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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론의 실체

민주식

1. 한국미 담론의 의미

우리는 요즈음 ‘한국미’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실체가 과연 무엇이며 또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는지를 말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한국미라는 것은 이전부터 주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발단은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이다. 초창기에는 비록 외국인 연구자들에 의해 행해졌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고 있지만, 이후 이를 바탕으로 하여 오늘날까지 활발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야나기 무네요시와 고유섭이 제시한 한국미론이 현재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주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한국미를 조명하려 했으며, 나아가 90년대 이후 세계화를 맞이하며 글로벌 공동체라는 시야 속에서 한국미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려는 반성이 일기도 하였다. 우리는 한국미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처럼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미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언제나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으며, 또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지금 2022년을 사는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은, 우리 시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한국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또 그간의 한국미에 대한 논의들이 과연 타당하며 설득력이 있는가이다. 그간 한국미에 대해 행해진 논의들을 돌이켜 보면, 우선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관념적이었다고 여겨진다. 구체성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시대적인 편차를 인식하지 못했다. 또 한국미의 고유성에 심취한 나머지 한국인이 아니고서는 그 진수를 알 수 없다는 식의 편협한 시각이 팽배해 있었다. 한국미를 논하는 장에서는 으레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독자성, 유일성, 우수성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북돋우는 일이 은연중에 퍼져 있었다.

한국의 학계나 문화예술계에서는 문화적 동질성을 재확인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적 전통의 역사적 뿌리를 발굴하는데 커다란 관심을 보인다.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갈망은 인간에게 있어서 일종의 보편적 현상일지도 모른다. 한 민족으로서 생존해 온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특수한 맥락으로 인해, 한국인은 분명한 문화적 자기 동일성에 대한 요구가 한층 강렬하다.

미학사상은 인간 정신의 발현이며, 미학사상사는 각 시대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과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해 간다. 한국의 사상적 전통은 샤머니즘, 유교, 불교, 도교에 있다. 따라서 전통 미학사상의 내용 역시 크게 볼 때 샤머니즘의 미학, 불교의 미학, 유교의 미학, 도교의 미학으로 나누어 불 수 있다. 전통에 관한 학문적 탐구라는 의미에서의 한국미학이 갖는 가치와 생명력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러한 탐구에서 독특하고 특징적인 한국적 요소를 발견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미학적 전통이 미학의 보편성, 일반성과 관련되고 있음을 밝히는 작업이 아울러 요구되기 때문이다.

2. 미학사상사에서 본 한국미

필자는 일찍이 한국 전통 미학사상의 근원을 ‘풍류’ 개념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나아가 그 역사적 변천 과정을 풍류 정신의 계보라고 하는 관점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한국의 고전문헌 가운데 풍류라고 하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2세기 쓰인 역사서 『삼국유사』 속의 인용되고 있는 최치원의 「난랑비서」(9세기 후반)이다. 「난랑비서」에 의하면 ‘풍류도’는 신라의 독자적인 ‘화랑’의 실천적인 교육이념이었다. 풍류도는 그 내용이 유, 불, 도 삼교의 사상을 포함하고 있는데, 본래 고래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사상이 발전하여 외래 사상인 삼교와 결합한 그것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한민족 고유의 전통사상을 ‘광명 사상’으로 부르기도 하고 ‘부루(풍류의 고어) 사상’으로 부르고 있는 학자도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신라 시대(B.C.57-A.D.935) 이전에 이미 한민족에게는 풍류 사상에 따르는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그것을 ‘원시 풍류’라고 부르고자 한다. 여기에는 고대의 제례의식으로부터 그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한국인의 ‘제천의례’는 음주와 가무를 수반한 집단적 행사였다. 그것은 물론 천신에게 제사 지내는 종교적 의식이며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행사이다. 형벌을 정지하고 죄인을 해방하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행하는 제의는, 공동체적인 유대감을 강화함과 동시에 일상의 속박이나 생활 규범으로부터 탈피하여 자유로운 마음의 해방감과 삶의 기쁨을 맛보는 일이 실제적 목적이었다.

신라의 풍류도의 주된 내용은, 도의와 미풍을 배우고, 생활에 예술을 끌어들이며, 아름다운 자연을 완상하는 것이었다. 도의와 미풍을 배우는 것은 풍류의 원래 뜻인 ‘선왕(先王) 시대 미풍의 흐름’을 계속해서 지켜나감으로써 윤리적 정치적 문화의 실현에 이바지함을 의미한다. 생활에 예술을 끌어들인다고 하는 것은 신라인 특히 화랑들이 시가 음악 무용 등의 예술을 중시하고 이것을 즐김으로써 인간 정신의 초속(超俗)적이고 조화로운 승화를 도모한다는 의미이다. 또 아름다운 자연을 완상하는 것은 산수를 유람하며 심신을 단련하는 수련방식이다. 화랑들은 경승지인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면서 대자연에 대한 신앙심과 외경심을 기르게 된다. 이러한 풍류도는 신라문화의 주된 이념이며 특히 화랑의 교육이념이 되어 국가 융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신라의 승려 원효(617-686)는 불교의 경전에 정통했으며 많은 저술을 남기고 있는데 그의 저작은 당시 중국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백가의 쟁론을 조화·화합하는 일, 즉 ‘화쟁(和諍)’에 있는데, 그 실천방법으로서 그는 계율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분방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는 승려이면서도 속인의 복장을 하고 귀족이면서도 광대놀음을 했다. 즉 그는 어떠한 것에도 얽매임이 없는 ‘무애(無碍)’의 풍류인으로서 가무를 행하면서 돌아다녔다. 『삼국유사』에는 「원효불기(元曉不羈)」 조가 있듯이,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전적으로 ‘불기’라고 부르기에 적합하다. 불기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속박됨이 없음’을 말한다. 그는 말로 나타내는 것으로 부족하면 노래하고, 또 노래로 나타내는 것만으로 부족하면 춤을 춘다. 큰 박을 두드리며 춤추는 원효의 모습은 기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전하는데, 그의 ‘무애(無碍)’의 유희는 진리를 전하기 위한 행위이며 설법을 대신하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고려는 불교국이며 승려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도 매우 컸다. 고려 중엽 새로이 개척된 선(禪) 철학은 인간 생존의 문제, 우주와 자연의 문제, 인간의 자유의 문제 등을 깊이 탐구함으로써 정신사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선림(禪林)의 승려들은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는 것이 자기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의 사상적 경향이 예술의 영역에까지 미치게 됨으로써, 소위 선시(禪詩)가 발흥한다. 선승의 시문은 선 철학의 관념론적 세계관에 따라 전개되는데, 그 전개에는 독특한 문체가 필요하게 된다. 그러한 시문에는 세속의 가치관, 전통적인 평균적인 가치관을 일신하려고 하는 발상이 나타나며, 또 독특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선림 독특의 수사법이다. 혜심(慧諶)은 기발과 파격의 표현으로써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경한(景閑)은 자연과의 접촉으로 물아일체가 되는 무심의 경지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것은 세속을 벗어나 자유롭게 되려고 하는 다름 아닌 심적 측면에서의 풍류이다. 선승들이 추구하는 깨달음의 경지야말로 긴장된 정신의 세계이며 정신미의 세계이다.

이규보(1169-1241)는 고려의 문인 관료로서 독특한 개성과 진취적인 세계관에 따라 ‘의(意)·기(氣)’의 문예론을 논하고 있는데, 말의 생동성과 시심의 활달함을 높이 평가하고 호방한 기상을 중시한다. 생동성과 활달함은 풍류의 핵심적 내용이다. 그는 시, 거문고, 술, 등 풍류의 매개가 되는 것에 관해 상당한 조예를 갖고 있었다. 그는 고심하여 힘들게 제작한 시보다는 정서가 스스로 발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지는 시, 즉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시를 높이 평가한다. 수양과 면학으로 뛰어난 인격을 형성하고 원숙한 사상을 갖추면 그 인격과 사상이 스스로 흘러넘칠 것이다. 그때 붓은 거기에 따라 움직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아무런 형식에도 구애됨이 없다. 신의(新意)가 창출된다고 하는 것은 실로 이것이다. 그의 문예론에서 볼 수 있는 ‘방광(放曠)’, ‘호방(豪放)’ 등의 평어는 그 자신의 품성임과 동시에 자유분방을 내용으로 하는 풍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왕조(1392-1897)는 유교를 국시로 삼고, ‘예악(禮樂)사상’과 글을 중시하는 ‘우문(右文)사상’을 그 문화적 기반으로 삼는다. 초기에는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배경으로 ‘전아(典雅)’한 문화가 꽃을 피운다. 서거정의 나라를 훌륭하게 한다는 ‘화국(華國)’의 문예론과 성현의 ‘중화(中和)’의 음악론은 이 시대의 윤리적 미적인 가치관을 나타내고 있다.

서거정(1420-488)은 문예의 기능을 ‘세교(世敎)’, ‘공명(功名)’, ‘사업(事業)’ 등에 있다고 한다. 세교란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문화의 수준을 높이며 국가의 질서를 바로잡는 기능이다. 공명이란 시문의 재능을 가지고 입신출세하여 군주의 ‘어제시(御製詩)’에 응수할 수 있는 명예를 얻는 것이다. 또 사업이란 외국의 사절과의 교류나 외교문서의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행하는 것이다. 그에게서 문예의 사명은 『시경』의 「소아(小雅)」와 「대아(大雅)」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기쁨과 즐거움, 행복과 평화의 감정 세계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감정의 세계는 풍아(風雅)라고 불린다. 그는 문예의 품격으로서 ‘풍성(豊盛)’과 ‘화려(華麗)’를 중시하는데, 이것은 ‘왕도(王道)의 풍’을 모범으로 하는 윤리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성현(1439-504)도 서거정과 마찬가지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료 문인이다. 특히 서화, 음악 등의 예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부휴자전(浮休子傳)」에서 말하는 ‘모름지기 시문, 산수의 탐승, 거문고를 즐겼다.’라고 하는 기록은 풍류를 즐긴 그의 생활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예문관(藝文館), 홍문관(弘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의 직책을 수행하고, 장악원(掌樂院)의 책임자를 겸하여 문예를 관장하였고, 재직 중에 세 번에 걸쳐 중국을 방문하였으며, 또 중국 사절을 접대하는 데에는 반드시 참여하였다. 그는 ‘예악에 의한 질서’를 가장 중시하고, 자연에서 성립하는 질서와 조화를 사회 속에서 실현하는 일 즉 ‘중화’의 실현에 힘을 쏟았다. 사회를 평화롭게 하는 일, 또 인간의 감정을 온화하게 하는 일 이것이 성현의 중화 미학이며 풍아의 세계이다.

조선 중기가 되면 재야에서 형성된 사림파가 ‘덕치(德治)’, ‘예치(禮治)’를 내용으로 하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를 주창한다. 그들은 의리 정신에 따라 ‘훈구파(勳舊派)’의 전횡에 대립하여 ‘민본(民本)’, ‘위민(爲民)’을 지향하는데,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李珥)는 이 ‘사림파(士林派)’의 대표자이다. 그들은 인간의 성정(性情)을 순화하는 것을 학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황(1502-1571)에게는 세간의 명리와 명분으로부터 초연하고 자연을 사랑함으로써 인격의 도야를 도모하는 것이 풍류이다. 즉 자신이 세운 도산서당 주변의 자연을 즐기는 일이 풍류이다. ‘좋은 경치를 만나면 흥취가 저절로 일어나 한참 동안 즐긴다.’라고 하듯이, 그는 산수를 거니는 자연 완상을 매우 좋아하였고 그것을 풍류라고 생각한다. 이황은 ‘온유돈후(溫柔敦厚)’의 품격을 가장 중시한다. 그것은 온화하고 중후한 성격을 지닌 가장 바람직한 완성된 인격을 의미한다. 그의 풍류는 인격의 도야를 목표로 하는 미적 생활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이(1536-1584)는 이황을 이어 사림파의 ‘성정(性情) 미학’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다. 그에게는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고의 도심을 발견하고 자신의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되는 것이 풍류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그의 문예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에게서 시는 흉중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자신의 수양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말을 기려(綺麗)하게 꾸미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외견상 건조하고 담백하며 문예적 수사가 적은 소위 ‘불문이위문(不文而爲文, 꾸미지 않으면서도 꾸밈을 이루다.)’의 미의식을 강하게 반영한다. ‘충담소산(沖澹疏散)’은 이러한 미의식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시의 품격이다.

조선 후기는 실학의 시대가 되는데, 풍류도 이 시대사조와 함께 현실에 대한 적극적 태도를 내용으로 한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민중의 생활, 사회의 모순 등에 관한 강한 관심이 표명된다.

홍대용(1731-1783)의 실학(實學)의 출발점은, ‘허학(虛學)’과의 엄격한 대결에 있는데, 그 실질적인 내용은 소위 ‘육예(六藝)’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예외적으로 병학(兵學)을 공부하고 사설 천체관측소를 지어 스스로 관측하였으며 실용에 도움이 되는 수학책도 편찬하였다. 나아가 현금(玄琴)의 명수라고 불릴 정도로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에 의하면 세속의 생활 속에서 생겨나는 고뇌를 잊고 또 우울한 괴로운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는, 술을 마시는 것보다는 시를 짓는 것이, 시를 짓는 것보다는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이 더욱 효과가 높다고 말하면서 음악의 기능을 높이 평가한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나타내는 노래나 음악은 그것을 노래하고 연주하는 사람에게는 수신(修身), 수덕(修德)의 수단으로서, 또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는 감계(鑑戒)의 수단으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그는 예술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자연(自然)’과 ‘천기(天機)’를 들고 있다. 천기란 기욕(嗜慾, 특별히 좋아하는 마음)에 얽매이기 이전의 인간 본래의 심적 상태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의 발현이 그의 풍류이다.

박지원(1737-1805)은 풍류라고 하는 관점을 사상의 표면에 내세우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의 사상의 규모의 크기로부터 ‘풍류 인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예술이란 각 시대의 생활을 기반으로 한 창조적인 활동이며, 예술가의 역할은 현실에 입각한 ‘진취(眞趣)’가 있는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 창작에서의 독창성의 주장이기도 하지만, 고문의 모방을 좋아했던 당시의 의고적 풍조로부터 보면 혁신적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방법을 구사하여, 중국의 고문을 조선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과거 중국의 한(漢)‧당(唐)의 글을 무분별하게 모방하고 표절하는 당시의 의고적인 풍조를 비판하는 한편, 작자가 처해있는 현실에 입각한 개성적 독창적인 글을 지을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합변지기(合變之機)’의 작법, 즉 치밀한 조직과 시의에 맞는 변용에 의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글을 높이 평가한다. 글 쓰는 일을 전투에 비유한 것은 그에게서 글을 쓰는 일이 전쟁을 수행하는 것처럼 투쟁적이었기 때문이다.

정약용(1762-1836)은 오랜 유배 생활 끝에 한층 원숙한 사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자기의 현실 상황에 구애되지 않고, 민중이 겪는 고난을 널리 이해하고 그 고난의 정체와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을 선비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서 문예 음악 회화 등의 예술적 활동은 화목한 마음을 선양하고, 원망하거나 사모하는 마음을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며, ‘애군우국(愛君憂國)’, ‘상시분속(傷時憤俗)’, ‘미자권징(美刺勸懲)’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인륜 관계를 선도하고 사회를 바로잡는 것이 예술의 사명이다. 그 때문에 그는 시의 품격으로서 굳세고 강하며 고뇌하는 기상을 갖는 ‘창경기굴(蒼勁奇崛)’을 모범으로 삼는다. 사회의 모순과 대결하는 시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이러한 일종의 비장미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서 풍류 정신은 정치나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 즉 ‘풍자’로서 드러나고 있다.

김정희(1786-1856)는 조선 말기의 저명한 문인이며 서화의 대가이다. 그는 소위 ‘추사체’라고 하는 독창적인 서체를 수립하는 한편, 당시의 예술계를 쇄신할 정도로 탁월한 감식안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예술세계는 광범위한 학문과 지식 위에 그의 타고난 재능이 결합하여 시, 서, 화 전각 각각의 분야에서 빛나는 결실을 이룩하였다. 그는 학문적 탐구와 예술적 창작과의 일치, 시, 서, 화의 일치, 나아가 이들과 선(禪)과의 일치를 바탕으로 하여, 문인예술의 이념을 추구하였다. 그는 고전 예술 가운데서도 특히 예서(隸書)가 보여주는 ‘방경고졸(方勁古拙)’의 미를 최고의 이상으로 생각하여, 공교(工巧)의 미가 아니라 준경(遵勁)하고 졸박(拙朴)한 원숙미를 추구한다. 탁월한 예술의 품격은 작가의 빼어난 인품과 교양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하며,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機)’를 강조한다. 특히 ‘난화(蘭畵)’와 같이 고상한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에 도달함)’의 도와 마찬가지로 ‘무자기(毋自欺)’의 성실성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서 풍류는 예서와 난화의 품격이 보여주듯이 ‘고상한 인격의 형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른 한국의 전통미학 사상사를 더듬어 본 결과, 우리는 각각의 시대에는 특징적인 미의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신라에서는 ‘단정미(端正美)’가 하나의 전형을 이루고, 고려 시대에는 ‘청신(淸新)·준일(俊逸)’의 미가 추구된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 초기에는 ‘전아(典雅)’의 미가 규범이 되는데, 중기가 되면 ‘충담(沖澹)’의 미가 이상이 되고, 그리고 후기에는 ‘창경기굴(蒼勁奇崛)’의 미나 ‘방경고졸(方勁古拙)’의 미가 부상한다.

한국의 전통 미학사상을 총괄한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은 지속해서 계승되어온 성격이라 말할 수 있다. 우선 첫째로 외면적인 감각적 미보다는 내면의 심성의 미를 중시한다. 즉 미의 형식이라거나 표면에는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대상에 내재하는 기운이나 정신을 중시하고, 예술에서의 창작의 양상 특히 작가의 인격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미의식은 ‘실(實)’을 지키며 ‘화(華)’를 버린다고 하는 사상과 연결된다.

둘째로 한국인의 미의식은 다양한 미 가운데에서 현란(絢爛)·호화(豪華)가 아니라 소박(素朴)·검소(儉素)·담박(淡泊)의 미로 향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작위를 가함이 없이, 저절로 존재하는 자연에 귀일하기를 추구하는 의식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선악, 미추, 교졸(巧拙)의 이원적 평가는 지양되고, 그 지양된 고차원의 상태에서 비로소 무위자연의 경지가 가능해진다. 이처럼 인위를 거부하는 것이 한국적 미의 정신이다. 한국인의 자연관에서 볼 때 자연이란 ‘저절로 그러한 것’이며, 미와 예술도 이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다.

셋째로 미나 예술의 가치가 단순히 창작가나 감상자의 자기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층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의 삶에 이바지할 수 있는 그 현실적 역할과 관련하여 고찰되고 있다. 다시 말해 참다운 예술은 인간의 성정을 순화하고 사회를 교화하는 등의 현실적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 때문에 미나 예술은 그 독자성으로 인해 중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윤리나 정치 등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진다.

이상의 세 가지 특징, 즉 ‘수실거화(守實去華)의 정신’, ‘소박(素朴)·담박(淡泊)에 대한 기호’, ‘윤리적 실천적 성격’은, 속세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고상함을 지향하는 미의식이다.

3. 지금, 한국미

우리가 통상적으로 한국미라고 할 때 그것은 한국의 전통예술에 나타난 아름다움 또는 그 아름다움의 개념화이고 범주화이다. 전통은 일종의 집단적 경험의식이다. 그리고 전통은 현재를 현실적으로서 규정하므로, 현재에 수렴되고 있는 박력이다. 한국예술과 한국미를 논하는 것은 전통을 논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예술가는 언제나 전통과 대결하며, 이에 따를 것인지 이에 반할 것인지 라고 하는 양자택일을 요구받는다. 예술창조는 전통과 상관적으로 논하는 경우 두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는 전통적 수법에 종속해가면서 그 완성도에서는 전통적 수준을 능가해버리는 걸작(masterpiece)의 제작이며, 둘째는 전통적 수법이나 전통적 내용과 전혀 취향을 달리하면서 양질의 작품을 정시하는 획기적인(epoch-making) 작품의 제작이다. 양자는 전통을 전제로 하여 살펴보는 한, 전통에 대한 혁신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같다.

확실히 혁신 없이는 예술의 역사도 있을 수 없고 시기 구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구분이 없다면 역사에 변화도 진전도 없을 것이다. 혁신이란 다름 아닌 전통의 혁신이다. 그러므로 전통이 우선 형성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혁신은 존립할 수 없다. 전통이 없으면 예술창조는 있을 수 없게 된다. 아무런 기능적(技能的) 전통이 없는 곳에서 예술창조는 절대 생겨나지 않는다. 주의해야 할 것은 혁신은 전통의 파괴가 아니라, 자기가 초극한 전통을 보존해가면서 자기에게서 시작하는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술가는 작품화하는 과정에서 고뇌하면서 자신의 과제를 수행한다. 여기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현대의 작가들이 추구하는 바가 또 추구해야 할 바가 과연 한국이라는 국가 또는 민족이라고 하는 집합체의 미를 상정하고 이를 목표로 삼아 작업을 행하느냐는 문제이다. 작품화 과정은 하나의 개성적 인격이 세계와 대결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유튜브 등 디지털 문화 소통이 대세인 시대에는 국가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다양한 개인의 특징과 스타일이 중시되고, 그래서 나만의 특징을 찾아 자신을 브랜드화하고 있다. 또 다양성, 타자성, 혼종성을 특징으로 하는 디아스포라 문화가 등장하여 그 영역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대에는 우리가 민족문화라는 제한된 시야에 갇히는 일이 실로 바람직한가? 한국의 미를 찾고 한국의 전통에 매달리는 것이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새겨보아야 한다.

한국미는 전통예술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지속하여 계승되어온 한국인의 미의식의 특징을 개념화한 것이다. 이를테면 ‘소박미’와 ‘간소미’가 있고 ‘자연성’과 ‘비균제성’이 있으며, 또 ‘신바람’과 ‘자유분방함’도 있다. 한국미 논의는 열려있는 담론의 장이며, 새로운 발견과 해석을 기다리는 장이기도 하다. 그간의 논의가 비교적 협소한 미의 개념을 중심으로 행해져 왔다면, 앞으로는 좀 더 확장된 시야에서 한국인의 감성의 문제로 나아가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의 미의식과 한국적 감성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많은 서양인의 머릿속에는 한국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특별한 이미지가 없다. 화려하고 웅장한 색채로 대변되는 중국, 무채색으로 극도의 절제미를 추구하는 일본, 이 두 나라의 이미지가 동양으로 통한다. 한국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여 색깔 없는 나라로 전락한 것처럼 여겨진다. 실로 독창적인 한국미는 없는 것일까? 한국인의 의식주에 반영된, 또 예술에 표현된 고유한 미의식과 감성은 무엇일까?

우리는 한국미를 규정하는 데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또 이 문제에 굳이 집착하여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 거론된 한국미의 제반 성격들이라는 것도 실은 어느 특정 시기의 특정인의 시각에 의해 프레임화한 것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의 일본인의 관점과 민족주의에 경도된 한국인의 관점이 상반되기조차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탈리아 미라거나 프랑스 미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도 귀에 익은 말은 일본 미, 한국미 정도가 있을 것이다. 이들 용어는 아마도 근대화를 겪는 과정에서 서구의 근대적 사고체계에 대해 위축감을 느끼고 자국 문화의 빈약함을 의식해서 만들어 낸 일종의 콤플렉스일지도 모른다.

한국미의 규명이라는 과제가 역사성을 간과하고 그 현재성을 무시한 채 본질 물음을 되풀이한다면, 한국미는 모름지기 획일화, 관념화, 단순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풍요롭게 해석될 여지를 안고 있는 한국미는 서둘러 그 본질을 규정하거나 정의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해석학적 질문과 대화를 통해 거듭나고 영원한 현재성을 향해 나아갈 때 그 올바른 해명에 다가갈 것이다.

한국미학회의 창립 이후 1970~80년대의 연구 동향을 살펴보면, 서구미학사의 이해에 중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칸트와 헤겔 등 독일 관념론적 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영미 학자들이 저술한 미학서의 번역과 소개도 있었으나, 영미 미학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90년대 이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여러 연구자에 의해서이다. 이들은 주로 분석철학을 기반으로 한 미학연구를 했는데, 대다수의 경우 한국인의 삶이나 문화적 뿌리와는 무관한 문제를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2000년도에 접어들어서는 푸코, 들뢰즈 등 프랑스 미학에 관한 연구도 점차 활발해졌다. 최근에는 젊은 연구자층에서 영화미학, 파퓰러아트의 미학, 뉴미디어 시대의 미학에도 커다란 관심을 보인다.

이처럼 현금의 미학연구는 한국의 전통미학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 한국미학에 대한 연구성과는 대부분 전문 미학 연구자들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음악학 미술학 등 인접 학문에서 다루는 예술학적 연구가 많고, 또는 평론가나 에세이스트들에 의한 고찰이 많다. 대부분의 한국미학 내지 동양미학 전공자들은 서양 미학사나 현대미학의 동향에 대한 지식이 두텁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에 관한 관심도 희박한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문제와 방법의 면에서도 한국미학과 서양미학 간의 단절이 나타나며, 한국의 미학사상을 보편적인 미학 문제로 풀어내는 일에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접어들어 미학에서도 동양과 서양의 대화가 한층 더 중요시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유럽 미학과 동아시아 미학은 커다란 두 개의 축을 이루어 왔다. 18세기의 중국 취미와 19세기의 일본 취미는 유럽의 문화사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영향력에 힘입어 중국미학과 일본미학은 상대적으로 일찍 유럽에 소개됐으나, 한국미학은 근래에 이르기까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국은 동아시아 문화권 속에서 오랜 역사적 전통과 고유한 언어를 갖고 훌륭한 예술문화를 가꾸어왔으며, 그 독자적인 미학을 형성해왔다. 2016년 제20차 국제미학회가 한국의 서울에서 개최된 이래, 많은 사람이 한국미학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끌게 되었다. 아울러 최근 BTS를 비롯한 한국 젊은 예술가들의 공연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힘찬 한류(韓流)를 보고 있다. 이는 비단 K-Pop이나 TV 드라마와 같은 대중적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차원 높은 문학과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추세이다. 우리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미가 지향해나갈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해보아야 할 것이다.


민주식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마치고, 일본 동경대학대학원 미학예술학 전문과정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제미학연맹(International Association of Aesthetics) 부회장, 중국루쉰미술대학 특빙교수이다. 전 영남대학교 미술학부 및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교수, 그리고 한국미학회장, 한국동양예술학회장, 미술사학연구회장을 역임했다. 연구 분야는 한국미학, 비교미학, 조형미학이며, 주요 관심 주제는 창의성, 진화하는 예술, 풍류, 미적 생활, 심미주의이다. 근래에는 동아시아 예술문화의 현대적 조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저서로 『아름다움 그 사고와 논리』, 『동서의 예술과 미학』, 『동아시아의 언어, 문화, 예술』, 『동아시아문화와 한국인의 감성』, 『동아시아문화와 한국인의 미의식』, 역서로 『그리스 미술 모방론』, 『미술의 해석』, 『비교미학연구』 『미학사전』, 『도쿄의 미학』 등이 있다.

한국미론의 실체

분량13,567자 / 27분

발행일2022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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