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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자연적이었던 적이 없다

허성범


편집자 주: 이 글은 건축, 자연, 인공 환경 등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개념이 변화하는 양상을 다루고 있으며, 그 인식과 정의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합니다. 끊임없이 달라지는 의미를 쫓기 위한 적극적인 독해를 권장합니다.


1.1.

건축적사무소(architectural/practice)는 ‘건축적’(architectural)이라는 단어의 규준을 정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architectural practice는 영국에서 설계사무소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되는 단어지만, ‘건축적’이라는 단어는 건축적 조각, 건축적 영화와 같이 다른 예술 분야를 형용하기도 하는, 범용적인 동시에 입체적인 뜻을 지닌다. 건축에는 건축에 내재한 비례, 구성, 구축적 성질뿐만 아니라 역사, 철학, 환경 등 다양한 관점이 녹아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기적 특성으로 인해 건축은 스스로를 바꿀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건축적인 건축(architectural architecture)’은 자연과 문화가 통합된 이음새 없는1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이 가능할 것만 같은 ‘건축적’이라는 말에도 태생적으로 담을 수 없는 의미가 있다. 바로 ‘자연적’(natural)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나뭇가지 하나, 벽돌 한 장 놓는 순간 인공(人工)은 이미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건축적이란 표현에 ‘자연적’이란 뜻을 새기는 작업은 모순적이지만 동시대적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특히 ‘모든 것이 인공적’이라고 규정하는 인류세가 논의되는 현시점에 사라져가는 ‘자연’과 ‘자연적인’의 개념은 재정의될 여지가 있고, 이는 인공과 자연의 개념이 모호해지는 현상과 공명한다. “건축은 인공적이기만 할까? 자연은 자연적이기만 할까?”라는 의문은 이러한 지점에서 유효해진다. 

1.2.

이미 오래전, 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Phillippe Descola)는 아마존의 아추아르(Jivaro Achuar) 족을 연구하며 그들에겐 서구에서 통용되는 ‘자연’이라는 개념이 없음을 짚었다.2 아마존은 외부인에 의해 문화로부터 분리된 원시림으로 단정 지어졌지만, 그곳에서 평생 살아온 사람들은 그런 ‘순수한 자연’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마치 지금의 우리가 도시를 바라보듯이 그들도 아마존을 이미 주어진 환경으로 바라본 것이다. 동시에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自然)의 뜻에 의하면 인간이 설정한 ‘자연보호구역’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다. 오히려 광활한 면적을 자랑하지만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채3 작동하는 Tahoe Reno Industrial Center(TRIC)는 ‘자연적 공간’의 정의에 가깝다. 이처럼 현대의 자연이라는 개념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하고 있다.

1.3.

인공 환경(built environment)의 개념은 태초의 건축에서부터 최초의 도시 그리고 현대의 대도시 메트로폴리스로 확장되어 왔으며, 문화를 넘어 만연한 현상이 되었다. 이를 예견하는 도시화(urbanization)라는 용어는 일데폰스 세르다(Ildefons Cerdà)가 1867년에 발표한 『도시화 일반』(General Theory of Urbanization 1867)에서 유래되었다. 도시화는 곧 “사람, 사물, 모든 종류의 이해관계, 수천 가지의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진 소용돌이치는 바다”4라던 그의 예견은 지난 세기를 지나며 구체적인 사실로 드러났다. 시민의 집합체인 도시는 유한한 경계를 가진 영역으로 축소되었지만, 도시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인공 환경은 자연과 같은 공간 개념, 즉 ‘어떤 환경 한가운데’가 되었다. 도시의 바깥이 여전히 도시적인 풍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도시화는 앞으로도 지속될 현상이다. 이 순간 건축가의 역할에 제동이 걸린다. 과거의 방식대로 인공성만을 확장하는 건축은 현대 환경의 존재 양상을 구축하는 데에 기여하지 못하고, 이분법적인 인공/자연관에 머물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성’에 관한 재정의가 필요해진다. 따라서 오늘날 건축가는 자연적 공간(natural space)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되며, 표상적 체계에 머물던 도시와 자연이라는 공간적 이미지를 비표상 체계의 건축으로 재구축하기에 이른다. 이는 도시-건축-자연이 통합된 하나의 환경, 지속되는 전체(the continuous whole)로 나아가는 단초가 되며, 이 과정 속에 건축이 다시 한번 우리가 살아갈 환경을 적극적으로 규정해야 하는 당위가 생겨난다. 

2.1.

시대적 요구로서 이러한 전환의 첫 번째 근거는 ‘인류세(Anthropocene)’5이다. 인류세의 ‘시작점’을 정하기 위한 논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6 그런데 여기에 건축적 관점이 끼어들 여지가 생겼다. 이는 지난 2023년 발표된 지구과학 논문7 덕분이다. 1993년부터 2010년까지 지하수 남용에 의해 자전축이 80cm 바뀌었다는 이 연구 결과는 결국 인공 환경의 확장, 즉 도시화가 기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한다. 지역의 날씨와 미기후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피난처(Shelter)를 만들어야 했던 인류가 전 지구적 기후를 바꾸는 존재가 된 것이다. 기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재의 인식을 고려해 보았을 때, 건축과 도시, 인공 환경에 이러한 새로운 인식과 사실을 반영하여 새로운 상호주관적 질서에 의한 공간 개념으로 전환해야 한다. 

2.2.

이에 서울마루 공공개입 설계 공모에서 발표한 ‘산들바람이 부는 마루’(2023)는 역사와 문화가 강조된 도시를 위한 공공성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도시-건축-자연이 하나로 통합된 환경성의 공공 공간을 제안한 작업이다. 오랜 시간 도시에 쌓여온 시간을 드러내고자 했던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의 건축적 개념8을 연장하여 머지않은 미래에 적층될 환경성을 더한 것이다. 기후에 선재하는 공공성9은 환경에 놓인 모두를 동등한 상태에 놓이게 하며, 기후와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가진 건축은 동시대의 공공성을 정의할 능동적 객체로 작동할 권리를 되찾게 된다. 즉, 인간, 비인간 존재들이 연대할 수 있는 입체적인 환경을 위한 공공성이 기후라는 공동의 조건을 통해 작동하며, 이는 도시의 공원처럼 종속된 공간 개념이 아닌 열린 경계의 공공장소를 정의하는 중요한 논의의 기점이 된다.

대상지는 ‘서울마루’라 불리지만 광장에 가까운 빈 공간이라는 생각이 있었고, 이에 마루의 기후적 특성을 이식하기로 했다. 계수나무 열 그루를 심은 흙바닥과 남북을 가르는 흙벽의 개구부는 바람, 사람, 동물, 식물 모두가 드나드는 유동적인 경계가 되어 환경을 잇는다. 이처럼 인간중심주의의 건축관, 도시관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를 위한 환경관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비판적 사유 없이 무조건 수용하는 (서양) 건축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중 ‘원초적 오두막’(primitive hut)은 건축의 기원에 관한 것으로, 인간이 외부 환경, 즉 기후에 대응하기 위한 피난처로 건축을 시작했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인공과 자연의 개념이 뒤섞이는 현대성과 공명하지 못하며, 동시대의 인공 환경에 상응하기 위해서는 건축 단독의 역사만으론 부족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기후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건축이 탄생했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건축이 역으로 환경을 변화시키는 현상은 동시대의 건축과 자연의 관계를 다르게 해석할 가능성의 들판을 제공한다.

3.1.

변화하는 환경관의 두 번째 근거는 고고학적 발견에 기반한다. 2019년 영국 리버풀대 로런스 바햄 교수 연구팀은 잠비아 칼람보 폭포 근처에서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미닌의 47만 년 전 목구조 사용 흔적을 발견했고, 2023년 네이처지에 발표했다. 이 연구에서 쐐기, 스크류와 더불어 구조적으로 기능하는 맞춤 노치(notch)의 흔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렵 채집 시절, 인류가 유목민이었을 것이란 통념을 뒤집을 뿐 아니라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2011)에서 언급한 주요한 개념인 인지 혁명의 시점도 앞당겨지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의 협력이 필요했을 이 순간의 상호주관적 목표 의식은 ‘거친 환경으로부터의 피난처 건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47만년 전 호미닌들도 지능과 상상력, 기술을 사용해 이전에 본 적이 없고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만들고 더 편한 삶을 위해 주변 환경을 변화시켰다. 이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우리와 비슷했다”는 바햄 교수의 언급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것이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이후부터는 주어진 환경에 수동적으로 적응한 역사가 아니라 환경을 능동적으로 재조직한 인공의 역사로 바라봐야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이를 부정하며 자연의 초월성10을 믿는 근대적 자연관은 그린벨트, 공원과 같은 자연의 재현적 공간을 옹호하며, 다시 한번 도시에 갇히는 마비11 상태에 처한다. 또한 도시와 자연을 위한다는 윤리적 접근은 그 인공성으로 인해 공간의 당위성을 약하게 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도시에 종속된 자연적 공간은 작위적이게 되고, 우리는 자연에 둘러싸여 있다는 환상 혹은 착각 속에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논리적 결함을 벗어나기 위해 제안한 ‘원초적 정원’(primitive garden)은 현대 환경의 존재 양상을 지지하는 원형(archetype)이다. 그 기원이 오두막이 아니라 정원인 이유는 나무 위나 동굴과 같은 피난처에서 나온 인류가 처음으로 시도한 구축물이 울타리와 같은 기반 시설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Garden(정원)의 어원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에덴’으로, 이미 인공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인공인 현대의 환경관과 함께 동일한 비표상 체계 위에서 작동할 수 있다. 더불어 내외부의 구분이 모호하며 느슨한 경계를 가진 정원의 공간적 특질은 도시의 바깥이 여전히 같은 도시 환경인 현대의 공간적 성질과 공명한다.

 Caspar David Friedrich, Der Wanderer über dem Nebelmeer, 1818. 이 그림은 초월적 자연을 상징하지만, 실제로는 편집된 풍경이라 볼 수 있다. (주10) / 자료 제공: 허성범

3.2.

이러한 관점에서 ‘발코니는 새로운 정원’(2021)은 ‘자연적 정원’이라는 새로운 원형을 제시하여 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 선정된 작업이다. 주된 주거 유형이 아파트인 한국에서는 발코니가 정원과 같은 역할을 한다. 만약 이 공간이 통제할 수 없고, ‘자연발생’한 공간으로 바라볼 여지가 있다면 이것을 대도시의 ‘자연적 공간’으로 재정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특히 법이라는 인공적인 장치를 통해 자연적 특성이 생겼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1986-88년 개정된 건축법으로 인해 외벽으로부터 1.5m 이하의 발코니는 내부 면적에서 제외되었고, 건설사들은 이러한 이점을 살려 발코니 면적을 극대화한 아파트 평면을 개발했다. 이 공간은 84 제곱미터 형의 4베이 구성이 규격화된 이후, 자연발생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 해당 법이 재차 개정되어 내부 확장을 용인해 주자,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통제를 위한 법에서 비롯된 아이러니다. 

한국의 발코니 정원은 멀리서 보면 산처럼 집합체로 읽히지만, 가까이에서는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시스템에 따라 적응하며 변한다는 차원에서 자연의 특성을 품은 이 정원은 인공으로 구축된 자연적 공간이 실재하는 사례이다. 숫자로 명시되지 않은 대규모의 공간이 자율적으로 존재한다면 그 공간의 성격은 자연의 정의에 더 가깝다. 따라서 현대의 한국 정원은 명확한 스케일의 비표상 체계 위에 존재하면서도 환경에 상응하는 성질을 가지는 것이다. 이처럼 건축에 자연성을 산입할 수 있을 때, 건축과 인공 환경의 관계는 직서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비로소 도시와 자연이라는 공간의 경계는 열리고, 환경은 ‘지속되는 전체’로서 통합된 공간 개념으로 바뀌어 간다. 이처럼 ‘발견된 자연성’이 인공 환경의 새로운 스케일로 작동한다면 “한국인들은 비원을 예로 들어 자신들의 미의식이 가장 자연적이라고 생각한다”12고 꼬집은 오귀스탱 베르크(Augustin Berque)의 비판이 정확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1.

마지막으로 세 번째 근거는 도시와 자연이라는 기존의 공간 개념이 1.3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표상적 체계, 즉 시대에 따라 바뀌는 이미지 위에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상호주관적 질서가 부상함에 따라 인공 환경을 이루는 개념 또한 유동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는다. 역사적으로 기술의 발달은 이러한 유동성을 실재화하는 선행조건이 되곤 했는데, 기차와 비행기는 도시 간의 이동과 가까운 국가 간의 이동을 일일생활권으로 만들었고, 디지털 기술은 마치 모두가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는 듯한 환경을 제공한다. 현대의 기술이 정밀하게 발전할수록 시간의 이미지는 계속 압축되어 가고, 물리적인 시간차도 줄어들 날이 머지않았음을 느낀다.

2023년 4월 20일, 120미터의 크기로 역사상 가장 큰 우주선인 스타십(Starship)의 발사 실험이 있었다. 100톤을 실을 수 있다는 규모의 유용함보다 더욱 크게 다가온 것은 앞서 개발된 재사용 가능 발사체인 Falcon 9에 비해 5~7배 절감된 비용이었다. 이러한 기술의 발달로 곧 운송 시스템의 전 지구적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며, 시간의 이미지를 넘어 공간의 이미지도 바꿀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뉴욕과 서울 사이를 단 몇 분 내에 오갈 수 있다면 이는 단지 도시(urban)의 재정의에 그치지 않고, 교외(suburban), 전원(countryside), 자연(nature)에 관한 대대적인 재정의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알프스라는 선례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끔찍한 산’(Montes horribilis)이라는 악명은 1882년 고타드 철로(Gotthard Railway)가 생기기 전까지 알프스에 대한 대중적인 견해였다. 필요악으로 여겨지던 알프스를 넘는 일이 아름다운 자연 풍경으로 치환되며 공간의 이미지가 바뀌었다.13 교통수단의 발전이 여행의 민주화를 가져왔고, 여행자 혹은 탐험가(traveler)는 관광객(tourist)이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스타십 프로젝트는 다시 한번 알프스의 공간적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도시와 자연 사이의 간극이 줄어든다면 극화된 알프스의 스펙타클한 대자연 풍경과 대규모로 조직된 도시공원 사이의 위계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는 곧 여행의 민주화를 넘어 공간의 탈영토화에 다가서는 기반이 된다.

‘City as a garden'(은마아파트 재개발 계획안)

4.2.

이러한 관점에서 뚝섬 유휴 교각 경관개선 설계 공모에 제출한 ‘자연을 위한 원고’(2023)는 ‘공원’이 도시에 종속된 자연적 공간이라는 틀을 깨고 이를 ‘어떤 환경’(Umwelt)14으로 전환함으로써 공간 구조를 재편하는 제안이다. 중심부에 별도로 구획된 중정 공간은 나무를 위한 기반 시설로 습도를 조정하는 설비가 교각으로부터 나온 열주를 통해 연결되고, 개방형 루버로 구축된 벽체는 통과하는 공기의 양을 조절하도록 제안하였다. 이는 나무의 생장에 광합성과 영양공급이 아니라 자정 이후의 공기 중 습도가 더 주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가 구축 방식에 개입한 결과이다. 이 안팎의 경계는 탄화목으로 둘러싸여 낮에는 그늘을 제공하고, 밤에는 나무를 위한 어둠을 형성하여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풍경이 된다. 더불어 나무가 자생하여 이 공간의 스케일을 넘어서는 순간, 벽체는 옆으로 자리를 옮겨 재구축되는데, 계속해서 순환하는 이 과정은 도시도 자연도 아닌 중간 지대를 생성하며, 결과적으로 도시에 종속된 공간 개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호주관적 질서에 의한 환경으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그 범위를 한정할 수 없는 환경의 지위를 획득한 공원은 더 이상 자연의 재현이 아닌 순환하는 생태계이자 풍경으로서 도시와 자연 사이의 ‘어떤 환경 한가운데’의 위치로 재조정된다.

5.1.

자연을 뜻하는 네이처(Nature)의 라틴어 어원 natura는 ‘태어난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15 자연(自然)에 기원 설화를 지어준 셈이다. 이는 ‘자연 자체의 지성’이 자연의 질서를 만드는 존재이자 ‘정신’이 깃든 유기체로 본 고대 그리스의 자연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자연을 ‘신이 만든 작품‘으로 생각한 중세의 기계론적 자연관에서는 ‘신의 지성’이 그 동인으로 작동했음을 보여준다.16 국내에서도 여전히 “건축가는 자연 속에서 질서를 발견하는 자이며, 무엇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하나도 없다”17는 식으로 통용되고 있는 고정관념은 근대성으로부터 파생되는 표상적 자연관에 머물게 한다. 이러한 관점은 인공 환경이 그 바깥의 외부 환경, 즉 ‘순수한 자연’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는 자연/문화의 이원론을 전제로 하며, 인공 개념을 자연에 종속, 대립시켜 일방향의 단조로운 해석을 재생산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아마존의 아추아르 족은 아마존의 숲과 강줄기를 메트로폴리탄의 인공 환경과 같은 위계로 인식한다. 이는 근대인의 자연적 표상인 ‘원시 자연’이나 현대의 보편적인 자연관이 여전히 고정된 주체(subject)에 의해 객체화된(objectified) 관념적 구성에 지나지 않음을 뜻한다. 최초의 인공 환경이 그 바깥의 자연과 구분 지으며 정의되었으나 도시화가 만연한 현대의 인공 환경은 반대로 자연을 어디에 ‘남길지’를 결정18하기 때문에 이 ‘고정된 주체’는 자연과 인공의 관계에서 모순을 일으키며 위기를 자초한다. 

이러한 우리의 이중적인 언어는 모든 문화와 모든 자연을 매일 휘저으며,19 현대의 인공 환경에 잔존하는 자연성을 소거한다. 자연이라는 개념이 무한 증식하는 하이브리드 속에 파묻혀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을 구출하려는 시도는 극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고, 이는 형식적으로 동일한 자연 공간의 이미지를 반복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순수한 자연이 존재하는’ 표상의 공간적 이미지는 거대한 캐시(cache)20 데이터로 쌓여, 역설적으로 원본에 접근할 수 없는 장벽을 형성하게 된다. 

5.2.

이미지(image)의 어원인 라틴어 이마고(imago)가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밀랍으로 얼굴을 본떠 만든 초상(portrait)이었듯이 ‘자연의 죽음’ 앞에 남은 자들이 할 일은 존중을 담은 이마고를 씌워주는 것뿐이다. 그 이마고의 재료는 장벽을 우회(detour)하는 새로운 경로, 즉 “자연은 죽었다”는 사실이며, 제작자는 도시가 아닌 건축이 될 것이 자명하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이마고가 한 개로 충분할 리 없고, 자연이 사라지면 도시라는 개념 또한 지시할 대상을 잃은 채 진공 상태에 놓이며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공 환경을 정의하기 위해 홀로 남은 건축에 ‘자연성’을 산입해야 한다. ‘인공 환경 속 발견된 자연성’은 앞으로 건축이 구축할 이마고의 표면, 즉 새롭게 구축될 자연으로서 인공 환경의 외부에서 끌고 온 표상이 아니라 깊숙한 내부에서부터 은은하게 드러나는 표면의 형태로 포착될 것이다. 이는 자연과 인공 사이의 이음새 없는 환경이 시작하는 순간으로, 건축이 도시와 자연을 통합하며 ‘지속되는 전체’를 유기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하는 지점이 된다. 우리는 결코 자연적이었던 적이 없다. 그동안 우리의 환경을 인간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애써준 숭고한 자연(Nature)의 희생에 애도를 표한다.

Anisotropic Lexicon

허성범

한국, 영국, 스위스의 여러 환경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후, 2020년 architectural/practice를 설립하였다. 2024 자문밖아트레지던시 입주작가로 선정되었으며, 한양대학교 ERICA, 계원예술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architectural/practice는 ‘건축적’이라는 단어의 규준을 정의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분법적인 도시관을 벗어나 ‘지속되는 전체’를 만드는 대안적인 환경관을 전제로 새로운 공간 개념을 탐구하고 있다. architectural architecture (건축적인 건축)으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 2023 서울마루 공공개입 파이널리스트, 한국-스위스 수교 60주년 오픈콜 선정, 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오픈콜 선정 등 다수의 공공프로젝트를 완수하였다. @sungbumheo @architectural.practice

우리는 결코 자연적이었던 적이 없다

분량10,100자 / 20분 / 도판 16장

발행일2025년 2월 28일

유형에세이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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