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의 배외주의 대두와 계속되는 식민지주의
서경식
분량13,630자 / 25분 / 도판 2장
발행일2017년 2월 1일
유형비평
들어가며
일본사회는 현재 역사수정주의와 배외주의로 완전히 뒤덮여버린 듯하다. 재일조선인을 비롯한 소수자들이 당면한 위기는 점점 더 심화되어간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일본사회가 현재 상황에 이르게 된 원인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중기적·단기적인 세 가지 층위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장기적 층위에서 검토해야 할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대외 팽창, 침략, 식민지 지배로 이어지는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쌓아 올린 국수주의·국가주의·식민지주의가 현재까지 어떤 영향을 남기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뿌리 깊은 역사수정주의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기적 층위에서는 1945년의 패전으로 ‘평화국가’로 다시 태어났어야 할 일본이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럴 만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결국 그렇게 되지는 못했던 사정, 1945년이 과거와의 절연과 갱생의 기회가 되지 못하고 과거의 연장(식민지주의의 계속)이 되어버린 사정에 관해 고찰해야 한다. 이때 미국의 핵우산 아래 몸을 맡기며 ‘평화국가’를 표방해온 이중 기준, 종래의 국가주의와는 다른 진보파의 ‘국민주의’(이를 ‘전후 내셔널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상징천황제(전후천황제)의 기능 등이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단기적이라고 할 때, 필자로서는 쇼와 천황의 사망 이후부터 현재까지 대략 27년간을 상정하고 있다. 그것은 베를린장벽 붕괴로 상징되는 냉전구조 종언 이후의 기간과 일치하고, 신자유주의 글로벌리제이션이 세계를 뒤덮어버린 시기이기도 하다. 이 기간의 전반, 일본사회는 거품 경기로 들떴지만, 후반에 들어서자 경제의 장기침체와 격차사회의 여러 모순으로 고통을 겪게 되었다.
또한 중국·한국 등 주변의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발전, 한신대지진, 동일본대지진, 후쿠시마원전 사고 등으로 다수의 일본 국민들이 자신감 상실에 빠지게 되었고, 그것이 내향적 자기중심주의를 강화하는 작용을 했다. 이 기간에 일본사회는 그때까지 미약하나마 유지하고 있던 민주주의적 요소와 보편적 가치관을 급속히 잃어버렸다. 단적으로 ‘우경화’ ‘반동’이라 불러도 무방한데, 이를 아베 수상은 ‘전후 레짐으로부터의 탈각’이라 칭하고 있다. 원래는 위에서 말한 장기·중기·단기 모두에 걸친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주로 단기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려 한다.
황량한 풍경
지금 내 눈앞에는 황량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일본사회에서 태어나 60년 이상을 여기서 살아온 나지만, 이런 풍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도심의 거리에서 ‘시민’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의 시위대가 확성기를 들고 당당하게, “조선여자들은 강간해도 된다”라고 고함을 친다. 재일 조선인과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인 신오쿠보(新大久保)에서 ‘반한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조선인은 목을 매라, 분신자살 하라!”라고 외쳤다. 원한다면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그 풍경의 일부를 볼 수가 있다.
A. 재특회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2003년 한류 드라마의 유행. 그 이후 2005년 『만화혐한류』(야마노 샤린 지음)가 폭발적으로 팔렸다. 총 발행부수는 100만 부에 가깝다.
재특회(재일의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는 2007년에 500명의 회원으로 설립되었다. 2013년 10월 무렵의 회원 수는 1만 4,000명이었다. 모임의 목적은 ‘재일조선인의 특권 폐지’와 ‘특별 영주 자격 폐지’이다. ‘특별 영주 자격’이란 1991년 한일외무부장관 회담 합의를 기반으로 제정된 출입국관리특별법에 근거하여 ‘1945년 8월 이전부터 계속해서 일본에 거주하는 구 식민지출신자와 그 직계 비속’에게 주는 자격(대다수의 재일조선인을 포함한다)이다. 다른 외국인과 비교해 재류 자격 수속이나 출입국 수속의 간소화 이외에 이렇다 할 ‘특권’은 없다. 재특회는 재일조선인과 한국을 주된 표적으로 삼아 차별적인 가두시위를 반복해왔다.
재특회가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칼데론 사건 이후이다. 재류 자격 없이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필리핀 출신인 칼데론 일가에게, 2006년 대법원이 가족 전원 강제퇴거 명령을 확정했다. 일가는 특별재류허가를 신청했지만, 법무부는 일본의 중학교에 다니는 소녀에게만 허가를 하여 가족과 떼어놓는 결정을 했다. 재특회 등 200명은 강제퇴거를 지지하며, 소녀가 다니는 중학교를 코스에 넣어 시위를 하면서 ‘범죄 필리핀인 칼데론 일가를 쫓아내라’라고 고함을 쳤다.
그밖에 재특회가 벌인 주된 활동으로, 2009년 8월 도쿄 도 미타카 시에서 있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 전시·보고 집회 방해, 같은 해 12월 교토의 조선 초급학교 습격, 2010년 4월 도쿠시마 현 교원노조 습격, 2011년 1월 나라 스이헤이샤박물관(奈良水平社博物館) 습격, 같은 해 8월 이후 후지텔레비전이 한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방영한다고 주장하는 항의 활동(참가자 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 2012년 3월 한국인 배우를 광고 모델로 기용한 제약회사에 대한 항의 활동 등이 있다. 한편 2013년 무렵부터 재특회 활동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나 그에 맞선 시위(반격)가 활발해졌고, 재특회 측의 가두 활동은 다소 진정되었다(단, 아직 종식되지는 않았다).
B. 하스미 도시코
2015년 9월 10일 만화가인 하스미 도시코(蓮見都志子)가 “거짓 난민(위장 난민)”을 비판한다면서 국제자선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이 촬영한 시리아 난민의 사진을 소재로 위장 난민을 야유하는 풍자화를 그려 페이스북에 게재했다. 한 달 후, 그는 해당 일러스트가 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0월 4일, 일러스트의 소재가 된 사진의 촬영자인 조나단 하임스(Jonathan Hyams)는 “이와 같은 편견을 표현하기 위해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사진이 이용되는 것에 충격 받았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라고 비판했다. 10월 7일 하스미는 촬영자에 대한 배려를 이유로 일러스트를 삭제했다. 10월 8일에 하스미는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이 일러스트는 모든 난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난민에 섞여서 들어오는 위장 난민을 야유한 것입니다.” “제가 느끼기에 많은 일본인은 전쟁난민이나 경제난민의 수용에 반대합니다. 그것은 왜인가 하면 일본은 이미 65년이나 전에 대량으로 전쟁난민을 받아들였고, 그들 때문에 일본에 사는 일본인이 냉대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일조선인을 겨냥해 한 말이다. 하스미 등 혐한론자들은 대부분의 재일조선인이 전후에 불법 입국한 사람들이고, ‘재일 특권’을 얻어 일본인의 기득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10월 2일 두바이의 미디어 stepFEED는 ‘시리아 난민 위기에 대해 최악의 리액션을 취한 7인’에 하스미를 선정했다. 하스미 도시코의 만화 『그래, 난민이 되자! 하스미 도시코의 세계』는 2015년 12월 19일에 발행되었는데, 초판 3만 부가 출판되어 한때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C. 교토 조선학교 습격사건
2009년 12월에 교토 시에 있는 조선학교를 재특회가 습격했을 때, 나에게 젊은 재일조선인 여성이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냈다. “지난 금요일, 교토 조선제일초급학교에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이라는 단체가 난입하여 어린이들 앞에서 ‘스파이의 새끼들! 조선학교를 일본에서 몰아내라!’라며 몇 시간에 걸쳐 협박을 했습니다. 요즘 이런 종류의 사건이 끊이질 않습니다. ‘일부 배외주의자들이 하는 짓이니 내버려두면…’ 이라는 일본인 주류(majority)의 감각이 이번과 같은 협박 행위나 폭행을 허용하는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는 듯합니다.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사무치는 글이었다. 내겐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때 가슴 속에 솟아오른 것은 이런 생각이었다. 그는 이제 막 20대가 되었다. 그의 또래였을 때 나도 같은 의문과 분노를 느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오직 한 가지 주장을 줄기차게 이어왔다. 하지만, 그래서 뭐가 어떻게 변했다는 건가? 이런 무참한 사회를 젊은 세대에게 남겨주게 될 줄이야… 미안함과 공허감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재일조선인이 일본에 있는 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결과다. 원래 하나였던 재일조선인을 둘로 나누고, 한쪽에는 권리를 부여하면서 다른 한쪽은 배제하는 선별이 허용되어도 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현상은 내 생각에는 일본의 주류에 편재하는 ‘국민주의’를 배경으로 ‘계속되는 식민지주의’가 표면화한 것이다. 재특회 등 일부의 문제가 아니다. 고삐 풀린 적의는 피해자인 재일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 자신도 해치고 있다. 식민지주의라는 것은 이렇게도 큰, 되돌릴 수 없는 상처와 왜곡을 남기며 계속되고 증식되는 것이다.”
이렇게 쓰고 나서 7년,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외국인 참정권 법안’, 즉 정주외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는 안이 불충분하나마 제시되었으나 그조차도 현재의 아베 정권하에서는 완전히 무산되어버렸고, 더 이상 입 밖에 내기조차 망설여지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고등학생 세대의 취학 원조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학비 무상화 정책은, 본래 특정한 국가정책이나 국가 간 관계와는 무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조선학교만을 열외로 하여 제외시키는 정책을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한 재특회의 교토 조선학교 습격사건에 관해서는 학교 측이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2013년 10월 7일 교토 지방법원이 재특회에게 조선학교 주변에서의 활동 금지와 약 1,200만 엔의 배상을 명령하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은 “(일본도 비준한) 인종차별철폐조약에서 금지한 인종차별에 해당하여 위법”이며 “시위 활동으로 인해 아동들을 위협하고 통상적 수업을 곤란하게 했으며, 평온한 교육사업을 할 환경을 해치고, 명예를 훼손했다”며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특회는 이 판결에 불복하여 오사카 고등법원에 항소했으나, 오사카 고법에서도 2014년 7월 8일 항소기각 판결이 내려졌고, 같은 해 12월 10일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극우배외주의자들은 주춤하지 않았다. 인터넷 상에서는 헤이트스피치가 점점 증대하고 있다. 우파 계열의 미디어가 ‘국적’이나 ‘매국노’라는 증오와 저주를 대대적으로 내세운 기사를 집요하게 계속 게재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잘 팔리기 때문이다.
D. 헤이트스피치 규제법
위와 같은 상황에서 헤이트스피치에 관한 법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아, 법제화 움직임이 일었고 2016년 5월 24일 ‘헤이트스피치 규제법’이라는 법률안이 중의원을 통과하여 성립했다. 이 법의 정식 명칭은 ‘본국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의 해소를 위한 대응 추진에 관한 법률’이며 자민당과 공명당(여당)이 제출한 것이다. 그 이전에 야당이 공동으로 참의원에 제출한 ‘인권 등을 이유로 하는 차별의 철폐를 위한 시책 비준에 관한 법률안’은 부결되었다.
이번에 성립된 법률의 목적은, 일본 이외의 국가나 지역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의 해소를 위한 기본 이념이나 기본 시책을 정하여 추진하는 것이다. 헤이트스피치의 정의, 즉 ‘본국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 가운데 ‘본국 외 출신자’란 ‘① 일본 국외에 있는 국가 또는 지역 출신자 또는 그 자손일 것, ② 일본국에 적법하게 거주하고 있을 것’이라는 두 요건을 충족시킨 자이다. ‘차별적 언동’이란 ‘차별적 의식을 조장하고 또는 유발할 목적으로 공공연히 그 생명, 신체, 자유, 명예 또는 재산에 손해를 가할 뜻을 고지하는 등 본국의 역외에 있는 국가 또는 지역 출신자라는 이유로 본국 외 출신자를 지역사회에서 배제하는 것을 선동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들 규정에는 벌칙은 없고, 노력은 필요하지만 결과는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념법이라고 일컬어진다. 야당 안은 인종 등(인종, 피부 색, 가계家系 또는 민족적 혹은 종족적 출신)을 이유로 하는 차별과, 부당한 차별적 언동을 금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노력의무가 아니고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성립된 여당 안은 헤이트스피치 억지에 대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견해가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본국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이라는 규정 속에 오키나와 출신자나 아이누는 제외되는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또 ‘적법한 거주’라는 점에 대해서는 난민신청자 등 재류 자격이 없는 외국인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문제가 지적된다.
이에 대해서는 대상 외의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허용한다는 취지가 아니고, 헌법 및 국제조약의 취지를 감안해 대처한다는 부대 결의가 이루어졌지만, 앞으로 운용에 있어 큰 문제가 남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기본 인권은 적법하게 거주하고 있는지와 관계없이 만인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고, 하물며 난민신청자의 경우 일본에서는 문호가 현저하게 좁은데다가 긴 시간이 걸리는 심사 기간 중에는 ‘적법하게 거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난민에 대해 폐쇄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 2015년 통계에서 난민신청자는 7,586명인데 난민인정을 받은 것은 27명에 불과하다. 아사히신문사가 2015년 12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난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응답은 24%에 머물렀고, 58%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1996년 9월 조사에서는 난민이나 외국인노동자 수용에 대해 ‘더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가 22%, ‘지금 이대로 좋다’가 65%였다. 20년 동안 일본 대다수의 의식은 거의 변화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정부 자체가 배외주의 세력
A. 극우배외주의 세력과 일본정부 각료와의 관계
더욱 불길한 것은, 이러한 극우배외주의 세력과 현재 일본정부 각료들이 친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의 유력지 〈가디언〉은 2014년 10월 13일자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하는 필자가 일부 요약한 것이다.
“야마타니 에리코(山谷えり子) 국가공안위원장(자민당)은 일본경찰의 최고 책임자이지만 일본의 극우그룹과 관련이 있고, 재특회의 유력 멤버인 마스키 시게오(木重夫)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재특회 멤버들은 지금까지 재일 한국인, 조선인을 ‘바퀴벌레’라 부르며 학살을 공언해왔다. 그럼에도 야마타니 에리코는 지금까지 재특회를 전혀 비난한 적이 없다. 야마타니는 2009년의 사진에 관해 촬영한 기억이 없다고 한다. 이 사진이 공개되어 문제가 되기 직전에는, 자민당의 다른 각료 두 명이 일본의 네오나치 정당의 당수인 야마다 가즈나리(山田一成)와의 사진 촬영에 응했음을 인정했다.”(저스틴 매커리 기자)
2012년 12월의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대승을 거둬 집권정당으로 복귀했는데, 그때의 가두연설 광경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아키하바라(秋葉原) 역 앞에서 연설하는 아베 신조를 일장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시민’들이 둘러싸고, 반중, 혐한, 재일외국인 배척을 외치고 있었다. 수상과 권력의 중추가 자신들에게 친화적이라고 하는 실감이 극우배외주의 세력을 고무시키고 있는 것이다.
“조선 여자들을 강간하라”, “조선인을 죽여라” 하고 백주에 공공연히 고함치는 ‘시민’의 존재가 용인되는 사회에서 조선인이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는가?
앞서 언급한 〈가디언〉의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야마타니 에리코,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이나다 도모미(田朋美)는 아베 수상의 측근이며 전시 일본에 관한 역사수정주의적인 견해를 그와 공유하고 있다. 일본이 1920년대 말부터 1945년의 패전까지 조선인이나 중국인 여성이 주가 되었던 몇 만 명의 여성들에게 전선에서 성노동을 하도록 강요했다는 주지의 사실에 대해, 이들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의를 제기해왔다. 아베 개조내각의 각료 19명 가운데 15명이 속해 있는 일본회의는 애국주의적 교육을 추진하고, 전시 일본이 아시아 대륙에서 행한 군사작전에 관한 ‘자학사관’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1997년에 창립된 단체다.”
B. 나치의 수법으로
무엇보다 내 마음을 황량하게 한 것은, 일본국민(결코 전부는 아닐지라도) 다수가 이러한 배외주의적 정책을 지지 내지는 용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의 독일을 연상케 한다. 부총리 겸 재무대신이며 일본회의 최고 고문인 아소 다로(麻生太)는 2013년 7월의 강연에서 개헌 절차에 관해 “나치의 요령을 좀 배우면 어떨까”라고 말했다.
천황을 국가원수로 정한다,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바꾼다,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규제한다, 현행 헌법의 “고문 및 잔인한 형벌은 절대로 금한다”라는 조문에서 ‘절대로’라는 문구를 삭제하는 등, 자민당의 개헌안은 간과할 수 없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또한 자민당 개헌안은 외국인의 기본적 인권을 확실하게 부정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자민당 개헌 초안에는 “공무원 선정을 선거에 의해 행하는 경우에는, 일본국적을 소유한 성년자에 의한 보통선거 방법에 따른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 ‘일본국적을 소유한’이라는 문구는 현행 헌법에는 없고 일부러 첨가한 것이다. 개헌안에는 이러한 항목도 있다. “긴급사태 선언이 발령되었을 때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내각은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정령을 제정할 수 있다.” 이것은 나치의 비상대권법과 동일한 발상이다.
최소한의 역사 지식이라도 있다면 “나치의 요령을 좀 배우면 어떨까”라는 말은 일국의 부총리가 농담으로라도 해서는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이런 발언에, 그 자리(국가기본문제연구회)에 모였던 재계인과 정치가들은 껄껄대며 웃음으로 응했다. 주로 해외 미디어로부터 비판을 받자 아소는 발언을 철회했지만, 일본 내에서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책임을 추궁 당하는 일도 없이 여전히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 이미 부정론자와 역사수정주의자들이 권력을 틀어쥔 사회가 되고 말았다.
C. 대지진과 파시즘의 위기
2011년 3월 11일에 동일본대지진과 큰 쓰나미가 일어났고, 이어서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에서 멜트다운 사고가 일어났다. 그 직후부터 밤낮으로 집요하게 흘러나오는 “힘내라, 일본!”이라는 선전 문구를 들으며 나는 파시즘 도래의 위기를 느꼈다.
1923년 9월 1일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났고, 도쿄와 그 근교가 괴멸적인 파괴를 겪었다. 그 와중에 약 6,000명의 조선인이 ‘방화를 저지른다’ ‘우물에 독을 넣었다’ 등의 사실무근의 데마고기(demagogy)로 학살당했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이 학살사건의 공식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이 지진을 계기로 정치적 반대 세력은 매우 처참하게 탄압당했다. 치안유지법이 발포되자 당시 미미하게 존재했던 데모크라시의 싹은 짓밟히고, 일본은 침략전쟁으로의 가파른 길로 내달린 것이다. 관동대지진 때와 같은 데마고기는 1995년 한신대지진에서도 나타났고, 2011년 동일본대지진, 2014년의 히로시마 호우 재해, 2016년 5월의 구마모토대지진에서도 집요하게 반복되었다. 일본정부가 조사도 사죄도 하지 않고,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도 하지 않은 것이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는 큰 원인이다.
관동대지진으로부터 90년 정도 후인 현재, 후쿠시마원전사고의 피해지역은 방사능에 오염되어 지금도 10만 명 이상의 주민이 원래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해 떠돌고 있다. 한때는 ‘이토록 엄청난 재앙을 경험한 이상, 이윤 추구나 대량 소비를 지상 가치로 하는 문명관이나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재고될 것이다’라거나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가치관도 개인의 삶의 방식도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라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후쿠시마원전 사고’는 천재가 아니라 인재다. 그러나 그 가해 책임은 오늘날까지 아무도 지지 않았다. 책임은커녕 아베 정권은 원전 수출에 매진하여, 전 세계를 향해 ‘후쿠시마는 통제되고 있다’라는 허언을 늘어놓아 도쿄올림픽을 유치했다. 국민 다수는 이것이 허언이라는 걸 알면서도 갈채를 보냈다. 과거 ‘군부에 속았다’고 했던 일본 국민들이 지금은 스스로 앞장서서 속는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단편화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일본의 문부과학성은 2015년 6월, 전국의 국립대학에 사범계열과 인문사회과학계 학부의 폐지나 전환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유는 ‘사회적 요구’에 따르기 위해서라고 한다. 즉 신자유주의체제의 지배층의 요구이리라. 젊은이들은 철학·역사·문학·예술 등을 접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타자와 대화하는 법이나 자기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법도 모르는 채 성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기계화·야만화’된 노동자·소비자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은 자본의 이익에 부합한다. 단편화된 인간의 시야는 좁고, 시간적인 척도는 짧다. ‘타자’가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해 그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 반성적으로 고찰할 수가 없다. 이러한 합리적인 판단력과 역사의식이 결여된 인간은 인종·민족·국적·성별·계층 등의 속성에 따라 상대를 규정하는, 즉 ‘차별’에, 그리고 국가에 무비판적으로 자기동일화하여 타자를 일률적으로 적대시하는, 즉 ‘전쟁’에 도움이 되는 존재인 것이다.
D. 계속되는 식민지주의: 아베 수상의 ‘전후 70년 담화’
2015년 여름 아베 신조 수상은 ‘전후 70년 담화’라는 것을 발표했다. 미디어는 이 담화에 ‘사죄’ ‘반성’ 등의 키워드가 포함될 것인지에 주목했다. 결론적으로 이 담화는 수상의 역사수정주의와 ‘일본적 보편주의’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일본의 미디어나 지식인 가운데 그 점을 예리하게 지적한 경우는 매우 적다. ‘아베 담화’는 모두(冒頭)에서 “러일전쟁이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라고 한다. 이 인식은 아베뿐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일본 보수파들이 널리 공유해온 것인데, 조선 민중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폭력적인 주장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러일전쟁은 조선반도와 중국 동북지방(만주)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고, 조선은 병참기지로써 일본에 의해 군사점령을 당했다. 그것이 훗날 ‘병합’(1910)으로 직접 이어진다. 식민지화에 저항한 ‘항일 의병’ 등 조선 민중이 일본군에 의해 살육 당한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즉 러일전쟁은 일본에 의한 조선 식민지화 전쟁의 일환인 것이다. 아베는 그러한 조선 민족을 향해 러일전쟁을 끄집어내어 자국을 미화한 것이다. 이것은 대화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는 조선의 예만을 들었지만, 아베 담화는 홋카이도· 류큐(오키나와)·타이완 정복과 지배에 대해서도 한 마디의 ‘사죄’나 ‘반성’을 하지 않았다.
아베 수상은 그 담화에서 서양 제국으로부터 밀려든 식민지 지배의 파도에 대한 위기감이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세계공황이 발생하고, 구미 제국이 경제 블록화를 진행하자 일본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일본은 고립이 심화되었기 때문에 힘의 행사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자’가 되었다. 방향을 잘못 잡아 전쟁의 길로 나아갔다. 이것이 그가 ‘반성’한 내용의 전부다. 이것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피해자를 향한 ‘반성의 변’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의 얼굴은 ‘서양 제국’으로만 향해 있다. 이는 ‘유럽 보편주의적’ 질서에 대한 도전과 그 실패를 반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베 담화’에는 “전장(戰場)의 그늘에는 명예와 존엄에 깊이 상처를 입은 여성들이 있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구절도 있는데, 이것은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군사 성노예)를 가리키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인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니, 누가 누구에게 훈계하려는 것인가. 게다가 ‘상처 입은’이라고 수동태로 말하고, 누가 상처를 입혔는가 하는 주어는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다. 어디까지나 국가의 책임을 부정 또는 회피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아베 담화’는 맺는 부분에서 “그 전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우리의 자식이나 손주, 그리고 그다음 세대의 어린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하는 숙명을 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며 감상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죄해야 하는 주체는 우선 국가다. 젊은 세대를 국가의 공범으로 끌어들여 ‘사죄를 계속하는 숙명’을 지게 하는 것은 일본정부가 아닌가. 이것이 오늘날 일본국 지배층의 역사인식 수준이다. 근대사를 통해 타자와 만나지 못하고 대화할 수 없었던 일본은, 여기서 또 타자와의 만남이 어긋나게 되었다. 그런 일본이 아베 정권하에서 미국의 일국지배체제에 추종하는 정책을 급속하게 추진하고 있다. 지금 일본은 세계 평화에 대한 심각한 위험 요인이다.
왜 여기까지 왔는가? 이제부터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
오늘날 일본에서 배외주의가 대두한 데에는 세계 공통의 요인과, 거기에 중첩되어 존재하는 일본 고유의 요인이 있다. 여기서는 전자에 대해 이야기할 여유가 없었다. 일본 고유의 요인에는 처음에 말한 것처럼 장기적·중기적·단기적인 층위가 있는데, 여기서는 주로 단기적인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배외주의 대두에 있어서는 1990년대 이후의 ‘리버럴파’(진보파)의 자멸(‘퇴락’) 요인이 크고, 게다가 그 극복의 길은 험난하다. 이 점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논해야 하지만, 지면이 부족하다. 참고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정부 간의 ‘12·28합의’와 관련하여 내가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를 비판한 공개서한을 읽어보기 바란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선풍이 휘몰아치고, 유럽에서는 영국이 EU를 탈퇴(브렉시트)하는 일이 일어났다. 양쪽 모두에 공통된 것은 이민에 대한 반감이다. 이 감정은 반지성적·비합리적인 것이고, 잘 조정하고 극복해갈 수 있을지 미지수다. 적어도 나 자신은 낙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로 귀결된 그 패전의 결과로 연합국으로부터 부여된(‘강요된’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라는 성과를, 일본 국민(소수의 지배층만이 아니다) 스스로가 잇달아 내던지는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토록 어리석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 모두’가 어리석다고 단정하고 절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계급투쟁을 다시 의제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글로벌한 연대를 끝까지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글로벌한 시각이 없으면 파리의 피해자(2015년 11월 13일 습격사건의)와의 감상적인 연대는 의사(疑似) 윤리적인 외설이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사상적 태도와, 그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결의일 것이다.
끝으로 나는 이라크전쟁 개전 직전, 에드워드 사이드가 죽기 7개월 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 소개하고자 한다. 사이드가 우리에게 남긴 유언이다.
“지금 현재, 제국주의자들을 이렇게까지 설치게 한 원인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사이드는 “강력하게 조직되어 많은 사람들을 확실하게 동원할 수 있는 저항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함께 “지식계급 전반의 실패”를 들었다. “중요한 목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중요한 목표란 에메 세제르가 말한 자유와 해방과 계몽을 추구하는 모든 민족이 모여드는 승리의 회합입니다.”
악몽의 시대에 이 ‘승리의 회합’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번역 형진의
서경식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교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도쿄 게이자이대학교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0년대 초부터는 디아스포라의 입장에서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현실, 일본의 우경화, 예술과 정치의 관계, 국민주의의 위험 등을 화두로 글을 써왔다.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2000년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2012년에는 민주주의 실현과 소수자의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제6회 후광김대중학술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고뇌의 원근법』, 『나의 서양음악 순례』, 『나의 조선미술 순례』, 『시의 힘』, 『내 서재 속 고전』,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 등이 있다.
일본에서의 배외주의 대두와 계속되는 식민지주의
분량13,630자 / 25분 / 도판 2장
발행일2017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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