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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설계의 개척자

박성태

건축가이자 정림건축과 정림건축문화재단 설립자인 김정철 선생은 2010년 9월 27일 새벽에 타계했다. 향년 79세. 어느덧 7년이 지났다. 그의 뜻에 따라 다음 해 4월 26일 정림건축문화재단이 설립됐다. 그는 평생 신앙인으로서 ‘청지기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복음에 빚진 자로서 한빛누리재단에 이어 정림건축문화재단을 만들어 나눔을 실천한 것이다.

김정철 선생은 건축가로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외환은행 본점과 전주서문교회가 대표작이다. 한국 현대건축사에서 은행 본점 및 고층 오피스 건축과 종교 건축에 그가 끼친 영향력은 크다. 한국의 산업화 시기 고층 건물과 교회 건축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건축가 김정철 선생에 대한 건축사적 조명 작업은 그리 많지 않다. 김정철이라는 건축가보다는 정림건축이라는 조직만 세상에 알려져 있다.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추구하는 독자적인 건축 언어나 화려한 건축적 행보가 그의 삶에서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정철 선생은 자신을 주장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이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따뜻하고 감성적이며 합리적인 건축가였다. 건축 조형과 언어의 홍수 속에서 그는 밋밋하지만, 한결같이 든든한 반석 같은 건축가였다. 개인보다는 함께하는 건축가들을 신뢰하는, 그러면서도 그들을 잘 이끌었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넘치는 건축가였다. 그는 한 사람의 거장에게 의지하는 방식이 아닌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은 건축가를 지향했다.

선생은 193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동시대 건축가 김수근 선생과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그는 김수근의 반보 뒤에서 다른 길을 걸었다. 김수근이 조형 의지를 앞세웠다면, 김정철은 ‘조직 설계에 의한 토털 디자인’을 바탕으로 사회의 변화가 요구하는 새로운 건축이 무엇인지를 탐구했다. 그가 설립한 정림건축이 세대를 넘어 50년 넘게 건강하게 지속해 오고 있는 것도 이런 그의 작업 태도를 이어온 덕분이다.

우리 도시를 이루는 대다수 업무·주거 공간은 개인 건축가의 작업이 아니다. 규모가 큰 건축물을 설계한 종합설계사무소의 역할이 절대적이지만, 그 성과에 대해서는 그동안 역사적이고 비평적인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러 주체가 모여 협의를 통해 디자인한 경우도 있고, 설계 조직 내에서도 팀 중심으로 설계를 했기에 개인 건축가의 작업에 비해 건축적 평가의 대상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도시의 대형 오피스 빌딩, 쇼핑센터, 아파트, 병원 그리고 교회 등이 우리 도시 환경을 이루고 있지만, 디자인 방법과 과정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에 펴내는 『김정철과 정림건축 1967–1987』은 건축가 김정철의 초기 작업에 대한 최소한의 아카이브 작업이다. 정림건축 50년의 역사 가운데 초기 20년에 국한한 이유는, 건축가 김정철의 흔적과 고민을 가장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또 같이 활동했던 이들의 기억이 옅어지고 자료들이 사라지기 전에 오래된 과거의 자료부터 먼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바라던 한국 건축의 다양성과 건강한 건축문화를 꽃피우기 위해서라도 김정철과 종합설계사무소인 정림건축의 작업을 좀 더 살펴봐야 하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번 기회가 한국 건축을 바라보는 시각의 확장, 김정철 선생에 대한 건축사적 재평가 작업의 단초가 되길 바란다.


박성태

정림건축문화재단 상임이사

조직 설계의 개척자

분량1,630자 / 3분

발행일2017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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