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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

김광수 × 김상호

김광수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인터뷰 김상호  《다큐멘텀》 편집장 


김상호  건축의 일상성이란 무엇일까요? 건축에서 일상성에 대한 논의가 출발한 배경을 생각해보면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김광수  일상성 논의 전개는 크게 두 개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동질성에 대한 비판이다. 새마을 운동 시절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건축을 주택 공급과 건설 산업이라는 차원에서만 바라보았다. 규격화되고 대량 생산되는 ‘공학적 건축’이 지배적이었던 이 시기에는 개개인이 가진 특수한 상황이 배제되거나 억압되는 표준화, 익명화 현상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풍부한 ‘일상적 삶’의 차원이 ‘공간의 동질화’에 의해 기계적으로 억압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러한 문제 제기의 이론적 배경은 유럽의 사회학자들(미셀 푸코의 ‘파놉티콘’, 앙리 르페브르의 ‘생활세계의 일상성’, 미셸 드 세르토의 ‘공간의 전유’), 질 들뢰즈(영토화- 탈영토화) 등)에게서 가져왔던 것 같고, 한국 내에서 일어난 주요 비판의 대상은 외압적 동질 공간의 ‘생산’에 관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생산’보다는 ‘소비’에 방점을 찍었던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는 후기산업사회의 소비문화와 맥락을 같이하고 억압적 권력의 미시성과 내면화, 타자 욕망과 관련이 있다. 이는 알다시피 지금까지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확대된다. 전자가 ‘공학적 건축’이었다면 후자는 ‘문화적 건축’이라 불릴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 권력의 기재는 ‘공간의 정치학’보다는 ‘이미지의 정치학’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동질성’보다는 문화적 습속에 의한 ‘취향과 구별 짓기’, 즉 ‘차이’를 가장한 동일성(타자 욕망)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두  배경은  한국  사회에서  심하게 중첩되어 있다. 때문에 서로가 각자의 대안인 것처럼 작용하며 자리 바꾸기만 하는 것 같다. 즉 규격화된 아파트의 대안은 차이를 가장한 문화적 이미지 건축이 되고, 공허한 이미지 건축의  대안은  철  지난  근대  계몽주의  건축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일상성  논의는  이  두  가지  모두에 민첩하게 초점을 맞추어 가며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김상호  일상의 건축이 이슈가 되는 데에는 그동안 건축가들이 일상을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건축이 일상으로부터 유리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김광수  과거 건축의 풍토는 계몽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했다. 어떻게 사람들을 근대 사회에 부합시키느냐 혹은 훈육하느냐 하는 관점에서 주택 공급과 도시 공간을 다뤘다. 특이성(singularity)을 지니는 개인이기 보다는 다수를 구성하는 한 개인일 뿐이었다. 그것이 푸코와 르페브르가 근대성을 비판했던 지점이다. 당시 건축가들은  근대성에 충실하도록 교육받았고 그것이 건축의 사명인 것처럼 생각했다. 건축가들은 일상적인 차원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의 차이를 보기보다는 동일성을 먼저 봐야 했고, 그마저도 구체성을 띄기 보다는 어떻게 추상화시킬까 하는 관점에서 봤다. 그러다 보니 건축 공간은 추상적으로 되고 사람들은 그 공간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구체적 삶이라는 차원의 일상성은 결여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관심사에서  일상을 어떻게 산업사회에 맞게 재편성하느냐 하는 문제였고 이러한 대의명분에 실질적인 일상은 소외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비판과 반성적 성찰이 일어나면서 일상성을 회복하자는 고민을 시작하려던 차에 신자유주의를 맞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문화는 산업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자본은 거대자본화 되었다. 건축은 이미지이자 이미지 소비재로서 취급 받기 시작하며 ‘명품 건축’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설계사무소 역시 거대화되었다. 미시성을 담보로 하는 일상성 논의는 무력화되고 다시 겉돌게 되었다. 그렇게 되다 보니 건축 생산 양식 자체가 일상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건축설계 종사자들의 일상(건축가로서의 주체)이 설계 과정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 결과물이 일상과 유리되지 않을 수 없다.

김상호  자본이 일상을 잠식하게 되면 지금 건축가들이 끌어낸 일상에 대한 본질적인 논의는 또 다시 겉돌거나 오도될 수 있습니다. 자본과 권력을 포함한 여러 위협들 속에서 건축가가 진정한 일상의 건축을 견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건축은 어쩔 수 없이 자본과 권력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걸까요?

김광수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긴장은 건축의 숙명이기도 하다. 건축은 순수한 분야가 아니다. 하지만 건축이 그렇게 끌려갈 수밖에 없는 건 아니다. 건축의 힘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한다. 건축의 힘이라는 것이 존재하기에 자본과 권력은 건축을 찾는다. 그리고 긴장이 존재한다. 건축은 삶을 규제하거나 제어하기도 하지만 삶을 환기시키기도 하고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며 자율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양자의 긴장 관계 속에서 어느 쪽을 이끌어 낼 것인지가 중요할 뿐이라고 본다.

사실 렘 콜하스나 자하 하디드로 대표되는 소위 68세대 끝자락의 건축가들이 해체주의를 통해 지향했던 것이 그런 것들이다. 어떻게 하면 사회적으로 침투하는 억압적 의미체계를 해체하고 스스로 자기 삶과 공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탈주의 선’을 만드느냐 하는 것이 그들의 큰 이슈였다. 그것을 주제로 사회 비판적인 토론을 통해 새로운 해체주의 건축의 언어들을 만들어갔고 ‘차이’를 큰 주제로 삼았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턴가 그들이 신자유주의의 첨병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혹은 그렇게 사회적으로 배치되었다는, 혹은 스스로를 방치하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젊은 시절 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건축 공간들이 만들어졌지만 그들이 의도했던 것이 그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느냐, 하는 의문도 생겼다. 오히려 그 공간들과 건축가들이 명품 소비재처럼 강한 아우라를 갖게 되면서 타자 욕망을 추동 하는 공간과 사람이 된 것은 아닌지, 물신화된 것 아닌지, 신격화된 것 아닌지 하는 의문이다. 그들에게는 자본과 권력이 발 벗고 찾아오게 하는 건축가의 힘이 물론 있다. 하지만 건축가의 힘과 건축의 힘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건축의 힘이 때로는 건축의 부정적 권력이 되기도 하는데 우리는 앞으로 이를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자본, 권력 그리고 건축은 그 규모에 상관없이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그 관계에서 건축가는 건축의 힘을 이끌어 냈는지 아니면 이끌려 갔는지가 중요하다. 그 다음으로 건축을 물신화한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사회가 건축의 힘을 어떻게 행사하는 지도 중요한 부분이지만 건축가가 그 힘을 어떻게 행사하는지도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김상호  그렇다면 일상의 건축에 대한 논의와 실천을 건강하게 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더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김광수  항상 어떤 모순이 있는 것 같다. 건축가들이 건강한 일상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작업을 했다 하더라도 실제 상황에서 작동할 때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의문해야 한다. 건축가가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궁극적으로는 극복될 수 없는 모순이면서 동시에 건축가의 영원한 숙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숙제이기에 항상 반문하고 극복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건축에 절대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과정 그리고 결과적인 면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 환경과 맥락 상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건축을 따로 놓고 평가하는 태도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갈수록 그러한 환경과 맥락을 건축가가 조절하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건축가는 더욱 건축물 자체에만 전념하게 된다. 이러한 선상에서 이상과 현실, 일상과 현실의 괴리는 더욱 커진다.

‘과정’의 중요성이 그래서 대두된다. 환경과 맥락을 건축가가 다루고 결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건축을 둘러싼 그 관계들이 반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이 건강하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건축과 건축 밖의 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과정의 디자인’과 ‘과정의 실천’이 중요해 지는 것이라고 본다. 이 과정은 건물이 구축된 이후에도 지속되는 그러한 과정이어야 하겠다.

김상호  건축의 일상성은 작은 규모에서 많이 논의되는 것 같습니다. 일상성은 작은 스케일이라야만 구현 가능한 것일까요?

김광수  일상성이 꼭 스케일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스케일이 커지면 자본과 권력의 체제가 강하게 작동한다. 때문에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행위를 들여다보면서 설계하기도 힘들어지고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그렇게 작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한다. 턴키 프로젝트 같은 데서 일상성에 주목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 다만 작은 건물들이 여러 개 모여 있는 환경에서는 설계자 및 사용자들의 자생성이 훨씬 더 살아난다. 비교적 개별 건물의 자치성이 있고 건물 간에 시간을 두고 촘촘하게 반응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근생 건물들이 그나마 일상성을 반영해온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큰 건물에는 통제 시스템이 작동한다. 근생 같이 작은 규모에서는 통제 시스템이 사소하다. 융통성이 ‘큰’, 하지만 ‘작은’ 건물 유형인 것이다. 들뢰즈 식으로 얘기하자면 작은데도 불구하고 대단히 “매끄러운 공간(smooth space)”이다. 덕분에 사람들이 공간 안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공간을 활용했다가 때가 되면 쉽게 나가고 또 새로운 프로그램이 들어오기도 한다. 그곳에서는 상황에 따라 진화하며 맥락과 반응하는 비교적 생명력 있는 일상적 풍경들이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작다고 해서 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 대부분의 소비재는 작아졌다. 뿐만 아니라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되기까지 했다. 이와 함께 통제 시스템도 대단히 촘촘해졌다. 앞서 말한 자본과 권력은 치열하게 일상을 잠식하고 있는데, 일상 공간을 잠식한다기 보다는 일상 시간을 잠식한다. 즉 크고 작은 것에 상관없이 무차별적이다. 지금은 큰 것이 큰 자본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 더욱 큰 자본을 산출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디자인이 화두가 되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쏟아져 나오는 디자인 상품들을 보고 디자이너는 마냥 반가울까? 자본과 권력은 일상을 잠식하기 위한 ‘차이를 가장한 동일성의 이미지 전략’과 ‘취향과 구별짓기를 위한 문화’를 필요로 한다. 작은 물건 그리고 건축으로 말하자면 작은 건축은 아마도 그 주요한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작지만 수많은 체인점들과 프랜차이즈 공간들, 브랜드 숍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신사동 가로수길의 급격한 변모 또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최근에 언론에서 조명했던 ‘결정장애’라는 질병이 있다. 너무나 많은 선택지가 생겨서 생긴 병이다. 너무나 많은 다름이 있어서 스스로 선택이나 결정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모르는 혹은 모르게 된다. 선택의 자유는 짐이 되었다. 그것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물신의 아우라가 가장 강력한 경우가 선택의 대상이 된다. 이 선택은 맹목적인 것인데, 말하자면 ‘지름신’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의 지름신은 대체로 큰 공간 보다는 작은 공간, 이를테면 인터넷을 보고 있는 자신의 방인 경우도 많다.

이와 같이 건축의 클라이언트든 재화의 소비자든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자신의 일상이 어떤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일상성이라는 것이 제대로 구현되고 자리 잡을 수 있다. 건축가 혹은 디자이너에게는 이를 진단할 능력도 필요하다. 클라이언트이든 건축가이든 이제는 ‘동질성’보다는 ‘다름’을 조심스럽게 경계해야 할 때이다. ‘큰 것’을 경계하기 보다는 ‘작은 것’, 즉 일상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대의명분에 의해서 일상이 소외되었다면, 현대 사회는 자신이 선택한 일상에 의해서 일상이 소외되기 때문이다.

일상성은 좋은 것이 아니라 최악일 수도 있고 최선일 수도 있다. 일상성은 지긋지긋한 것이기도 하고 생기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지긋지긋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행하는 생기 있는 일탈이 이내 지긋지긋함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현대 세계 대부분의 일상성이다. 일상성은 사실 조울증과 비슷한데 조울증보다는 차라리 우울증이 치료하기에 낫다고 정신과 의사들은 이야기한다. 지긋지긋한 일상성과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혹은 벗어나게 해주기 위한 탈주의 시도 혹은 디자인의 시도는 무척 조심스럽기만 하다.

인터뷰 1

분량6,071자 / 12분

발행일2013년 12월 21일

유형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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