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문 1999, 2023
우대성
분량16,893자 / 34분 / 도판 21장
발행일2025년 1월 10일
유형좌담
천년의 문은 1999년 새천년준비위원회가 국가 상징 건축물 건립을 위해 열었던 설계공모의 당선작이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백지화되며 설계자였던 오퍼스건축이 설계용역비 지급 청구 소송을 이어간 끝에 2010년에 승소했고, 천년의 문 설계 원작자의 저작권도 법적으로 보전되었다. 그런데 최근 서울시가 서울링 계획을 발표하며 표절, 저작권 문제가 제기되었고, 서울시가 해명에 나섰지만, 사안은 아직 계류 중이다.
- 설계자 발표: 우대성 우연히,프로젝트 대표
- 저작권 의제 발표: 정상재 새건축사협의회 저작권위원장, 임형남 새건축사협의회 회장
천년의 문, 안녕하십니까
우대성 반갑다. 너무 오래되어 가물가물했고, 기억의 저편 속에 깊숙하게 묻어뒀었는데 혼탁하게 다시 끄집어 올려졌다. 어쩌면 오늘 포럼의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23년 전에 안녕하지 못했고, 그러다 중간에 완전한 안녕을 이야기했는데, 다시 안녕하십니까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됐고, 그것의 또 다른 바램은 또다시 안녕하기를 바라는 일이다. 어쨌든 이런 큰, 희한한 프로젝트들은 건축가의 의지와 상관없는 프로젝트들이기도 해서 이렇게 뜬금없이 소환되기도 하는 것 같다. 이 소환 자리에 다시 있다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지만, 이것도 건축가가 견뎌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저작권까지 연결된 문제이지만, 그 이야기보다는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아예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서 스스로도 이 프로젝트의 건축가로서 소환을 해보며, 프로젝트 자체에 대해서 그리고 11년 정도의 긴 소송에 대한 지루한 이야기와 성과를 나눠보고자 한다. 23년 전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아니라 지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소환해서 써먹을 수 있는 일 또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귀감이 될 수 있는 부분을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 소송 결과가 하나의 가치로 자리매김해 많은 사람에게 저런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내 케이스가 될 수도 있겠다는 것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포럼을 준비하며, 이것이 건축의 문제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건축의 문제는 굉장히 지엽적인 것 같다. 건축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태도에 대한 문제 또는 윤리에 대한 문제, 이 부분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모든 것이 결국에는 여기로 귀결될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2000년, 세계 최초의 200m 원형 건축물
우대성 천년의 문의 애칭이 서울링이었다. 당시에 굉장히 에너지를 많이 써서, 경상도식 표현으로 하면 ‘쎄빠지게’ 프로젝트를 했다. 쎄빠지게 프로젝트 했던 이야기, 그때 얻었던 엔지니어링적인 성과 그리고 23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 돌아볼 지점도 같이 이야기해 보겠다.
당시에 만든 투시도다. 왼쪽에 있는 스티커는 빛바래있지만, 당시에 열심히 차에 붙이고 다니며 홍보하고 다녔던 이름, 서울링이다. 저 그래픽 디자인은 전은호 디자이너께서 당시에 만들어줘서 사용했던 것이었다. 천년의 문이 무엇이었는지, 당시에 만들어 놓은 영상을 보고 이어가겠다. 지금 보면 굉장히 허접해 보이는 영상이지만, 23년 전에는 당시 가격으로 2천만 원을 들여서 만든 대통령 보고용 영상이다. 대통령에게 보여주지는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공모를 통해 공식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월드컵 경기장이 지어지고 있던 근방이 프로젝트가 지어질 곳이었다. 주변엔 95m짜리 쓰레기 산이 조성돼 있었고, 멀리 나인 홀 골프장도 만들어져 있었다. 설계는 세 가지 단순한 키워드(완벽한 원, 슈퍼 스케일, 단순성)를 가지고 진행했다. 설계 공모에서는 당연히 구조 설계와 구조 검토까지 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2000년이었고, 200m라는 상징성 때문에 우리가 당선됐다. 신문 1면에 실리고 해외에 알려지며 기쁜 나날이 잠시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디자인 조형이 아닌 200m의 직경을 가진 비어있는 원형의 세계 최초 건축물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다른 나라에 있는 조형물들처럼 도시를 상징하는 대상으로서 우리나라의 대표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월드컵도 있어 시기적인 부분도 맞았고, 평화 통일에 대한 의미도 있었다.
설계안에는 곤돌라가 꽤 많이 있었다. 하부에는 전시관이 있고,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서 전망대로 가는, 두 가지 기능이 있는 구조였다. 설계 지침에 공사비는 300억 원이라고 나와 있었다. 우리가 제시할 때는 밑의 전시관이 300억 원 정도로 가능하고, 위의 원형 건축물은 지침의 내용보다 비용이 더 들고 밑의 상가를 분양해서 재원을 조달하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 조건으로 당선했고, 계약도 그대로 했다.
프로젝트 체계
우대성 정부에서 진행한 프로젝트지만 실제로는 문화관광부가 사업 추진의 실질적인 역할을 했고, 당연히 그 뒤에 정부도 있었다. 서울시는 땅을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 정부에서 100% 출자해 재단법인 천년의 문을 만들어 그 재단과 계약을 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런데, 실제 프로젝트의 결정 주체는 청와대, 문화부, 서울시, 월드컵조직위원회, 새천년준비위원회, 재단법인천년의문이 공동으로 만든 6인 위원회였다. 실제 세부적인 내용은 재단에서 정하고, 정책적인 방향은 6인 위원회에서 조율해서 정하는 방식으로 눈에 보이진 않지만,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

세계 최초의 어려움
우대성 세계 최초라고 하는 것의 어려움은 우리의 예상을 심하게 뛰어넘었다. 첫 번째는 구조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 발생했다.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국내에서 가능한 엔지니어링이 거의 없었다. 세계에서 제일 잘한다는 오브 아럽(Ove Arup & Partners, 현 ARUP), 독일의 슐라이베르그만, 와이드링거(Weidlinger), 일본의 미쓰비시 중공업이 어떻게 알았는지 자기들이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다 찾아왔다. 다음은 캡슐 곤돌라 시스템도 특수하게 생겨서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다. 당시 런던아이가 막 개장했을 때라 그 시스템과 비슷하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해 런던아이 곤돌라를 만든 프랑스 회사 포마(POMA)와 계약했다. 지금은 흔해졌지만, 프로젝트의 껍질인 파사드 엔지니어링 부분도 해결이 거의 불가능했다. 이를 위해 독일 회사 슈미들린과 계약해서 해결했다. 이외에도 풍동실험 하는 곳이 지금은 국내에 몇 군데 있는데, 당시에는 전혀 없어서 캐나다의 RWDI에서 진행했다.

지금은 인터넷이 굉장히 활성화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수단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메일을 보내고, DHL로 뭔가를 보내며, 해외에 있는 회사들과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아침 6시에 출근, 새벽 3시 퇴근을 1년 내내 했다. 그렇게 움직여야 그들의 시간에 맞춰서 이메일을 보내고, 회신 받을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경우 엔지니어링을 하는 데 오류나 실수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국가계약법에는 그에 관한 허용이 없다. 프랑스 퐁피두 센터는 뭔가 잘못 만들어도 대통령이 시간을 벌어주는데, 우리나라에서 실수는 오류고 계약 위반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최초이건 무엇이건 실패할 수 없었다. 사실 런던 아이도 실패했다. 처음에 미쓰비시 중공업이 했는데 실패하고, 계약 방식이 디자인과 시공을 동시에 하는 디자인 빌드 방식으로 바뀌며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런 시스템이 있었다면 세계적인 건축물이나 어떤 최초의 시도를 할 수 있는 해법이 되었을 텐데, 국내의 조달 시스템 계약 방식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탓할 순 없으니 어떻게든 진행했다.
원의 단면
우대성 높은 건물들은 바람에 대한 영향이 대단히 크다. 바람 중에서도 볼텍 셰딩(Vortex shedding)이라는 와류가 있다. 바람이 앞에서 불면 그 바람이 뒤에서 끌어당기는 와류가 되는데, 그것 때문에 건물이 뒤틀리면서 많이 움직이게 된다. 건물 제일 꼭대기에 전망대가 있기 때문에 바람을 견디고 건물이 설 수 있는지를 넘어서 거주 안정성, 움직임을 제어해서 사람이 잘 머물 수 있는 수준까지 컨트롤해야 했다. 또 비용이 무한정 있지 않기 때문에 가장 큰 비용이 드는 구조 파트에서 비용을 적절하게 들여야 했다. 그래서 철골 톤 수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가 등 여러 가지 변수를 함께 해결해야 했다.
처음 설계안에서 원의 단면은 사다리꼴이었다. 상부 2개 층에 전망대가 있고 캡슐이 도는 방식이었는데, 흔들림이 너무 많아서 어려웠다. 처음 공모전 당시엔 링의 하부에 교각이 있었고 그것이 하부를 좌우에서 지지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저 교각만 가격이 100억 원 정도가 나왔고 올림픽 대교를 넘어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이 부분은 초기에 제거됐다. 그러다 보니 구조적인 안정성의 큰 부분이 사라지기도 했다.

구조 설계는 처음엔 홍콩의 오버에이럽에서 하려다가 잘 안 돼서 런던 본사로 옮겼다. 구조설계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런던에서 프로젝트에 대해 우리에게 보고하는 회의가 있었다. 전문 통역사를 두고 나는 옆에 앉아서 설명을 들었다. 구조 엔지니어는 프로젝트의 구조 ‘리스크(risk)’를 계속 언급했다. 회의 내용대신, 도대체 몇 번이나 리스크를 말하는지 세어봤는데, 54번이었다. 그래서 직격탄으로 예스(yes) 또는 노(no)로 대답해라, 구조적으로 되냐 안 되냐고 물었더니 ‘노(no)’가 바로 나왔다. 그래서 다시 엔지니어를 찾으러 다녔다. 시애틀의 SWMB사와 미국 LA의 오버에이럽 지사를 찾았다. LA의 지사장은 킹 리 창(King Le Chang)이라는 중국 사람이었는데, 국내에서 HDC현대산업개발과 복잡한 프로젝트들을 몇 번 해서 국내 실정을 아는 분이었다. 두 군데 모두 솔루션을 제시했다. 해법도 이미 찾아놨더라. SWMB는 바깥의 철골 박스 안에 콘크리트를 채우는 복합구조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당시에 그러한 복합구조 건물에 대한 국내 기준이 없었다. 그래서 선택할 수 없었고, 오버에이럽 LA 지사의 킹 리 창이 제시한 여러 솔루션 중 하나의 방법을 택했다.

그 방법으로 가기 전에 여러 과정이 있었다. 원래 사다리꼴이던 단면을 타원으로 했다가 규모를 150m로 줄이기도 했다가, 박스형 단면에 구멍을 뚫어봤다가, 바람이 문제가 되니 외장재에 구멍을 뚫어서 만들기도 했다. 결국 원래 당선됐었던 첫 번째 아이디어, 200m와 단순한 원의 심플함 두 가지는 그대로 지키는 해법을 찾아냈다.
그 과정에서 RWDI와 함께 풍동실험을 했는데, 바람 데이터를 보면서 슬펐다. 우리나라의 바람 데이터가 없었다. 풍동 실험을 할 때는 100년 또는 200년 만에 한 번 정도 올 수 있는 바람을 가정하고 실험하는데, 천년의 문을 진행할 때는 100년 주기 바람에 대비한 조건을 만족하도록 했다.
해법으로 다이아몬드 형태의 단면이 나왔다. 당시에는 지금은 쓰지 않는 폼-지(FORM-Z)라는 프로그램을 썼다. 그걸로 만들어서 평면을 뽑아보니 찌그러진 평면이 나오더라.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부분과 좀 달랐다. 링은 정면에서 보면 완전한 원인데, 측면은 똑같이 올라가지 않는다. 하부의 폭은 27m 정도고, 상부로 갈수록 폭이 좁아진다. 하부에 회색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구조가 지탱하고 있다.
이외의 구체적인 엔지니어링 이슈들
우대성 움직이는 곤돌라는 비용의 문제와 유리의 바람 저항 문제 등으로 후에 개수가 줄어든다. 동그라미, 타원, 외장재에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시도하며 골프공에 왜 딤플이 있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바람 저항을 줄이려면 저런 불규칙한 딤플들을 만들어 와류를 없애 주어야 한다.
캡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마에 가서 다행이었다. 이전까지는 곤돌라 캡슐이 위에서 매달려 있는 형태였다.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면 지지점을 잡으면서 시선을 가리게 된다. 포마는 이를 해결하는 특별한 방식의 특허를 개발해 가지고 있었다. 이를 적용한 런던아이의 곤돌라는 전체를 싸고 있는 형태로 올라가면서 수평이 유지된다. 런던아이에서는 전체 휠이 움직이는 방식으로 초속 0.25m/s로 천천히 움직이며 서지 않고 사람이 타고 내린다. 천년의 문에서는 그 기술에 더해 캡슐이 스스로 올라가는 방식을 사용했고, 멈춘 상태에서 사람이 타고 내린다. 캡슐은 올라갔다가, 올라온 방향으로 다시 내려간다. 원을 양쪽이 모두 오르내리는 경로가 되는 방식이다. 이 방식으로 결정하기 위해 당시 검토할 수 있는 모든 캡슐의 운행 방식, 속도, 시간당 운동 횟수 등을 분석하고 비교했다.

외장에 대해서도 국내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테크니컬하고 복잡한 방식을 거쳤다. 또 어떻게 세울 것인가, 어떻게 설치하느냐도 굉장히 어렵고 중요한 지점이었다. 런던아이의 경우 원래 150m 규모를 세울 예정이었다. 원래 설치 방식과 다르게, 템즈강에 눕힌 후 한 번에 세우다 보니 크기가 150m에서 135m로 줄었다. 엔지니어링 적인 측면과 조립하는 동안 배가 오가야 하는 크기를 고려한 맥시멈 크기가 그 정도였다. 그렇게 테크니컬한 부분과 현실적인 부분이 합쳐져 마지막에 설계가 나오고 이후 시공이 된다. 천년의 문은 디자인도 있겠지만 디자인 이외에 설계라는 또다른 가치, 엔지니어링 기술이 검증되었다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프로젝트 중단과 건축계의 여론
우대성 이렇게 엔지니어링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날 갑자기 언론에 ‘건립 중단 발표문’이 떴다. 2001년 3월 28에 기사가 올라왔는데, 이 기사가 뜨기 직전에 월드컵 대교 공모가 올라왔다. 토목 구조물인데 처음으로 디자이너와 협업할 것이라는 공모 조건이 있었다. 이에 토목회사들이 같이 하자고 찾아왔는데, 우리는 천년의 문을 백지화하던 도중이라 함께할 수 없었다. 2000년에 계약은 했지만 딱 1년 지난 시점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이 프로젝트가 중단된 표면적인 이유는 시의성이 사라졌고, 월드컵 경기 이전에 완성되지 못하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시민단체에서 반대한다는 것도 있었다.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이 많았고 건축계에서도 서명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
프로젝트 중단을 발표하기 전에 문화부는 국가가 출자해 재단법인을 만들었으니, 그 돈을 먼저 회수했다. 그리고 계약 주체도 아닌 문화관광부에서 사업중단을 발표했다. 실제 움직임은 국가 차원이었던 거다. 그렇게 해산 결의를 한 후, 우리에게 용역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우리는 돈을 달라고 서류도 챙겨 보냈다. 그들은 정산을 하지 않겠다며 우리가 보낸 설계 도면 전체를 사무실 앞에 버리고 가기도 했다. 당시 문화관광부의 김한길 장관은 그냥 줄 순 없고 법원에서 판단을 내리면 정산하겠다고 했다.

우리가 열심히 쫓아다녀 건축단체에서는 후속 조치를 잘해달라는 말랑말랑한 입장문 하나를 발표했다. 이후에는 다른 입장문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백지화되었을 때 서현 교수는 건축가가 받는 초라한 대접에 관한 이야기를 신문에 실었고, C3에서는 ‘우리에게 건축계는 있는가 – 부서진 천년의 문… 왜 건축계는 말이 없나’를 주제로 좌담을 마련하기도 했다. 좌담 내용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우리들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할 뚜렷한 지점을 발견할 수 없다”1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 생겼을 때 우리가 그 사안을 실제로 들여다보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데, 토론은 하지만 특별히 책임지거나 그럴만한 목소리는 절대 내지 않겠다는 태도로 일관되어 있었다.
23년이 지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새건사협의회에서 큰 지지를 해주었다. 지지라기보다는 내려고 했던 목소리를 정확하게 냈다고 생각한다. 20년 전에는 이런 목소리들이 없었다. 근데 이것을 우리(건축계) 빼고 모두가 안다. 그래서 다른 데서 건축계를 이렇게 다룬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가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분쟁과 소송
우대성 분쟁은 갈등이 있다는 의미지만, 소송 전 단계에서 해결되면 가장 좋다. 그게 안 되면 결국 소송 과정을 거치게 된다. 돈을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소송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 해외의 세계적인 엔지니어들과 협업했는데, 그들은 돈을 지급하지 않으면 진행하지 않는다. 집을 담보 잡아가며, 다른 곳에서 돈을 빌려 가며 저만큼이나 한 거였다.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소송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그때 많은 사람, 어른들, 큰 사무실들을 찾아다니며 조언도 얻었다. 선례가 한 건도 없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슬픈 조언이 있다. ‘칼로 푹 찌르면 윽하고 죽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는 꽤 연로한 분들의 말이었다. 어쩌면 나에게는 그 상처가 더 컸던 것 같다.
오래 안 걸릴 줄 알았다. 한 3년 정도 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소송은 2단계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계약했던 재단법인 천년의 문을 상대로 설계비를 달라고 한 소송이 3심까지 가서 6년 반이 걸렸다. 대한민국이 3심제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5심을 했다. 대법원에 가서 파기환송을 했는데, 고등법원이 대법원의 파기환송 한 부분에 대해 불만이 많아 다시 거꾸로 보내는 일이 있었다. 설계는 공사비 300억 원을 기준으로 했는데, 나중에 공사비가 올랐다. 이에 대해 인정하는 판결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돈이 너무 커지니까 이걸 다 인정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깎아서 다시 올렸다. 결국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아서 이겼다.
그 이후엔 재단법인은 돈이 없으니, 국가를 상대로 돈을 받으라고 했다. 우리에게 지급됐던 건 보조금이었는데, 보조금을 지급한 프로젝트가 일이 생겨 중단되면 돈을 줘야 한다고 법령에도 쓰여 있다. 돈을 받기 위해서 기재부에도 가고, 국민권익위원회에도 갔다. 국민권익위원회에서도 돈을 지급하라고 했는데도 문화부에서 돈을 못 주겠다고 했다. 버틸 수 있으니까 주지 않은 거다. 그래서 그다음 단계로 어쩔 수 없이 문화부를 상대로 소송을 다시 시작했고, 이겼다. 이렇게 몇 년 더 걸렸다.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소송의 결과
우대성 2010년 6월 23일 자의 확정증명 문서 한 장 받는데, 2001년 3월부터 10년 8개월이 걸린 거다. 어쨌건 소송은 이겼다. 이겼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사실이긴 하다. 소송을 진행할 때는 당연히 일을 했으니, 건축가의 권리로서 돈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런데 건축가의 권리에 대한 판례를 남기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돈에 대한 것도 있지만 우리가 일을 했고 그것에 대한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공포 받고, 판례로 남기는 일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유효한 것이다. 우리가 했던 계약은 국가계약법에 의한 것으로, 이 소송에서 나온 성과는 굉장히 중요하고 건축계 모두가 지금도 쓸 수 있는 판례다.

소송을 하면서 많이 배웠다. 많은 변호사를 찾아다녔는데, 건축설계 관련 변호사는 없었다. 돈이 되지 않는다. 설계비가 얼마 되지 않고. 내용도 너무 복잡하다. 그래서 전문변호사가 없었고 사례도 없었다. 그 10년 동안 건축 허가받으러 관공서 간 일이 몇 번 없었다. 그보다는 법원, 국회, 기재부, 국민권익위원회 등에 억울함을 풀러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건축과 법 그 사이의 관계들을 어쩔 수 없이 알게 됐다. 다행이었던 것은 우리가 해외 회사와 계약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계약에 대한 기록을 철저하게 많이 했다는 점이었다. 모든 기록은 증거로 입증되기 때문에, 소송에 큰 도움이 됐다.
다시 소환된 천년의 문
우대성 그렇게 잠잠하게 사그라들고 있다가 2012년에 중국에 Ring of Life라는 건물이 세워졌다고 지인으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왔다. 157m 규모로 천년의 문과 비슷한 디자인이라 깜짝 놀랐다. 그래서 국제 소송을 고민하고 변호사 자문을 받아 준비했는데, 이길 순 있을 것 같지만 돈은 절대 못 받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그러면 또 에너지를 쓸 수는 없다고 판단해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지금까지 평온한 일상을 살아왔는데, 작년 8월에 한강에 세계 최대 대관람차가 생긴다는 기사가 떴다. 그래서 ‘설마 이런 거 하는 거 아니겠지’라고 하며 노들섬에 기존 서울링을 합성한 사진을 내 페이스북에 올렸다.

사실 그 10년 사이에도 조용했던 게 아니라 여러 제안이 있었다. 경기도, 파주, 포항 등 우리나라 여러 지자체에서 이걸 하겠다고 연락이 왔었다. 된다고 생각은 안 했지만, 열심히 쫓아다니기도 했다. 2009년에 서울시 물관리국에서도 검토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저러다 말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서울시 측에서 문자와 전화가 왔다. 지금 다시 200m 규모의 천년의 문을 추진한다면 돈은 얼마나 드는지, 안정성은 괜찮은지, 사업성을 높이는 방법은 없는지를 물어왔다. 시장이 추진하고자 하는데 대외비로 해달라면서. 그래서 만났다. 23년 사이의 건설 물가 지수를 계산해 보니 2.98 배가 나왔다. 당시 기본 설계를 했을 때 부가세 빼고 838억이 나왔으니, 대충 계산하니까 지금은 2,800억 원 내외가 된다. 이와 함께 천년의 문 애칭이 서울링이었다는 정보들은 알려주되 지금 시대에 그런 걸 하는 게 맞지 않는 것 같다며 하지 말라고, 우리것을 쓰지 말라고 했다. 그랬는데도 그 뒤에 서울시에서 서울링을 추진하고 있고 그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마음이 불편했다.
어떻게 이게 다르다고 할 수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가운데가 비어 있다는 것뿐 아니라 원형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 이런 비례를 갖는 것이다. 그림이 아니라 1년간의 지독한 설계를 통해서 완성한 엔지니어링이 반영된 설계저작물이다. 이를 통해 확보한 안정성, 그 비례와 크기, 육각의 디자인, 아래의 푸팅(footing) 등 모든 것들을 다 갖춘 것이다.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자 서울시는 저작권의 영역이 아닌 것으로 사료된다는 내용의 문서를 보내왔다. 기능적인 저작물이고 자신들의 것은 미완성 도안에 불과하며, 또 인터넷에 검색하면 이런 비어 있는 원형의 대관람차가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답변을 공식적인 법률 자문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온 것이 얼마 전 일이다. 그래서 2000년에는 세계에서 우리가 최초였고 하나밖에 없었다고 얘기했다. 서울시는 그 사실은 몰랐던 것 같다.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천년의문 디자인을 존중한다고 했다.


재밌는 것은 2022년 2월에 이런 그림을 내려고 하다가 우리가 알게 되어 쓰지 않게 했는데, 3월 8일에 나온 그림을 보면 아래 쪽의 푸팅이 사라졌다. 어떻게 하면 좀 덜 비슷하게 할까 고민하느라 지운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눈엔 보이지 않겠지만, 내 눈에는 보일 수밖에 없다. 결국 서울시의 이 프로젝트 그림을 그린 데가 희림건축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분노했다. 정식 용역을 받아 그린 것도 아니었고, 희림건축은 과거 우리의 모든 도서를 가지고 있다. 이게 과연 공정한가?
위치, 규모, 용도 등 2000년 당시 천년의 문과 지금의 서울링 제로가 거의 비슷한 것 같다. 오세훈 시장이 “매끈한 대관람차의 콘셉트만 잡은 것이고,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설계하신 분이 표절 의구심을 갖게 돼 조인을 하라고 해도 기분이 틀어지셔서 안 하겠다고 하신 상태”라고 했다는 기사를 봤다. 대관람차를 만드는 것이라면 상식적으로 바람이 가장 큰 문제일 텐데 거기 껍질을 왜 붙이는가? 천년의 문과 대관람차는 태생이 다르다. 그리고 (프로젝트에) 합류하라고 했다는데, 나 말고 다른 분은 그 얘기를 들은 적이 없는 것 같고, 나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 없다.
정당성과 시의성
우대성 당시에 국가가 돈이 없어서 못 했다고 하니 이번에는 민자 사업으로 한다고 한다. 그런데 발표 자료 맨 밑에 작은 글씨로 “필요 시 재정보조금 지원 검토”라고 쓰여 있다. 결국 4천억이라는 돈을 민자 사업을 통해서만 하는 게 아니고, 돈이 부족하면 결국 세금을 투입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저작권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시민으로서 이게 기술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생각을 거꾸로 해봤다. 서울시가 발표한 그림대로가 괜찮은가 생각해봤을 때 기본적으로 원을 잘 지탱해야 한다. 95m의 쓰레기 산인 난지도 꼭대기에 이걸 세우고, 바깥 캡슐을 잘 처리해야 하고, 지구온난화로 인해 더 강해진 바람을 견뎌야 한다. 캡슐의 목적은 바깥을 투명하게 보기 위한 것인데, 그렇다면 저런 바깥 캡슐을 씌우지 않아야 하는데? 캡슐이 돌기 위해서 구조가 지지해야 하는데 어떻게 바깥으로 돌지? 사실 해결이 안 되는 진짜 말 그대로 그림이다. 런던아이에서 축대 형식의 초기안과 케이블 형식의 최종안이 다르듯, 천년의 문도 초기의 안과 설계안은 다르다. 그림과 엔지니어링은 다르다.
더 크게는 누가 서울시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는가 질문해야 한다. 이런 기획이 가능하다면 창작 행위를 하는 우리 모두는 뭐 하러 그런 고민을 하는가. 빨리 제일 좋은 걸 가져다 베끼면 되는 일인데 말이다. 진행 방식이나 저작권 뿐 아니라, 누가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인지, 안전성은 확보되는지, 세금이 얼마나 들 것인지 등 모든 부분에서 나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4천억의 공사비면 설계비를 대충 계산해도 설계비가 180억 원 정도 나온다. 적지 않은 비용이다. 돈 버는 일로 생각하고 시장으로부터 함께하자고 제안 받았다면 0.1초는 고민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앞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애초 설계자였던 나 스스로 지금 저것이 지어지는 것이 맞는가를 생각해봤다. 첫 번째로는 시의성이 사라졌다. 2000년에 국가적인 상징물을 만들고자 했던 목적이 지금 달라졌다. 그리고 2000년에는 비어있는 원형 건물이 세계 최초이고 유일했는데, 어찌 됐건 지금은 중국의 Ring of Life 등 비슷한 것들이 생겼다. 오리지널리티를 주장하기엔 궁색한 상황이다. 또, 과연 지금 시대에 이 방법이 여전히 유효한가? 지금은 다른 무언가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언가가 필요하다면 지금 시대정신에 맞는 것을 공론화를 통해 만들고, 설계공모를 통해 방법을 찾아나가야 한다. 얼마 전에 받은 오발령 문자처럼 서울링 발표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문답
청중A 당시 천년의 문에 대한 시민의 의견이나 사회의 파급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하다.
우대성 두 가지의 상반된 분위기가 있었다. 초기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가 분명히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반대의 목소리가 생겼다. 500명의 반대 서명 운동도 있었다. 그것이 취소의 명분이 됐던 것은 맞지만 주류는 아니었다. 어쨌건 국가적인 무언가를 하겠다는 선언에 프로젝트가 진행됐지만, 그렇게 엄청나게 큰 것이 선정될 줄 몰랐던 거다. 원래는 ‘평화의 12 대문’이라고 해서, 천년의 문을 필두로 10년마다 문을 하나씩 지어가는 120년 계획이었다. 그런데 너무 큰 게 처음에 선정되는 바람에 그 뒤의 것들이 다 취소됐다. 국가 세금을 쓰는 문제였기 때문에 마지막에 반대 여론이 꽤 있었던 건 사실이다. 사회의 기대치가 컸냐고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지금처럼 온라인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주목받진 못했고, 설계자 입장에서도 사회적인 공론이나 분위기는 알기 어려웠다. 사회적으로는 대체로 무관심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청중A (설계자 입장에서) 링 말고 다른 대안도 있었는지 궁금하다.
우대성 대안은 없었다. 설계경기에서 당선된 안의 핵심이 링이었기 때문에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의 문제만 있었다. 그나마 대안이라면 사이즈를 좀 줄인다, 껍데기를 벗긴다, 뚱뚱하게 도넛처럼 만든다 정도였다. 그러면 비용과 바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끝까지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수정을 했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발주처 측에서 당선안이 가지는 ‘200m 원형의 단순성’이라는 중요한 가치는 반드시 유지하라는 조건이 있었다.
청중B 프로젝트를 이렇게 힘들게 했는지는 처음 알았다. 오늘 계약 관계에 대해 중요한 팁과 좋은 판례를 남기고 공유해주어 도움이 많이 됐다. 이번 얘기를 듣고 나니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작권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문제가 얽혀 있어 혼자 대처하기 어려울 것 같다. 새건협을 비롯한 건축사협회가 나서야한다고 본다. 어떻게 더 공론화할 수 있을까?
우대성 복합적인 이야기이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0.5초만에 결론이 났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가 제일 중요했다. 근사한 건물이 세워질 수도 있고, 설계를 맡으면 경제적인 이득이 생길 수도 있고, 여러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다 떠나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딱 한 단어가 떠올랐다. ‘싫다.’ 온 몸이 싫다고 거부했다. 이 프로젝트가 내게는 엄청난 트라우마인 것이다. 국가적으로든지, 대중적으로든지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를 바랄 수도 있겠지만, 내게 그것은 다음 문제였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소멸되기를 바랐다. 과정을 합리적으로 진행했더라도 내 몸과 마음의 목소리가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떤 일은 소멸되는 것이 개인에게 가장 바람직한 일이 있다. 누구에게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지 않은가. 천년의 문이 내게 그렇다. 그래서 결론이 굉장히 간단했고,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페이스북에도 글로 정확하게 목소리를 냈다.
왜 싫은지는 그 다음 문제였다. 생각해보니 23년 전 그리고 지금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불합리들이 있었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왜 우리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많은 기자에게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대응할 거냐는 질문이 많았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시나요? 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첫 번째로, 그 원인을 제공한 서울시에 가서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두 번째, 더 큰 질문으로 누가 그런 권리를 서울시에 주었냐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하고 되물었다. 나는 어떤 상황이 생겼을 때 피동적인 질문을 넘어 그 원인을 제공한 더 근본적인 질문, 예를 들어 저것이 지금 여기에 맞는가 같은 질문을 한다. 서울링은 20년 전에는 적절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단순히 상징성만으로 승부하기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공동 대응도 좋지만 자기 목소리를 정확하게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에 따라 사람들이 공감하거나 반대하게 된다. 개인을 떠나 건축을 포함한 디자인을 하는 모두에게, 더 나아가서 시민들에게 이 프로젝트가 득이 되는가 질문해야한다. 지금 구도에서는 4천억 원의 민자 사업(2023년 8월에는 1조 870억원까지 늘어났다)으로 누가 이득을 보는가? 굉장히 작은 비용의 일도 설계 공모로 공론화를 거치는 요즘에 정상적인 것 같지 않다. 이렇게 중요한 프로젝트가 정말 필요하다면 더 많은 사람의 지혜를 모으는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 20년 전보다 우리는 더 성숙했고, 소통의 창구도 여럿 있다. 100% 합의될 수는 없지만, 공동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서울시를 처음 만났을 때 지금 시대에 맞는 가치는 친환경과 탄소제로이니 이런 가치를 담은 새로운 걸 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랬더니 이름을 서울링 제로로 바꾸어서 나왔다.
나는 내 의견을 바꾸지 않고 꾸준히 말하고 있다. 남들이 도와주면 더 큰 힘이 된다. 오늘 포럼에 와서 현장에서 온라인에서 듣는 누군가가 있다는 자체만으로 굉장히 힘이 된다. 11년 동안 소송을 하며 뛰어다녔을 때 진실로 공감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타인의 일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그래도 (이렇게 들어주는 사람들을 통해) 이 일이 뭔가를 시작하게 하는, 생각하게 하는 어떤 씨앗이 되면 좋겠다.
청중C 지금의 이 상황, 오늘의 이 자리가 아니었다면 지난 그 10년의 소송 과정과 노력을 어떤 방법으로 알릴 계획이었는지 궁금하다.
우대성 천년의 문 프로젝트가 백지화될 때쯤 찬성하는 모임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 모임을 통해 정기적으로 모이기도 하고, 아까 언급했던 다른 지자체들의 제안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뭔가를 하겠다는 의지는 없었고, 우리를 지지해준 분들에게 감사를 표현했던 것이다.
천년의 문을 계기로 공공 프로젝트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공공건축의 개선을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가지를 다 실천했다. 공공 프로젝트를 하지 않으면서도 서울시 건축정책위원을 하고, 공공정책에 관련된 일들을 했다. 그곳에서는 발언을 비교적 강하게 했다. 공모전은 나가지 않고, 실무는 하고 있고, 관련된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비용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문제 등 건축에 대한 부당함을 누군가는 정확하게 지적해야 바로잡힌다. 내 힘은 미약하지만 조금씩 바꾸고 있다.
이번 일이 없었으면, 다시 들춰낼 일도 없었을 거다. 천년의 문 일에는 그냥 소멸됐으면 아쉬울 가치들이 분명히 있다. 그걸 부정할 순 없다. 막연하게 언젠가 먼 미래에 통일이 되거나 국가 차원에서 의미있는 일이 있을 때 천년의 문이 한 번 더 회자돼서 공론화 자리에서 한 번 등장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불려나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청중D 이제는 링이 너무 흔하다. 안정성 문제도 여전하다. 두바이의 링이 가장 큰 규모인데, 시공이 1년 반째 멈춰있다고 알고 있다. 제작비도 과도하다. 다른 사례들에서도 공통된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링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어쨌뜬 서울시는 추진 중이고, 법적인 자문도 거쳤다는 기사를 봤다. 그 법적인 자문이라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다.
우대성 (서울시와) 문서가 오고 간 부분이 있으니 조금은 답을 해줄 수 있다. ‘천년의 문 디자인 존중한다. 민자사업으로 갈 경우 저작권 문제가 발생하면 조치하도록 하겠다’ 정도가 서울시의 법률적 자문을 거친 답변인 것 같다.
저작권 상식으로 베른 협약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저작권 등록을 하지 않아도 공포로서 가치를 가진다는 협약이다. 베른 협약은 전 세계 대부분의 주요 나라들이 다 가입해 있다. 천년의 문이 백지화됐을 때 처음으로 한 일이 저작권 등록을 위한 조사였다. 당시 최고 국내 권위자가 이미 국내외 많은 언론에 공포가 됐고, 베른 협약에 따라 공포로서 효과를 가진다고 했다. 물론 저작권 등록까지 하면 좀더 유효성이 생기겠지만, 무언가를 최초로 했고 그것을 공포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서울시의 법률 자문에서 자신들이 보여준 것은 예시에 불과하고 실질적인 것이 아니라며 책임을 뒤로 넘기는 데에 나는 더 분노한다. 그것은 분쟁이 생겼을 때 누구를 대상으로 싸워야 하는가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를 만났기 때문에 ‘이 문제에 11년을 매달린 인간 하나가 있구나. 그냥 넘어갈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분명 했을 것이다.
20년 전과 많이 다른 것은 각자가 자신의 주장을 어떻게든 펼칠 수 있는 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감하느냐와 언론이 조명하는 정도에 따라 실리는 힘이 다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개인이 목소리를 낼 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을 많은 사람이 공감하면 보편적인 가치, 여론이 될 것이다. 공익을 생각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가치를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원고화 김보경 / 편집 김상호
천년의 문 1999, 2023
분량16,893자 / 34분 / 도판 21장
발행일2025년 1월 10일
유형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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