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즈의 변화
전숙희, 장영철
분량5,784자 / 12분 / 도판 5장
발행일2024년 6월 17일
유형인터뷰
smallness
전숙희 사무소를 개소할 때 당시 경제 버블이 한순간에 꺼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건축 시장에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를 고민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smallness’로부터 시작하기로 했고, 스스로를 툰드라의 초식 생물로 생각했다. 육식 동물처럼 먹이를 많이 먹거나 독식하려고 하지 않고 필요한 만큼의 먹이를 천천히 찾아다니는 식으로 생존하기로 했다. 처음에 집중했던 것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직접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첫 작업이 이상의 집 모바일 갤러리였다. ‘smallness’의 대원칙은 재료의 물성에 답하는 것이었다. ‘What do you want to be, brick?’이라는 루이스 칸의 말처럼, 재료의 특성이 구법으로 이어져서 그것이 건축의 본질이 되는 것을 연구하고 실천했다. 이런 마인드는 2013년 제주 애뉴알레 프로젝트까지 이어졌다.
와이즈의 데뷔작은 2011년 Y하우스다. 유일한 완공작이었고, 이 작업으로 그해 젊은건축가상을 받았다. 지금의 젊은건축가상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시절 우리 같은 신인에게 완공작 하나는 매우 큰 과제였다. 그래서 당시 응모 기준은 최소한 완공작 하나를 포함해달라는 정도였고, 우리는 Y하우스로 간신히 그 최소 기준을 맞출 수 있었다. 함께 제출한 다른 작업은 이상의 집에서 구상했던 여러 아이디어와 연희동에 추진했던 땅콩집 프로젝트 정도였다.
이때 심사위원 중 한 분이었던 에이텍건축의 김희옥 선생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프로젝트의 연결 다리가 되어서 우리의 두 번째 건물이 되었다. 같은 시기에 인큐베이팅되었던 프로젝트가 ABC 사옥이다. 두 건물에 쓰인 벽돌이라는 재료는 루이스 칸의 말을 인용할 때나 썼을 뿐 사실 와이즈와 거리가 먼 재료였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기존 건물에 있던 전벽돌을 물려받겠다는 생각으로 처음으로 쓴 재료였는데, 그 이후 지금까지 와이즈와 긴 인연을 이어오게 됐다.
환경과 세계의 변화 속에서 와이즈 작업의 방향과 접근방식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smallness’의 방향과 전략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능했고 잘 작동했다. 하지만 그 방식만 고수하기는 어려워졌다. 일상적인 것들이 더는 현실에 맞아 들어가지 않게 됐다. 날씨가 예전 같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상태 변화가 오랜 시간에 걸쳐 이어질 것 같다. 지금 당장 확실하게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가고 있지는 않고, 건축을 하는 방법과 태도 차원에서 경로를 재탐색하는 과정에 있다.



와이즈의 분화
전숙희 2016년 10월 9일 한글날, 와이즈가 많은 주목을 받고 있던 때였는데, 장 소장님이 폭탄선언을 했다. ‘이제 나 하고 싶은 거 할 거야’ 하면서 직접 기획하고 만들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겠다고 했다. 가라지가게의 시작이자, 와이즈건축 고행의 시작이었다. 가라지가게에 투신한 장 소장님의 왕성한 활동으로 빼빼라는 가구 브랜드를 런칭했다. 가볍게 어디든 이동, 조립해서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빼빼 가구 정신은 진화를 거듭해서 결국 가구로 공간을 만드는 데까지 이르렀다. 건축가의 DNA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2016년의 장 소장님이 처했던 상황을 돌이켜보면, 모두 좋은 프로젝트를 괜찮은 클라이언트들과 진행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들이 갑자기 돌변했다. 마치 잘하던 연애를 끝내자고 통보해 온 느낌이었던 것 같다. 원인은 공사비와 땅값 상승, 이런저런 변심, 금이 가기 시작한 신뢰 관계, 느닷없는 문제적 인물의 등장 등이었다. 장 소장님은 멘붕에 빠졌고, 나는 뒷수습을 해야 했다.
장영철 그때 다섯 개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다. 모두 좋은 일이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씩 엎어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는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생각이 들었고, 두 번째로는 (와이즈의) 건축 시장에 변화가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의 생각 속에는 기본적으로 ‘건축주와 너무 힘겨루기를 했나? 원하는 것을 적당히 타협해서 들어줄 걸 그랬다’ 같은 생각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다른 것들보다 CM과 욕심 많은 건축주였다. 그들은 뭔가 빈틈만 보이면 그것을 낚아채서 사람을 휘두르려 들었다.
전숙희 좋은 프로젝트는 좋은 건축주가 첫 단추다. 나름대로 좋은 건축주라고 판단해서 시작했던 일이 나락으로 빠지고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경험을 그때 처음 했다. 그러고 나서 회복한 다음 일이 잘 되고 경계심이 약간 흐릿해졌을 때도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은 선택을 해서 또 고생길을 가는 일을 되풀이했다. 건축가로서의 어떤 욕심 때문이었는데, 결국 그 일이 또 와이즈의 발목을 잡았다.
장영철 그때부터 와이즈의 태도와 방식이 분화되었다. 나는 지금 와이즈건축에서 떨어져 나온 상태다. 그 뒤로는 몸도 마음도 편해졌다. 전 소장님은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더 할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했다. 건축의 시스템이란 발주 체계, 시공 방식, 법체계 등 건축을 ‘이용해먹으려고 하는’ 어떤 공고한 체제다. 그것이 점점 건축 행위를 쉽지 않게 만드는 중이지만, 어떻게라도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는 방향을 와이즈건축은 계속 찾고 있다.
초창기 ‘smallness’라는 개념은 작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프로그램부터 제작까지 직접 관여할 수 있고, 그래서 도시 안에서 사람들에게 더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담겨있었다. 우리는 그 신념대로 일했고,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좀더 큰 프로젝트(어둠속의대화)와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났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큰 ‘행운’이었는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방향대로 계속 좋은 프로젝트를 할 수 있을 거라 섣불리 생각했던 것 같다.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규모를 넘어서면서 ‘건축을 이용해먹으려는’ 시스템에 걸리기 시작했고, 그 시스템의 완력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거기서 깨지고, 찢어지고, 상처 입기 시작했다. 전 소장님은 그것을 꿋꿋하게 버텨가며 잘 벗어났고, 나는 못 견디고 나와서 내 일(가라지가게)을 만들었다.
지금 와서 드는 약간의 후회는 그때 ‘smallness’를 시스템적으로 발전시켰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작은 땅을 사서 직접 시공하고 프로그램을 넣어서 우리 작업에 가치를 불어넣는 일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가라지가게에서 프로젝트화하려고 하고 있다. ‘스몰니스’가 ‘비즈니스’가 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려고 한다.

시차: 2016, 2022
전숙희 장 소장님은 현재 건축의 경로를 이탈해 있는 상태다. 끈만 연결해두고 몸을 건축 바깥에 빼고 있는 느낌이랄까. (본류의 건축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걱정스러웠다. 영영 안 돌아오면 어쩌나 했다. 나도 이런저런 작업을 하면서 나름의 허들을 넘으며 시간을 보내고 난 요즘은 ‘그러면 또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정통’의 것이 정의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한 방향으로만 가던 길이나 선배들이 해왔던 방법을 정통이라고 대충 말해본다면, 꼭 그 방식이 아니라고 해서 건축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잘못된 길도 아니라는 것을 이제서야 느낀다.
날씨 좋은 어느 날 장 소장님과 바람 쐬러 차를 타고 한강 변을 달렸는데, 그때 비로소 2022년의 전숙희가 2016년의 장영철을 만난 것 같았다. 어떤 좌절이었는지, 어떤 새로운 탐색을 하려고 했는지 이해했다. 2016년 당시에는 우리는 서로 다른 날씨 속에 서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매우 쾌청한 날씨 아래 있었고, 장영철은 번개와 우박을 맞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상태를 모르고 있다가 잡고 있던 손이 젖어오는 걸 보고서야 구출에 나섰다고 할까. 지금은 바깥세상도 많이 바뀌고 있고, 내 안의 생각도 많이 변하고 있다. 2016년 장 소장님은 바깥세상 때문에 안이 변한 것이라면, 요즘 나는 안과 밖이 같이 소용돌이 치며 변하고 있다.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얘기를 장 소장님한테 했다. ‘나는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할래’라고 했던 당신의 말을 드디어 이해했다. 그리고 내가 그때 당신의 결정을 지지한 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나도 그때의 나, 나를 지지해주고 내 일을 같이 수습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나도 하고 싶었던 것을 미뤄놓은 것이 있으면 이제 과감하게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런 내면의 변화는 태도의 변화였다. 이전에는 주의 깊게 주변을 관찰하는 사려 깊은 태도에서 벗어나 이젠 과감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고 싶은 것을 미루지 말자, 다음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스케치북에 ‘Be Bold!’라고 써놓았다.
성찰과 전환
전숙희 지난 한두 해 나도 나의 경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 나 역시 내가 내린 선택과 결정 때문에 대가를 치뤄야 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그동안 너무 사적인 건축물에 우리의 시간과 재능을 쏟았던 것은 아닐까였다. 좀더 균형 있게 할 수도 있었는데 하는 성찰이다. 예전에는 민간 프로젝트에 집중했고, 공공 프로젝트는 ‘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해야 한다’로 바뀌었다. 그 계기가 장 소장님을 떨어져 나가게 만들었던 당시 일들에 들어 있던 문제들: ‘돈밖에 몰라’, ‘땅이 더 좋아’, 사소한 일로 금 간 신뢰 등이었다. 그 문제들을 보면서 개인들의 사적인 프로젝트에 건축가 너무 많은 시간과 재능을 쏟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의 아주 사적이고 귀중한 무언가를 만드는 일도 값진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흔하게 쉽게 만날 수 없다. 민간 영역에서는 좋은 사람과 좋은 작업은 하되, 그 일을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이전에 민간 프로젝트를 하면서도 만족스러웠던 이유는 사적인 일임에도 공적인 태도를 가진 건축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그렇지 않은 일을 겪으면서 크게 실망했다. 건물이 공공재라는 내 믿음에 균열이 생겼다. 개인 건축주는 잘못이 하나도 없다. 그의 집이니까 문을 잠글 수도 있고, 원치 않은 시간에는 출입을 막을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데 이전에는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처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더 많은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공공 프로젝트에서는 그곳이 좋은 위치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오는 곳이 될지가 첫 번째 판단 기준이 되었다. 그런 일이면 재미있고 보람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우리가 건축을 시작하는 새 출발점이 되면 좋겠다.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것이 건축물이다. 열어주지 않으면 껍데기밖에 볼 수 없다. 그런 곳은 아무리 신경 써서 만들어도 사람들은 그 건물의 본질을 온전히 다 경험할 수 없다. 서소문역사공원을 보면서 공공건물이 이렇게 깊은 곳까지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이 근사했다. 건축가들이 이런 건축물을 남기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힘들어서 멀리했던 것, 귀찮아서 멀리했던 것이 사용자와 방문자를 생각하면 좋은 일로 다가온다.
한동안 미술관 작업을 멀리해왔다. 손이 많이 가고 힘도 드는데, 밖으로는 백조 같은 고고함을 유지해야 하는 게 미술관의 일이라서였다. 최근에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는 일(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스스로 만들었다. ‘내가 만든 것이 사람에게 개방되고 많이들 보겠구나’ 하는 상상만으로도 무척 즐거운 일이다. 지금 하고 있는 미술관 야외 전시 프로젝트를 통해 꿈꾸고 있는 것은 그곳이 공원이나 놀이터 같은 곳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저녁 무렵 편하게 들러서 쉬었다 갈 수 있는 곳을 만드는 일이 참 즐거운 일이라는 걸 다시 알아가고 있다. 그렇게 쓰임새가 개방적인 공간을 계속 만들어가고 싶다.
인터뷰이 전숙희, 장영철 / 인터뷰어 김상호 / 원고화 및 편집 김상호
와이즈의 변화
분량5,784자 / 12분 / 도판 5장
발행일2024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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