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을 떠난 여행의 시작
정해욱
분량10,291자 / 20분 / 도판 8장
발행일2025년 2월 28일
유형강연록
오늘날 건축은 어디로 가는가
오늘날 건축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 건축은 어떻게 있는가
제가 좋아하는 세 가지 질문입니다. 너무나 크고, 쉽사리 답할 수 없죠. 하지만 요즘같이 생존이나 적응에 집중하는 시대에야말로 건축 분야 혹은 건축 기율(discipline)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번 호기롭게 던져보려 합니다. 세 질문을 다르게 말하면 ‘진짜 건축은 어디에 있는가’인 것 같아요. 리얼리티의 위기 속에서 건축이 어떻게 해야 오늘날 더 유효해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기도 하죠. 저는 건축 분야에서 다루는 주된 매체인 건물보다, 건축이라는 분야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태도에 좀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리는 ‘건축’은 ‘세우고 쌓다’라는 국어 사전적 의미보다는 서구에서 통용되는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한정해서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문화 현상으로서 건축
앞의 세 질문에 제가 처음으로 꺼냈던 답은 ‘가상’이었습니다. 4년 전, aapk라는 콜렉티브 활동의 일환으로 냈던 책 『가상-건축 Architecture as Fabulated Reality』는 국영문 제목이 의미를 주고받으면서 하나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책입니다. 요즘은 가상이 현실이 되는 시대, 모든 것이 제각각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시대라고 하는데, 만약 건축이 애초부터 가상이었고 꾸며낸(fabulated) 세계관이라면 가상적 활동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실체이자 분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실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토대로 시대적 변화와 건축의 본성을 엮어보려는 시도였어요.

“건물은 실용적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건설되지만, 종종 그 이상을 해내고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아키텍처’라 부르는 경향이 있다.”
“‘아키텍처’는 ‘좋은 건물’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좋든 나쁘든 어떤 건물의 문화적 측면이다.”
Andrew Ballantyne. Architecture: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저는 건축을 서구에서 유래한 독특한 문화적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건물이나 공간을 바탕으로 주로 조형적, 시각적인 생각을 쌓거나 건물, 공간에 생각을 주입하는 일련의 행위이고 그것이 축적되면서 생성된 하나의 세계관이자 서사라고 봅니다. 건축은 건물과는 다른 목적성을 가지는 메타적 존재로서 나중에 건물에 깃드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팔라디오의 빌라 로톤다를 보면 누가 봐도 강력한 질서를 건물에 욱여넣었죠. 보자르 체계에서 파르티 개념을 건물 입면에 구체화해 나가는 과정 또한 건물에 조형적인 충동을 입혀나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구에서 긴 시간 동안 건축에 어떤 양식을 구현하기 위해 애써왔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사실 양식이 왜 필요한지, 그것을 왜 추구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기능적인 이유보다는 ‘건물은 이렇게 생겨야 한다’는 고정관념으로 인해 그 양식을 계속 건물에서 외피로 끄집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구 건축 역사를 요약해보면, 조형적인 고정관념을 반복 재생산하고 변주하는 일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이는 건물을 잘 세우거나 건물의 기능이 나아지게 하는 일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그런 생각 때문에 알베르티가 건축 행위의 중심을 표상(representation)으로 옮길 수 있었다고 봅니다. 보여지는 건물 이면에 무형적인 동시에 조형적이고 시각적인 질서를 잡는 게 건축의 핵심이었던 거죠. 그래서 제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알베르티 건물에서의 질서는 건물이나 공간 경험보다 2D에서 더 잘 보인다는 사실이에요. 즉, 도면을 봐야 포착됩니다. 여기서 건물은 이 아이디어를 위한 컨테이너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모더니즘에 이르면,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건축을 무브먼트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들은 잡지에 글을 쓰고 전 세계를 다니면서 전시를 했어요. 건물을 짓는 기회는 이들이 유명해진 다음에야 전리품처럼 주어집니다. 이 무브먼트에서 중요한 것은 건물을 짓기 전에 건축의 증명이 끝났고, 그들의 건축이 무엇인지 대중에게 각인되었다는 겁니다. 무브먼트로서의 가상성은 종이 위의 가상성에 비해 한술 더 뜨는 것 같아요. 종이 위에서는 적어도 형상으로 존재했지만, 무브먼트쯤 되면 행위 자체가 건축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건축이 원래 가상적 이데아를 갖고 있는데, 그게 점점 더 무형화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에서도 건축 고유의 문화적인 습속이 유효하다고 봅니다. 데이비드 치퍼필드를 이 건물의 건축가라고 호명하는 그 자체가 건축의 메타적인 속성을 드러냅니다. 과연 그가 도면을 직접 그렸을까요? 아니면 면적을 계산하고 구조를 풀었을까요? 아니면 이 건물의 쾌적함을 위해서 MEP를 설계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지만 이 건물에 주입된 아이디어의 주인이므로 그를 이 건물의 건축가로 부릅니다. 결국 건축이란 건물의 메타적 이데아를 지정하여 주입하는 일을 의미하게 되는 거죠.
아모레퍼시픽 사옥 평면은 강력한 그리드 시스템 위에서 작동합니다. 치퍼필드에게 건축 아이디어는 그리드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가상적인 질서인데, 저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드를 살짝 비튼다면 건물 동선이나 기능이 나아질 수 있음에도 자신의 그리드를 끝까지 고수할 때,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거기에 건축의 태도이자 핵심이 있습니다. 건축이 독자적으로 추구하는, 자기만의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죠. 다만 물성을 가진 ‘진짜’가 되기 위해서 건축을 굳이 건물에 넣어본 게 아니었을까요?
건물과 건축적 아이디어 사이의 관계가 역전되는 상황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드로잉 ‘마이크로메가스’가 그의 다른 건물들에 비해 더욱 흥미롭고 살아있다고 느끼고, 그런 드로잉이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생명력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즉, 건축을 건물이 되는 과정의 일부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건축이 갖고 있는 순수한 가능성들을 어떻게 발현해야 될까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대상의 존재 방식
그런 한편, 오늘날 대상이 존재하는 방식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최근 리셀가가 상당히 높아진 조던은 신기 위한 신발이 아닙니다. 이게 왜 이렇게 비쌀까를 생각해 보면, 그 가치가 기능에 있는 게 아니라 이 신발이 만들어진 서사에 있어요. 서사는 곧 믿음의 문제입니다. 일종의 가상적 내러티브인 건데, 요즘은 설득이 되면 진짜가 되고, 가치가 생기고, 존재를 인정받습니다. 기능도 중요하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건축으로 바꿔 말하면, 지어진 것만으로는 더 이상 리얼리티가 확보되지 않는 것이죠. 게다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진보는 물리적인 경험 혹은 감각적인 경험마저도 설득력의 문제로 환원시켰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액정을 보면 터치스크린인 줄 알고 본능적으로 눌러본대요. 인터페이스를 터치했을 때 반응하면 그게 진짜로 받아들여지는 거죠. 최근 출시된 게임 엔진 ‘언리얼 엔진 5’의 트레일러 이미지를 보면, 현실에서 사물에 태양광이 난반사해서 형상과 양감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과 거의 흡사하게 가상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도 가정용 컴퓨터로 아주 손쉽게 말이죠. 이러한 상황에서 ‘진짜’란, 물리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진짜인 게 아니라, 가상이더라도 우리를 일관되게 설득하고 있으면 이게 진짜, 리얼리티인 것 같습니다. 건축계에도 일관된 콘셉트로 세상을 설득하려고 했던 선구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르 코르뷔지에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름을 바꾸기 전후의 작업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가 개명을 통해서 만들고자 했던 건 사람들에게 건축적 세계관, 컨셉, 리얼리티를 심는 것이었죠.

그런데 조던을 비롯한 여러 브랜드들이 허구의 서사로까지 실존 투쟁을 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기능만으로 차별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그럴싸한 것들, 심지어 기능에 문제가 없는 것이 많이 쏟아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냥 공급 과잉도 아니고 하이 퀄리티의 공급 과잉입니다. 건축도 범람하고 있습니다. 아크데일리를 비롯한 여러 미디어에서 잘 지어진 건축이 매일 새롭게 수십수백 개씩 쏟아져요. 스타 건축가의 사무소는 마치 공장처럼 전 세계 모든 도시에 건물을 뿌립니다. 퀄리티도 괜찮아요. 어떻게 보면 좋은 건물을 만드는 것은 패턴화되었고 매뉴얼을 따라가는 일 같기도 합니다. 좋은 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건축인들도 과잉 공급되고 있어요. 소셜미디어에서는 페이퍼 아키텍트들이 각축을 벌이고, AI는 그럴싸한 건물 이미지를 계속 만들고…. 이 과잉 공급의 끝에 저는 존재론적인 위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충동 족발 골목에 자칭 원조집의 족발이 맛있다면 진짜 원조는 자기 존재를 어떻게 증명하고 설득해야 되는가의 문제에 빠지지 않을까요? 저는 건물과 건축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가상이 실존한다면 그 실재는 더 위기를 맞게 될 것 같고요.
과거에는 물리적 스펙터클이 하나 나타나면 모두가 호들갑이었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은 서울에 롯데타워가 100개 생겨도 누구 하나 콧방귀도 끼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체의 생김새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에는 휴대폰을 어떤 모양으로 만들지가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중요한 과제였는데 스마트폰이 나오자마자 껍데기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모든 것이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대상의 실제, 리얼리티, 혹은 핵심이 물질이나 물량이나 그 생김새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죠. 대표적으로 2013년 iOS7이 업데이트됐을 때 모든 아이콘이 추상화, 축약화됐습니다. 스큐어모피즘1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이 자체를 진짜로 받아들일 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한편, 건축적 서브라임 아니면 스펙터클이 이제는 다 게임 속에 있는 것 같아요. 게임은 저마다 독자적인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고요. 게임을 두고 세대별 시각 차이가 있는데, 기성세대는 은연중에 게임이 현실로 연장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정작 게임 플레이어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예를 들어 GTA는 플레이어가 대도시의 범죄자가 되는 게임인데, 이 게임을 한다고 해서 서울이 GTA 속 산 안드레아스처럼 범죄도시가 되기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 게임은 게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게임에는 즐거움 외에 어떠한 목적도 없고, 그 자체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자극이자 영감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니어처는 또 다른 흥미로운 예시입니다. 비트라 뮤지엄에서 비트라가 만드는 의자를 미니어처 모형으로 출시한 걸 봤는데 실제 의자보다 더 매력 있어요. 어떤 의자는 디자인이 과감해서 직접 쓰기엔 부담스러운데, 그 모형을 보면 너무 갖고 싶은 거예요. 이런 경우를 건축에 대입하면, 표상이 지시하는 실제 건물보다 표상 그 자체가 더 매력 있는 거죠. 밀리터리 프라모델을 만드는 취미를 가진 분들이 많죠.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지만, 2차 대전에 나온 독일 탱크 같은 밀리터리 인공물은 시각적으로 매력적이거든요. 이런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는 게 아니라, 그저 그 대상의 에스테틱만 떼와서 그것만 즐기는 겁니다.
만약 이런 모형이 가짜라는 생각이 든다면, 뒤샹의 ‘샘’을 봅시다. ‘샘’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변기가 예술 작품의 지위를 획득했죠. 사람이 직접 조각했거나 그려내지 않았더라도 어떤 사물이, 공산품이 예술이 될 수 있다면, 개념만으로도 진짜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왜 건축이 건물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을까요? 건축 그 자체로 충분히 재밌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 자체로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즐길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건축은 진짜가 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요즘 건물 짓는 일은 환경을 오염시킬 수도 있고 공익적으로도 안 좋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단양을 여행하다가 남한강 특산품인 쏘가리의 거대한 조형물을 마주쳤습니다. 관념을 물질로 직역한 것이죠. 건물에 대한 아이디어를 꼭 건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비슷한 메커니즘일지도 몰라요. 벤추리의 오리가 주는 교훈을 좀 더 확장해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질로 뭔가를 직역해야 한다는 관념을 버리면 오히려 더 많은 가능성이 생긴다고요.
어떤 아이디어에 실질적인 쓸모를 바로 들이대는 건 옛날 일인 것 같아요. 학교에서 학생들이 현실성 없는 작업을 하면 교수님들이 이런 코멘트를 하기도 합니다. “너는 아직 학생이니까 이런 거 해도 돼.” 저는 그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요. 그런 작업을 평생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대신에 그 아이디어가 자율적으로 독립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 다른 컨테이너를 찾으면 된다고 봅니다. 굳이 건물이 아니더라도요. 그래서 저는 이 세 가지를 구별합니다.
- 건물을 짓는 일
- 건물을 디자인하는 일
- 건축
저는 이 셋이 각각 다른 전문 분야라고 인식합니다. 그리고 세 분야가 동등하며,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물을 짓는 일’은 말 그대로 실제 건물을 시공하는 일입니다. ‘건물을 디자인하는 일’에서 간혹 디자인이라는 말을 건물의 멋부림 또는 외형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디자인은 건물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모든 문제를 심미성을 기반으로, 엔지니어가 주목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섬세하게 해결해 나가는 전체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것과 제가 위에서 설명한 건축은 또 구별됩니다.
이렇게 셋을 분리해서 보면 제일 위태로운 게 건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이 셋 중에 ‘건축’만 쓸모가 없습니다. 저는 이 무쓸모에 어떻게 대응하고 포용해 나가는가가 이 시대의 건축적 과제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구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건물 디자인의 전문가는 건축과 협업해야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고, 건축을 하는 사람은 건물을 위해서 건물의 전문가와 협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세 가지 일을 한 사람이 다 아는 거 아니야?’, ‘건축은 그렇게 다 잘하는 분야라고 가르치는 것 같은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고도화된 현대 사회에서 그건 불가능한 일 같습니다.
저는 건축만의 역할을 찾을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이고 낭만적일 것 같습니다. 여러 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 건물의 실존을 강화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찐) 건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달리 말하면 리얼리티를 건물에 부여하거나 영혼을 부여하는 일이라 말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드데이가 생각하는 건축의 요체는 ‘건축적으로 지적인 영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Upperhouse-Oriented
『Upperhouse-Oriented』는 미드데이의 첫 번째 건축 프로젝트 결과물입니다. 어퍼하우스라는 공동 주거 프로젝트를 저희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책입니다. 저희는 건축이 설계자의 의도나 지어진 건축물 너머에 더 크게 잠재할 수 있고, 거기에서 영감을 끄집어내는 게 건축적 생명력이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기획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설계자의 의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미드데이가 구축하는 새로운 건축적 영감으로 채워집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이 건축물이 더욱 풍성하게 살아있도록 합니다. 건축 시장에는 이미 잘 지어진 집이나 멋진 디자인이 넘쳐나고 있어요. 물질을 통한 감동은 상향평준화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시장의 선두 주자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할까를 저희 나름대로 제안한 것이 이 프로젝트입니다.

이 책은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 장은 디자이너의 태도, 두 번째 장은 디자인 과정에서의 방법론, 세 번째 장은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장에서는 디자이너가 집에서 일어나는 여러 행위를 다양한 형상으로 고안하고 발현시킨 결과를 유형학적으로 파헤쳐 모두 펼쳐 보입니다. 화장실을 예로 들면 평면이 얼마나 다양한 지에서부터, 사사롭게는 물 쓰는 방식에 따라 바닥의 단차가 얼마나 다채롭게 구성되는지도 다이어그램으로 시각화합니다. 두 번째 장은 ‘공간이라는 객체’라는 타이틀로, 영역화된 공간이 객체로서 갖는 실제를 다양한 건축적 표상 장치를 통해 추적해 보는 내용입니다. 한편, 디자인이 어떻든 결국 여기는 사람이 사는 집이고 지루한 일상이 펼쳐지는 곳이죠. 그래서 세 번째 장은 그런 배경으로서의 집을 이야기합니다. 앞에는 이 집에 살고 있는 아이의 일기를 넣었어요. 동생과 싸우고 엄마에게 혼나는 내용인데, 건축 드로잉을 열심히 나열한 다음에 그 집에 사는 아이의 일기를 넣음으로써 ‘결국 사람 사는 건 다 이런 거야’라는 시퀀스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습니다.

대장경(부제: 편견의 집)
<도시 시도>에 출품한 ‘대장경’을 소개하면서 마무리 지어볼까 합니다. 이 작업은 저희가 ‘건축적’이라고 느끼는 권위를 포착하는 동시에 해체하는 시도입니다. 지금의 우리가 훌륭한 건축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어떻게 보면 주입된 고정관념의 집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AI로 만든 멋있는 건물을 업로드하는 계정이 많은데, 다시 생각해 보면 자기가 생각하는 ‘멋짐’을 재생산하는 일종의 노스텔지어와 같거든요. 거기엔 텍토닉도 없고, 장소성도 없고, 콘텍스트도 없고, 공간도 없으니까 시각적 특질만 가지고 AI가 생성해 주는 이미지를 골라내다 보면 결국 자기의 편견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죠. 저는 이런 현상에 부정적인 게 아니라, 순수한 시각적 특질 사이에서의 선택을 추동하는 그 편견 자체가 흥미로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주어진 건축적 재료가 아닐까요?
‘과연 누가 이 시대의 건축적 권위를 만들었을까?’를 고민하다 보니까 뉴욕 현대미술관(MoMA, 이하 모마)이 떠올랐습니다. 모마가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아카이빙하는 자료들을 전부 긁어모은 다음에 AI로 뒤섞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내용은 하나도 없는데 시각적 특질만으로도 아우라를 갖는 이미지가 1,000장 가까이 쏟아져요. 형태적 특질을 통해 시각적 편견만 공회전하는 겁니다.

드로잉뿐만 아니라 건물 이미지도 있어야 건축 같잖아요? 요즘 그런 건물 이미지는 다 인스타그램이나 핀터레스트 안에 있죠. 그래서 핀터레스트에 프리츠커 수상자 이름을 검색한 다음 검색 결과 화면 자체를 AI로 뒤섞어 버렸어요. 이건 각각의 건물이 아니라 이 건물들이 한꺼번에 나열돼서 풍겨내는 그럴싸함 그 자체인 거죠. 그리고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그런 편견을 가중하기 위해서 이 이미지 위에 저희가 썼던 텍스트를 교묘하게 병치했고요. 최종적으로 영상을 만들었는데, 건축스러운 이미지를 반복해서 보여주고 계속 바뀌어갑니다.

최종 결과물은 다소 직설적이지만 이 시대의 건축이 존재하는 방식을 은유하는 형태로 설치되었습니다. 건물이 자리해야 하는 기단부 위에 건물 대신 영상이 재생되는 스크린을 올려놓았습니다. 둘 사이의 대비를 위하여 기단부를 가장 고전적으로 만든 것이 작은 포인트입니다.
- 건물을 잘 짓기 위해서 건축은 충분하지 않다.
- 좋은 건축을 위해서 건물은 충분하지 않다.
저는 건물과 건축, 이 두 가지가 서로 불충분하다는 사실이 너무 흥미롭습니다. 근데 둘 사이의 간극과 미끄러짐이 역설적으로 저희가 앞으로 무궁무진한 일을 할 수 있는 놀이터가 되어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 건축을 탐색해 나가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원고화 및 편집 심미선
정해욱
미드데이의 공동 운영자로, 개념을 정의하고 구분하는 일과 형식과 내용 사이의 미끄러짐을 포착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인식과 사고의 틀을 갱신하여 시대에 호응하는 건축적 실천의 형식을 제시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드데이는 출판/저술/전시/실무 등을 넘나들며 ‘건물(building) 이전에 실존하는 건축(architecture)’, ‘건축 표피 이면의 질서와 에스테틱’에 대한 사고를 전개합니다. 두 권의 단행본 『가상-건축 Architecture as Fabulated Reality』(공동 저술)와 『Upperhouse-Oriented』를 출간하였으며, 다양한 매체를 통해 건축적 리얼리티가 확장되는 프로젝트를 지향합니다. @midday.lab @midday.official
건물을 떠난 여행의 시작
분량10,291자 / 20분 / 도판 8장
발행일2025년 2월 28일
유형강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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