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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으로서의 일상: ‘일상의 건축’ 담론에 대한 비판적 소고

송종열

우리는 왜 ‘일상’에 주목하는가?

우리가 ‘일상의 건축’ 혹은 ‘건축의 일상성’을 다루기에 앞서, 먼저 던져야 할 물음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터이다. 이런 질문은 ‘일상(성)’이란 용어가 다시 담론의 내부에 들어온 배경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하고, 동시에 “일상(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피해 갈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물음에 대한 사유가 첫 번째 물음 -우리는 왜 일상에 주목하는가?-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유인 즉, 두 번째 물음이 ‘일상’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배경과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고, 이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지금-여기’ 우리의 상황과 간접적으로나마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선, 첫 번째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이토록 ‘일상’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 번째, 근대 사회의 단위인 ‘일상’에 주목하는 이유는 ‘현재’라는 시간의 시간성을 강조하고, 일상이 언제나 ‘나름의 역사를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역사가 경험되고 변화하는 곳은 바로 ‘지금–여기(Jetztzeit)’이지, 개인이나 개인의 의식 내부에서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생생한 현실에 근거한 ‘현재’와 ‘일상’이 초월적이고 영원한 것에 호소하는 형이상학의 해로운(?) 영향을 일정 부분 상쇄하고 서사적 시간관을 대체하는 데 꼭 필요한 조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삶’이란 항상 현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그러한 삶은 ‘일상의 물질성’을 외면하고서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곳’의 ‘현재’는 한 시대의 성격과 근사성을 갖고 있다. 요컨대 현재가 갖는 의미는 역사적 시간의 ‘핵심적인 결정(結晶)’을 함유하고 있고 그 농축된 의미를 구현한다. 그러니까 현재는 필연성의 장이자 유연성의 장으로서 오늘 속에 농축되어 있고 ‘지금-시간’ 속에서 가시화되는 것이다. 그로써 ‘현재’와 ‘일상’은 시대의 성격을 드러내는 변함없는 ‘정치적 지표’로 기능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일상의 양면성이 가진 모순과 상보성 때문이다. 일상생활은 따분한 것, 판에 박힌 것, 압박, 수동성, 무의식적인 것이 식민화된 무대이고, 극사실과 잠재적 해방의 장소이기도 하다. 요컨대 동일한 사회적 공간 내에서도 ‘다양한 시간적 리듬들’이 공존하고 그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곳이 바로 ‘일상’이다. 또 일상을 규정하는 몇 가지 언급들을 살펴보면, 지극히 ‘평범한 것 속에 평범하지 않은 뭔가가 있는’ 일상의 양면성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한편으론 “지루한 세계가 경험의 세계를 한정짓고 모든 반성의 조건을 결정짓는다”는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의 말에서, 경험을 구조화하고 식민화하는 일상의 자잘한 것들에서 얻는 ‘총체성의 위안’을 엿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론 사회 질서의 유지를 확보하는 ‘기능주의적 사회학’ 개념과 닮은 앙리 르페브르(Henri Lefbvre)의 일상 개념에서, 마치 안전밸브와 같이 갈등의 폭발을 제어할 저항의 표면을 허용하는 공간으로서의 ‘일상’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일상의 양면성은 “일상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은 서로에 대해 흔적을 남기고 서로에 대해 기리며 서로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상쇄한다”는 르페브르의 말에 잘 녹아 있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눈앞에 있는 것(Vorhandenes)’, 바로 그 ‘세인(혹은 그들, das Man)의 세계’에서 실존을 궁구(窮究)할 수 있는 방식이 ‘일상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상에서 변형(Verformung)과 저항(Widerstand)의 힘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일상’에 주목하는 또다른 이유다.

우리는 가끔 일상(日常)이라는 말, 특히 ‘상(常)’이라는 표현에서 ‘공통의 추상적 운명’이 지닌 ‘지루한 세계’를 떠올리곤 한다. 이 ‘일상’이란 말에서 ‘재생산되는 리듬, 반복적인 일과, 획일성’이라는 부정적 함의를 떠올리는 것은 산업자본사회의 발달로 인해 현대인의 삶 곳곳에 파고든 ‘상품’의 압도적인 힘과 그로 인해 더욱 깊어진 ‘소외’라는 현대인의 심리상태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일상(성)의 개념’이 19세기 유럽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형성 과정에 대한 일종의 논평으로 발전되어 온 ‘근대성 담론’을 통해 공식화되고 유통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이 ‘객관세계’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일상은 항상 직접적이면서도 현재에 ‘영원성’이라는 감각을 부여하는 수많은 일과와 반복의 침전층으로 채워져 있다”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일상은 어떻게 비판성을 획득하는가?

앞의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상을 논하는 이유는 ‘일상’이 지닌 비판성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일상생활을 ‘비판적, 정치적 구성체’로 고려하는 것은 건축이 이러한 상업화, 소비의 패러다임에, 오늘날의 건축 행위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에 맞서라고 제안하는 것”이라고 한 스티븐 해리스(Steven Harris)의 주장은 지극히 타당하다. 말하자면, 산업자본주의 사회가 불러일으킨 병폐라고 할 수 있는 소외, 익명성, 억압적 체계 그리고 과도한 상업화/소비로 인한 문제(인식) 등이 역설적으로 ‘일상’에 비판성을 부여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대개 일상의 공간은 마가렛 크로포드(Margaret Crawford)가 말하듯 주의 깊게 계획되고, 공식적으로 지정되었으며 공용으로 충분히 활용된 공간과 대조를 이룬다. 말하자면 이 공간이 갖고 있는 특성은 익명적이다. 해리스의 말처럼 “연대를 알 수 없고, 대수롭지 않은 특성으로부터 기인하는”그런 익명성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익명성’이라는 말은 ‘비판적 발언’이 되는데, 말하자면 익명이란 말로 인해 익명적이지 않은, 이름을 갖춘 건축(Name Brand Architecture)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대개 개별적인 가치보다는 공동 가치에 이끌릴 뿐만 아니라 속박을 받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버내큘러적이고 전통적인 건설자들의 기계적인 과정들에 속한다. 후자는 이에 반해 개인의 창조적 정신이 더 많이 발현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런 분할이 염두에 두는 것은 다름 아닌 ‘상업화, 소비의 가능성’이다 (앞서 말했듯이 ‘일상’이란 개념이 등장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산업자본주의 사회 구조였다는 점을 상기해보라.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일상은 익명성이란 말이 잘 표현하고 있듯이 대문자 건축을 포함하는 특수화된 행위들의 범위 바깥에 놓여 있다. 그로써 일상은 표상이라는 전문적인 매개로도 아우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일상이 표상에 직접적으로 포섭되지 않는 이유는 그 의미들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형성되고, 일상생활의 소소한 대화에서만 공유되기 때문이다.

‘범주화하거나 표상할 수 없는’ 일상의 성격은 그로써 이론화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가 “일상의 실천은 현대성(Modernity)에 관한 조직적인 담론을 결여하고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상의 잠재성이 (이론과 같은 상부구조가 아닌) 의미의 하부영역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테면 앞서 잠깐 언급했듯 일상이 “극사실과 잠재적 해방의 장소”이지만 일상의 실천은 덜 억압적인 사회를 뒷받침하는 “일종의 다채롭고 조용한 절차들의 비축”이라는 측면에서 “창조적인 에너지가 새로운 창조물들을 대비해 저장되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론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일상’은 르페브르가 개진했던 ‘일상생활에 관한 비평’이 대표하는, 1930년대와 1970년대 사이에 전개되었던 프랑스 사유의 또 하나의 계통을 재고하라고 제안한다. 일상적인 것, 생생한 경험 그리고 정치적 투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노선의 사유가 구조주의 담론에 익숙해 있던 폭넓은 미국 청중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상황주의자들과 같은 운동권 사이에 주로 알려져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반이론화의 성격을 띤 일상의 경험과 실천이 갖는 나름의 비판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일상이 비판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자체의 ‘익명성’ 그리고 조직적인 담론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반이론적 성격’ 때문이다.

일상의 건축? 건축의 일상성?

우리가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서도 여전히 곤혹스러워하고 이 담론을 쉽게 풀어갈 수 없는 이유는 “일상이 무엇인지” 포착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심지어 건축계에서 일상 담론의 주된 텍스트로 삼는 르페브르의 경우에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 원인 중 일부는 고정적인 범주화와 그에 대한 변증법적인 접근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인식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은 아마도 “일상의 본성에,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는 표현일 것이다. 요컨대, 일상은 ‘철학의 대상’인 동시에 본질적으로 ‘철학적이지 않은’ 것이다. 일상의 모순적인 성격을 몇 가지만 풀어쓰자면 이렇다. “일상은 안정성과 불변성의 이미지를 전하지만 일시적이고 불확실한 것이다. 선적인 시간이라는 반복적인 시가행진의 통제를 받지만, 자연의 주기적 시간이라는 갱생을 통해 이를 보완한다.

따분하고 판에 박힌 일상은 참을 수 없는 무엇이지만, 때로 축제적이고 즐거운 것이다. 일상은 기술 지배적인(Technocratic) 합리주의와 자본주의의 통제를 받지만, 일상은 그것들에 가담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은 가장 끔찍한 억압의 경험들을 구현하지만 가장 강력한 변형의 잠재성들을 구현하기도 한다. 아무리 인간미가 없어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는 까닭에 인간적인 것을 드러낸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일상’이라는 용어가 때론 ‘그러한 바’가 아니라 ‘그러하지 않은 바’로서 더 잘 정의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일종의 타자(Other)라는 점이다. 이런 상황이 내포하는 문제점은 ‘일상’에 대한 모호한 규정이 ‘일상의 건축’에 대한 규정 역시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미덥지 않은 그리고 의혹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는’ “일상의 건축, 혹은 건축의 일상성”이라는 조어(助語)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건축은 생래적으로 보수적이다. 드물게 예외는 있지만, 건축가들은 부수기보다 짓는 것을, 단명하는 것보다 오래가는 것을 창조하기를, 질서를 파괴하기보다 질서를 강화하기를 더 좋아한다. 그러고 보면, ‘일상의 건축’은 아이러니하게도, 보수적인 성향을 띤 ‘건축’과 그 반대의 성격을 가진 ‘일상’이 조합을 이룬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상의 건축’이란 용어를 정확한 규정 없이 쓰거나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이러한 이유는 짐작건대 일상과 건축의 특성상 ‘구체성’이 공통 분모로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테면, 건축은 부득이하게 구체적일 수밖에 없고 그 구체성을 바탕으로 일상생활의 구조이자 무대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무의식에 강요하는 뭔가가 있다면 ‘건축을 통해 일상생활에 접근하는 작업’은 여러모로 ‘평범한 것’에 관한 이론이 심히 부족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이 경험되는 정확한 방식, 즉 각기 다른 양상을 띠는 삶과 풍경에 관계하는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측면들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건축의 물질성(Materiality)은, 이로써 일상생활이 지닌 특수성(Specificity)으로 이어진다. 이로 인해 ‘일상의 건축’ 담론에 참여하는 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물질문화의 쟁점’을 즉각 ‘일상의 문제’로 곡해한다는 점이다. 일상에 관한 이론을 곧바로 건축의 전문 분야(Bailiwick)에 주입한 르페브르도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일상의 삶은 자양물, 의복, 가구, 가정, 이웃, 환경 등에 관계한다. 괜찮다면 그것들을 물질문화라 해도 되지만 (이를) 일상의 쟁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이처럼 여전히 남아 있는 개념의 혼동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건축’은 생활의 물질적인 무대와 전문적인 디자인에 관한 더욱 협소해진 관심들에 관한 연구로 자리잡았다. 생각건대, 오늘날의 건축 역사, 이론과 실천적인 분야에서 ‘일상을 논의하는 일’은 소문자 건축과 대문자 건축의 교차점에 와 있는 듯하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성’이란 낱말에 대해 꼭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일상성(Alltäglichkeit)이란 개념은 르페브르가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고 혁명적인 변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무렵 읽었던 하이데거의 초기 작품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이데거의 ‘일상성’은 부정적인 함의를 갖고 있는데, 이 용어는 대개 ‘진정성이 결여된’ 현존재(Dasein) 혹은 인간 존재의 특징을 드러내는 말로 쓰였다. 이 단어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1927)에서도 ‘불안’과 ‘목적의 결여’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아마도 인간은 “죽음의 불안을 잊기 위해 일상성(日常性)에 몸을 던진다”라는 표현이 가장 극적인 예일 것이다. 사실 하이데거가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루시앙 골드망(Lucien Goldmann)에 따르면, 이 용어는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ács)가 1911년, 에세이 「비극의 형이상학(The Metaphysics of Tragedy)」에서 처음으로 제안한 것이었는데, “진정한 삶(Authentic Life)”과 대비되는, 따분하고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하찮은 삶(Trivial Life)”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었다. 용어의 이 같은 쓰임을 이해한다면 낱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따로 없이 무비판적으로 ‘건축의 일상성’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행태가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건축이냐? 혁명이냐?

한때, 르 코르뷔지에는 이러한 물음 ― “Architecture or Revolution?” ― 을 제기했다. 건축, 즉 ‘개량(Amelioration)’이 혁명, 곧 ‘재앙(Catastrophe)’을 방지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이 물음을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이후 건축이론가들이나 건축사가들이 오늘날 세계에서 고착되어가는 “일상의 소외와 억압은 오직 혁명과 변화를 통해서만 해결될 것”이라는 르페브르의 꾸준한 주장을 애써 무시해 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이면에 놓인 이유를 들자면, 우선 르페브르의 주장이 대문자 건축의 위계를 위태롭게 하는 데 있다. 즉, 그의 주장은 대문자 건축(Architecture)과 소외되지 않은 삶(Unalienated Life), 이 두 가지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 르페브르의 “일상생활을 토템이나 비망록(Aide Memoire) 같은 것으로도 붙잡을 수 없다”는 주장을 곰곰이 생각하면, 그들이 왜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그의 주장은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이후 대문자 건축이 견고하게 구축해온 위계와 권위를 흔드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밖에 건축의 맥락에서 볼 때 르페브르의 도전이 의미하는 바는 훨씬 더 도발적인데, 이는 이분법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흔히 말하듯 예술-건축은 비범한 것, 그러니까 적어도 일상생활을 상징적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뭔가 노력하는 행위다. 일상생활과 관련해서는 거기에는 대문자 건축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소문자 건축만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인간들이 만들고 생각해낸 총체적인 물질세계 혹은 문화 환경을 훨씬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수용하는 소문자 a를 가진 건축(architecture)을 말한다. 그런데 르페브르가 요구하는 것은 대문자 건축과 소문자 건축의 구분을 유지한 채, 소문자 a의 건축의 차원에서 일상생활을 바꾸는 변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는 오직 소문자 a의 건축만이 일상에 관여한다). 말하자면 비범한 것과 평범한 것 사이의 이분법적 구분을 근본적으로 없애라고 주문하는 것이었다. 이런 요구는 건축에서 일상을 고려하는 작업이 (소문자 a의 건축의 경계 내에서만 머물 것이 아니라, 그로써 경계를 강화하고 대문자 A의 건축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관료체제의 통제된 소비, 즉 후기자본주의 경제의 힘들과 그것들이 연루된 정부의 권위에 침투하고 저항하는 행위여야 한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또 그러한 저항은 일상적인 것, 반복적인 것 그리고 집요하게 평범한 것에 초점을 두는 방식을 취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르페브르의 입장에서 볼 때) 일상은 대문자 건축에 대한 비판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르페브르는 “혁명은 사람들이 더이상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때 일어나고 오직 그때만 일어나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그의 언명을 자칫 “일상의 끝에 혁명이 있다”는 말로 곡해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와 같은 곡해가 르페브르의 의도와 다르게 여전히 일상과 혁명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질적으로는 르페브르의 주장이 앞서 언급했듯이 마치 안전밸브와 같이 갈등의 폭발을 제어할 저항의 표면을 허용하는 공간으로서의 ‘일상’을 파악한 것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르페브르에게 일상은 “갈등의 폭발, 즉 혁명을 제어하기 위해” 저항의 표면으로 허용된 공간인 것이다. 요컨대 혁명이 꿈꾸는 바를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그로써 대문자적인 체계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삼을 수 있겠지만 결국, 종결적인 혁명이 아니라 건축이 문제다.

이와 같은 논지를 일정 부분 수용하더라도, 그의 주장에 논박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 테면 “이분법적인 구분을 근본적으로 폐지하라”는 르페브르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이 가능하리라 보는 것은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이라는 말이다. 요컨대, 대문자 건축과 소문자 건축의 구분을 폐지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 둘은 위태로운 긴장상태(Critical Tension)에 걸쳐 있는 것이 즉각 보이지는 않겠지만 각자의 기능을 역동적으로 수행할 동력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판단하는 이유를 세르토의 ‘전략과 전술(Strategy and Tactics)’의 개념을 빌어 설명하면 두 가지 정도로 들 수 있다.

우선 소문자 a의 건축, “영토화된 것으로 정의되고 정치적 의식성이 강화되면서도 새로운 문화의 힘들을 예상하고 조립하는” 건축은 현재의 상태(Status quo)에서 “영토적이고 정치에 관심이 없으며 보수적인 혹은 규범적인” 대문자 A의 건축을 검토하도록 한다는 차원에서 그렇다. 두 번째, 대문자 A의 건축은 소문자 a의 건축에 해당하는 것과 비교하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정립해 나갈 것이고, 그로써 소문자 a의 건축은 늘 잠재적으로 대문자 A의 건축에 해당하는 것에 도전하거나 잡종화한다는 차원에서 그러하다.

일상 담론의 한계와 새로운 출발점

이처럼 일상이 취하는 전략은, 그러니까 ‘경계와 범주를 흐릿하게 하는 것’은 일상을 정확히 규정하는 문제, 즉 “일상의 특성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어떤 과정을 통해 일상이 작동하고 작동되는가” 하는 문제를 다시 한번 소환한다. 이같은 지속적인 소환에 이 담론에 관여하고 개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상을 더 정확하게 규정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로써 이 주제를 다뤘던 저술가들의 대부분은 ‘일상’을 의도적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구분하지 않고 음성적인 영역에 내버려두었다. 이런 문제는 이론의 분야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예를 들어, 버나드 루도프스키(Bernard Rudofsky)의 『건축가 없는 건축(Architecture without Architects)』(1987)만 보더라도 이런 상황을 피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것이다. ‘일상의 건축’을 수행하는 작업은 일상을 기반으로, 대안적 미적 특징을 상세하게 기술함으로써 일상의 추상화를 피할 수 있지만, 이것은 결국 ‘건축적인 지식과 창조성을 똑같이 부인하는’ 일종의 이중의 덫(Binary Trap)에 갇힌 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지식 그것은 권력과 전문 지식의 억압적인 구조들과 결합되기 때문이고, 창조성 그것은 무비판적인 천재성과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일상’에 관한 사고는 건축적 사유를 새롭고 중요한 방향으로 떠밀었지만, 이들 방향들은 원래 이러한 이론이 가진 약점으로 인해 그리고 사상사에 의해 유도된 오독과 건축을 먼저 점유하는 것들에 의해 그 한계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일상에 관한 이론들은 오히려 환경을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으로 생각하는 건축적인 습관을 강화시켰다. 게다가 건축 저술가들은 일상생활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지난 30년간 건축 이론을 지배했던 이분법적 담론 모형에 끼워 맞추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우리가 ‘일상 혹은 일상의 건축’을 생각한다면, 다시 시작해야 할 곳도 바로 이곳이다.


송종열

건축평론가

비판으로서의 일상: ‘일상의 건축’ 담론에 대한 비판적 소고

분량10,268자 / 20분

발행일2013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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