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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쩌다가 지구를 걱정하게 되었나

김상호

출발은 장애인이었다. 장애를 더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돌보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확산되고 있는데, 건축은 갑갑할 만큼 그 변화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있다. 배리어 프리가 제도화된 덕분에 건축설계 시 거쳐야 할 온갖 인증이 하나 더 늘었고, 유니버셜 디자인 개념이 느닷없이 다시 소환되어 떠돌고 있는 정도다. 건축가의 시각에서는 이 둘은 장애인 공간을 본질적으로 개선하지 못하는, 기계적 방편과 문자적 구호로 여겨질 뿐이다. 사회의 요구와 질문은 쌓여만 가고, 건축의 호응이나 대답은 요원해보인다. 더 늦기 전에 양쪽을 테이블에 앉히고 진짜 논의를 시작해보기로 했다. 장애를 설계 요건 이상의 진지한 관심사로 둔 건축가조차 건축계에서는 귀한 존재였다. 고민 끝에 조재원과 김정임 두 건축가에게 도움을 청했다. 조재원은 장애인을 위한 공간을 리모델링하며 그 과정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긴 바 있어서였고, 김정임은 최근 들어 장애와 돌봄의 공간에 관심이 생겨 공부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였다.

‘장애와 비장애를 어떻게 구분지을 수 있을까’, 첫 회의 때 테이블 위에 던져진 질문이다. 단순한 질문이지만 답은 단순하지 않다. 휠체어에 앉으면 장애인이고, 걷기가 불편하면 비장애인인가? 눈이 보이지 않으면 장애인이고, 안경을 쓰면 비장애인인가? 자폐는 장애이고, 우울은 비장애인가? 질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는 모두 장애를 하나쯤 갖고 산다. 멀쩡한(과연 진정으로 멀쩡하긴 한가) 내가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내일 갑자기 장애인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어떤 계기나 시간에 의해 어떤 경계를 넘어설 뿐이다. 장애와 비장애는 정상과 비정상의 부분 집합이기도 하다. 모두 우리가 임의로 만들고 답습해온, 돌아보지 않은 채 내버려둬 굳어버린 기준이다.

의문은 빠르게 확장되었고, 물음표는 마침내 인간과 비인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스스로 정한 경계와 기준에 대한 의혹이 장애인을 넘어 인간을 넘어선 세계에 다다른 것이다. 결국 장애와 비장애라는 고정관념은 정상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낳은 구시대적 생각이 되었다. 이쯤 되자 생물과 미생물과 무생물, 물질과 비물질까지 생각의 연쇄작용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가제였던 ‘모두의 집’의 ‘모두’에 물음표가 달렸다. 그렇게 우리는 지구에 이르게 되었고, 완전히 다른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 환경과 생태 전문가이자 활동가인 최진우가 심사위원으로 합류했다.)

하지만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기만 해서는 건축 공모전이 생겨날 수 없다. 우리는 다시 지표면으로 내려와 자연환경과 도시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유사 이래 인간밖에 생각해본 적 없는 건축인들이 비인간 생명이라는 낯선 존재를 인식하고 설계에 고려할 수 있게 해야 했다. 건축 행위에 자동으로 수반되는 자연 훼손과 산업 폐기물에 대한 반성도 필요했다. 건물의 수명을 고작 30년으로 생각하는 우리 사회 특유의 문제적 통념도 바꿔야 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우리는 몇 가지 대원칙을 세웠다: 파괴적 신축을 하지 않는다, 저마다 각자의 ‘모두’를 생각해본다, 건물을 넘어 시간을 계획한다, 설계가 아니라 시나리오를 세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동의 지식을 모은다.

출발이 장애인이었다는 첫 문단 문장들 속 ‘장애인’이 ‘인간’으로 바뀌었는데도 이야기의 내용이 전혀 거슬림 없이 유효하다. 이번 학생건축상에서 건축은 여전히 인간에 의한 것이었지만, 더 이상 인간만의 것이나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비인간, 자연, 지구를 포함하는 ‘모두의 집’을 위해 인간이 인간으로서 써야 할 도구가 되었다. 인류세, 기후위기, 생명다양성 같은 말에 편승하지 않고, 그 말들이 허울 좋은 구호로 전락하지 않게 하고, 지금의 당면한 과제, 절실한 현실, 불같은 위기로 모두의 머리와 손에 닿길 바랐다. 비단 참가 학생들에게만이 아니라, 너무나 무력한(그래서 무책임해보이기까지 하는) 건축계에도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면 했고, ‘학생 공모전’이라는 방법적 한계와 인식의 울타리를 넘어서 학생들의 가감 없는 생각과 비전으로 건축계를 일깨울 수 있기를 바랐다.

얼마나 이 이야기가 건축계에 가닿았을지는 모르겠다. 학생공모전이라는 방식이 사회적으로 파급력을 미치기엔 한계가 있겠지만, 적어도 이 주제와 제안들을 접한 누군가에게 각성의 촉매가 될 수 있다면 우리의 과업은 사명을 다한 셈이다. 우리는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도록 이 책에 담긴 생각과 자료를 열심히 퍼 나르려고 한다. 특히, 부록으로 수록한 4,600여 개의 비장의 데이터베이스도 잘 기억해두길 바란다. 언젠가 당신의 ‘새로운 가족’을 위한 집을 준비할 때를 대비해 <모두의 집: 내일의 지구를 위한 오늘의 건축>의 부록을 북마크해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새롭게 발견하는 정보를 덧붙여 당신의 이웃과 지인들에게 마음껏 공유하길 바란다. 그렇게 눈을 뜬 이들이 하나둘 모여 지금까지와 다른 ‘모두’가 될 수 있다면, 어쩌면 정말 변화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저쪽 한편에서는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이주하는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도전하고 있다. 멋진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어지르고 망가트린 곳에서 이사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화성을 제아무리 갈고 닦아도 지구가 되진 않는다. 우리가 정말 화성에 가서 살게 된다 해도, 지구 대회복의 날 동안의 임시 대피소 생활일 것이다. 매일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하루라도 빨리 생명이 넘치는 푸른 지구로 다시 돌아갈 날만 고대하며 살 것이다.

김상호 정림건축문화재단 실장

우리는 어쩌다가 지구를 걱정하게 되었나

분량2,709자 / 5분

발행일2024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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