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글
김보현
분량2,041자 / 4분
발행일2022년 9월 30일
유형서문
2002년 10월 일본 히로시마대학에서 ‘일본 근대미학과 예술 사상의 콘텍스트’를 주제로 제53회 일본 미학회 전국대회가 열렸다. 여기에 참가한 유일한 한국인 미학자 이인범은 아래와 같이 소회를 밝혔다.
“미학과 미술사가 일본을 통해 이식됨으로써 (한국 미학의) 지역, 시기, 장르별 분열성이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 일본 미학이 문을 열어 놓은 뒤 서구로부터 밀려온 유행의 파도-독일 관념론, 구조주의, 분석철학적 미학-에 정처 없이 휩쓸려 내려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 우리 삶의 그 저주받은 흔적이 일제강점기에 선명하게 찍혔다.”
임성원, ‘한국 미학의 정초를 위한 예비적 고찰’, 부산대학교 예술학 석사학위논문 중 재인용, p.26.
다시 말해 오늘날 한국의 아름다움, 혹은 한국성, 한국 미학의 현주소는 여태껏 그 근원을 알지 못한 채 누군가가 한 표현을 그대로 답습하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라는 지적과 함께, 모두가 알다시피 그 시작은 일제강점기였고 여전히 그 안에서 발전이 없다는 뼈아픈 현실을 개괄한 것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22년, 여전히 미디어에서 떠드는 ‘한국적인 것’과 ‘한국적 아름다움’이 1922년 야나기 무네요시가 주창한 ‘애상미’, ‘비애미’, ‘천연과 인공의 조화’, ‘정(情)의 예술’, ‘친근함의 예술’에서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바라보며, 정림학생건축상 2022의 주제로 ‘지금, 한국성’을 고민하게 되었다.
웅성거리는 여러 담론 속에 ‘한국 건축’을 아파트가 아닌 한옥으로만 상정하는 태도에 대한 작은 반발심도 작용한 것 같다. 기술의 발달로 균질화된 미감 속에서 여전히 한국의 아름다움은 ‘여백의 미’가 전부인지에 대한 오랜 궁금증이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성’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오래도록 매만져서 그 끄트머리가 해질 대로 해진 오래된 카드 패를 바라보는 기분이 드는 까닭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학생들과 ‘지금’에 초점을 맞추어 돌파구를 한번 찾아보기로 했다.
역대 최다 인원인 545팀이 신청한 이번 정림학생건축상에서 총 12개의 수상작이 선정되었고, 이들 안에서 우리는 깊게 공감한 한편, 씁쓸함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본디 건축이 인간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수단이자 거대한 흔적이라는 대전제를 확인받는 양, ‘지금, 한국성’은 대학생들이 마주하는 한국 사회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동시에 한국의 미적 특징이 지닌 한계를 타파해야 한다는 위기감과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냉소와 연민이 빈번하게 스쳐 지나갔고, 자기주장을 내세우면서도 남을 의식하는 이중적인 태도,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쉽게 태도를 바꾸는 변덕스러움 등 이번 공모전에서 호명된 한국성은 으레 떠올리던 한국의 특징에서 많이 벗어난 듯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도 친숙한 것들이어서 불편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한국성’이란 케케묵은 주제를 꺼내 들 때, 어쩌면 이 오래된 카드 패 사이에 숨어 있던 조커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패를 열어본 지금, 단 하나의 히든카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금 우리는 히든카드를 찾기에 앞서 공통의 질문부터 만들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성’이란 주제를 다루었던 것은 새로운 집단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거쳐야만 했던 통과의례가 아니었을까? 정체된 담론을 ‘지금’이라는 동시대의 렌즈로 바라보고자 했던 시도는, 언제나 ‘타자’에 의해 설정되어온 한국성의 실마리를 오늘날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스스로 고민해본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바로 여기서부터 다시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가야 한다. 건축과 사회, 한국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학생들이 발견해낸 태도와 생각, 그리고 건축계에 맴돌기만 하는, 정리되지 못한 담론들 사이를 연결할 문장을. 새로운 단어를 떠올리기도 하고, 고쳐쓰기도 하며 때로는 잠시 침묵하기도 하는 말더듬의 순간에 우리는 머물고 있다. 정당한 말들이 도래하지 않은 ‘지금’에도 여전히 ‘한국성’은 흐르고 있기에 우리는 계속 기록하고, 문장을 다듬어갈 따름이다.
김보현 정림건축문화재단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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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2,041자 / 4분
발행일2022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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