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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철과 정림건축 1967–1987

박정현

이 글은 김정철의 일대기도 정림건축의 첫 20년에 관한 밀도 있는 비평도 아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60년대에 창업해 국내에서 가장 큰 설계사무소를 일군 한 인물의 전기를 쓰기 위해서는 개인사에 대한 내밀하고 세세한 정보가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그러나 20세기 한국의 역사는 각종 문서와 자료를 충실히 챙기고 보존할 여유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다. 김정철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헤쳐온 시대를 증언해줄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생전에 남긴 미공개 회고록과 몇 장의 사진이 전부다. 창업자의 정보가 이렇게 소실되어 가는 동안 정림건축 초기의 많은 자료 역시 망각의 늪에 빠졌다. 다행히 주요 작업에 관한 슬라이드 필름과 마이크로필름이 남아 있었지만, 대형 설계사무소가 어떻게 운영되고 몸집을 키워냈는지 확인하기에는 부족했다. 제출과 함께 사라진 현상설계안뿐만 아니라 각종 상세도면, 직원 명부와 조직도 같은 회사가 생산한 문서를 충분히 살펴볼 수는 없었다. 이 부재는 한국 현대 건축사 서술의 조건과 같다. 대단히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인 단서와 정보들의 불완전한 조합이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김정철 개인사의 주요 지점을 한국 현대사의 문맥 속에서, 초기 정림건축의 주요 분기점을 한국 현대 건축사의 흐름 속에서 읽어보고자 했다. 이 짧은 에세이는 직소퍼즐을 맞출 때 제일 처음 놓는 몇 개의 조각일 뿐이다.

1

김정철은 1932년 8월 13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1 고조부는 서당 훈장이었고 할아버지는 작지 않은 땅을 소유했고 과수원을 경작하고 있었으니 집안 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아버지와 숙부가 모두 평양의전에서 수학했음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평양의전은 김일성 종합대학 부속 평양의과대학의 전신으로 당시 최고 고등교육기관이었다. 한학자의 아들이었던 할아버지 본인은 농업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고수했지만, 자식들에게는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최신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또 본인은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할머니와 며느리에게는 교회에 나가라고 적극적으로 권할 만큼 개방적이었다. 실용적인 서구 학문을 신식 교육기관에서 배운 아버지와 교회를 다니는 어머니를 둔 일제강점기 서북 지역 중산층 가정에서 김정철은 자랐다.

서북 지역은 중앙 사족에 의해 통치된 조선에서 차별받는 곳이었다. 국경과 가까운 이 지역은 한반도 내에서 인구의 유동(이민족의 유입이나 타지로의 이주)이 가장 많은 곳이었고 이는 자연스레 사족의 형성을 더디게 했다. 또 척박한 환경으로 농업보다 상공업이 일찍 발달한 곳이기도 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평안도 지역의 공업 생산량은 경기 및 서울 지역과 비교해 두 배 이상 많았다.2 과거에 급제해도 중앙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기에 고향에서 서당을 여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서북 지역은 다른 곳보다 문맹률도 낮았다. 요컨대 “서북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최적의 장소”였다.3 평양의전을 휴학하고 미국에서 자동차 두 대를 들여와 운전학교 사업을 시작한 아버지의 시도 역시 시대와 지역을 배경에 두고 이해할 수 있다. 경성에서 운행 중이던 자동차가 500여 대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4 그러나 신식 문물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사업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이 사업은 시작도 하기 전에 예상 밖의 사고들로 실패로 돌아간다. 견습생이 주유를 하면서 성냥불을 켜는 바람에 차가 전소하는 일이 벌어졌고, 남은 한 대마저 운전에 서툰 숙부가 몰고 나갔다가 모란봉 계곡에서 사고를 내고 만다. 이에 아버지 김지훈은 사업을 접고 만주로 건너간다. 1938년, 김정철의 나이 6세 때였다.

만주국과 관동주 지도, 1930년대

1930년대에 만주로 건너가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았다. 구한말부터 만주의 간도 일대는 자치권을 행사할 만큼 조선족 정착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고, 1932년 만주국 수립은 조선인을 유인하는 계기가 되었다.5 조선을 떠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보고자 하는 이에게 만주는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하나였다. 농업 개척 등으로 많은 조선인은 만주, 그중에서도 간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이주했다. 여전히 조선족 자치구로 남아 있는 옌볜 일대는 당시에도 거주민의 73퍼센트가 조선인이었다.6 그러나 김지훈이 가족을 데리고 향한 곳은 간도가 아니라 랴오둥 반도 끝에 위치한 다롄(大連)이었다. 김지훈은 다롄에서 새롭게 운수사업에 도전하고자 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본사가 있기도 했던 다롄은 만주국의 핵심 거점 가운데 하나였지만, 다롄이 속한 안둥성(安東省)7 일대 한국인의 비율은 1.69퍼센트에 불과했다. 6살 김정철이 처한 환경은 조선말이 거리에서 들리는 조선족 마을이 아니라 일본인, 러시아인, 몽골인, 중국인, 조선인이 뒤섞인 대도시였다. 모든 민족의 화합과 협동 즉,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프로파간다를 만주국이 내세운 이유를 체감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만주국 내 조선인의 신분은 대단히 역설적이었다. 독립국가 만주국의 국민이면서도 내선일체라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따라야 했다. 단적으로, 조선인은 일본인과 함께 만주국의 병역의무에서도 제외되었다. 조선인은 일본 병역법에 따라 일본 제국군으로 징집되게 되어 있었다. 조선인은 일본과 만주국 사이에 끼어 있었다. 현실에서는 2등 국민으로 차별을 받았지만, 제도적으로는 만주에서 조선인은 일본인과 같은 지위를 누렸다. 이런 배경에서 김정철은 일본인들이 주로 사는 아파트에 거주하며 다롄 일본인 학교인 향양(向陽)소학교에 취학한다.8

다롄의 해수욕장에서, 왼쪽부터 김순우(모), 한 사람 건너 김정식, 김지훈(부), 김정철, 1938

김정철은 이곳에서 인생의 첫 번째 선생을 만난다. 3학년 담임이었던 하라 선생은 유일한 조선인 학생으로 늘 기가 죽어 있던 김정철에게 ‘일본인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격려한다. 김정철은 이 한마디가 학교생활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식민지 소년의 첫 성취와 인정은 어려운 일에 직면할 때마다 자신을 일으키는 인생의 신념이자 좌우명으로 자리를 잡는다.9 만주에서 일본인 소학교 추억만큼이나 10대 김정철의 인상에 강하게 남은 것은 다롄이라는 도시 자체였다. 성인이 되기 전 김정철에게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던 이 7년 동안의 다롄 시절은 그의 이후 행보에 흐릿하지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다.

다롄 종산 광장, 1930년대

다롄은 일본의 만주 진출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곳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러시아에 조차권을 빼앗긴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다롄을 만주의 거점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정치적 변화는 도시 공간에 흔적을 남겼다. 러시아의 방사선식 도시계획에 일본의 양식 건물이 일제히 들어선 종산 광장은 특히 이국적이었다.10 김정철은 만년에 다롄을 “계획적으로 조성된 현대적 도시”로 회상하며, 다롄의 “화려함과 정교함을 뽐내는 유럽식 건물들”을 보면서 저런 건물을 지어보는 것을 꿈꾸었다고 말한다. 의사나 목사가 되길 바란 부모님의 희망을 버리고 건축가의 길을 선택한 데에는 다롄에서 받은 인상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유년기의 경험에서 현재 성취의 씨앗을 찾아보려는 성공한 건축가의 선택적 회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부모님과 네 동생의 실질적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김정철이 높은 임금이 보장되지 않는 건축과로 진학한 것에는 유년기의 경험도 분명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종산 광장의 도로와 양식 건물이 건축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했다면, 다롄 역사(驛舍)는 건축의 효율과 기능에 감탄하는 계기였다. 20세기 한국에서 누구보다도 사무소와 설계 모두 조직적이고 기능적이길 바란 김정철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그것이 설령 사후적 재구성이라 하더라도) 당연히 후자였다. 도착 층은 지상에, 출발 층은 2층에 배치된 다롄 역사의 기능성에 김정철은 매혹된다.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만주 철도의 시작점11이었던 다롄 역사는 수많은 기차가 들고나고 쉴 새 없이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뱉어내는 거대한 기계였다. 직육면체 매스에 별다른 장식 없이 평활한 표면, 기능이 외관에 그대로 드러나는 근대 건축의 전형이었다.12

다롄 역사, 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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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양소학교를 졸업하고 다롄 3중학교에 입학한 해, 김정철이 13살이던 1945년 여름, 일본의 항복은 조선인들에게 광복의 환희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다롄에 있던 조선인들은 사정이 복잡했다. 한국은 해방이었지만, 만주국은 엄연한 패전국이었기 때문이다. 김정철의 가족은 일본군의 철수 후 다롄을 장악한 소련군을 피해 평양으로 급히 되돌아가야 했다. 이후 10년 동안 김정철과 그의 가족은 20세기 중반 한국이 겪은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변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느냐마는 김정철은 이 시기를 문자 그대로 ‘온몸으로’ 체험한다. 김지훈은 가족과 함께 신의주를 거쳐 고향 평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다롄 이주로 평양의 근거지는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고 공산당이 북한을 장악하자, 김정철의 가족은 북한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김지훈은 1947년 먼저 혼자서 월남해 서울로 향한다. 연락이 끊어진 상태에서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업에 성공했다는 소문을 들은 가족은 차례로 월남을 감행하기로 결심한다. 훗날 와전된 소식임이 밝혀지지만, 이는 모든 가족이 북한을 떠나는 데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1948년 당시 13세였던 김정식(2남)은 동생 김정완(3남)을 데리고 38선을 넘는다. 이어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김정철, 김정헌(5남), 김정용(4남)이 서울로 향한다. 38선의 통행이 점차 힘들어지던 와중에 세 차례에 걸친 월남은 모두 성공한다.13

가족보다 먼저 월남한 아버지 김지훈은 중국 대사의 운전기사로 취직해 있었다. 덕분에 중국대사관에 있는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고, 김정철의 일곱 식구는 이 단칸방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한다. 김정철을 비롯한 형제들은 당장 학교를 다닐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김정철은 월남한 1948년 중학교 4학년인 나이였으나, 그 해는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미공보원에서 하는 무료 영어강의를 들으며 신문팔이로 돈을 모은 김정철은 1949년 멈추었던 학업을 이어간다.14

중학교 4학년, 요즘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에 편입한 김정철이 다닌 학교는 대광중학교로, 어머니가 선택한 학교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동문이 대학 동문보다 더 중요한 시절 학교의 선택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대광중학교는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북한 출신 기독교 유지들이 북한 피난민 기독교 가정의 자제를 위해 설립한 학교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1947년 12월 서대문구 충정로 피어슨 성경학교의 공간을 빌려 시작했으며, 개교 당시 학생 수는 1학년에서 5학년까지 291명, 교직원은 12명이었고, 이사장은 한경직, 초대 교장은 백영엽이었다. 김정철이 입학한 1949년 신설동 현재의 위치로 교사를 이전한 신생학교였다.15 개인의 학업성취와 무관하게 경기고나 서울고 등의 명문 학교는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유년기는 자신의 판단이나 결단과 무관하게 환경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김정철의 유년기를 좌우한 환경을 한 구절로 말하자면 서북 출신 기독교 집안이었다. 대학을 들어가기 전까지 김정철은 이 그물망 안에서 성장했다. 김정철의 집안은 서북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온전한 타향이었던 서울에서 자리를 잡아나갔다.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들은 역시 서북 출신 피난민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후암장로교회를 다녔다. 훗날 후암장로교회는 김정철이 자신의 이름으로 처음 설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16 요컨대 기독교는 김정철 삶의 한 축이 되어간다.

그의 학교생활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한 번 중단된다. 이북 출신이었기에 북한이 점령한 서울에 남아 있기는 힘들었다. 아버지와 매형을 비롯해 김정철, 김정식 등 10명의 남자는 부산으로 피난한다. 임시 수도 부산으로 옮긴 중국대사관은 이번에도 그에게는 일자리를, 그의 가족에게는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같은 해 8월 김정철은 부산 광복동 사진관에서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을 남기고 학도의용군에 입대한다. 학도의용군은 여러 전선에 배치되기는 했지만, 후방에 남은 패잔병 소탕이 주 임무였다. 그러나 미7사단 32연대에 배치된 김정철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다. 최일선 상륙부대는 아니었지만, 불과 석 달 전 학생이었던 김정철은 변변한 군사교육도 받지 못한 채 전장 한가운데 떨어진 것이다.

학도병 입대 직전, 동생 김정식과 함께, 1950

군 복무 기간의 동선을 정확히 추적하기는 힘들지만, 그는 안양에서 대기하다 용인에서 다시 실전훈련 및 산악훈련을 받은 뒤 개마고원 자락 장진호로 향한다. 인류 전쟁 역사상 가장 추운 겨울에 벌어진 전투로 기록되는 장진호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17 18세 소년에게 전쟁이라는 극한 경험은 상대를 살상하는 교전이 가져다주는 충격보다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펼쳐지는 삶과 죽음이 선사하는 공포였다. 미해병 1사단과 미육군 7사단은 중공군의 대공격으로 11월 29일 후퇴 길에 오른다. 총상을 입은 학도의용군에게 붕대를 감아주던 김정철은 포탄으로 머리와 어깨에 부상을 입고 닷지 M37 ‘쓰리쿼터’ 트럭 조수석 발판에 매달려 후퇴하지만, 다시 세 군데 총상을 입는다. 다리에 총상을 입어 걸을 수 없었던 그는 미군 등에 업혀 인근 민가로 탈출한다. 미군이 떠난 뒤 자신이 속한 부대를 찾지 못한 채 남쪽으로 힘든 발길을 옮기던 그는 미해병 1사단과 극적으로 만나 청진으로, 이어 일본 후쿠오카 미육군병원으로 후송된다. 머리와 다리에 입은 부상은 운 좋게도 신경과 힘줄을 피해갔지만, 어깨 부상은 후유증을 남긴다. 이후 그는 왼팔을 들어 올리는 데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 회복 후 1951년 1월 3일 부산항으로 귀국해 1월 5일 가족과 다시 조우한다. 월남에 이어 한국전 참전,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 참여, 후퇴와 총상, 귀국으로 이어지는 이 일련의 경험은 김정철과 가족들에게는 종교적 기적이나 다름없었다.18

아버지 김지훈은 평등주의와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아내와 자식들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알았으며 화목한 가정을 이끌어 가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무능했다. 월남 이후 중국 대사의 기사 말고는 별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도 이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이가 든 김정철은 일찍 가장이 되어야 했다. 1951년 3월, 제대와 함께 그는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로 취직한다. 세탁 후에 풀칠하고 다림질을 하는 일감을 받아왔다. 가계에 보탬에 되었지만 학교로 돌아가는 일은 늦어졌다. 부산 서구 천마산 인근에 자리한 대광고등학교 천막 분교에 들어간 때는 대입이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이었다. 학도의용군 복무와 부상으로 1년 이상 학업에 공백이 있었지만 제 나이에 맞게 3학년으로 복학한다. 평양에서 의대를 다닌 아버지는 의대를, 교회에 몰두해 있던 어머니는 신학대를 희망했지만, 김정철은 건축과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해 겨울 그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에 합격한다.

서울대 건축공학과 축구팀,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정철,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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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철이 건축공학과에 입학한 1952년에 건축 관련 과가 개설된 종합대학은 서울대학교가 유일했다. 지금의 한양대학교에 해당하는 한양공과대학에서 4년제 건축공학과가 학생을 모집한 것은 1948년이었지만, 종합대학교로 승격되는 것은 1959년에 이르러서다. 홍익대의 건축미술과도 1954년에야 개설된다. 말하자면 김정철은 해방 후 대학에서 건축 교육을 받은 1세대에 해당한다. 국내 최고의 교육기관이었지만 1950년대 서울대의 사정은 열악했다. 부산에서 임시 교사를 운영하던 서울대는 1953년부터 단과대별로 서울로 돌아간다. 건축공학과도 1953년 가을 성동역 근처 서울대 사대부속고등학교에 머물다 1954년 공릉동으로 복귀한다.19 김정철은 가회동에서 입주 과외교사를 하면서 생활을 해결했다. 확인 가능한 유일한 학부 시절 작업은 1955년 4학년 여름 방학 기간 동안 신국범 등과 함께 제출한 ‘서울시 의사당 현상설계’다. 여름 바캉스 대신 선택한 이 현상설계 경기에서 김정철 팀은 응모작 28점 가운데 이광노에 이어 2위를 수상한다. 서울 시청사 앞 빈 땅에 서울시 의사당과 사무실을 건립하는 계획이었다. 김정철보다 4살 위로 1956년 무애건축연구소를 개소해 각종 설계에 참여한 이광노의 안은 『동아일보』의 표현을 빌면, “양식과 한국식을 절충한 것이 특색으로 얼핏 보기에는 ‘쩨니스 라디오’형”이었다. 김정철 팀의 안은 국제주의 양식을 그대로 따라한 것으로, 학생으로서 당시 유행하던 최신 양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면 이광노의 안은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광노, 서울시 의사당 계획안, 1955(『동아일보』, 1955년 9월 10일)
서울시 의사당 계획안, 신국범, 이신옥, 이상순과 공동작, 1955

학생 시절의 습작으로만 간주하기에 이 프로젝트에는 흥미로운 점이 많다. 50년대 중반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작업에서 모티프를 따왔을 뿐 아니라, 20여 년 뒤 정림건축이 추구하는 건축의 씨앗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피스 타워에 저층 포디엄을 조합한 구성, 포디엄 부를 도시 가로와 연결한 점, 상징적 형태나 모티프보다 기능을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데 우선했다는 점 등은 이후 정림건축 오피스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발전한다. 한편, 이 계획안은 SOM의 레버하우스(Lever House)에서 타워와 포디엄의 조합을, 르코르비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에서 필로티와 브리즈 솔레이(brise-soleil)라는 요소를 빌려왔다. 레퍼런스가 되는 이 두 건물은 모두 1952년에 완공된 것이다. 당시 최신 작업은 국내에 『아키텍추럴 레코드』, 『프로그레시브 아키텍처』나 일본 건축 잡지를 통해 소개되었다. 잡지는 해외의 주요 흐름을 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창구였다. 그러나 김정철과 동료들은 오직 트레이싱지 위에서만 레버하우스를 서울시 의사당으로 옮길 수 있었다. 레버하우스를 가능케 한 물리적 조건, 이를테면 철골과 금속 멀리언, 복층유리를 비롯한 건설 부재는 국내에 전무했다. 이는 비단 1955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피스라는 현대 세계의 보편적 건축과 국내 생산체제의 미비 사이의 간극은 이후 30여 년간 김정철과 정림건축이 처한 조건이자 쉽게 극복하기 힘든 장벽이었다. 콘크리트의 가소성을 이용한 기념비적 건축이 아닌 산업화에 보조를 맞추는 건축을 추구한 이들은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는 간극이었다.

SOM, 레버하우스, 1952

1956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김정철은 종합건축연구소를 첫 직장으로 삼는다. 이천승과 김정수가 이끈 종합건축연구소는 당시 국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설계사무소였다. 이천승은 소년 김정철이 다롄에서 큰 인상을 받은 다롄 역사 건설에 참여한 만주철도 출신이었고, 김정수는 평양 출신으로 김정철과 동향이었다. 1953년 종로 2가 82번지 영보빌딩에서 시작한 종합건축은 회사 이름대로 건축 설계를 한 개인의 예술적 창작이라기보다는 각 분야의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한 설계 집단이었다. 1953년 적산기업이었던 고려방직공장 설계를 수주한 것을 계기로 설립된 종합건축은 김정철이 입사한 1956년 무렵 우남회관 신축 공사 설계를 진행하는 등 사세를 크게 확장해 나가던 중이었다. 이 무렵 종합건축의 주요 프로젝트는 고려방직공장, 국회의원 합숙소, 청량리 임업시험소, 광릉 임업시험소, 한국문교서적주식회사 사옥, 남대문교회, 이화여자대학교 강당, 인천 판초자공장 대지 측량, 중앙청 신축 대지 측량, 한국흥업은행 대전지점 신축 공사 설계 감독, 우남회관 신축 공사, 문경 시멘트 대지 측량, 신신백화점 신축 공사, 공군본부 현상설계, 동대문시장 신축 공사 등이었다.20 국가의 전후 부흥계획에 맞추어 측량, 공장 설계 등 포괄적인 엔지니어링 업무를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설립 취지에 “국가부흥사업에 있어서 건축의 중요성은 경언(警言)을 불요하거니와 … 건축 토목 기술자 내지 부대설비 기술자를 총망라하여 당면 과제인 설계 감독과 구조설계 시공의 연구와 후진 양성을 목적으로 함”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21

우남회관 상량식, 1958(서울사진아카이브)

김정철은 약 3년가량 종합건축에서 일한 뒤 1959년 산업은행 주택사업기관 ICA로 자리를 옮긴다. 이 시기 국내 건축계의 가장 큰 사건은 같은 해 열린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서 김수근이 당선된 일이다. 도쿄대에서 수학하고 귀국한 김수근의 이후의 활동은 한국에 다른 종류의 건축가가 등장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1931년생인 김수근은 나이로는 김정철보다 한 살 위,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 학번으로는 2년 선배였다. 함경북도 청진 출신인 점도 김정철의 삶과 교차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건축가로서의 행보는 거의 접점이 없다. 김수근은 귀국과 함께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건축가,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댄디즘으로 자신을 표상했다. 물론 이런 관점은 후대에 더 증폭된 것이지만 김수근은 귀국 직후부터 중요한 국가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기린아로 급부상한다.22 반면 김정철은 한국 최고의 테크노크라트 집단인 은행에서 일하는 경로를 취한다. 20여 년 뒤 서로 다른 두 설계사무소 유형으로 분기하는 최초의 지점이다.

ICA 기술실 재직시 설계한 주택 계획

1955년 미 국무부 산하 해외 원조기관으로 설립된 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는 한국에 주택건설 자금을 원조했고, 1954년 조선식산은행을 모태로 출범한 한국산업은행이 그 운용을 맡았다. 이 사업을 위해 설립된 것이 산업은행 주택기술실이었다. 엄덕문, 김중업 등이 책임자로 있었을 만큼 50년대 중후반 주택기술실은 가장 앞선 설계 집단 가운데 한 곳이었다. 김정철은 1958년 보건사회부가 ICA 자금으로 실시한 ‘제1회 전국주택현상설계 현상공모’ 제4부 동리 부문에서 안영배와 공동으로 출품해 1등을 수상하기도 한다.23 주택기술실에서 6개월 남짓 일한 뒤 김정철은 한국은행 영선과(營繕課)로 이직한다.

이직의 계기는 무엇보다 경제적 사정이었다. 설계사무소의 월급으로는 부모님을 모시며 네 동생의 학비를 충당할 수 없었다. 한국은행은 건축을 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다. 종합건축에서 받던 월급이 6배로 뛰었고 각종 상여금과 유무형의 혜택이 뒤따랐다. 1950-60년대 은행과 비료공장은 누구나 선망하는 직장이었다. 정확히 같은 해 동생 김정식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공장이었던 충주비료에 취직한다. 산업과 금융계에서 인맥을 형성하고 관련 설계 역량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였고, 이는 고스란히 정림건축의 자산으로 자리 잡는다. 소유한 건물의 유지보수에 주력하는 요즘의 영선과와 달리 당시 영선과는 여러 지점 설계를 수행하던 은행 내 설계사무소였다. 경제적 안정과 함께 김정철은 1959년 11월 14일 이정호와 결혼한다. 이듬해에는 장남 김형국이 태어난다.

이정호와의 결혼식,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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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는 전후 복구와 함께 전쟁 전 유럽 중심의 모더니즘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던 시기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서구 지향적인 시기였다. 좌·우파 가릴 것 없이 서구적 ‘민주주의’는 절대적 가치였고, 한국적인 것은 벗어나야 할 구습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전통은 반민주적이었기에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전통의 악습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가능한 길”은 서구적인 것의 수용이었다.24 ‘민족’은 온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뭔가를 도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최인훈의 말을 빌리면, “이광수의 임은 민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민족 같은 것을 등에 업고 나설라치면 단박 바지저고리 소리를 들을 테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세대, 무슨 일을 해보려 해도 다 절벽인 사회, 한두 사람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시대”였다. 이후 민족과 한국적인 것이 거의 모든 분야에 의미를 부여하는 최종 심급으로 부상했던 것과 달리 당시 민족은 그 자체로는 별 소용이 없었다. 우남회관과 같은 주요 국가 프로젝트가 한국적인 것이나 전통의 무게를 거의 개의치 않고 서구의 모더니즘을 추구할 수 있었던 이유다. 아무런 기술적 토대도 없이 손으로 빚어 만들더라도 국제주의 모더니즘은 의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전통 계승과 한국적인 것의 구현 문제는 196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김정철은 모더니즘의 영향이 가장 강한 시기를 종합건축과 한국은행에서 보내며 건축가로 성장하게 된다. 그의 건축이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모더니즘은 하나의 모습을 지닌 것이 아니다. 특히 전후 모더니즘은 브루탈리즘과 지역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르코르뷔지에의 후기 작업 역시 새로운 기념비적 형태를 추구하는 쪽으로 펼쳐졌다. 한국이 이 다채로운 흐름을 역사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해할 여유는 없었다. 맥락과 문맥에서 이탈한 여러 경향이 특정 경로를 통해 배제되기도 하고 과장되기도 하면서 국내에 소개되었다. 김정철에게는 다른 누구보다 그로피우스가 사표가 되었다. 그는 그로피우스를 “산업혁명을 가르쳐준 최초의 사람이었고, 공업사회의 위대한 가능성을 연구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의 요구에 동화시키는 방법을 제시했던 위대한 교육자이자 건축가”로 파악했다. 철근 콘크리트라는 재료의 사용, 기능주의와 표현주의를 결합한 건축 어휘가 늘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르코르뷔지에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김정철은 그로피우스의 합리주의적 경향에 더 이끌렸는데, 정림건축의 목표였던 “건축을 통한 사회 선도, 토털 아키텍처의 추구, 팀워크의 강조” 등은 그로피우스에게서 영향 받은 것이었다. 그로피우스는 1945년 한 개인의 역량을 앞세우기보다 디자인 문제에 대한 조직적이고 집합적인 대응을 모색하기 위한 설계사무소 TAC(The Architects Collaborative)를 설립한 바 있다.25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 시스템이 온전히 도래한 전후 미국에서 바우하우스의 실험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로피우스의 TAC가 정림건축과 정림건축이 모델로 삼는 종합건축에 어떤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구체적으로 적시하기는 쉽지 않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1970년대 정림건축의 토털 디자인과 조직 체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미국 서부를 중심으로 활동한 웰턴 베켓(Welton Becket)이다. 이로부터 20여 년 전인 1950년대 김정철은 거장의 신화가 서서히 저물고 조직과 체계가 더 우선시되는 건축이 관건이 되는 시대를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생각은 건축사에 대한 예리한 비평적 관점이나 지식에 기인하기보다는 본격적인 경제개발을 추진 중이던 한국 사회의 가까운 미래에 대한 직감에 연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장기적인 경제 상황을 예측하기에 한국은행보다 더 나은 곳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충주비료에서 6년가량 일하고 제4비료공장인 진해화학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와 있던 동생 김정식은 김정철에게 건축사 사무소를 개설하자고 제안한다. 이때가 1966년이다. 금융업과 산업계에서 쌓은 충분한 경험과 인맥이 사무실을 여는 데 필요한 자신감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김정철과 김정식의 개인적 역량이 발휘될 수 있었던 서로 긴밀히 연결된 두 가지 시대적 맥락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행으로 사용된 구 조선저축은행(현 스탠다드차터드 은행), 1950년대
충주비료공장, 1958 / 자료 제공: 국가기록원

1966년은 1962년 시작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마무리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준비하던 때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경제성장을 위한 최소한의 물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른 최우선 생산품은 시멘트, 판유리, 비료였다. 개발과 식량 증산을 위한 가장 절실한 원자재였다. 적어도 양적 규모 면에서 시멘트와 판유리의 국산 공급이 100퍼센트 충족된 때가 1966년이다. 이른바 ‘개발 드라이브’를 걸 수 있는 문턱을 넘어선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66년 8월 15일 서울 시청 앞에서 ‘도시계획모형전’이 열린다. 김현옥 시장이 주도한 이 전시는 서울 도시계획을 최초로 모형으로 만들어 일반 대중에게 선보이는 자리였다. 한 달여 만에 130만여 명이 방문할 만큼 큰 화제를 모은 이 전시는 앞으로 서울 전역이 공사판이 될 것을 공표하는 것이기도 했다. 경제성장과 이에 따른 건축 물량이 급성장하고 있었다.

도시계획모형전 개장식에 참석해 김현옥 서울시장의 설명을 듣는 박정희 대통령, 1966

이에 대한 제도적 대응이 1963년 제정된 건축사법과 이에 따라 1965년부터 시행된 건축사 시험제도다. 이전의 대서사(代書士) 제도는 고등공업학교 관련 학과를 졸업해야 하는 등의 자격 요건이 분명히 있었지만, 대서사는 문자 뜻 그대로 복잡한 건축법에 맞추어 문서의 허가를 얻어주는 역할이 컸다.26 이를 설계자 중심의 충주비료공장, 1958(국가기록원)  직능 제도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었다. 1965년 첫 건축사 시험은 기존 대서사에게 시험을 면제해주는 조항을 두고 4년제 건축학 관련 학과를 졸업한 이들이 보이콧을 벌이기도 했다. 김정철과 김정식은 1967년 건축사 시험에 응시해 합격한다. 1967년 합격자 수는 1급 건축사(졸업 후 5년 이상의 경력) 19명, 2급 건축사 51명으로 총 70명에 불과했다. 시험 면제자를 비롯해 1-2회에 1,589명을 뽑은 여파로 급격히 높아진 문턱을 뛰어넘은 것이다.27 건축사 제도가 신설될 때 생긴 갈등은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대단히 배타적인 건축사 자격의 획득이 독립할 수 있는 토대이자 대단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는 점이다. 김정철의 학교 후배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중대형 설계사무소 가운데 하나인 간삼건축을 설립한 원정수와 지순 역시 1966년 건축사 면허 취득과 함께 독립한다. 이들은 건축사 면허 제도가 기존 명성에 의존해 수주가 이루어지는 관행과 설계사무소의 도제식 관계를 깨뜨리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평가한다.28

1967년 6월 17일 을지로 단층 기와집에서 네 명의 직원과 함께 정림건축은 시작한다. 김정철 36세, 김정식 33세였다. 사무실 개소를 위한 비용은 김정철이 충당했으나 등록은 김정식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집안의 손위 두 형제가 동시에 불확실한 미래에 뛰어들기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안정적인 수입을 유지해야 한다는 김정철의 현실적인 판단에서였다. 김정철은 한국은행에 더 머물다 1970년 정림건축에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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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철이 개인으로 설계한 첫 작업은 정림건축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3년 어머니가 다니던 후암장로교회를 설계하게 된 것이다. 해방 직후 이북 지역 피난민들이 모여 기도회를 가진 것이 모태가 되어 발전한 이 교회는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와 함께 서북 기독교인들의 거점이었다. 1960년 조동진 박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교세가 확장되었고 교회를 신축하기에 이른다. 후암장로교회가 신축을 결정하던 1963년 초는 한국 교회 건축에 관한 유형이 전혀 축적되어 있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철은 기능적이고 합리적인 접근을 택했다. 김정철은 우상을 금하며 예수의 말씀 자체에서 신앙의 핵심을 찾는 것이 개신 교회 교리의 본질이라고 여겼다. 이에 따라 말씀의 전달은 교회 건축의 핵심 기능이 된다.

이북 피난민들의 임시 거처이자 후암장로교회의 모태가 되는 기도회가 열린 후암동 한국은행 기숙사 건물. 1960년대 중반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사무실로 이용된다.

후암장로교회는 이런 기본적인 도식을 구현하려 했다. 1층에 주일학교, 도서실, 사무실, 목사실 등의 필요한 실들을 두고 2층에 예배실을 배치한 장방형 입방체 매스는 교회가 요구하는 기능을 충실히 수용한다. 반면 첨탑과 같은 교회 건축의 통속적인 상징적 장치는 제거했다. 대신 ‘말씀’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음향에 주의를 기울였다. 김정철, 그리고 이후 정림건축이 교회 건축을 설계하는 기본적인 원칙이 여기서 세워진다. 모든 자리에서 설교대를 잘 바라볼 수 있도록 한 평면 배치와 음향공학적 고려를 우선하는 것이다. 후암장로교회에서는 음향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문화공보부 방송 언론 담당 기감 한기선과 협력했다. 기술적 문제를 전문화하고 협업하는 태도를 이 첫 작업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목사 조동진, 건축가 김정철, 음향 전문가 한기선은 후암장로교회에서 함께 작업한 지 10년 뒤 함께 교회 건축에 관한 책을 펴낸다. 미국 남침례교(Southern Baptist Convention) 총회의 건축 계획을 총괄한 조셉 스타일스의 책을 조동진 목사가 번역하고 김정철과 한기선이 내용을 더해 편집한 『현대 교회건축 계획』을 출판한 것이다.29 이 책은 1부 스타일스-조동진의 “교회성장과 시설확장”, 2부 김정철의 “교회기능과 건축공학”, 3부 한기선의 “교회건축과 음향공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사가 교회의 설립과 교세를 확장해 나가고, 건축가가 교회 건축을 기능적으로 설계 시공하고, 공학자가 설교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음향을 고려함으로써 교회 건축을 둘러싼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후암장로교회, 엑소노메트릭, 1963

후암장로교회 이후 경복교회, 동대문교회, 인천제일교회, 가락동교회 등 여러 교회를 설계한 후 펴낸 이 책에서 김정철이 모델로 삼은 교회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네덜란드의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와 부활교회(The Church of the Resurrection), 코너스톤교회(The Cornerstone), 스위스의 보트밍겐 개혁교회(Kirche Bottmingen) 등 기능적이고 합리적인 모더니즘 문법을 충실히 따른 교회가 전범이었다. 이들은 모두 예배 공간은 장식 없는 낮고 넓은 장방형 매스에 종 또는 십자가를 설치하기 위한 높고 좁은 수직 매스를 병치한 것이 특징이다.30 김정철의 후암장로교회에서 시도한 이 접근법은 교계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한국 기독교 교회 건축의 한 전범으로 자리 잡는다.

발터 부르스터와 한스 울리히 후겔, 보트밍겐 개혁교회, 1958

후암장로교회가 김정철이 생각한 기능적이고 합리적인 교회의 원형을 구현해볼 기회였다면, 1979년 설계한 전주서문교회는 조형성을 시도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사무소가 대형화되면서 개인의 아이디어와 조직의 체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던 시기의 작업이다. 한편으로는 교회 건축에 대한 요구도 달라져 있었다. 기능을 충족하는 것 이상으로 조형성과 상징성을 추구하던 시절이다. 김수근의 1978년의 양덕성당, 1981년 경동교회 등이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작업이고, 서문교회 역시 이 맥락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호남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였던 전주서문교회는 김정철의 교회 작업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여유로운 대지 규모는 건물의 형태와 규모를 제약하지 않았다. 볼륨과 매스를 정해두고 그 안에서 프로그램을 해결하기보다는 건물의 기능과 건축가의 의도에 따라 매스를 다룬 건물이다. 평면은 설교대를 꼭짓점 삼아 기본 장방형 평면이 부채꼴로 확장해 나가는 꼴이지만, 대칭적이거나 반복적이지 않아 외부에서 그 형태를 짐작하기는 힘들다. 주변의 한옥을 고려해 높아 보이지 않게 하는 것, 교회 공동체의 구심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프로그램의 주안점이었다. 이전 교회 작업과 가장 다른 점은 빛의 조작이다. 세심하게 고려된 음향에 빛의 상징적인 효과를 더한 것이다. 이는 후암장로교회와 서문교회 사이에 있는 노량진교회(1974)와 비교하면 명확해진다. 장방형 평면에서 탈피해 부채꼴로 펼친 평면, 적벽돌의 부분적 사용 등 노량진교회는 서문교회와 유사한 점이 많지만, 빛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수법은 무척 다르다. 설교단 오른쪽 벽에 끼워 넣은 스테인드글라스는 후암장로교회에서처럼 옆에서 들어오는 빛, 즉 실내를 밝히는 용도였고 광원을 볼 수 있는 장치였다. 반면 서문교회의 빛은 대부분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거친 벽돌 벽을 비춘다. 이 빛은 조도를 위한 빛이 아니라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서문교회는 건축가이자 신앙인으로서의 개인을 읽어낼 수 있는 대표적인 작업이다.

전주서문교회, 1979
전주서문교회 평면도,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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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정림건축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독립했을 때, 두 형제 모두 정림건축이 오늘날과 같은 대형 설계사무소, 또는 조직 지향적 설계사무소로 성장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정철이 일했던 종합건축이 분명 지향하는 설계사무소의 한 모델이었겠지만, 당시는 요즈음 통용되는 설계사무소의 분화가 이루어지기 전이었다. 예술로서의 건축과 작가의식을 앞세우는 아틀리에와 건축을 비즈니스로 이해하는 중대형 사무소라는 최근의 이분법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한국에서 작가주의 건축가의 한 전형을 확립한 김수근도 1960년대 말에는 국가 주도 경제 개발계획을 주도한 국가 기업을 이끌었다.31 국가 주도 경제개발 계획이 낳는 여러 기회와 제약은 한국의 건축가들이 무엇보다 먼저 대응해야 했던 현실이었다. 이런 시대적 환경 속에서 정림건축이 표방한 경영 원칙과 지침을 이해할 수 있다.

정도와 성실을 바탕으로,

첫째, 우리는 현대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미래지향적인 창작활동을 통하여 영구적인 국가발전과 환경개선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한다.

둘째, 우리는 조직적으로 종합적인 창작활동을 통하여 기술혁신과 완벽한 토털 디자인을 수행한다.

셋째, 우리는 부단한 기술개발과 축적을 도모하여 기술 수준을 국제화하고 나아가 국위선양 및 외화의 절약, 획득을 목적으로 한다.32

조직화를 통한 토털 디자인을 추구하고 기술 개발을 축적하는 것이 국위 선양과 외화 절약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대 한국 건축과 엔지니어링 업체가 당면한 과제였다. 역으로 기술 개발을 축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 역시 국가 주도 경제개발 프로젝트에서 주어졌다. 금융계와 산업계에서 경력을 쌓아 온 두 형제의 협력은 경제개발에 가속을 가하던 1960년대 말 여러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수행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형제의 모교인 대광중고등학교 관련 건물, 여러 교회와 은행 지점 등 적지 않은 일이 있었지만, 정림건축이 한 차례 도약하는 첫 번째 계기는 1969년 대성목재공업의 월미 합판공장이었다.33 인천 북성포구 동양방직공장 옆에 세워진 8천 평에 달하는 규모의 공장 설계였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정림건축은 경제적 안정뿐 아니라 철골 트러스를 이용해 대공간을 만들어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어 1970년에 수행한 한양화학 사택단지는 정림건축이 도약하는 두 번째 계기였다.34

한양화학은 1960년대 말부터 추진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의 산물이었다. 1969년 정부는 석유화학공업 단지 조성에 들어간다. 폴리에틸렌, 염화바이닐, 아크릴로나이트릴, 카프로락탐 등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건립하려는 계획이었다. 국내 기술과 자본으로는 부족하였기에 미국 다우(The Dow Chemical) 등의 회사와 합작회사를 설립하거나 차관을 도입했다. 이때 외국과 합작에 나선 회사가 바로 충주비료다. 한양화학은 충주비료와 미국 다우가, 동서화학은 충주비료가 미국 스케리사와, 한국 카프로락탐은 충주비료가 차관을 받아 발족시키게 된다. 정림건축은 이 세 공장 관련 프로젝트를 모두 수주한다. 이 비료공장 건설을 위해 내한한 외국 기술진들을 위한 사택단지와 행정동 건물이었다. 1970년 한양화학 사택단지(울산)를 시작으로 1971년 동서화학 사택단지(울산), 1974년 남해화학(제7비료공장) 공장, 1976년 한양화학 공장 및 사택단지(여천) 등을 잇달아 수주했다. 이 일련의 프로젝트를 통해 정림건축은 외국 엔지니어링 업체와 협업할 기회를 얻었고, 외국 업체가 요구하는 높은 사양의 건설 기술 및 도면 작도법 같은 지식을 습득한다.35 일련의 화학 공장 프로젝트의 수주와 진행에 김정식의 충주비료 경험이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정림건축이 무료로 머물던 을지로 적산가옥에서 북창동 삼옥빌딩으로 사무실을 옮기는 것도 이 무렵이다.

남해화학(제7비료공장), 여천, 1974
한양화학 공장 및 사택단지, 여천, 1976

화학 공장 프로젝트로 기반을 닦은 정림건축은 1973년 외환은행 현상설계 당선으로 국내 대표적인 설계사무소로 발돋움한다. 현상설계가 있기 4년 전, 김정철은 한국은행에서 외환은행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1969년 외환은행은 본사 사옥 신축을 계획하고 사내에 설계팀을 꾸렸고, 이 설계팀에 김정철이 속해 있었다. 은행 내부 사정으로 이 계획은 무산되지만, 김정철은 신축 준비를 위해 40여 일간 해외 답사를 떠나는 행운을 누린다. 은행, 오피스 건축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도시와 건축에 관한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였다. 이 계획이 무산되고 난 뒤 김정철은 외환은행을 떠나 정림건축에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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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외환은행 현상설계는 정림건축뿐 아니라 한국 현대 건축의 역사에서도 주요한 분기점이다. 우선 외환은행 신축은 1960년대 말부터 정부와 서울시가 추진해 온 도심재개발 사업의 일환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종로, 을지로, 광화문 일대의 필지를 도심재개발 구역으로 지정해 고밀도 개발을 추진한 서울시의 계획은 1970년대 내내 원활히 진행되지 못했다. 수십에서 수백 개의 작은 필지를 하나의 필지로 만들고 고층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본 축적과 행정력이 동원되어야 했다. 한국의 자본은 서울을 고밀도로 바꿀 만큼 축적되지 않았다.36 때문에 1970년대에 민간 영역에서 도심재개발 사업이 진행된 곳은 거의 없었다. 외환은행 본점 신축은 이런 가운데 1970년대 추진된 대표적인 초기 도심재개발 사업이었다. 대지가 내무부가 사용하고 있던 구 동양척식회사 건물이었기 때문에 정부의 의지에 따라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즉 외환은행은 도심재개발의 시범 사업이자 이후 지어지는 은행 본점 건축의 시발점이었다.

외환은행 현상설계 제출안, 1973
외환은행 현상설계 제출 모형, 1973
서울시 주요 시각 요소 배치와 외환은행, 「한국외환은행 본점신축공사 계획설계설명서」, 1973
배치 및 외부 공간 비교, 「한국외환은행 본점신축공사 계획설계설명서」, 1973

한편 외환은행 현상설계는 1960년대 말 주요 국가 프로젝트가 파행을 겪은 뒤 치러진 대형 현상설계 경기였다. 1966년의 종합박물관 현상설계, 1967년의 정부종합청사는 독립국가이자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건축으로 표상할 수 있는지를 묻는 기회였다. 그러나 전자는 전통적 요소를 현대 재료로 번안하라는 정부의 요구에 주요 건축가들이 반발하면서 보이콧하는 일이 벌어졌고, 후자는 정부가 나상진의 당선안을 번복하고 미국 엔지니어링 업체 설계로 공사를 감행하면서 건축의 생산적인 논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1973년 외환은행 현상설계는 김수근, 김중업, 나상진 등 대표적인 건축가를 비롯한 열두 팀의 지명 현상설계로 진행되었다. 이름값은 없었지만 은행이라는 프로그램에는 가장 밝았던 정림건축은 대단히 강력한 언더독이었다.

삼일빌딩, 한진빌딩 등 철골 구조를 이용한 몇몇 고층 빌딩이 있었지만, 한국 건축가들에게 고층 오피스 건물은 대단히 낯선 건축 유형이었다. 정림건축이 제안한 34층 규모는 당대 최고층 빌딩이었다. 이전까지 설계한 오피스는 외환은행 부산 지점 등 10층 내외가 전부였으니 정림건축으로서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무엇보다 고층 오피스를 생산하기 위한 물적 토대가 전무한 상황이었다. 구조를 위한 H형강, 커튼월을 위한 경량 철골 부재와 패널 등이 국내에서 전혀 생산되지 않았다. 외화 사용이 대단히 엄격했기에 수입 자재를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도 불확실했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면 1970년대 한국의 건축가들은 19세기 말 미국의 건축가들보다 금속 재료를 사용하지 못했다. 1973년 제출안은 고층 오피스와 저층 영업장이 분리되어 있고, 검은색 금속 멀리언이 직육면체 볼륨에 리듬을 부여하는 미스 반데어로에적 구성이 특징이다. 외환은행 설계 시 여러 방면에서 참조점이 된 고층 빌딩으로는 일본의 가스미가세키, 고베 무역센터, SOM의 유니언 카바이드 빌딩, 케빈 린치의 CBS본사, 미스 반데어로에의 시그램 빌딩 등이다. 이 중에서 외형 면에서는 유니언 카바이드 빌딩의 흔적이 지배적이다. 시그램 빌딩을 재해석한 유니언 카바이드 빌딩은 거장을 재해석한 조직 설계사무소의 전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철골 구조와 외피의 멀리언이 물리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으나 논리적으로 빈틈없이 묶여 있는 미스의 시그램과 달리 유니언 카바이드는 철골 기둥이 외피와 병합되어 있었고, 하나의 논리가 건물 전체를 관장하지 않는다. 대지의 조건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뉴욕 중앙역으로 이어지는 철로 위에 지어져야 했기에 철로 폭을 고려해야 했던 것이다.

고층부 구조 및 입면 비교, 「한국외환은행 본점신축공사 계획설계설명서」, 1973

한국의 건축가들은 고층 건물의 입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그리고 각각의 선택에 따르는 유불리를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서 경험한 적이 없었다. 현상설계 당시 정림건축이 제출한 「한국외환은행 본점신축공사 계획설계설명서」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고층부 구조 및 입면 비교”에서 정림건축은 커튼월과 기둥의 관계를 넷으로 구분하고 장단점을 정리한다.37 이 비교표에서 정림건축은 ‘커튼월이 기둥 선에서 후퇴한 경우’와 ‘커튼월이 기둥을 감싸는 경우’(기둥이 슬래브의 끝에 위치해 커튼월과 만나는 경우)를 선호했다. 실내에 기둥이 노출되는 단점이 있지만, 고층 건물의 구조와 형태에 어울리는 유형이었다. 외환은행 계획안의 기둥은 외벽 선에 맞닿아 있다. 외피와 기둥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고층 빌딩에서 대단히 결정적이다. 기둥이 외벽에서 물러나면 평면 활용에서는 불리하나 외벽의 모듈 구성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정반대로 기둥이 외벽선 바깥으로 나가면 창의 모듈은 파괴되나 공간의 활용도는 가장 높다. 유니언 카바이드 빌딩과 외환은행 현상안에 채택된 방법은 이 둘 사이의 절충이다. 기둥을 바닥 슬래브의 끝 선에 일치시키고 외피는 멀리언의 모듈로 구성하는 것이다. 정림건축은 이를 통해 “국제적 비즈니스의 일선 업무상으로서의 세련미를 추구하고 전체 면을 거울처럼 주변의 환경 및 도시경관을 투영” 시키고자 했다. 정림건축은 미스나 SOM의 고층 빌딩처럼 멀리언의 리듬으로 커튼월을 조직하고, 이 추상적 입면으로 현대 산업사회를 표상하고자 했다. 적어도 이것을 당대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외환은행 착공식 배포 자료(1차 설계 변경), 1976
외환은행 착공식 기념사진, 왼쪽 끝 정주영, 왼쪽 다섯 번째 구자춘 서울시장, 1976년 8월 26일

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산업적 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고층 빌딩을 말 그대로 세우기 위한 철골은 수입할 수 있었지만, 멀리언과 외장재까지 수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입 자재를 최소한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현실적 요구를 반영한 1976년 변경안은 정림건축이 제시한 고층 건물의 한 유형으로 자리 잡는다. 이 유형은 이후 이어지는 도심재개발사업, 여의도 개발 등에서 정림건축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데 기여한다. 우선 내부 공간의 효과적인 활용을 위해 외벽과 커튼월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구조의 모듈이 전체 입면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림건축의 선택지였다. 철골 구조의 리듬과 무관한 커튼월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경량 철골 멀리언이 없는 상황에서 네 입면을 동일한 마감이나 리듬으로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이 결정은 정면과 측면의 구성을 분리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견고하고 육중한 모서리가 커튼월의 틀을 만드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았다. 이로써 구조와 외피는 분리되었다. 구조의 논리적 결과로서의 외피가 아니었다. 석재로 마감된 듯한 외환은행의 네 모서리는 구조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지만 건물 전체에 견고한 인상을 부여한다. 또 아무런 기능도 없고, 내부에 공간도 없지만 얕은 테라스처럼 돌출된 스팬드럴 부분은 입면에 요철감을 부여하며, 기둥의 수직선을 감추고 건물 전체에 수평선을 강조한다.

외환은행 최종안 모형, 1976

고층부가 원거리에서 주변 환경에 시각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라면, 영업장이 있는 저층부는 보행자의 눈높이에서 도시의 가로 조직과 관계를 맺어야 했다. 고층 타워와 저층 포디엄의 조합은 구성면에서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르코르뷔지에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의 유엔 본부(1948)를 비롯해 여러 선례가 있었을 뿐 아니라, 김정철 역시 대학 4학년 시절에 제출한 서울시 의사당 현상설계에서 이미 실험한 바 있었다. 관건은 건축물의 바닥 면적에 비해 넓은 대지 조건에서 저층부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였다. 정림건축은 을지로에서 명동으로 들어가는 곳에 포디엄을 두고 영업장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구조의 부담이 적은 저층부에서는 더 개방적인 입면을 구성했고, 브라질산 수입 화강석으로 마감했다. 예산 부족으로 고층부는 화강석을 쓸 수 없었고, 정림건축은 다시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분홍빛 타일을 pc 콘크리트 패널에 붙여 건식으로 벽에 조립하는 방식이 해결책으로 채택되었다. 고층 빌딩에 적합하지 않은 작은 타일을 사용하면서도 시공과 공정의 합리화를 모색했다. 동시에 타일의 모듈과 패널의 모듈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리듬은 넓은 벽면의 단조로움을 피하게 했다. 현장의 임기응변과 생산의 합리화가 타협한 결과다.

외환은행 마감 디테일 / 사진: 박영채

1973년 현상안에 강하게 나타난 미스나 SOM의 영향을 1976년의 변경안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설비, 슬래브의 프리패브화 같은 여러 기술적 시도가 국내에서 처음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설계 변경은 일종의 후퇴였다. 당시 한국에서 건축의 표상보다는 생산이 압도적으로 우위였고, 국가 경제 정책이 건축의 의미를 결정했다. 외한은행 프로젝트가 어떤 조건 속에서 계획되고 수정되고 지어졌는지 김정철의 언급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무소가 갖는 문제는 현대적인 기계화 공업을 고려한 디테일의 채택, 완전한 시공성을 감안한 재료의 구사, 기술적 문제 외에도 건물 유지ᆞ관리 체제의 확립 등 업무의 기계화에 따르는 합리적제반설비조건의연구를들수있으나,더욱중요한것은 도시계획 및 행정의 뒷받침일 것이다.”

1960-70년대 오피스 건물의 수요 대부분을 차지한 은행 영선과에 10년간 몸담은 김정철이었기에 고층 오피스 빌딩은 기계화와 공업화를 통해 생산되고 유지되는 것이야 함을 한국의 어느 건축가보다 더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경제 정책 가운데 주택을 제외한 건축의 합리적 생산은 우선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도심재개발과 이에 따른 중앙 행정부와 국영기업의 공간 재배치 등에서 건축은 도구적 수단 이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3년 현상설계에서 완공까지 7년여가 걸린 외환은행 프로젝트는 정림건축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김수근, 김중업 등 개인의 창조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축가들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대형 프로젝트를 정림건축이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고층부 사무실과 저층부 영업장으로 분리한 유형은 후속작 대구은행을 비롯해 국내 금융사 사옥의 모델이 되었고,38 정면과 측면을 별도 처리하고 모서리부와 전면부를 나누는 입면 구성은 정림건축의 상공회의소, 사학연금회관 등 여러 고층 오피스 유형의 모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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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은행은 은행 본점의 전형을 제시한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설계사무실의 조직화와 대형화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설계사무소의 조직을 대형화하고 설비, 구조, 전기 등 여러 전문 분야로 나누어 운영한 예가 국내에서 정림건축이 최초는 아니었다. 김정철이 일한 종합건축이 국내에서는 최초로 조직 설계를 표방했다. 그러나 종합건축의 조직화는 학계와 산업계의 전문 인력이 모두 모인 엘리트 집단으로서의 조직화였다. 김정수(소장), 이휴선(난방), 지철근(전기, 서울대 교수), 강진성(건축기사), 윤정섭(도시, 서울대 교수), 이승우(구조, 건축), 김형만(건축) 등 당시 대표적인 공학자들이 함께 몸담고 있었다.39 종합건축은 각 분야의 전문 업체와 전문가가 드물던 시절 구성된 산학협력체 같은 조직이었다. 분야별로 책임을 나눴지만, 사무실 전체의 조직이 분야별로 구성되고 운영되지는 않았다. 십수 년 뒤 정림의 시도는 보다 체계화된다.

웰턴 베켓 사무소의 조직도, 1972

외환은행을 수주하기 전 1972년 별다른 분야 구분 없이 29명으로 이루어져 있던 정림건축의 조직은 외환은행이 완공될 무렵인 1980년에는 111명의 인원이 기획실, 설계1~4부, 견적부, 감리부, 기전부로 나뉘어 배치되어 있었다. 2년 뒤 인원은 2명 늘었을 뿐이지만 조직은 훨씬 체계화되어, 기획부, 설계1~4부, 해외사업부, 구조부, 견적부, 기계부, 전기부, 감리부, 총무부로 더 세분화된다.40 이 분화는 건축과 관계된 산업에 대응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발주처의 관료조직에 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부 프로젝트의 하자 보수에 즉각적으로 대처하는 방식이었다. 기술 파트의 내부화를 추구하던 정림건축이 조직화의 모델로 삼은 회사는 미국 설계사무소 웰턴 베켓이다.41 정림건축은 웰턴 베켓이 1972년 펴낸 『토털 디자인』(Total Design: Architecture of Welton Becket and Associates)을 레퍼런스 삼아 조직을 변화해 나간다. 20세기 초 거장 건축가들이 꿈 꾼 토털 디자인이 건축에서 시작해 가구, 전등, 시스템 키친, 문손잡이 등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면, 전후 조직적인 설계를 지향한 대형 설계사무소의 토털 디자인은 건축에서 공장, 인프라, 도시까지 확장되어 나가는 것이었다. 한 개인의 업무 영역을 훌쩍 뛰어넘는 후자를 위해 필요한 것이 사무소의 체계적인 조직이었다.

정림건축 조직도, 1972, 1974
정림건축 조직도, 1980, 1983
1984년 수행 프로젝트 맨파워 분석

한편 조직화 추구는 1980년대 중반 캐드 시스템 도입으로도 이어진다. 1985년 미국에서 시그마3(캐드 시스템)를 국내에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 건축 설계사무소에 직원을 파견해 견문을 넓히고 자료를 얻는 방식으로 세계 건축계의 동향을 주시해 온 정림건축은 1985년 25만 달러를 지불하고 시스템을 도입한다. 고정환율이었던 1985년 1월의 환율은 830.30원, 12월의 환율은 890.88원이었고 연평균은 860.59원이었으므로, 당시 시세로 2억 1,500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1985년 정림건축의 직원은 130명, 월급 총액이 6,200만 원 내외였으니 캐드 시스템 도입은 전체 직원의 석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큰 비용을 들여 도입한 캐드 시스템이 설계에 직접 활용되지는 못했다. 캐드를 비롯한 컴퓨터의 활용이 설계 작업의 변화를 불러오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초창기 캐드는 프레젠테이션용 투시도 제작 등에 활용되었다. 간단한 선 드로잉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컴퓨터가 그려낸 투시도는 건축주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이런 실제 효용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캐드의 한글화 과정이다. 작업의 능률을 위해서는 메뉴의 한글화가 필요했고, 캐드로 작성한 도면을 현장에서 활용하기 위해서는 한글을 입력, 출력할 수 있어야 했다.42 워드프로세스 글과 한글 타자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한메타자교실이 1989년에야 출시되었음을 감안하면, 컴퓨터에서 한글을 입출력하는 문제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대구은행 캐드 렌더링, 1986

정림건축은 한글 완성형 글자 전체를 캐드로 그려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한국형 표준디테일』(1979)이 일본 다이세이 건설과 협업한 플라자호텔 등을 통해 습득한 여러 디테일을 청사진으로 구워 펴낸 결과물이었다면, 『건축상세: 정림 디테일』(1990)은 디테일 도면 전산화의 결과였다. 조직적인 설계를 하기 위한 지적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다른 어떤 국내 설계사무소보다 일찍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기술 파트의 내부화 전략은 1997년 IMF 구제금융 위기를 맞아 좌초되고 만다.

『건축상세: 정림 디테일』, 부록에 수록된 라인 드로잉으로 완성한 한글표,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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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철은 1984년 3월에서 1988년 2월 한국건축가협회 부회장을 거쳐 16대 회장을 역임한다(1988년 3월~1990년 2월). 건축작가협회를 전신으로 하는 건축가협회는 문화와 예술로서의 건축을 추구하고 사회적 책임을 지는 건축인을 지향하는 직능단체다. 건축사라는 법적 지위를 보증하는 직능단체인 건축사협회와는 다른 헤게모니를 형성해 왔다. 이천승, 김희춘, 송민구, 엄덕문, 정인국, 김수근, 이승우 등 문화적 권위를 인정받는 이들이 협회장을 이어왔다. 김정철의 회장 선임은 조직 건축을 목표로 삼는 설계사무소가 한국 건축계의 문화적 중심에 편입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43 서울대-종합건축-한국은행으로 이어진 정림건축 창립 이전 김정철의 행보는 당시 건축을 전공한 한국의 젊은이가 택할 수 있는 최고 엘리트의 길 가운데 하나였지만 건축계 내부에서는 비주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정철과 정림건축은 명문 고등학교의 인맥, 거장 건축가 아래에서 수련, 기념비적 국가 프로젝트의 수주, 한국적인 것의 현대화 등 비슷한 세대 건축가들이 명성을 쌓아나가는 길과 다른 경로를 지나왔다. 역설적으로 이 다른 경로가 정림건축이 산업화 시대의 한국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고, 한국 현대 건축의 다양성을 가능케 했다.

한편, 1980년대 중엽은 대형 설계사무소의 익명성과 개인 건축가의 작가의식이 공존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였다. 아틀리에가 할 수 있는 작업과 대형 설계사무소만 할 수 있는 작업은 확장된 경제 규모에 맞추어 점차 분명하게 나뉘었다. 또 대형 설계사무소를 키워낸 1930년대 생 건축가들이 장년으로 접어들던 시점, 즉 제도판보다는 책상에 앉는 시간이 늘어나던 때이기도 했다. 정림건축에서 김정철 개인의 흔적은 이 무렵부터 차츰 옅어지기 시작한다.44 한국종합무역센터(1985), 국립중앙박물관(1995), 인천국제공항 여객터미널(1997) 등 정림건축이 온전한 조직 설계의 틀을 갖추고 성장하게 되는 때는 이 이후다. 이들 작업을 분석하고 역사적, 비평적으로 평가하는 일은 또 다른 시선과 언어가 필요하다.

노량진 자택 서재에서 젊은 시절의 김정철

박정현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건축의 고전적 언어』 등을 번역했으며, 『전환기의 한국건축과 4.3그룹』, 『아키토피아의 실험』, 『중산층 시대의 디자인 문화』(이상 공저) 등을 썼다. 〈Out of the Ordinary〉,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베니스 비엔날레 2018 한국관〉 등의 전시 기획에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의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김정철과 정림건축 1967–1987

분량28,920자 / 50분 / 도판 47장

발행일2017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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