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다 함께, 그리고 점이지대
노명우
분량23,395자 / 45분 / 도판 2장
발행일2015년 2월 10일
유형강연록
사회학이 꼭 필요할까?
반갑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화로 시작해보죠. 오늘 점심을 일 때문에 처음 뵙는 분과 함께 했습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시작했는데, 인사 나눈 지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분이 저에게 ‘수도사 같은 느낌이 난다’ 하시는 거예요. 나의 어디에서 그런 분위기가 난다는 걸까, 이게 칭찬일까 무엇일까 등 알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누군가에게 저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 허벅지를 찔러가면서 고통스럽게 참고 사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새삼스레 세상의 양면성을 떠올렸습니다. 오늘 나누게 될 이야기도 세상만사의 양면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쓴 『사회학의 쓸모』2)라는 책이 있습니다. 후배 사회학자들이 질문하고 바우만이 대답하는 대담집입니다. 아주 다양한 주제가 논의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핵심 질문은, 우리가 살고 있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사회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떤 쓸모를 제공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 시대에 도대체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여전히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왜 그럴까, 그런 사람들에게 사회학이란 어떤 쓸모가 있는 학문인가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대화를 합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그들의 고민과 제 고민 사이의 유사성을 느꼈습니다. 저 또한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쓸모를 사회학을 전공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늘 고민이었거든요.
그 책에 등장하는 한 가지 질문을 소개하겠습니다. 후배 사회학자들은 바우만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사회학자가 아닌 사람이 사회학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 필요가 있습니까?” 치명적인 질문이죠. 제가 사회학과 교수로서 대학이라는 제도의 틀 안에 있는 한 이런 질문과 마주치지 않습니다. 사회학과 수업에서 『사회학의 쓸모』를 의심하는 학생은 없습니다. 당연히 사회학을 가르치는 저와 같은 사회학과 교수들도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존립 정당성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학이라는 제도가 그런 질문을 피해가도록 제도 안의 학생과 교수를 보호해주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사회학과 수업을 듣는 학생은 사회학에 대해 관심이 있으니까 사회학과 수업을 수강 신청했을 것이고, 사회학과 교수 역시 사회학을 좋아하니 사회학자가 되었을 터이니 대학 내 사회학과 수업은 일종의 취향 공동체와도 같습니다. 그 공동체 내에서는 그 누구도 공유하고 있는 취향의 정당성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습니다. 어떤 사회학자도 대학 내에서는 사회학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사회학자에게는 때론 치명적으로 작용합니다. 사회학자는 대학 외부로 나오는 순간 바로 이 질문에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로 이런 자리가 그런 경우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아예 모르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사회학을 좋아하기는커녕 아예 사회학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도 있지요.
사회학은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회학자만이 그리고 사회학만이 사회를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 안에는 사회학자를 포함하여 사회학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비록 그 사람들이 사회학을 모른다고 해서 사회에 대해 무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누구나 사회 속에 있기에 누구나 사실 자기도 모르는 채 사회학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사는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내가 어떤 공간 속에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바로 오늘 우리는 이런 공통점에서 출발하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이 사회학을 알든 모르든 전혀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사회학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함께 사는 이 사회이니까요.
여러분과 함께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서 불만을 느낀다면, 그 불만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불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가능한 방법은 대체 무엇일까요? 물론 저는 이 질문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비록 지금 당장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내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언젠가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 같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198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사람입니다. 제가 대학생이었던 80년대, 그때의 청춘들은 미래를 낙관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비록 80년대는 어두웠지만 내가 중년의 나이가 되는 시대가 오면 그 시대는 정말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죠. 그 당시 학생들이 많이 불렀고 저도 좋아했던 노래 중에서 ‘그날이 오면’3)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비록 그 당시엔 우리가 꿈꾸는 ‘그날’은 없지만 언젠가 ‘그날’은 꼭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래는 지금보다 당연히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 미래는 현재보다 훨씬 더 유토피아에 가깝다는 믿음을 단 한 번도 상실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중년의 남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전혀 저에게 찾아오지 않았어요. 중년의 남자가 되어 경험하는 세상, 중년에 맞이한 세상은 제가 스무 살에 막연하게 기대했던 ‘그날’을 맞이한 중년과는 전혀 다르죠. 20대 때 저는 미래를 믿었습니다. 하지만 중년의 나이가 되어 그 미래를 맞이한 지금, 저는 미래가 현재보다 반드시 더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상실했습니다. 80년대에 제가 미래를 믿었던 이유는 제가 젊었기 때문일까요? 제가 지금 미래를 믿지 못한다면 제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지금, 여기’의 20대들을 보면 꼭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 원인이 제가 보낸 세월 때문이라고 해석되지는 않습니다. ‘지금, 여기’의 젊은 세대들도 저만큼이나 ‘미래’를 믿지 못하고 현재에서 불만을 느끼며 서성거리고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시대, 현재를 긍정으로 바라볼 수 없는 감각, 지금 우리는 이런 공통의 기반 위에 있습니다.
공백 기간, 아노미 시대
현재 한국 사회는 공백 기간, 사회학 용어로 표현하자면 이른바 아노미 시대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 현재는 어찌 보면 익숙한 과거의 규칙과 가치관들은 시효를 다하고 약화되어 사라져가고 있는데, 그걸 대체 할만한 어떤 것은 아직 나타나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사라지는 속도에 걸맞게 새로운 가치가 형성되지 못하기에 사라진 자리는 텅 비어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일종의 싱크홀 양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스무 살에 기대했던 미래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꽉 채워진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30년 후에 실제로 맞이한 2010년대라는 현재는 꽉 찬 공간이 아니라 거대한 싱크홀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텅 빈 사회, 자꾸만 더 비어만 가는 사회, 지금 그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이 비어 있음은 근심·걱정이 사라지는 무심(無心)과는 다른 상태입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비어 있음은 박탈이고 상실이고 공허함이라는 시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지요. 이 공백은 움푹 패고 땅으로 꺼져버린 붕괴의 상태에 가깝습니다. 혹은 통제할 수 없는 블랙홀이 이 사회에 있어서 가치 있는 것들은 다 빨려 들어가고, 마치 이 세상에는 사라져야 마땅한 것들만 남아 있는 상황처럼 느껴집니다.
프로이트가 『문명과 불만족』이라는 책에서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느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지금 우리의 상황을 아주 잘 묘사해주는 표현이 아닌가 싶어요.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공백 기간 속에서 다수의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방향 상실감을 느낍니다. 그 바다는 너무나 커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뿐만 아니라, 육지가 너무나 멀게 느껴져서 어디론가 가려고 노를 젓는 것조차 무의미하다고 느끼고 있죠. 그냥 둥둥 떠 있는 느낌, 방향 상실과 강력하게 결합한 무기력감, 공백기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정서입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에 육지가 있는지, 어디가 동서남북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어요. 육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 혹은 육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목적성이 분명한 상황이라면, 때로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상황이 우리를 좌절감으로 이끌지는 않지요. 오히려 망망대해에 떠 있는 느낌이 우리에게 반드시 육지로 가고 말리라는 결의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고난이 의지를 자극하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아마 1980년대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나 싶어요. 고난이 사람들을 좌절시키기는커녕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의지와 에너지를 만들어냈던 시스템이 작동했던 시대였습니다.
1980년대 사람들이 느꼈던 ‘불만족’은 대상이 분명했습니다. 군부독재와 민주주의의 부재가 불만족의 대상이었으니까요. 1980년도 힘들었던 시대였지만, 그 시대에 사람들은 ‘불만족’의 근원을 잘 알고 있었고 어디로 가야 할지 또한 또렷하게 머리에서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불만족’은 만연해 있는데, 그 ‘불만족’의 근원을 알 수 없어요. 근원을 알 수 없는 ‘불만족’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뭔가 시대에 덫에 걸려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덫에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걸린 덫이 무엇인지 몇 개인지 도통 알 수 없습니다. 그 덫을 누가 설치하는지도 몰라요. 모든 것이 불확실한데, 단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내가 덫에 걸려 있다는 느낌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공백 기간에 처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집단 심성을 만들어 냅니다. 무기력은 나만의 무기력만이 아니라 공백 기간에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집단 심성이 되는 것이죠. ‘불만을 품는다는 것’과 ‘무기력을 느낀다는 것’은 서로 다른 행동 양식을 불러일으킵니다. ‘불만’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한 개인이 품을 수 있는 불만이 임계치를 넘으면 사람은 폭발합니다. 불만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이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불만’과 ‘무기력’이 결합한 상황이라면, 가중된 ‘불만’은 항상 행동을 낳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중된 ‘불만’이 무행동을 낳기도 하지요.
‘불만’과 ‘무기력’이 만나 ‘무행동’이라는 자녀를 낳고, 지금 그 자녀가 번성하고 있어요. 불만은 창궐하고, 동시에 무기력도 암세포처럼 빠른 속도로 증식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이 상황에서 불만을 느낄 수 있는 뇌의 촉수가 무뎌지면 속이 편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촉수는 더 예민해집니다. 그 예민해진 촉수를 가진 사람들이 SNS에서 인터넷 게시판에서 서로 만납니다. 툭 하고 치면 순식간에 폭발할 것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요. 그 사람들의 먹잇감은 매일 등장합니다. 한국 사회는 역동적이니까요. 늘 분노의 대상은 어떤 형태로든 등장합니다. 그들은 불만의 해우소를 분노의 대상에 대한 저주 행동에서 찾습니다. 이게 현재 공백기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신경은 더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집니다. 공백 기간 속의 우리에게 신경증은 낯설지 않죠. 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탈출구를 찾는 첫 번째 방법을 전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는 사유의 습관에 대한 점검에서 발견하고자 합니다.
지름길 전략과 완전대체 종말론적 변화의 타당성
첫 번째는 이른바 ‘숏컷(지름길) 전략’입니다. 80년대에 상식으로 여겨졌던 생각이기도 하죠. 만약 어떤 사회에 문제점이 있다면 문제점을 해결하는 느린 길이 있고, 느린 길 이외에 빨리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지름길이 있다면 당연히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겠죠.
지름길이 있다는 생각은 매우 보편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지지하는 정치적 노선이 달랐어도 지름길이 있다는 생각 자체는 공유되기도 했습니다. 이 지름길 전략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정치적 색깔과 상관없이 80년대를 산 많은 사람이 공유했던 상식이었습니다. 지름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달랐지만, 지름길 자체에 대한 부정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른바 발전론자들은 경제성장이라는 지름길이 있다고 생각했고, 일단 그 지름길의 끝에 도달한 후에 경제성장의 성과를 나누자고 주장했다면, 좌파는 민주화를 위한 지름길이 있고 민주화라는 지름길에 도달하면서 경제성장도 함께 이뤄낼 수 있다고 믿었던 편이었습니다. 지름길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지름길에서 미래는 성큼성큼 다가옵니다. 게다가 그 미래가 긍정적이라면 지름길 위에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황홀하게 다가오겠지요. 지름길은 우리를 더 좋은 미래로 빨리 데려다 주니까요.
이제 다시 2010년대로 돌아와 봅시다. 그리고 우리의 무기력에 대해 생각해보죠. 우리에게 엄습한 이 무시무시한 무기력의 배후에는 다시는 지름길을 찾을 수 없는 현실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요. 지금 우리 시대에는 지름길이 더는 없는 게 아닐까요? 지름길들이 사라졌는데도 우리가 그 길을 여전히 찾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무기력에 빠지지 않을까요? 무기력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호소합니다. 사회가 좀 더 빨리 바뀌었으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사회는 쉽게 바뀌지 않느냐고요. 빨리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저변에는 어딘가에 빠른 변화를 추동하는 지름길이 있지 않은가라는 기대가 여전히 깔려 있습니다.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자꾸 우회하는 듯하니까 그 상황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결국 무기력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사회의 변화에는 지름길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80년대에 있었다고 믿었던 그 지름길이 진정 80년대에 있었던 것일까? 이 근본적인 질문과 관련하여 한 가지 사례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죠. 흔히 극좌파와 극우파는 일맥상통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런 상식적 주장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80년대의 극좌파였던 인물 중에서 지금 현재는 극우에 가까운 주장을 하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80년대 극좌파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면 지름길의 지름길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지름길의 지름길을 믿는 사람은 빠른 변화를 원합니다. 지름길의 지름길이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그들은 변화 속도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변화 자체의 가능성을 의심합니다. 이 사람들은 지름길의 지름길이 있다는 자기 생각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기보다 아예 태도를 바꾸어 세상의 변화란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빨려 들기 쉬워요. 급진적이고 매우 빠른 변화를 요구했던 극좌파는 이렇게 쉽게 극우파적 세계관으로 갈아타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지름길이 없어서 무기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위한 지름길은 아마 파랑새의 존재와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라요.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이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에서요. 만약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만 유독 지름길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예 지름길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던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본래 변화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천천히 일어나는 것이라면요? 당장 빠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무기력에 빠질 필요는 없겠지요. 변화는 단지 우리의 기대보다는 희망보다는 느린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지름길 전략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종말론적 사고방식에 의한 우리의 사유 습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어요. 문제 있는 이 세상이 완전히 붕괴하고 그 위에 완벽하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기대하는 생각 말입니다. 만약에 종말론적인 대체 모델과 숏컷 전략 모두가 가능하다면 정말 좋은 겁니다. 변화를 앞당길 수 있는데, 그 변화도 부분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재의 모든 문제점을 완벽하게 대체하는 변화라면 정말 좋겠지요.
강한 자아와 ‘나 홀로’ 전략
한국 사회는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사람들 각자 마음속에서 지름길 전략과 종말론적 완전대체 모델을 슬금슬금 포기했습니다. 지름길 전략과 종말론적 완전대체 모델을 포기하면서 동시에 사유의 습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성찰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것은 무의식처럼 남았어요. 이 충돌적인 모순 상황이 현재의 공백 기간을 만들어냈습니다. 공백 기간이 도래하자 사람들은 도피처를 찾았습니다. 도피처 전략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저는 한국 사회에서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한 모델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이른바 강한 자아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강력한 비판의 대상이죠. 이 모델이 강력한 비판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만큼 이 모델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 모델에 대한 아무리 많은 비판이 있어도 이 모델의 영향력은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사회학자들을 그걸 ‘신자유주의형 인간형’이라고도 하고 ‘자기계발 담론에 포획된 주체양식’이라 표현하기도 하지만, 전 일상의 용어로 ‘나 홀로 전략’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나 혼자서, 나의 힘으로 이 공백 기간의 불안을 극복하려는 전략인 것이죠.
‘나 홀로 전략’을 삶의 전략으로 채택하는 사람은 자신은 이 전략의 수혜자가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나 홀로 전략의 수혜자가 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사회에는 고용, 정치 질서의 불안정성 등 여러 가지 불안정성이 있어요. 즉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불안정성이 외부에서 개인을 규정하고 있는 거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나 홀로 전략’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예측 가능한 것으로 바꾸어 놓으려 해도, 외부의 불안정성과 개인이 확보한 안정성이 곧 충돌합니다. 나 홀로 전략을 통해 확보한 안정성과 외부의 불안정이 출동할 때는 거의 언제나 후자의 힘이 더 커요. 외부의 불안정성보다 더 강한 개인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은 현 사회 체제에서 지극히 소수에 불과해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론적으로 나 홀로 전략을 통해 안정성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전략을 포기하지 않아요. (이론적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화적으로는 왜 그 전략을 선택하는 것일까요? 이 배경에 세상은 이제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지는 않을까요? 세상이 나아져도 내가 나아질 가능성이 없으니 나라도 혼자 나아지겠다는 생각인 거죠.
촌스럽게 느껴지는 ‘다 함께’ 전략
보통 사람들은 나 홀로 전략을 매우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지요. 사회계급적인 조건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당신이 그런 전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당신이 세상을 잘 모른다는 증명이다, 당신의 삶에서 그게 실현될 줄 아느냐, 당신이 삼성가의 아들도 아닌데 왜 나 홀로 전략을 추구하느냐, 라는 식이죠.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그토록 나 홀로 전략에 매달릴까요?
나 홀로 전략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숏컷 전략과 완전대체 모델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1980년대의 ‘다 함께 전략’이 매력적이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사람들이 ‘나 홀로 전략’을 많이 채택하는 이유는, 그것 말고는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전략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만약 80년대 방식의 ‘다 함께 전략’이 여전히 매력적이라면 삶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그 전략 주변으로 자연히 모이겠죠. 하지만 비록 삶의 고통이 커진다 하더라도 ‘다 함께 전략’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다른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또, 왜 다 함께 전략이 사람들에게 덜 매력적으로 느껴지는지, 왜 문화적으로 나 홀로 전략 쪽으로 마음이 움직이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문제와 관련해서 다 함께 전략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연대’라는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름길 전략과 완전대체 모델과 결합되어 있는 연대론의 중요한 전제 중에 하나가 대의를 위한 자기희생이라는 이타주의입니다. 제가 80년대를 통해서 저 스스로 구축했던 상식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름길 전략과 완전대체 모델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타주의가 있었어요. 대의를 위해서 움직일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또 하나, 어차피 지름길 전략은 성립할 거니까 이건 오래가지 않을 거니까, 대의를 위해서 제가 희생한 순간은 굉장히 짧은 것이고 그 순간이 지나고 완전대체 모델에 의해서 세상이 새롭게 구성된다면 제 헌신도 분명히 보상을 받게 될 것이고 제 이타주의가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라고 판명되는 순간이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이러한 지름길 전략, 완전대체 모델과 관련된 이타주의 모델은 2010년대의 공백 기간을 사는 사람에게는 더는 매력적이지 않은 모델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나 홀로 전략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는 것, 그리고 문화적 효용성이 소진된 이타주의 모델이 연대를 구성하는 원리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델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갈 필요성을 개발하는 것일 테죠. 그렇게 하지 못하면 공백 기간에서 새로운 장으로 갈 수는 없겠죠.
점이지대
우리가 현재 머물러 있는 곳이 대피소이고 이런 대피소의 상황 속에서 무기력증을 느끼고 있고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뭔가 노력하고 있고, 어떤 것을 펼칠 가능성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 상태를 언어적으로 표현하면 ‘점이지대’가 아닐까 합니다. 현재의 공백 기간을 벗어나 완전대체 모델과 같이 프로그램화된 어떤 것에 의해서 당장 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공백 기간에서 벗어나서 그 어디론가 갈 수 있는 상황, 과도기적 내지는 일시적이고 유동적일 수도 있는 상황을 뜻하는 단어로 점이지대를 사용해봅시다.
완전대체 모델이 불가능하고 지름길 전략도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공백 상태에서 무한히 많은 점이지대를 창출해야만 하지 않을까요? 제가 상상하는 점이지대에서 중요한 이슈는 두 가지입니다. 점이지대라는 것이 지금의 공백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점이지대에서 해야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 또 하나는 무기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무지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어떤 뜻인가? 더 많이 배우거나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절대 바뀔 수 없다는 체념론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굉장히 많이 배운 사람도 이런 사고방식에 아주 많이 노출되어 있고 그걸 통념으로 받아들이고 그걸 상식으로 가지고 있어요. 그 사람이 얼마나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와는 상관없이 실제 삶의 전략에서는 체념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을 자주 봤습니다. 전문가도 매우 무지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의미의 무지가 빚어내는 무기력, 무지와 결합한 무기력의 연결점에서 우리는 벗어나야만 해요.
저는 점이지대라는 것이 바로 우리한테 알게 모르게 우리가 노출된 체념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뭔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체념론에 따르면 인간에게 선택권은 없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하자면 이거죠. “그래 봐야 별수 있겠어?” 점이지대에서 우리는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자각을 다시 획득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통해서 체념적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쿳시 소설의 메시지
최근에 흥미롭게 읽었던 책이 존 쿳시(John M. Coetzee)4)의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입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많이 읽히지 않는 소설가이지만, 어느 사회학자보다도 탁월하게 사회에 관한 성찰을 소설에 담고 있습니다. 저는 쿳시의 이 소설에서 핵심적인 것은 체념론적인 메시지에서 우리를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점 같습니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거죠. 인간의 선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자체가 무기력한 공백 상태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 홀로 전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영웅을 모시거나 초월적인 존재에 기대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죠.
쿳시가 소설에서도 일관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만약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려 있는 상태라고 한다면 그 덫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영웅이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감염되었던 체념적 무지에서 벗어나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이에요. 인간이 현재 무기력하다면 그 무기력이 어디 오는가? 쿳시는 체념적 무지에서 온다고 보는 거예요. 세상은 그런 거야, 라고 생각하는 체념적 무지를 갖고 있는 한 우리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거죠. 반대로 말하면 무기력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체념적 무지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의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그중에서 제 뒤통수를 쳤던 구절을 읽어 볼게요.
“하지만 정밀과의 유사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세계가 경쟁적인 경제들로 구분되어야 하는 건 그것이 세계의 본질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무리다.”
체념적 주장은 무리라는 거죠. 그게 본질이야, 인간은 경쟁할 수밖에 없고, 약육강식이야, 원래 그런 거야. 그러니깐 너는 너만이 나 홀로 전략을 추구해, 라는 것은 쿳시가 볼 때는 어불성설입니다. 다시 인용입니다.
“경제가 경쟁적인 관계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런 식으로 세계가 돌아가도록 결정했기 때문이다. 경쟁은 전쟁의 승화이다. 전쟁에는 불가피한 것도 없다. 전쟁을 원하면 우리는 전쟁을 택할 수 있다. 똑같은 의미로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택할 수 있다. 경쟁을 원하면 경쟁을 택할 수 있다. 그 대신 동지적인 협력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것이 쿳시가 소설에서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체념론적 무지에서 인간이 왜 벗어나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현재 사회는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는 덫에 걸려있다는 느낌을 받고, 망망대해에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그 상황 속에서 결국은 이론적으로는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나 홀로 전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죠.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영웅을 기다리거나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서 세상이 구원받으리라고 하는 기대를 떨쳐 버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어떻게 살 것인지를 하나하나 결정할 때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망망대해에서 기적적으로 되살아나는, 기적적으로 그 어느 곳인가로 도달하는 상황이 생갈 수도 있다는 것이 쿳시의 생각입니다.
사회학, 사회학자의 역할
사회학자로서 저는 마지막으로 도대체 사회학이 이런 사회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사회학자들이 하는 말을 사회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왜 들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사회학자가 하는 일이란 우리가 빠져있을지도 모르는 체념론적 무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기회, 장소, 공간을 마련하는 것, 또 그 속에서 말을 거는 것, 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진짜 우리가 체념론적 무지에 빠져있는지 아닌지를 점검하는 것, 그 점검을 통해서 무기력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끈을 찾는 기회와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들이 모여 일종의 점이지대를 형성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여기 모이신 분들은 점이지대로 가고자 하는 의지가 충만하신 분들이고, 저 또한 여러분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모르게 점이지대로 한 발자국 더 옮겨간 것 같아 매우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Q. 최종적으로 결론 내리신 것 중에 연대를 강조한다는 말은, 아직도 80년대식 사고방식이 유효한 면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방식의 현대적 번안인지 궁금합니다. 또 한 가지는 점이지대나 집합적 선택을 한다는 것이 사회학적인 어떤 관계망을 넘어서, 공간적으로 번안이 되는 건지, 아니면 사회구조와 사회적 공간구조는 다르게 해석되는 것이 맞는 건지요.
A. 옛날 방식의 연대라는 것 자체가 더는 매력적이지 않게 된 이유는, 그것은 이타적 모델에 근거해 있고 자기희생을 근거로 하는데, 그 점이 이젠 매력적이지 않다는 거죠. 저는 이것이 사람들의 심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뭐냐 하면, 그만큼 한국 사회는 개인에 대한 감각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대도시 환경이 되어버렸다는 거죠.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에 관한 흔적은, 아주 나이 드신 분들의 경험 속에서만 있죠. 전통적 형태의 공동체에 대한 기억, 그리고 전통적인 공동체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인간 유대에 대한 감각, 이런 것들은 나이 드신 분들은 삶 속에만 있어요. 저도 시골에 대한 추억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외갓집이 도시였으니까. 외가에 간다는 건 우리가 잃어버린 전통적인 공동체의 영역, 일차적인 유대가 살아 있는 현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른 집에 가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죠.
어떤 일차적인 유대, 전통적인 유대라고 부르는 것들, 그것들은 동질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들이잖아요. 한국 사회가 그동안 수치상으로만 도시화가 된 것이 아니고, 수치상으로만 사람들의 주거환경이 바뀐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조건이 합쳐져서 실제로 사람들의 사유방식과 멘탈에 굉장한 변화를 일으켰죠. 그래서 옛날 사람과 지금 한국 사람이 동일한 한국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농촌 공동체에 관한 체험 혹은 삶의 경험으로 갖고 있는 분들과 그것을 갖고 있지 못한 (도시에서 성장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멘탈의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일차 공동체의 정서에 입각한 연대가 이야기되는 경우들이 무척 많았고 그것은 서로 같아지는 것이었죠. 그러나 사회적 조건과 사람들의 경험이 바뀌면서 더는 그것에 대한 체험 자체가 없는, 그저 이론이나 기억으로만 가진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죠. 분명히 아까 선택과 관련해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집합적 선택이 되어야만 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유대나 연대라는 문제는 집합적 선택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부분과 관련이 있고요. 그렇다면 연대라고 하는 상황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엄중함과 중요함은 변하지 않는데, 연대와 유대 혹은 공동체가 변하고 있을 때, 그것들이 기본적으로 움직이는 메커니즘, 핵심 원리가 무엇인가에 있어서는 확실한 변화가 있다는 거죠. 그런 맥락에서 예전에 공동체 또는 일차적 유대라는 것이 동질성, 이타주의, 희생에 기반을 둔 유대라고 한다면, 더 이상 그런 것들(모성애, 희생, 영웅적 이미지를 가진 시민운동가)에 근거를 둔 연대의 모습이 아니라, 연대가 이루어지는 기본 원리와 바탕이 조금 바뀔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맥락이 있죠. 연대가 매력을 잃는 이유도, 지금 사람들은 바뀐 감성과 관점을 갖고 있는데, 주로 이야기되는 연대와 공동체는 대개 노스탤지어 형태를 지니고 있는, 그래서 과거를 복원하거나 상실된 것을 복원하려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형태는 확실히 만들어가야 하는 모던한 형태의 유대이자 공동체일 수 있죠.
문제는 균형에 있는데요. 상실된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만들어야 하는 것들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 경우들이 매우 많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공동체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노스탤지어적 관점에 알게 모르게 빠지게 됩니다. 그게 이야기하기도 쉽고 구체적이니까요. 저는 점이지대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 중에 하나도 새로운 형태의 모던한 공동체 내지는 새로운 형식의 연대에 관한 상상, 실험 같은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 스스로 희생하고 이타적인 방식으로 자기를 구성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다른 방식에 의해 움직일 수 있는 유대와 연대의 틀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 사람들이 가진 의지와 공간의 문제에서도, 저는 충분히 공간의 형태로 번역될 수 있는 문제로 봅니다. 왜냐하면, 이런 (지금 이 강연 장소인) ‘통의동집’과 공동주거 공간이 창출된 것도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죠. 물론, 공간이 창출된 의지가 확장되기도 하고, 공간을 구현하려는 의지와 구현된 공간이 항상 100% 완벽한 싱크로율은 보여주지는 않습니다만, 둘이 굉장히 중요한 상관관계와 상호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듯해요. 의지와 공간은 번역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번역이 되어야만 하죠. 왜냐면 의지라는 건 공간과 같은 형태로 번역되지 않으면, (그것은 굉장히 관념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아무런 실질적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위험성도 있죠. 의지는 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념적일 수도 있는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의지가 공간으로 번역되는 일들, 다시 공간이 의지로 번역되는 일들이 활발하게 일어나야만, 의지가 가질 수 있는 본원적인 한계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통의동집’ 같은 경우도 그런 면에서 일종의 점이지대잖아요. 여기서 무엇이 결정된 건 아직 아니지만, 과거의 전통적인 형태의 가족들이 주거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들이 있고,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상황이 일종의 나 홀로 전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 내지는 나 홀로 전략 이상의 의지를 가진 분들이 이 공간 안으로 모이게 되고, 여기서 어떤 사회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통의동집’도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점이지대가 공간화된 것이죠. 여기서 무엇이 일어나고 어디로 귀결될지는 사실 알 수는 없지만, ‘통의동집’ 역시 점이지대가 공간으로 번역된 형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Q. 공공기관에 있다 보니 어떤 사회적 체계 안에서 개인의 가치는 거의 중요하지가 않아요. 내가 뭔가를 선택해서 뭔가 결과를 내고 싶지만, 그건 사회가 원하지 않는 거죠. 일방적인 회의가 이뤄지는 사회에서 사는 느낌을 참 많이 받고 있는데요. 그 체계를 어떻게 따지고 들어야 그 체계가 잘못됐다는 것을 내가 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내 짧은 지식으로 그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이런 체계를 잘못되었다든지, 이것은 현재의 가치에 맞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사회적 트렌드나 동향 같은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따지고 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A. 제가 아까 완전대체 모델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라며 점이지대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에 어떤 맥락이 또 깔려 있냐면, 저는 종말론적 완전대체 모델이 가지고 있는 속성 중 하나가, 모든 변화가 다 동시에 일어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이라고 봐요. 나도 변하고, 우리 가족도 변하고, 우리 동네도 변하고, 사회도 변하고, 그러니까 모든 것이. 그런데 인간이 속하는 영역, 그리고 변화가 요구되는 단위들은 굉장히 다층적이거든요. 사회가 변한다고 내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변한다고 사회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변하는 것과 가족이 변하는 게 다르고, 가족이 변하는 것과 우리 동네가 변하는 게 다르죠. 가장 작은 단위로서의 내가 있다면, 가장 매크로(macro)한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우주까지 있죠. 사람은 굉장히 여러 가지 레벨의 어떤 집합체의 단위에 소속되어 있고, 제가 종말론적 완전대체 모델이라 했던 것의 전제 중에 하나는 어느 날 딱 메시아적 순간이 왔을 때, 가장 마이크로한 것부터 가장 매크로한 것까지 완벽하게 동시에 바뀔 것이다, 라는 전제가 하나 깔려 있는 건데요.
제가 완전대체 모델이 시효를 다하지 않았느냐고 주장한 것은, 대충 묻히자, 삶이 안 변한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과 관련이 있어요. 변화의 속도는 사람이 속해 있는 레벨에 따라서 변화 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변하는 것과 내 가족이 변하는 것, 그리고 내가 혈연공동체를 재구성하는 것과 사회 안에서 가족제도가 변하는 것은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한 사회에서 또 한국 사회에서 가족제도가 변하는 것과 지구적 차원에서 가족제도가 변하는 것이 분명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저는 점이지대라는 현상과 관련해서 중요한 문제는 여러 레벨에서 변화 속도가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한 개인의 변화와 어떤 사회의 변화, 딱 두 가지 축만 놓고 보면, 결론은 이겁니다. 못 변해요. 변화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회는 다른 단위보다 변화가 훨씬 더 느린 단위라는 거죠. 사회는 훨씬 더 큰 단위고, 사회라고 하는 단위 안에는 훨씬 더 많은 행위자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는 작은 단위보다, 이해관계가 훨씬 더 복합적으로 교차하고 있어서 사회라고 하는 단위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거죠. 우리가 변신론적 무지에서 벗어나는 또 하나의 방법, 즉 점이지대를 생산한다는 것 자체도, 어떤 변화의 단위, 레벨, 속도, 항상 모든 것이 한 단위에서 변화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변화가 자동으로 다른 단위의 변화로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변화의 과정에 대한 상상도 필요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아주 사적인 영역과 그 극단에 있는 공적 영역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점이지대와 같은 영역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가장 거대한 공적 영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의 변화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점이지대에선 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거기에서라도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리고 완전대체 모델들이 시효를 다했다고 했을 때, 사회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기력에 우리가 빠지지 않을 방법들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Q. 숏컷 모델이나 기존의 동질성에 기반한 연대 같은 것이 실효를 다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안 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계층에서 서서히 변화할 가능성을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 그게 조금 더 긍정적인 변화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인내심을 가져야 하고 도덕적으로 더 투철하게 무장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연대론이 이타주의나 희생에 기반을 뒀기 때문에 지금 먹히지 않는다는 것은 오늘에 와서 더 강한 도덕적 무장을 한 채 시간을 견디는 게 과거보다 더 힘들어진 상황일 수 있는데, 과연 말씀하신 상황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싶어요. 시간을 견디고 여러 계층의 연대를 만들어가면서 도덕적으로 투철하게 무장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A. 저는 도덕적 모델과 윤리적 모델은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하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행위의 리스트가 있는 것이 도덕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저는 별로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이고 별로 도덕적이 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도덕적인 건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상징적인 작은 사례를 들자면, 도덕적인 예를 너무 많이 들면 어쩔 수 없이 위선자가 되는 겁니다. 도덕은 겉으로는 좋잖아요. 도덕적이라고 했을 때 생각나는 리스트가 있잖아요. 이웃을 사랑해라 등… 그 자체를 뭐라고 할 수 없잖아요. 근데 정말 사람이 그걸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못하거든요. 그런 척을 하는 거죠. 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 도덕적 요구는 저한테는 불가능해요.
점이지대에서 필요한 문제는 이런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윤리적인 것이란 어떤 것일까요? 저는 서로 얽혀 있음에 대한 인식이 윤리적인 거라고 생각합니다. ‘책임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윤리적인 것의 핵심이고, 모성애라든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책임져야 한다는 그런 도덕적인 리스트로 무장된 책임이 아니라, 저는 책임이라는 단어에 관련해 흔히들 이야기하는 ‘책임(responsibility)은 반응(response)할 수 있는 능력(ability)으로부터 나온다’는 이야기가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널 책임져줄게! 이런 건 도덕적인 것이죠. 이런 게 아니라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낀다는 건 누군가에 대해서 우리가 얽혀있을 수밖에 없는 엄중한 상황에 대한 인식, 그게 책임이라는 거예요.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인 거죠. 아무리 내가 저 사람이 싫어도 저 사람과 내가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그러니까 제가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하면 그 행위의 결과가 저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간에 타인에게, 물론 어떤 때는 아주 강하게, 어떤 때는 아주 미약하게, 어떤 때는 즉각적으로, 어떤 때는 시간적으로 유예된다고 할지라도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와 타인은 서로 반응(response)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반대로 누군가가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의 행동은 저에게 즉각적으로, 또는 시간적으로 유예되어서,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영향을 미치는 거죠. 예를 들어 제가 지지하지 않는 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의 행동이 저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게 바로 서로 얽혀 있음의 문제라는 것이 얼마나 엄중하고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얽혀 있는 상황이 인간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면 도덕적인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책임성의 원리에 따라서 움직여지는 윤리적이라고 하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어요.
아까 변신론적 무지에 관해서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벗어나야 할 무지 중에서 하나를 더 꼽으라고 한다면 이런 의미의 윤리적 감각이에요. 한국 사회는 도덕적 감각은 매우 뛰어난데, 그래서 모두가 다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도덕적 감각뿐만 아니라 윤리적 감각도 뛰어나야 하거든요. 이것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행위라고 봐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죠. 인간이냐 인간이 아니냐라고 했을 때 겉으로 드러난 도덕적인 계율을 얼마나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의 문제로 환원시켜서 생각하는데, 제가 생각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그런 의미의 윤리적 의식을 갖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 같아요. 그런 의미의 윤리적 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인간이 아니거든요. 인간이 아니어야만 합니다. 인간이라면 서로의 행위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하고, 거기서 자기가 어떤 책임을 가질 것이냐의 문제가 누가 도덕적으로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점이지대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이런 윤리적인 감각, 책임을 회복하는 것이고 도덕을 이기는 것이죠.
두 번째 문제와 관련해서, 저는 이기적인 것에 대한 다른 해석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굉장히 도덕적 감각으로 무장되어 있고 도덕적 감각이 요구되다 보니까, 이타적이라고 하잖아요, 근데 저는 사람이 이타적일 수 없다고 보거든요. 이타적이려고 노력하는 거지, 사람은 이타적일 수 없죠. 이타적이라면 제가 이미 신이거나 성직자겠죠. 저는 세속인이거든요, 세속인인 저는 이타적일 수는 없고 세속인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이타적이면 좋겠다는 것일 뿐, 어떤 사람이 이타적이지 않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타적인 건 인간이 따라야 할 규범적 상황이 아니라 전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는 이타적인 걸 도덕적으로 따라야 할 규범적인 상황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이것이 부메랑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오히려) 윤리적인 감각을 무디게 하는 장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봐요. 저는 이타적인 상황은 인간에게 오히려 예외적인 상황, 신적 존재가 아니면 신적 존재의 삶을 그대로 따라서 살려고 하는 수도사와 같은 사람들이 행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세속인은 자기가 가진 이기심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고 그 대신 자신의 이기심을 정확하게, 도덕적으로 채색하지 말고 정확하게 사실 그대로 드러내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이기적이려고 노력해요. 저는 제가 소중하니까 타인으로부터 무시당하는 모욕감을 견딜 수 없어요.
타인은 저를 모욕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거든요. 제가 만약 윤리적인 행동을 어기는, 인간들이 모여 있는 사회 구성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매우 비인간적인 행동, 비윤리적인 행동을 했다고 하면 제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로부터 내쳐지더라도 할 말이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고 하면 어떤 타인도 저를 모욕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아요.
그런 맥락에서 제가 어떤 연대에 관한 필요성을 느낄 때는 제가 모욕당한 느낌을 받을 때예요.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 때 제가 모욕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린아이들이 고통받았다는 그런 생각이 아니라 저는 제가 모욕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면 제가 그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이런 식으로 나를 대한다고 하면 국가권력과 사회를 나를 정말 무시하는구나, 지금 이 상황이 그대로 유지가 된다고 하면 나에게 그런 일이 닥쳤을 때 나도 이렇게 국가와 사회에 의해서 없는 존재로 무시당하겠구나, 이렇게 급박한 위기 상황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공개되고 재연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이미 저는 당사자의 맥락에 서 있었던 거죠.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연대하거나 유대를 한다고 했을 때도, 도덕적인 색채를 지워버린, 윤리적인 바탕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기심, 긍정적 의미의 자기애를 훼손당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저라는 개인한테만 특별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상 매우 보편적으로 일어나요. 예를 들어 제가 노동자인데 노동자로서 정말 소중하게 여겨야 할 자기애가 훼손당할 수밖에 없는 고용조건이나 이런 것들은 제가 특별히 못나서 저에게만 규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상에서 저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은 거죠. 그런 사람들과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것들, 그런 게 저는 21세기에 필요한 연대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것은 이타심이 아닙니다. 그런 맥락에서 제가 모욕당했다는 판단을 했을 때 이 시대의 양심을 가지고 있는 시대의 지사도 아니고 정말 세속을 사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당연히 자기도 국가로부터 모욕당하고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러면 제 행동은 거룩한 행동도 아니고 뭐, 독립운동도 아니고 단순히 자신을 지키는 행동입니다.
끝으로, ‘사회학자들은 왜 그렇게 사회를 비관적으로 보느냐’는 질문을 흔히 받는데요, 어떤 사회학자가 뭐라고 했냐면, 내가 비관론자여서 그런 게 아니다. 세상이 변화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당신이 나에게 설명해봐라, 날 설득시킬 수 있다면 내가 태도를 바꾸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제가 늘 갖고 있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제가 문제점을 억지로 찾아내는 게 아니라 만약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언젠가 없어진다면 세상이 변화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충만한 사회가 되면 사회학이라는 학문도 더는 필요 없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사회가 변화해야 할 이유가 여전히 있는 한, 사회학자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한 이야기 중 제가 좋아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지성은 비관적이지만 의지는 낙관적이다.” 지성적으로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이유는 염세적으로 보려는 게 아니라 세계가 좀 더 좋아지기를 기대하면서 무엇이 없어지고 무엇이 개선되어야 세계가 더 좋아질까, 그런 관점에서 지성은 비관적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패배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의지는 낙관적일 수 있는 그런 태도가 좋을 듯합니다. 각자의 점이지대에서 그런 기운을 느끼길 바랍니다.
노명우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론이 이론을 낳고 해석에 다시 해석을 덧칠하는 학문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연구 동기를 찾는 사회학을 지향한다. 사회학이 다른 어느 학문보다 동시대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싱글남 사회학자’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근저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를 내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에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열정을 물려받았고, 버밍엄 학파의 문화연구에서는 동시대에 대한 민감한 촉수의 필요성을 배웠다. 지은 책으로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 『계몽의 변증법-야만으로 후퇴하는 현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노동의 이유를 묻다』,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아방가르드-도전과 역설』,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구경꾼의 탄생』 등이 있다.
나 홀로, 다 함께, 그리고 점이지대
분량23,395자 / 45분 / 도판 2장
발행일2015년 2월 10일
유형강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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