설탄트’(Korea Pacific Consultant)로 바뀌면서 이사진이 대폭 변경될 때도 이사직을 유지했다.16 간단히 말하면 기공은 설립 단계에서부터 김수근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조직이다.17

일본을 방문한 기공의 스태프와 석정선(오른쪽 아래), 1966 / 자료 제공: 백대현
김수근이 설계한 서울 삼청동 석정선 자택, 1960년대 후반 / 자료 제공: 백대현

그런데 정작 건축가 김수근이 기공의 부사장과 사장으로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직원이 350명에 이르는 대형 조직의 대표였던 김수근의 업무 범위, 그가 만난 국내외 관계자 목록, 국가 산업계획과 관련된 주요 결정 과정, 해외 출장 횟수와 목적지 등에 대한 정보는 현재까지 전혀 발굴되지 못했다. 몇몇 단편적인 증언에 비춰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이 전시가 조명하는 네 개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김수근이 단 한 장의 스케치나 도면도 그리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김수근이 자신의 설계사무소에서 데려오거나 채용한 건축가들은 스스로를 기공의 직원이라기보다 김수근 팀의 일원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대형 ‘관료적’(bureaucratic) 조직의 구성원이 아니라 ‘천재적인’(genius) 개별 건축가로 생각했다.18 문화예술을 후원하고, 자신의 사무실이 담론 생산의 중심지이길 원하며, 때로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듯 행동하는 것이 건축가의 ‘멋’이라고 생각한 김수근의 카리스마는 관료 조직 내 예외적 별동 부서의 존재를 가능케 했고, 토목과 여타 엔지니어링이 중심인 기업에서 건축의 존재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19

쿠데타를 혁명이라 칭하고, 혁명의 주체를 자임한 40대 군인 정치인들이 한일청구권자금(달러) – 기공 설립(기술) – 포항제철로 대변되는 중화학공업 육성(산업독립)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추구한 것은 경제성장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경제성장은 물질적 빈곤에서 벗어나는 것 뿐만 아니라 정신적 차원에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과 연결돼야 했다. 그러자면 경제성장과 그것이 가져올 미래가 가시화돼야 한다. 기공 설립 당시 경제성장과 도시계획을 모형으로 나타낸 대규모 전시가 연이어 개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통령과 시장이 안전모를 쓰고 현장을 누비는 모습과 공사장의 비계와 거푸집은 개발을 알리는 표상이었다. 국영 엔지니어링 업체 기공, 그중에서도 국가 건축가들의 역할은 미래라는 시간성을 한국에 도입하는 것이었다. 억압적 동원 체제가 약속한 미래를 생생히 시각화하는 것이 건축가들에게 주어진 임무 또는 자처한 역할이었다.

1967년 김석철은 기공이 펴낸 보고서 「원남로 – 퇴계로, 영천 지구 재개발을 위한 조사 및 기본계획」에서 서울시가 발표한 ‘서울 마스터플랜’을 “도시가 상정해야 하는 대상이나 도시 형성의 기본 엘레먼트 또는 도시 구성 원리 등에 관해서” 아무것도 밝히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대단히 대수롭지 않은 계획”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서울 마스터플랜은 관료 겸 경제인이자 한국 도시계획의 대부 격인 주원의 주도로 입안된 것으로, 전후 서울 개발의 전환점을 가져온 계획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김석철, 1943년생)이 서울시에 제출하는 공식적인 보고서에서 타 분야의 원로(주원, 1909년생)를 비판하는 모습은 유교적 윤리를 강조하는 한국 사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다. 그만큼 기공의 건축가들은 자의식이 충만해 있었고 당시 한국 사회의 한계를 일거에 뛰어넘고자 했다. 현대건축의 생산이 가능하기 위한 물적 · 사회적 토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은 현실이 아닌 책에만 존재했으며, 건축가와 건축이라는 단어조차 낯설던 시대에, 그들은 모든 결핍을 단번에 뛰어넘어 미래를 선취하려 했다.

한편, 국가의 계획을 현실화하거나 계획이 빚어낼 미래를 표상하는 것이 임무였던 기공의 프로젝트는 한국 건축사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게 될 부산물을 남겼다. 1966년 11월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건축 · 예술 전문지 『공간』이 그것이다. 여기서도 김종필과 석정선의 이름이 등장한다. 김종필은 용도를 특정하지도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 돈을 김수근에게 제공했고, 석정선은 『공간』의 초대 발행인을 맡아 22호가 나올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기공의 건축 작업이 국가를 경유함으로써 아방가르드의 외피를 두른 것처럼, 『공간』은 중앙정보부의 돈으로 추정되는 비자금을 통해서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충분히) 래디컬한 잡지로 등장했다. 1960년대 유럽의 래디컬한 독립 매체들이 저비용으로 간단하게 인쇄할 수 있는 이동식 등사기의 등장에 힘입은 것과는 정반대 상황이었던 셈이다.20 『공간』은 대단히 혁신적인 매체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때 이른 출현이었다. 사진의 적극적인 사용과 세련된 편집, 기사의 밀도, 그리고 가격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공간』에 견줄 만한 — 예컨대 『뿌리깊은나무』 같은 — 잡지는 10년 뒤에나 등장하게 된다.21 『공간』은 김수근이 기공을 떠날 때까지 기공의 주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창구로도 기능했다. 당시 『공간』 지면에는 기공이 생산한 보고서에서 발췌한 내용들이 전통 건축, 해외 건축의 흐름 등과 함께 낯설게 뒤섞여 있었다. 정부 제출용 보고서가 제작 부수, 독자 접근성에서 대단히 제한적이었던 데 비해 『공간』은 기공의 건축가들이 자기 아이디어를 세상에 알리기에 유용한 매체였다. 그렇게 독재 권력과 유토피아적 상상력, 계획 합리성과 몽상은 잡지라는 매체를 통해 다시 한번 뒤엉켜 있었다.

공보부에서 감사장을 받은 석정선(오른쪽), 1966 / 자료 제공: 국가기록원
정일권 국무총리와 석정선(왼쪽, 당시 일요신문사 사장), 1965 / 자료 제공: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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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의 건축가들은 관(官)을 경유해 현실의 무게를 뛰어넘고 미래를 선점하려 했지만, 그들의 상상력은 바로 그 현실(물적 토대)에 가로막혀 있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과 정보가 일정한 시차를 두고 그만큼의 열화를 거친 채 도착하던 한국에서 미래는 세계 어딘가에는 이미 도래한 현재일 뿐이었다. 6m 스팬을 가진 철근콘크리트 구조물 이상을 지어본 적 없는 건축가들이 설계한 거대 구조물은 낙후된 현재를 미래로 끌고 나갈 동력이 부족했다. 상상(미래)은 현실(현재)에 이내 따라잡혔다. 건축이 기공의 전체 사업과 그 사업의 완성이 약속한 미래를 재현하는 역할을 맡은 기간은 매우 짧았다. 이는 무엇보다 김수근과 그의 팀이 1969 – 1970년에 일제히 기공을 떠났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무렵 발전국가 한국에서 건축의 역할 자체가 변해버린 탓도 있었다. 건축은 더 이상 국가 계획의 표상일 필요가 없었다. 완성된 포항제철소의 용광로와 파이프라인, 울산 현대조선소의 거대한 크레인과 도크 앞에서 콘크리트로 빚은 키 작은 건물은 한없이 왜소했다.22 건축은 ‘산업적 숭고’(industrial sublime)를 넘어서지 못했다. 국가는 건축에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현재화할 것을 요구했다. 1970년대 건축 담론이 거의 전적으로 ‘한국성’을 둘러싼 논의로 재편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김수근의 퇴사와 맞물려 건축 업무가 대폭 축소된 기공은 더 이상 건축가들이 주축인 회사가 아니었다. 기공은 한국 현대건축사의 시야에서 급속히 사라졌고, 김수근의 예술가적 자아(한국성을 구현하는 건축가)를 완성하기 위한 부정적인 극복 대상 이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러는 사이 1960년대 말 기공의 주요 프로젝트들은 자료 수집과 연구의 관심권에서 밀려났다. 엑스포70과 한국무역박람회는 철저하게 잊혀졌고, 여의도 마스터플랜 보고서는 서울역사박물관 한 켠에 자리 잡았지만 학술적 조망의 대상이 된 것은 반세기가 지난 2010년대의 일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기공의 작업은 충분히 역사화되지 못했다. 이는 사료의 결핍을 드러내는 동시에 불명확한 자료를 둘러싼 기억의 인정투쟁을 낳았다. 김석철이 여의도 마스터플랜을 두고 자신의 크레디트를 주장한 반면, 세운상가가 슬럼과 동일시될 때 누구도 자신이 세운상가의 건축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전자가 지어지지 않은 계획으로 유토피아적 열망의 상징이자 모두가 긍정하는 유산이 된 데 반해, 후자는 단기간에 지어진 계획이자 실패한 미래로 모두가 부정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군사정권기에 벌어진 국가폭력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면서, 그 정권과 연루될 수밖에 없는 1960 – 1970년대 국가 프로젝트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으로도 예민한 문제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의도, 한강 연안, 세운상가 등 서울의 하부구조를 결정해버린 기공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누구도 기공의 초기 역사를 추적하지 않는 동안 그 유산은 “볼 수 있으면서 동시에 볼 수 없는 것, 현상(現像)하면서 동시에 현상하지 않는 것”으로서 유령이 됐다.23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시간에 호출해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어긋난(out of joint) 시간을 복구하는 것이다.24 불명확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과거의 흔적과 유산을 대면하는 일은 실질적 죽음과 구분되는 상징적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을 거듭해나감으로써 어긋난 시간을 복구할 수 있다.

단지 역사적 호기심으로 기공에 대한 사료를 수거해 역사의 선반에 올리자는 게 아니다. 서울이 오늘날의 크기로 확장되고 도심 공간이 재편되던 시기, 기공의 건축가들이 실패한 지점에는 지금도 유효한 건축의 전선(前線)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려 했으나 선취하지 못한 미래, 트레이싱지와 원고지 위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던 공공 공간, 현대 한국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건축을 짓지 못한 무능력은 이후 한국 건축의 한계를 설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기에 1960년대 기공의 작업에 대한 합당한 평가를 생략하고 한국 현대건축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권력과 가까운 만큼 부풀었던 상상력을 가늠하고 그 잔해를 추적하는 일은 기공 건축가들의 연보에서 누락된 부분을 채우는 것도 아니고, 독재 권력과 연루된 그들의 활동을 상황적 불가피성으로 옹호하는 것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는 한국 현대건축의 가까운 기원에 드리운 망각과 왜곡의 장막을 걷어내고, 이 유령성과 대면해야 한다.

해외개발공사 기술 훈련원 기공식, 1970 / 자료 제공: 국가기록원

박정현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2013), 『건축의 고전적 언어』(2016) 등을 번역했으며, 『전환기의 한국건축과 4 . 3그룹』(2014), 『아키토피아의 실험』(2015), 『중산층 시대의 디자인 문화』(2015) 등을 공저했다. ‘2011 광주디자인비엔날레’, 〈Out of the Ordinary〉(2015),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 – 1997〉(2017) 등의 전시 기획에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의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현대건축에서 국가, 아방가르드, 유령

분량10,885자 / 22분 / 도판 14장

발행일2019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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