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어진 것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건축이 아니다
이희준
분량6,755자 / 14분
발행일2025년 2월 28일
유형에세이
“진실성은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같은 스타일이다.”
닐 테넌트1
1. 거짓말
루이스 칸에게 건축은 진리의 탐구였다. 존 러스킨에게 건축은 쓸데없음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필립 존슨, 루이스 바라간, 프랭크 게리, 아르넨 야콥센에게 건축은 예술이었다. 리처드 로저스에게 건축은 과학, 예술, 수학, 공학, 기후, 자연, 정치, 경제 등을 모두 포함하는 분야였다. 반면 발터 그로피우스에게 건축은 공학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헤르만 헤르츠버거에게 건축은 사회적 연결을 가능케 하는 구조물이었고, 톰 메인에게 건축은 사회적 행위다. 한편, 애덤 카루소에게 건축은 문화적 실천이다.2 반대로 크리스티안 케레즈에게 건축은 기존 건축 문화와 무관한 것이다.3 존 헤이덕에게 건축은 영혼을 건드리는 것이었다(그러지 않으면 건물이었다). 미스 반 데어 로에에게 건축은 시대의 의지를 공간화한 것이었고, 알바로 시자에게 건축은 현실의 변형이다. 반대로 레온 크리에에게 건축은 짓지 않는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에게 건축은 매스를 빛 속에서 정확하고 웅장하게 결합하는, 학습해야 할 게임이었다. 마찬가지로 1960, 70년대 개념주의 건축가들에게 건축은 직능이 아니라 학습이었다. 오스카르 니에메예르에게 건축은 놀라움을 주는 것이었고, 알바 알토에게 (궁극적) 건축은 낙원이었으며, 크리스티앙 드 포잠박에게 건축은 좋은 생활을 위한 수단이다. 반대로 리처드 마이어에게 건축은 논란, 토론, 논쟁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나아가 베르나르 추미에게 건축은 한계가 왜곡되고 금지 규정이 위반되는 지점에 놓인 것, 심지어 어쩌면 거기서 살인을 저질러야만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4 데니스 스콧 브라운과 로버트 벤투리에게 건축은 오리, 혹은 장식된 헛간이다. 렘 콜하스에게 (동시대) 건축은 쓰레기 공간(Junkspace)이다. 한스 홀라인에게는 모든 것이 건축이었다.5
건축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건축가의 의견은 제각기 달라 어느 하나로 좁힐 수 없다. 건축가가 건축을 만드는 사람, 혹은 건축을 하는 사람이라면, ‘건축가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도 마찬가지로 다양할 것이다. 다만 이상의 건축가는 건축물, 도면, 콜라주, 사진, 회화, 조소, 시, 소설, 수필, 인터뷰, 강연, 편집, 서체, 패션, 영화, 교육, 작품 명칭, 사무실 명칭, 사무실 위치 등을 통해 건축과 관련된 의견을 전달했다. 요컨대 매체가 달랐을지언정 이들의 공통점은 ‘건축에 관한 의견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건축가는 의견, 즉 건축의 의도를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6 그런데 모든 건축물을 방문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종이나 스크린을 통한 건축 경험은 불가피하다.7 이런 상황에서 건축가는 건축의 의도를 건축물로 전달하거나 건축물 외 매체를 통해 출판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8 따라서 건축가에게 다음 질문은 중대하다. 어떻게 출판할 것인가?
모든 영화감독이 자기가 연출한 영화의 최종 편집권(Final Cut Privilege), 즉 대중에게 공개되는 영화의 최종 편집본(Final Cut)을 어떻게 편집할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것은 아니다. 감독이 최종 편집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비교하면, 전자의 영화가 감독의 의도대로 완성될 공산이 더 크다. 하지만 명망 있는 감독이거나 감독 본인의 자본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감독이 최종 편집권을 갖지 못하는 사례는 흔하다. 20세기 미국 영화 감독은 최종 편집권 부재 등으로 인해 자기 의도대로 완성하지 못한 작품이나 TV 방영, 기내 상영 등을 위해 감독 의사와 관계없이 편집된 작품에 본인 이름 대신 가상의 이름인 앨런 스미시(Alan Smithee)를 내세웠다. 관객은 앨런 스미시라는 이름을 통해 감독의 의도대로 완성된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를 구분하고 그 의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감독은 자기가 ‘감독’한 영화만을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다.
건축에서도 영화와 마찬가지로, 건축주가 전 과정에서 건축가를 ‘온전히’ 신뢰하거나 건축주와 건축가가 동일인인 경우를 제외하면 건축가가 ‘최종 편집권’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건축물은 최종 편집권의 유무와 무관하게, 건축가의 의도대로 지어지지 않을 수 있는 셀 수 없는 요인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진 등의 매체를 통해 지어진 모습을 가감 없이 출판한다면 다양한 이유로 종래에 실현될 수 없었던 건축가의 의도는 잊히거나 오해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건축가는 ‘어떻게 출판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다음 몇 가지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완공된 모습 그대로 출판한다. 혹은 영화감독이 앨런 스미시를 내세웠던 것처럼 다른 이름으로 출판한다. 혹은 아예 출판하지 않는다. 혹은 사진과 도면, 이미지를 본래 의도에 부합하도록 수정하여 출판한다.
이 중 마지막 방식, 다른 버전의 영화를 추가로 공개하기 어려운 영화 매체와 달리 건축에서는 가능한 이 방식을 통해 건축가는 건축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 이는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대응하는, 건축가의 가장 효과적인, 어쩌면 유일한 무기다. 누군가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지적한다면, 공간을 실제 모습보다 커 보이게 왜곡한 건축 사진뿐만 아니라 여느 건축 사진이 (그뿐만 아니라 모든 도면과 이미지가) 건축물의 일부분만을 담음으로써 거짓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거짓말이 드러나는 부분이야말로 건축가가 중요시하는 것, 의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해를 돕는다.9 이와 관련해 건축가가 취할 수 있는 건축 방식은 다음과 같다.
의도에 부합하는 부분만 사진에 담는다.10 혹은 사진에서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부분, 즉 건축 요소의 형태, 치수, 색과 재료, 조명의 색온도, 가구나 소품, 사람 등을 삭제·삽입하거나 수정한다.11 이를테면 기둥이나 창틀은 더 얇게, 혹은 두껍게 수정하고, 복도는 더 좁고 어둡게, 혹은 넓고 밝게 바꾸며, 스프링클러, 화재감지기, 시스템 에어컨, 환풍구, 의도하지 않은 가새와 조명, 스위치는 지운다. 도면에 묘사된 공간, 투시도 이미지에 묘사된 공간, 실제 지어진 공간은 모두 달라도 된다. 건축 의도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면 투시도 이미지에 묘사된 공간을 도면에서 찾을 수 없더라도 괜찮다. 지어진 건축물이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렌더링 이미지를 사진 대신 출판한다. 건축주에게 제공하는 자료, 공모전 출품 자료, 출판 자료는 모두 다르게 제작한다. 출판 이후에도 계속 다른 버전의 도면과 이미지를 제작·출판한다. 설계 시, 혹은 과거 출판 시 고려하지 않았지만 후에 떠오른, 의도에 부합하는 건축 요소를 이후 출판할 사진과 도면에 삽입하고 더 풍성한 독해를 불러일으키는 맥락을 글로 덧붙인다.
건축물의 수명은 유한하나, 도면과 사진, 이미지, 글로서의 건축은 영원하다.12
2. 건축은 영희에게만 중요하다
테이블 위에 무디어진 지우개를 쌓는 철수가 보인다. 쌓다가 이내 무너진다. 잠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른 순서로 다시 쌓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옆 테이블의 아이가 철수의 테이블을 건드려 무너졌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가진 지우개를 모두 쌓았다. 새로운 모습으로 쌓아보았다고 한다. 곧 철수는 필통에 지우개를 다시 넣고는 카페를 나섰다.
지우개가 뭉뚝한 정도, 그것을 가장 높게, 아름답게, 혹은 이전에 시도되지 않은 방식(이를테면 개미를 훈련하여)이나 배치로 쌓는 것은 철수에게나 중요한 일이다. 혹자는 왜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냐고 할 것이고, 정신 사납다고 할 것이다. 보통 사람은 지우개에 대해, 흑연이 잘 지워지는지, 지우개 똥이 많이 나오지 않는지, 너무 비싸지 않은지 정도가 궁금할 테고, 어쩌면 이마저도 신경 쓰지 않고 아무거나 쓸 것이다.
철수에게 지우개 쌓기가 중요한 딱 그만큼 영희에게 건축이 중요하다. 이 부분에 적용될 자재가 무엇인지, 이 틈의 폭은 왜 10mm가 아니라 5mm이어야 하는지, 왜 이 흰색이 아니라 저 흰색이어야 하는지, 왜 이 전구의 색온도는 3,000K가 아니라 4,000K여야 하는지, 왜 글을 쓰는지, 왜 학생을 이렇게 가르치는지, 왜 이것에 시간의 대부분을 쓰는지는 영희에게만 중요하다. 혹자는 무너지지 않고 에어컨이 잘 작동하고 창문의 단열 성능이 좋으며 물이 잘 나오면 됐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영희에게 그것은 건축이 아니다. 한편, 정민은 영희가 고민하는 이상의 것들이야말로 건축이 아니라고 한다.
영희는 틈의 치수와 흰색의 채도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지수를 만나 기뻤다. 하지만 지수는 틈은 10mm, 그리고 이 흰색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희는 골치가 아프다.
철수의 ‘지우개 쌓기’는 지우개가 흑연 자국을 지우는 역할에서 벗어나는 시점에 시작된다. 철수는 ‘왜 사람들은 지우개의 역할 탈피를 상상하지 못할까?’라고 생각하지만, 곧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만 쓸데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일 수 있다는 사실에 가닿는다. 지우개 쌓기가 사라진 삭막한 세상을 상상하지만, 사라져도 세상은 잘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 지우개 쌓기가 많은 사람이 즐기는 스포츠가 된 상황, 그리고 스포츠 스타가 된 자기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하지만 그런 미래가 오지 않아도 괜찮다. 철수는 지금도 지우개 쌓기가 충분히 즐겁기 때문이다.
3. 지어진 것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건축이 아니다
2020년 1월 30일, 사프디 형제는 로스앤젤레스의 한 식당에 카메라와 마이크를 설치한 후 애덤 샌들러를 불러 프로젝트에 관해 논의하자고 한다. 이 상황이 녹화되고 있는 줄 몰랐던 샌들러는 만남 중간에 대화가 녹음되고 있음을 깨닫고 화내며 식당을 나선다. 이내 그는 화가 풀린 듯 웃으며 자리로 돌아오고, 사프디 형제와 샌들러, 중간에 합류한 제이슨 베이트먼이 대화를 이어 나간다. 여기서 영상은 끝난다. 이 단편 영화 <질문과 답변>은 다음 질문의 답을 끝내 내리지 않는다.13 샌들러는 이 상황이 녹화되고 있음을 사전에 알았는가?
<거짓의 F>에서 오손 웰스가 직접 극 중 이야기가 허구임을 밝힌 것처럼 다큐드라마 영화는 대부분 영화가 픽션임을 극 서사에서 드러낸다.14 또 리얼 버라이어티의 ‘몰래카메라’는 그 대상이 몰래카메라가 진행된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질문과 답변>에서 이 부분은 공백으로 남아있다.15 메건 암람이 식당 점원을 연기했다는 사실도 위 질문의 답을 내리는 데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관객은 샌들러가 샌들러를 연기했는지, 혹은 연기한 것이 아닌지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관객은 이 상황이 녹화되고 있음을 알아채기 전까지의 그의 발언이 진짜 본인의 생각과 일치하는지 알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의 발언이 본심이었는지, 혹은 연기였는지 드러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본심은 늘 바뀔 수 있지 않은가?
건축가와 건축을 분리하여 이해(해야)하는 한 가지 이유가 여기 있다. 모든 건축가가 항상 본심을 말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 어떤 주장은 그가 말하고 싶은 상반된 두 이야기 중 하나일 수 있다. 더욱이 본심인지 여부는 해당 발언의 유효성과 무관하다. 이런 상황에서 건축가의 경험과 작품, 작품과 작품을 섣불리 연결 짓는 비평뿐만 아니라 건축가의 작품을 단일한, 혹은 몇 가지 키워드로 묶는 해석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논의를 확장하는 유효한 생각이라면, 그것이 본심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의견이고, 논의이며, 건축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탄소 배출이 적은 자재와 공법만을 적용해야 한다. 아니, 그것에 초점을 맞추면 건축에 다른 아이디어를 담는 것에 집중하기 어려우므로 꼭 그럴 필요는 없다. 건축물 안팎에서의 좋은 삶이 건축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아니, 그것은 건축의 수많은 가치 중 하나일 뿐이다.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렘 콜하스, 데니스 스콧 브라운, 로버트 벤투리, 세지마 가즈요 등 소수 건축가의 작품을 제외하면 새로웠던 건축은 없다. 아니, 기존 건축과 3%만 달라도 새로운 건축이다. 건축가는 활동 국가의 역사에 정통해야 한다. 아니, 국가 정체성과 건축이 조응해야 할 필요도, 특정 국가의 역사와 양식을 알 필요도 없다. 건축물 복원 중 소실 부분 교체 시, 혹은 증축 시 덧붙이는 부분은 기존 부분과 구별되어야 한다. 아니, 그것을 통해 새로운 생각을 제시할 수 있다면, 덧붙이는 부분에 기존 부분과 구분되지 않은 재료를 적용하여 어디가 교체·증축된 부분인지 모르도록 해도 된다. 건축 잡지가 비판을 포기하고 무겁지 않은 주제와 쉬 읽히는 문체의 글로만 채워지더라도 널리 읽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니, 비평하지 않는 건축 잡지는 그 역할을 상실한 것이다. 비평하지 않는 건축가는 건축가가 아니다. 아니, 많은 이가 좋다고 느끼는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이야말로 건축가다. 건축가의 경제적 생존에 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아니, 논단에서는 건축 자체에 관해 논의해야 한다. 건축은 건축주의 것이다. 아니, 건축은 건물주의 것이다. 아니, 건축은 사회의 것이며 건축주라는 단어는 수정되어야 한다. 아니, 건축은 건축가의 것이다. 모든 것은 건축이다. 아니, 지어진 것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건축이 아니다.
이희준
canon vision의 공동 대표로, 서울문화재단 본관 라운지,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초 인테리어 등을 설계했다. 『건축평단』의 책임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미로』, 『C3』, 『와이드AR』, 『건축평단』 등의 지면과 두 권의 단행본에 건축과 영화에 관한 글을 썼다. 한양대학교 ERICA 겸임교수를 거쳐 홍익대학교와 국민대학교, AA 비지팅 스쿨 서울에서 건축 설계를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건축학전공을 졸업하고 영국왕립예술학교에서 최우수 논문으로 건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hee.joon.lee @canon__vision
지어진 것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건축이 아니다
분량6,755자 / 14분
발행일2025년 2월 28일
유형에세이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모든 텍스트는 발췌, 인용, 참조, 링크 등 모든 방식으로 자유롭게 활용 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의 출처 및 저자(필자) 정보는 반드시 밝혀 표기해야 합니다.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이미지의 복제, 전송, 배포 등 모든 경우의 재사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