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search close
https://archnews.manualgraphics.com/bk-kn-cover/
문단구분
글자크기
  1. -
  2. +
배경
  1. 종이
글꼴스타일
출력
  1. 출력
목차

단편 잇기

김효영

오늘 포럼을 준비하며 처음 심사위원 셋이 모였을 때를 떠올렸습니다. 한국성을 주제로 삼는 공모전의 제목을 정해야 하는데, 한국성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하지만 정면 돌파를 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성을 다시 이야기한다면, 과거의 논의와는 달라야 한다는 데에 뜻을 모았습니다. 그런 공감대 안에서 ‘지금, 한국성’이라는 주제를 던졌습니다. 지난 시간에 민주식 교수님이 선언한 것처럼, 저도 한국성의 어떤 고유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작성한 주제설명문은 ‘왜 지금 다시 한국성을 질문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우리가 마주한 상황을 이해하고, 한국성을 질문한다는 것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와 태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제 글은 졸문이므로, 다른 글을 빌어서 생각을 펼쳐보려고 합니다.

「건축평단」 2015년 겨울호에 ‘건축의 한국성’이라는 주제로 많은 분이 글을 써주시고 토론도 했었어요. 책의 첫 글에 김인철 선생이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했습니다. 예전에 아시아 건축가들이 모여서 자기 작업을 발표하고 비평하는 포럼이 있었다고 해요.1 여기에서 다른 나라의 건축가들은 개인적인 주제를 가지고 자기 작업을 설명했는데 미묘하게 국가별 성향이 잘 묻어났다고 합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참가한 건축가 여섯 명은 전부 한국성이라는 주제로 얘기를 시작해서 작업을 설명했대요. 그래서 다른 국가의 참가자들이 ‘한국성이 도대체 뭐길래 그걸로 작업 얘기를 하냐, 그거 빼면 설명이 안 되는 것이냐’라고 항의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김인철 선생은 이 글에서 ‘우리나라 건축가들은 왜 이렇게 모호하고 무거운 주제를 강박적으로 계속 이야기할까?’를 다시 물었습니다.

이종건, ‘한국성을 붙잡는 까닭과 방식’, 「건축평단」 2015년 겨울호에서 발췌. / 자료 제공: 김효영

이종건 선생은 같은 책에 수록된 ‘한국성을 붙잡는 까닭과 방식’이라는 글에서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강박적으로 한국성에 관해서 묻는 것은 다시 생각해보면 아주 지독한 한국성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까지도 우리가 한국성을 논의하는 사유 안에 포함해야 하는 것 아닐까?’라고 썼어요. 여기 있는 저를 비롯해 포럼에 참석한 여러분들 모두 아주 지독한 한국적 상황에 있는 것이죠. 공모전에 많은 분이 관심을 두게 된 데에는 한국성 논의가 이전과는 좀 달라졌거나, 달라질 수 있다는 공통적인 인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즉, 한국 사회가 정체성을 찾는 방식이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출발하거나, 민족적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어떤 강박에서 조금 자유로워진 것 같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한국성을 붙잡는 방식은 어때야 할까요? 이종건 선생의 글을 빌자면, 예전처럼 어떤 테두리를 지어서 그 안에 들어와야 한국적이고 그 밖에 있는 것은 한국적이 아닌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대 한국’ 또는 ‘한국적인 것에 고유성이 있다’는 강박관념을 깨고 “한국성을 (…) 보편적 휴머니즘(코스모폴리탄)의 ‘대안적 길’ 내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반딧불의 잔존』에서 발췌. / 자료 제공: 김효영

프랑스 미술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글에도 참고할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디디 위베르만은 책 『반딧불의 잔존』에서 발터 벤야민의 변증법적 이미지 개념을 인용합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은 실제로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아니고 굉장히 먼 거리를 두고 있지요. 그래서 완전히 다른 시간대에 출발한 빛이 지금 우리 눈에 동시에 들어오는 것인데요. 누군가는 그걸 연결해서 별자리로 만들어 의미를 붙였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별자리는 신화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우리의 운세를 점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디디 위베르만은 각기 다른 시간대의 이미지가 단속(斷續)적으로 펼쳐지다가 현재 시점에서 만나 상상력을 통해 또다른 이미지로 출현한다는 생각을 별빛에 비유해 설명했어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처한 상황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출발한 것, 아주 가까운 과거로부터 온 것, 새롭게 찾아낸 것, 너무 멀리서부터 우리에게 다가온 것,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것 등 각각이 하나의 별이고, 우리가 이것들을 어떻게 연결하고 관계를 맺어주는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한국성’을 얘기한 것처럼, 디디 위베르만은 ‘지금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 즉 동시대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아감벤의 이야기를 끌고 옵니다. 동시대성은 현재라는 고정된 시간이 아니라, 앞서 별자리를 언급한 것처럼 예전 것과 지금 것을 만나게 하는 것으로, 그 동시대적인 것은 “위상차와 시대착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주 밝은 빛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두운 곳에서 그 별들을 찾아내고 ‘반딧불을 보는 수단’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새로운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도 찾아낼 수 있는, 또 밝은 빛을 벗어나서 어두운 곳을 헤맬 수 있는 용기, 별자리를 연결할 수 있는 시적인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윤아랑, ‘긍정한다는 것’,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에서 발췌. / 자료 제공: 김효영

이런 용기와 시를 짓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윤아랑 작가는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에 수록된 글 ‘긍정한다는 것’에서 ‘긍정한다는 것은 어느 한쪽에도 쉽게 속하지 않는 것, 온전히 속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아름답다고, 혹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취하고, 부정적이라 판단되는 것은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동시에 끌어안고 포용하는 것이죠. 그래서 긍정한다는 태도는 굉장히 모순적이며 자기를 스스로 “복수화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굉장히 가까이 가서 살펴보는 시선이 필요하기도 하고, 다른 것들과 같이 보고 연결할 수 있도록 뒤로 훨씬 더 멀리 나아가서 보는 먼 시선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고 얘기해요.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요.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한국성이 어떤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면, 한국성은 우리가 긍정적인 태도로 긍정적이라고 생각되는 것 또는 부정적이라고 생각되는 것, 아주 다르다고 생각되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에 주목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저는 이 글에서 “결국에, 긍정한다는 건 기꺼이 책임지는 일이다”라는 문장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이것과 저것에 관계를 맺어주는 일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더 긍정적으로 만들어갈 것인가를 묻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성을 끝없이 질문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요? 관계 맺음을 통해서 우리가 조금 더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또 그 관계를 같이 책임지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원고화 및 편집 심미선


김효영

단국대학교와 경기건축전문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여러 젊은 건축가의 아틀리에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김효영 건축사사무소를 개소했다. 건축이 만들어지는 상황에 감정을 이입하여 어떤 성격을 찾아내고 표현하며, 이를 통해 생겨나는 질문으로 지금의 우리를 건축과 묶어내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영주시, 서울시, 행정중심복합도시의 공공건축가로 활동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단편 잇기

분량3,583자 / 7분 / 도판 3장

발행일2022년 9월 30일

유형강연록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모든 텍스트는 발췌, 인용, 참조, 링크 등 모든 방식으로 자유롭게 활용 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의 출처 및 저자(필자) 정보는 반드시 밝혀 표기해야 합니다.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이미지의 복제, 전송, 배포 등 모든 경우의 재사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