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김정임, 조재원, 최진우
분량5,966자 / 12분
발행일2024년 8월 27일
유형비평
1차에 제출한 297팀의 제안을 읽고 2차 발표팀 17팀을, 17팀의 발표를 듣고 5팀의 제안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심사 과정은 내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응모작들의 사고와 언어가 새로운 만큼, 그 상상의 지평이 넓은 만큼, 심사를 맡은 우리의 독해도 새롭게 확장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공모 주제의 발제 논의과정에서의 우려- 실무에서도 해법을 도출하기 어려운 광대하고 난해한 주제를 학생공모의 주제로 삼는 것이 적정한가 -는 기우에 불과했다. 이번 공모전을 ‘해법을 겨루는 경쟁보다는 주제에 대응하는 공동의 지식을 축적하고, 이를 발판삼아 좀 더 깊고 넓은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초석을 만드는 공동 연구의 장으로 삼자’고 했던 데 대해 참여팀들은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는 성과물을 보여주었다.
참여작들은 함께 사는 규약을 맺는 테이블에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앉는다는 전제로, 바로 지금 우리의 일상이 펼쳐지는 곳곳을 새롭게 관찰하고 공존의 환경과 문화를 상상했다. 심사는 시나리오들이 지적탐구와 상상의 힘으로 드러낸, 이제껏 건축과 도시의 서사에 등장한 적 없었던 주인공들- 곰팡이부터 펫샵의 애완동물, 굴과 소라게, 농장의 소, 철새, 붉은 여우 등등까지-을 만나는 과정이었다. 또한, 이들이 펼치는 장소의 흥미진진한 미래와 현실과의 간극 사이에서 스스로의 모순과 수많은 과제를 깨닫게 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297팀의 시나리오들을 펼쳐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이 글을 통해 그 과정에서의 통찰과 배움을 일부라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참가작들은 ‘모두’라는 사용자 범주와 미래를 대입해 용도와 형식을 재고해야 하는 다양한 조건의 대상지를 선택해 새로운 미래를 제시함으로써 그것이 근거하고 있는 계획과 사용의 전형적인 준거들, 지속할 수 없는 기준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했다. 시나리오들이 펼쳐낸 고유하고 흥미로운 지형들을 대략 다음과 같이 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화장실과 장묘장의 건축과 문화를 다시 쓴 두 시나리오는 그 스케일이 확연히 다르면서도 개인과 한 사회의 문화가 만나는, 인간의 생리와 자연의 생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개입하는 시나리오로서 흥미로웠다.
‘공개공지’를 다종의 생물이 공존하는 미래의 거주지로 리노베이션한 참가작은 특정 공간이 아닌, 제도로 규정된 공간을 대상지로 삼음으로써 확장성을 가질 수 있는 접근이 돋보였다.
국회에 표류 중인 ‘동물 비물건화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의 최종입법을 가정하고 청계천을 대상지로 일대의 애완동물 판매상가의 생물종의 해방과 연결 생태계, 사람의 거주까지를 포함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깊게 질문한 시나리오는 그 치밀함이 소논문 같았다.
50년, 100년의 긴 시간, 광역의 시나리오를 펼친 참가작들이 있었던 한편, ‘혜화동에서의 1년’은 수세미라는 특정 식생이 생장하는 ‘생태의 시간’과, 그 식물을 소재로 건물을 재건하는 ‘건축의 시간’을 교차하게 한 시나리오로, 당장 실행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구체성이 돋보였다.
한 농촌 마을이 사라지고 허물어지는 과정을 거주자 ‘모두’의 관점에서 ‘아름다운 사람이 머문 자리’를 대체해 다양한 생명체의 이주를 허용하는 ‘계획’과 ‘실행’을 요하는 시간으로 접근한 시나리오에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수상작들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주제도 다루었다:
- 화석 에너지원에서 재생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그 용도를 전면검토해야 할 주유소, 주차장, 도로 등의 이동 기반시설이 전환을 촉진하는 네트워크가 되는 상상.
- 자연과 도시 경계에 위치한 인구구조의 변화로 전환이 촉구되는 폐교는 어떤 배움의 장소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시나리오.
- 해수면의 상승, 잦은 홍수 등으로 위기에 처한 수변 공간이 물 안팎의 생명체와 공존하는 공간으로 변화하는 시간.
- 다양한 문맥에서 접근한 아파트와 빈집, 빈집이 될 아파트에 대한 과감한 상상들.
- 1차 생산 기지로서 논을 모두의 ‘거주’의 공간으로 보고 리노베이션한 시나리오.
시나리오를 한 단계, 다음 단계 따라 읽으며, 참여팀들이 ‘의구심’과 ‘한계’라고 느꼈을 난감한 지점들을 공감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의 절벽 같았을 그 지점을 과감히 뛰어내려 이야기를 지속한 경로를 감탄하며 따라가곤 했었다. 참여팀들이 관찰하고, 대화의 장을 만들고, 액션을 촉구하는 계획가로서뿐 아니라, 화자로서 이야기의 안팎을 넘나드는 모습도 목격할 수 있었고, 이 또한 주목할 만했다. 무엇보다 시나리오상에서 때때로 논리의 비약 같았던 바로 그 균열의 지점들이야말로 ‘내일의 지구를 위한 오늘의 건축’을 이어갈 동료들에게 이번 공모의 참여자들이 구축해 선물한 ‘디딤돌’이라고 생각한다.
한시가 급한 멀고 먼 여정도 한 걸음부터다. 모두의 노력으로 한 걸음을 나아갔다. 600~900명에 이르는 참가팀 구성원들의 안내로 보이지 않던 길을 보고, 알아차리지 못했던 감각을 일깨우는 놀라운 시간이었다. 글을 마무리하며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 심사위원 조재원
‘모두의 집: 내일의 지구를 위한 오늘의 건축’이라는 주제는 오늘날 지구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시의적절하다.
작년 7월에 시작된 주제에 대한 논의는 근현대 도시와 건축계획의 기준이 되어온 비장애, 이성애자, 남성의 몸이라는 범주에서 소외되어 온 대상들을 살펴보자는 데서 출발하여,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반성과 비인간 생물종을 동등한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의까지 확장되었다. 그간 ‘친환경건축’, ‘지속가능한 건축’, ‘생태건축’ 등의 용어로 업계에서도 많은 연구와 법제정, 실무에의 적용이 진행되어 왔지만, 기술적인 측면만이 부각되어 왔고 도시와 건축을 바라보는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인문학적, 철학적 담론들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번 정림학생건축상에 제출된 297팀이 제기한 문제의식과 제안들은 이런 현실 속에서 길어올린 값진 마중물이다. 1차 심사에서 17개의 제안을 추릴 때, 완성도도 물론 중요했지만,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이슈를 골고루 다루고 있는지를 중요한 선정 기준으로 삼았다.
인공적으로 복원한 청계천이 과연 생태적인 장소인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 일부 구간을 인간의 접근을 차단하는 방법으로 방사구간을 만드는 제안을 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공개공지가 아닌 비공개공지를 만들자는 전위적 발상을 제안한 ‘This Open Space is Private’은 당장 실천해 볼 수 있는 방법으로 대도시 속에서 다시 우거지고 우글거리게 하는 리와일딩을 시도하는 좋은 제안이다.
수세미라는 바이오머티리얼을 건축재료로 활용한 ‘혜화동에서의 1년’은 지역재료를 활용하면서 계절과 시간이라는 감각을 건축생산과정에 결합시킨 신선한 제안이고, ‘창신동, 격자에 녹아들다_공존을 위한 계면의 형성’은 비인간 생물의 모듈러 요소를 3차원적으로 분석해 보려는 접근이 인상적이다. 어쩌면 모든 생물은 서로의 계면을 인식하고 그걸 존중해주는 방향으로 진화해온 게 아닐까. 오직 인간만이 그걸 인식하려는 노력 없이 마구 침범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성을 하게 된다.
‘모두의 화장실’은 시선을 땅속 균근 곰팡이에게까지 확장하고 곰팡이와 나무들이 공유하는 우드와이드웹(wood wide web)의 형성을 돕는 제안으로, 공적 가치 실현에 효과적인 공원 내 화장실을 사이트로 선정한 영리한 제안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머문 자리’는 인구감소로 인한 지방소멸을 위협으로만 보지 말고, 인간이 점유했던 장소를 다시 자연에 잘 돌려주는 기회로 삼아보자는 인식의 전환을 제안한다. 미래엔 리와일딩 전문 건축가가 직업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예측해 본다.
용산 미군기지의 오염문제와 새로운 장례문화를 결합한 ‘Finale Grove_최후의 숲’, 전기차와 수소차의 등장으로 폐업하게 될 주유소를 활용하여 도시에 징검다리 녹지를 만들자는 ‘Nestation:주유소의 미래’도 충분히 현실적으로 고려해 볼 만한 제안이다.
그 밖에도 인구축소기의 폐교와 아파트 문제를 다룬 ‘학교를 잊고, 학교로 잇다’, ‘Concrete Veins’, ‘Concrete Utopia’, 그리고 해수면 상승에 따른 변화를 예측해 본 ‘물 속의 우리’, 활기를 잃은 산자락과 맞닿은 시장을 동굴의 공간구조로 해석, 다양한 생명체의 서식지로 재구성한 ‘Recaving:Market(h)all’을 비롯, 일일이 다 언급할 순 없지만 이번 공모전을 통해 얻은 귀중한 제안들이 부디 정책입안자에게 전달되어 인간중심적 개발논리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길 바란다.
주제를 정하고 심사를 하는 모든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이번 계기를 통해 우리의 삶과 터를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인간종으로서 어떤 태도를 갖고 건축을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앞으로도 많은 고민과 실천을 하게 될 것 같다. 이 공모전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하니 건축의 미래가 밝게 느껴진다.
— 심사위원 김정임
야생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문명은 자연과 맺어 온 관계를 반성하며 다시 야생으로 생태적 전환의 방향을 돌리고 있다. 리와일딩(Rewilding)으로 가는 미래지향적 물결이다.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아방가르드적인 낯선 개념이다. 우리 땅에도 리와일딩 씨앗이 싹트기 위해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철학적 사유를 길러내야 한다. 상충하는 여러 이해관계와 갈등에 조응하는 연습도 필요하다. 2024년 정림학생건축상이 ‘모두의 집: 내일의 지구를 위한 오늘의 건축’이라는 주제로 그 포문을 열었다.
건축이 비인간 누구와 어떻게 공존하며 시공간적인 타협을 어떻게 이뤄낼 것인지에 대해 전국 여러 대학의 400여 팀이 리와일딩의 씨앗을 뿌렸다. 그중 297팀이 비인간 ‘모두’가 공존하는 시나리오의 싹을 틔웠다. 이 싹들은 새로운 지식의 초석을 놓자고 한 이번 공모전의 가장 큰 수확이다. 비인간과 공존의 과정을 고민하고 연습해 본 이 학생들이 미래 건축의 씨앗들이다. 1차 심사를 거친 17개의 수상작은 다양하고 창발적인 접근으로 구성되어 리와일딩 건축 시나리오의 기대되는 컬렉션으로 활용될 것이다.
학생들이 제출한 거의 모든 작품은 도시와 인간의 반성과 성찰로부터 시작한다. 학생들은 도시와 건물을 어떻게 비우고 인간이 점유한 공간을 어떻게 양보할 것인지, 콘크리트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환경에 윤리적인지 고민한다. 건축 공부하는 학생들이 한결같이 ‘비인간’의 존재를 인정하고 말하는 게 뜻밖에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였다. 공존의 대상은 멧돼지 개체수를 조절하는 토종 여우부터 다양한 텃새와 철새, 갇혀있는 외래종 동물, 미생물인 곰팡이와 지의류 등까지 그 범위가 다양하다. 스스로를 대변할 수 없는 ‘비인간’ 사용자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건축물 재료와 공간구조에 대한 기술적인 아이디어와 접근이 탁월하다.
다소 아쉬운 지점도 있다. 대부분 안이 인간의 역할과 행위자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야생동물과의 공존에 대해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단선적인 서사에 머물러 있다. 이는 야생동물의 행위주체성과 역동성, 생물간 상호관계에 대한 이해도가 낮기 때문이다. 리와일딩 계획에서는 야생동물과 생태계에 대한 체험적 지식이 요구되고 자연과 야생에 정말 도움이 되는지 충분히 숙고하여야 한다. 한편 지역 개발압력과 인간사회의 관여, 동물과의 상충 등 복잡한 이해관계를 배제하는 측면이 많은데, 예측 가능한 문제점과 갈등에 대한 대응 전략과 해법을 제안하는 시나리오로 발전되어야 한다.
기후·생태 위기가 닥쳐오고 인구감소에 따른 도시가 축소되는 사회적 배경에서 이번 공모전을 준비한 학생들은 리와일딩을 상상하고 꿈을 꾸었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의 사회는 이와는 반대로 가고 있다. 생태보호구역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갯벌과 섬을 파괴하여 신공항을 건설하며, 개발제한구역과 군사보호구역을 해제하여 메가 시티를 건설하고, 초고층의 대규모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진행 중이다.
종말적 위기에서 더 나은 파국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비인간의 야생과 공존할 수 있는 상상과 도전, 준비와 연습으로 빌드업되어야 한다. 이번 건축공모전에서 배출된 17개의 리와일딩 시나리오 컬렉션이 국내에서 인류문명의 반성과 야생의 재시작을 재촉하고 있다. 새싹이 자라 나무가 되어 숲이 될 때까지 도전해보자. 건축이 그 전환의 깃발을 들어야 한다.
— 심사위원 최진우
김정임
서로아키텍츠의 대표로 마스터플랜과 건축설계, 오피스플래닝 등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해오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변화하는 구성 요소들 간의 상호작용과 관계성을 고찰하고 건축 공간에 반영하는 것에 흥미가 있다. 대표작으로는 양천공원 책쉼터, 마곡하늬중학교, SK디앤디본사 및 SK가스 본사 업무공간혁신, NEW 논현사옥, 라테라스 한남, 서울스퀘어(구 대우빌딩) 리모델링 등이 있다. 배재대 하워드관(2011), 라테라스 한남(2013)으로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애월_펼쳐진집(2018)으로 제주건축문화대상, 양천공원 책쉼터(2021)로 서울시 건축상과 대한민국공공건축상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조재원
공일스튜디오(0_1studio)대표다.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적정하고 지속가능한 가치를 더하는 사회적 공간을 탐구하고 실현하는 데 관심을 두고 일하고 있다. 근작으로는 통의동 6번지 근생을 리노베이션한 대우재단사옥 오르비스,강동그린나래복지센터의 발달장애인 보호작업장+체육관으로의 리노베이션, 대학로 샘터사옥을 리노베이션한 공공일호가 있다. 2010년 제주 돌집 플로팅L로 제주건축문화대상 본상, 2011년 대구 어울림극장으로 공공디자인대상 그리고 2016년 코워킹플랫폼 카우앤독으로 서울시건축상을 수상한 바 있다.
최진우
전문 연구자와 환경운동 활동가의 경계를 넘나들며 환경문제 해법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환경생태 연구활동가(Eco-Activist Researcher)이다. 자연과 공생하는 생태전환 도시를 위해 시민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여러 시민과학 활동과 시민행동에 함께 하고 있다. 서울환경연합 생태도시전문위원, 가로수시민연대 대표, 생명다양성재단 이사, 기후재난연구소 기획위원장, 인천녹색연합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다. 서울 철새보호구역 시민과학 연구로 2021년 숲과나눔재단 환경학술포럼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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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2024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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