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학’, 그리고 ‘현대’
이병태
분량9,980자 / 20분
발행일2022년 9월 30일
유형강연록
‘한국성’이란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가 그만큼 타자화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강연 제목을 ‘한국’, ‘철학’ 그리고 ‘현대’라고 쓰고, 각 개념어에 따옴표 처리를 한 이유는 이 개념들 모두 20세기부터 사용된 용어로, 단 하나도 전통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개념, 또는 그런 틀을 사용하여 우리 것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향한 마음이 강렬해지는 것은 타향에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한국다움’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있으므로 자꾸 한국다움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명 또는 근대
우리 역사를 생각할 때 일제 강점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시기는 근대화와 맞물려있지요. 우리에게 서구, 근대화가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탈식민주의 학자인 에메 세제르(Aime Cesaire)와 제자인 프란츠 파농(Frantz Fanon)1의 책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파농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검은 피부, 하얀 가면』과 같은 책에서 작가 마요트 카페시아(Mayotte Capecia)의 책 『나는 마르티니크 여자(Je suis martiniquaise)』를 자주 언급합니다. 마요트 카페시아는 백인 남성을 선망해서 실제로 백인 남성과 결혼을 하기도 했으니, 어찌 보면 그의 책에는 자전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선망하는 순간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여성 주인공이 백인 남성을 처음 보는 순간, 그의 출현 자체가 압도적인 충격으로 다가온다고 표현되고 있어요. 대체할 수 없는 완벽한 이상으로 다가온 것이죠. 이런 글이나 현상에 대해 에메 세제르나 파농은 비판적으로 언급합니다. 실제로 당시 서구가 가지고 있었던 근대적인 학문, 근대적인 문화 등이 흑인 사회에 도래하자 백인은 강력한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나 동화되기를 열망했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뼈아픈 역사적 침탈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죠.
이쯤에서 ‘근대’, ‘모던(modern)’이라는 개념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개념은 어디에서 출현했을까요? 우리가 근대라고 번역하는 ‘modern’의 라틴어 어원이 ‘modernus’입니다. 이 말이 현재의 의미로 정착하는 데 서양문학사의 한 논쟁이 중요한 위상을 차지합니다. 동화 『장화 신은 고양이』를 쓴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2가 17세기 후반에 벌어진 이 논쟁, 즉 ‘신구문학논쟁(新舊文學論爭)’에서 신파(新派), 즉 ‘moderne’파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중세를 벗어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전범으로 삼았던 서사가 고대 그리스인데, 이 양식도 시간이 지나면 낡은 것으로 느껴집니다. 페로는 그래서 새로운 서사의 창조를 감행하고 또 강조했던 것이죠. 모던이라는 단어는 좁게는 ‘새로운 것’을 의미합니다. 어원사전을 찾아보아도, 모던은 ‘새로 부임한 관료’를 지칭할 때 사용한 수사였거든요. 그만큼 단순하고 소박한 일상어가 수백 년의 역사 속에서 정치, 문화, 예술, 경제 등등 시스템이 중첩되며 광의의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죠. 미학이나 예술, 문예이론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모더니티는 장기간 형성된 개념일 뿐만 아니라, 매우 많은 의미를 갖습니다. 역설적으로, 모던은 자유, 해방, 개인 등등 새로운 가치로 이뤄진 개념 같지만 20세기로 접어들면 민족 국가 등 초기 근대가 가지고 있었던 개념과 대립하는 내용들이 뒤섞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정의하기 쉽지 않은 개념 중 하나이지요.
동화와 수용의 열망
일본에서도 근대성 개념을 두고 어마어마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카리브해나 흑인 문화권에서 서구를 어떤 선망의 대상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일본 역시 선망의 대상으로 서양 문화를 받아들입니다. 1500년대 중반, 포르투갈 사람들이 일본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에는 막부가 허가한 항구 안에서만 교역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포르투갈 사람들이 끊임없이 선교하려고 시도하니까 일본 정부에서 무력으로 제압하기도 했고요. 일본에는 아직도 포르투갈 문화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일본의 튀김, 덴뿌라(てんぷら)는 포르투갈식 튀김인 템포라(Tempora)에서 온 것이지요. 그러다가 최고의 장사꾼인 네덜란드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달랐던 것은, 포르투갈은 의식주와 관련된 일상적 문화를 일본에 남기지만, 네덜란드는 서서히 서구가 가진 학문이나 이론 등을 전수할 수 있는 창구가 됩니다. 일례로 18세기에 출판된 요한 아담 쿨무스(Johann Adam Kulmus)라는 독일의 의사가 쓴 해부학책이 전해지며 일본 난학(蘭學)3의 출발점이 됩니다. 일본 드라마로 다뤄질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스기타 겐파쿠[杉田 玄白]4는 본래 의학을 공부했고, 네덜란드어를 하나도 할 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해부학책에서 인체 해부도를 보고 충격을 받아서, 일생을 걸쳐서 번역하겠다고 마음먹고 실제로 네덜란드어를 공부해가면서 번역해냅니다. 이것이 양학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유럽 전체에 대한 호기심과 서구의 이론을 흡수하고 수용하는데 몰입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이 처음에는 흑선5과 같은 어마어마한 물질문명에 압도되었으나, 서구 열강의 학문적 깊이, 실용적인 정신, 정치 시스템 등 정신문명에도 몰입하게 된 것이죠.
그리하여 일종의 “서구 지식 수용 특공대”가 결성됩니다. 메이지 6년에 메이로쿠샤[明六社]라는, 일본 내의 내로라하는 학자 모임이 결성되었고, 서구문물을 수용하려는 매우 적극적인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6가 가장 유명한 사람입니다. 일본 만 엔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이고, 일본 사람들이 연말연시 신사에서 자식들 대학 잘 가게 해달라고 빌기도 하는 신격화된 인물이기도 하고요. 이 사람과 함께 활동했던 인물 중 하나가 모리 아리노리[森有礼]7인데요. 이 사람의 일생도 살펴보면 당시 일본이 얼마나 서구수용에 몰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영어국어화론’을 펼쳤습니다. 공용어(official language)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일본의 국어(mother language)로 영어를 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일생을 바쳐서 서구를 선망했던 인물이고 실제로 서양인과 결혼도 했습니다. 그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는데, 이 역시 일종의 종자 개량, 즉 일본인의 서구인화를 실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메이로쿠샤는 반쇼시라베쇼(번서조소,蕃書調所), 카이세이쇼(개성소, 開成所) 등과 결합하면서 나중에 동경제국대학의 전신이 됩니다.8 그러니까 이들의 근대 대학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서구를 체계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조직이었던 셈인 것이죠. 이들이 서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근대화되기 위해서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궁리학, 격물치지학 그리고 철학
‘철학(哲學)’이라는 말이 창안되기 이전에 서양 철학은 유학과의 유사성을 연결고리 삼아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양계초라는 근대학자가 서양서들을 많이 번역했기 때문에, 당시에 한자를 읽을 수 있는 유학자, 대표적으로 석정 이정직이나 전병훈 등은 한서(漢書)를 통해 서양 학문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정직의 『석정집』에 보면 「강씨철학대략」이라는 칸트에 대한 소논문이 있습니다.9 여기에서 이정직은 칸트를 “서양의 유학자”라고 평합니다. 상당히 탁월한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칸트가 남긴 『순수이성비판』, 『판단력 비판』 등의 책을 보면, 칸트 철학 체계가 유학과 유사한 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서양철학에서 근대철학 부분이 그렇습니다. 칸트의 스승이 볼프이고, 볼프의 스승이 라이프니츠인데요. 라이프니츠는 『주역』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수학자 중에도 『주역』에 등장하는 이진법과 라이프니츠가 설명한 이진법을 비교 연구하는 분도 있습니다. 동양 유학이 프란체스코 선교회를 통해서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읽히면서 근대합리주의가 형성될 때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여 연구하는 분들이 따로 있기도 합니다. 증거라고 할 만한 것도 꽤 남아있어요. 왜냐하면 칸트의 스승이었던 볼프가 대학 총장이었는데, 후일 대학 총장직에서 해임되는 사유가 유학을 너무 강조하여 이단시되었기 때문이거든요. 칸트 개념에서 얘기하는 ‘경외’가 유학에서 이야기하는 성(誠)・경(敬)・신(信) 중에서 경(敬)10 개념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정직은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이를 직관적으로 파악한 것이죠. “이 사람(칸트)은 서양 유학자구나” 하고요.
전병훈 선생은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읽은 학자입니다. 그에 대한 글이 『정신철학통편』 안에 들어있기도 합니다. 이들은 “서양의 ‘philosophy’라고 하는 것은 궁리학(窮理學)이다”라고 판단했습니다. 유학을 궁리학, 즉 리학(理學)이라 말하는데 서양의 철학이 그와 같다고 여긴 것입니다. 『대학(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따서 ‘philosophy’를 ‘격물치지학(格物致知學)’이라고 옮기기도 했습니다.
그걸 뒤바꾼 사람이 니시 아마네[西周]입니다. 메이로쿠샤의 일원이었던 니시 아마네는 ‘철학’이라는 말을 창안했습니다. 아마네는 기존의 유학자들보다도 더 정교하게 보았습니다. 서양의 ‘philosophy’에는 동양 유학에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근대 경험주의와 같은 과학적 세례의 흔적들이었습니다. 논증이나 실험, 검증 등이 강력하게 개입되다 보니까 더 이상 궁리학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판단했고 『백일신론(百一新論)』이라는 책에서 철학이라는 용어를 창안했습니다. 그 뒤에는 근대 대학들을 통해서 용어가 확장, 정착되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노우에 테츠지로[井上哲次郎]는 동경제국대학의 철학과 좌장 격인 인물이었는데요. 이 사람도 천황에 충성하는 군국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서양철학자인 사람입니다. 함석헌의 스승이었던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천황에 대한 충성을 묵례 또는 절을 통해 표시하지 않는 바람에 불경죄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탄압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을 주도했던 인물이 이노우에 테츠지로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일본은 이들을 통해서 철저하게 서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그 역사나 깊이가 훨씬 더 오래되었습니다. 실제로 건축학이라는 학문의 이름도 서양어를 번역한 것이고, 사실 대학에 존재하는 대부분 학과의 명칭이라고 하는 것이 전부 그러합니다. 서양어를 우리 언어로 바꾼 것을 잘 살펴보면 대부분 두 글자이지요. 자유, 평화, 철학 등등…. 최초에 번역할 때 일본학자들이 고안한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바꾸려야 바꿀 수가 없지요.
유학자에게 도래한 서양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고 서구 철학이 우세하면서 유학을 비롯한 우리 철학과 학문은 몰락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심도있게 들여다보지 못했을 뿐, 유학은 학문적 깊이가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서구에서 기독교와 유학을 이어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유학자들을 완전히 설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중에서 대표적으로 이마두(利瑪竇),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천주실의』에서 ‘천주(天主)’라는 개념을 세워 유학의 발원지인 중국에 기독교를 전파하려 했던 노력을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1600년대 일본에 조반니 바티스타 시도티(Giovanni Battista Sidotti)라는 이탈리아인 선교사가 잠입해 선교활동을 하다가 붙잡혔습니다. 이때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라는 유학자가 취조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취조하면서 기독교가 어떤 학문인지 계속 파고듭니다. 듣다 보니 자꾸 천국이 있다고 하고, 하느님이 있다고 하고, 기도하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니까 나중에는 기독교가 미신이라고 단정합니다.11 실제로 유학자들이 기독교를 처음 접했을 때, 기복적인 요소나 ‘내세가 있다’ 즉,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어떤 세계가 있다고 하는 태도 등에서 혹세무민하는 일종의 미신이라고 보았습니다. 유학이 고리타분해 보이지만,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요소가 강했어요. 예를 들어 무당에게 점을 보는 행위 등은 유학자들에게 거의 경멸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태도로 공부를 한 유학자들에게 아무리 기독교의 위세가 크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갖추고 있는 논리가 수준 이하로 보였던 것이죠. 그래서 당시에 안정복과 같은 사람들이 『천학고』나 『천학문답』 등에서 논리적으로 비판합니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기독교의 하느님, 즉 ‘천주’란 ‘상제’라고 설득합니다. 여기에서 ‘상제’는 중국 경전에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이처럼 마테오 리치는 과거 중국 경전에서 쓰던 용어를 가져와서 익숙한 개념처럼 접근하고자 했습니다. 구한말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학자 중 한 명이었던 홍정하(洪正河)12는 “우리가 경전에서 상제라고 썼던 이유는 일종의 비유적인 표현이었다. 이 세상을 비추는 이치를 비유적으로 예시한 것이었지, 실제로 그런 존재가 있음을 믿었던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매우 논리적인 반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한편, 최근 개봉한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 ‘오일러의 법칙’이 등장합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마방진, 가로 세로의 합이 똑같이 되도록 하는 게임을 합니다. 오일러에 따르면 6차 마방진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했는데요, 조선시대 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최석정은 9차 마방진까지 풀었습니다. 이미 서양에서도 최석정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최석정은 본래 유학자이고, 부차적으로 수학을 연구했음에도 그 수준이 매우 높았던 것이죠. 유학 자체가 꽤 깊이 있는 학문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전통이 굉장히 손쉽게 무너집니다.
학문과 권력
문자가 만들어진 이래로 지식, 학문, 교육은 권력과 떨어져 본 적이 없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이유나, 대학 졸업 이후 지향이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결국 권력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유학의 학문적 깊이가 깊었다는 것은 곧 유생이 교육을 잘 받고 학문적으로 인정받으면 그 사회에서 일정한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나라일수록 망가트리기가 손쉽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본은 그것을 알고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고 볼 수 있어요.
일본의 막부시대 끝나고 사무라이 계급이 무너졌습니다. 사무라이 일부는 유학자가 됩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일본과 조선의 유학 수준은 현격한 차이가 납니다. 일본이 오랫동안 깊이를 쌓아왔던 조선의 교육체계를 어떻게 무너뜨렸을까요? 가장 먼저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추락시켰습니다. 그리고 1920년대 초반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일어날 때, 일본이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고, 이 사회에서 출세해 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이들이 모이는 곳을 경성제국대학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신의 한 수이죠.
유학의 붕괴와 대안적 움직임
이에 성균관이나 유생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나철과 신채호가 하나의 본보기를 보여줍니다. 이 두 사람은 성균관을 장원급제, 그러니까 수석으로 입학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둘 다 박사였고, 오늘날로 치면 교수임용증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돌입하는 순간 이 두 사람은 관직에 나아갈 길을 단칼에 때려치웁니다. 신채호는 무장투쟁을 위해 준비를 했고, 나철은 대종교라고 하는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대종교는 항일무장투쟁의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조선 말기 손꼽혔던 부잣집안의 이회영, 이시영 등 여섯 형제도 대종교에 귀의하기도 했고요.
일본의 한국학자인 오구라 기조가 ‘조선은 모두 글을 배운 유학자들이라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행동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그것은 이해가 부족한 것입니다. 유학자의 공부가 오늘날 ‘글만 읽는 일’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유학자가 ‘암기한다’는 의미는 계속해서 체화시키는 과정이며, 반복해서 외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생각하고 곱씹으면서 삶 속에 적용해보는 것입니다. 체득의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 작업을 수행해왔던 것이지요. 이들의 특징이 뭐냐면, 대부분 가치관이 탄탄하게 정립되어 있고 자신들이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을 마주하면 용서하지 않습니다. 의병장 중에 문인이 많았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책 읽던 사람들인데 갑자기 전장으로 뛰어나간 것이거든요. 이것은 깊이 있는 학문의 전통에서 그런 힘이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뼈대 있는 유학자 가문에는 도인법이라는, 몸을 망치지 않고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몸을 체조할 방법이 가전비기(家傳秘技)처럼 내려오기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학문의 깊이가 많이 다른 것이죠.
하지만 성균관, 향교, 서당 등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지방 향교에 군 면제 등 비리가 많으니까 대원군이 이걸 다 철폐했고요. 이제 필드에는 사람이 몇 남지 않았습니다. 제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잡지 「개벽」을 간행한 주요 인물로 이돈화와 김기전이 있습니다. 둘 다 공식적인 학벌은 없습니다. 한 명은 서당을 다녔고, 다른 한 명은 서당을 다녔다는 설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가방끈이 없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 사람들이 서양 이론과 책을 상당히 수준 높게 번역하고 소개하는 잡지를 만들어서 활동을 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또 그런 사람이 적지 않았음에도 공식적인 학문 권력기관을 넘어설 수는 없지요.
경성제국대학교 철학과에 처음 입학했던, 최초의 철학도로는 박치우, 신남철, 박종홍 등이 있습니다. 박치우는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고, 신남철은 서울대학교 국립대 반대운동을 하다가 월북했습니다. 박종홍은 국민교육헌장을 쓴 인물이고요. 철학을 공부한 분 중에 그 시대의 현실과 맞서 싸우려 했던 분들은 죽거나 사라지고, 현실과 타협했던 분들은 나중에 독재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죠.
한편 1800년대, 전통 학문의 권력에서 벗어난 종교・철학적 대안이 중국, 일본, 우리나라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납니다. 우리는 동학, 일본은 금강교, 천리교 같은 민중 종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중국에는 태평천국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이전과는 다른 삶의 원리를 스스로 만들고 제안하려고 했던 것인데요.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 역시 가방끈이 없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주로 사용한 철학 용어는 ‘밥’, ‘젖’, ‘땅’과 같은 일상용어입니다. 사실 외국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개념들도 결국 고대 그리스나 과거의 일상어에서 따온 것들이 많지요. 그런데 우리의 경우 그런 시도가 근대 권력, 국가 권력이 탄생하면서 다 무너집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원인 제공자이자 부패한 탐관오리였던 조병갑이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당시 최시형의 사진을 보면 지독하게 역설적인 상황 때문인지 눈빛이 아주 처연하기 그지 없습니다.
권력과 파괴
이처럼 우리 철학의 흔적을 찾다 보면 주목하게 되는 것이 제국의 권력입니다. 권력에 의해서 전통이 티도 나지 않게, 완벽하게 사라졌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 이후 대학에서 가르치는 철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은 대부분 일본이나 미국 쪽에서 들어온 학문적 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철학이 실험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완벽하게 무너진 것은 권력의 작동과 분리해서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국주의 권력만이 우리의 삶을 파괴한 것일까요? 사회학자 조은이 『사당동 더하기 25』라는 책에서 철거민들이 어떻게 쫓겨나게 되었는지를 기록했습니다. 서울 시내에 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트럭에 실린 채 한강 다리를 건넙니다. 사당동에 달동네를 이뤘다가 개발 논리에 의해 상계동으로 쫓겨나고 또다시 부천 소사동으로 밀려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천에 올림픽 성화가 지나가야 한다는 이유로 거기에서도 쫓겨나는데요. 이처럼 전통 건축물은커녕, 근대 건축물, 주거지 등 살고자 하는 몸부림의 흔적조차 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은 일제 강점기라는 제국주의 권력과는 또다른 형태의 권력이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여러분이 건축의 영역에서 한국다움을 찾는다고 한다면, 이 시대에 작동하는 가장 강력하고 억압적인 권력이 무엇인가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자본이 아닐까 싶습니다.
원고화 김보현 / 편집 심미선
이병태
세상에 대한 이해와 실천의 실마리를 얻고자 인간, 사회, 문화 등의 주제에 몰입하고 있으며, 같은 이유로 한국 철학사 및 한국사상사도 연구하고 있다. 나와 너, 그리고 세상을 잇는 ‘고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 ‘철학’, 그리고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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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2022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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