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세계
전숙희, 장영철
분량6,240자 / 12분
발행일2024년 6월 17일
유형인터뷰
94학번의 타임라인
전숙희 나는 94학번으로 수능 첫 세대다. 고2까지는 학력고사를 준비하다가 고3 때 갑자기 수능을 본 불안한 세대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사회가 시스템을 테스트하던 시기에 성실하게 몸과 마음을 바쳤다. 97년이 졸업 학기였고 98년 2월에 대학을 졸업했다.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을 때다. 700~800원 하던 원달러 환율이 2,000원으로 세 배 가까이 치솟았고 주가지수가 300 밑으로 떨어졌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기업이 하나씩 부도났다. 뉴스를 보고 있으면 국가가 망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로재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내가 마주한 세상의 모습이었다. 3년 동안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일을 했다.
2001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학기가 시작하고 일주일쯤 됐을 때 911 테러가 터졌다. 버클리 캠퍼스 옆 YWCA 로비에서 그 장면을 뉴스로 봤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이후 3년 동안 경제가 위축됐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를 막 다니기 시작한 무렵이었던 2007년에는 서브 프라임 사태가 터졌다. 지하철에는 그날 해고된 사람들이 종이 상자를 하나씩 들고 탔다. 부실 금융 도미노의 여파가 세계로 퍼져나갔고 우리나라에도 2011년까지 그 영향이 이어졌다. 우리는 이때 OMA가 말한 ‘bigness’를 떠올렸고, 버블 경제가 만들어낸 것들에 회의감이 들었다.
가까운 시점으로 눈을 돌려보면, 2019년 겨울부터 3년 동안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일상에 또 다른 큰 영향을 줬다. 바로 뒤를 이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상 세계 패권 전쟁이고, 전 세계에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 IMF 사태부터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사건이 생길 때마다 자영업자들은 몰락했고, 기득권은 세력을 강화했고, 공생과 연대보다 쏠림과 경쟁이 심화했다.
한편, 우리나라 인구의 20%에 육박하는 68세대 약 860만 명이 마침내 은퇴 연령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우리 앞에는 더 큰 변화가 예정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몸담고 있는 건축계에도 영향을 끼쳐왔고, 부익부 빈익빈을 가속했다.
기후변화와 건축의 미래
전숙희 전에는 환경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이런 변화들이 왜 생기지?’하는 질문을 이어가다 보니 환경 문제로 연결되었다. 환경과 기후의 변화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던 사이 굉장히 큰 것들을 바꿔놓았다. 근래 2022년 5월 무렵부터 세계 곳곳에서 가뭄과 화재 소식이 들렸다. 여행으로 들린 지방의 산과 계곡마다 겨울 가뭄으로 물이 다 말라 있었고, 파종 시기가 미뤄졌다. 지난 여름에는 물 폭탄 같은 폭우가 여기저기 쏟아졌다. 이런 변화는 자연 생태계와 환경을 바꾸는 한편, 생활의 변화를 이끈다. 지난 8월은 우리가 그전에 알던 8월이 아니었고, 결국 도시와 건축의 환경 변화로 연결되는 것 같다.
‘겨울은 계속 추울까?’ 생각하면, 단열 성능을 재고할 필요가 생긴다. 몇 년 전 중부 지방의 단열 기준이 크게 강화되면서 단열재 두께가 두꺼워졌다. 그에 따라 건축물 면적 계산법에 따른 전용면적이 줄어들면서 불만이 쏟아졌다. 결국 면적 산정 기준이 바뀌었다. 반대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기준으로 기준값을 맞춰야 할까? 지난 10년의 기상 관측 수치가 앞으로 10년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기후변화의 여러 가지 현상들이 우리가 예측하는 수준보다 더 길게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 생태계의 변화는 사회적 생태계의 변화로 이어질 텐데, 그것을 전혀 감지할 수 없다. 세계 곳곳의 전쟁과 분쟁도 우리 일상과 건축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어디서도 일관성 있는 이야기를 접하기 어렵다. 지금은 사회 생태계와 자연 생태계가 모두 혼란 속에 있다.
미국에 있을 때 찰스 과스메이의 사무소에서 일했는데, 2007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을 때 그는 ‘40년 동안 일해오면서 이런 혼란은 겪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미국 경제가 곤두박질치는 것을 처음 본 것이다. 나는 그때 그가 느낀 공포감이 체감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해가 된다. 우리가 중견 커리어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극복하듯 뛰어넘어야 하는 것인지 피하듯 비켜서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장영철 기후변화는 거시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작은 사무소의 실무에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이것은 건축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거기에 대처하는 태도는 크게 둘로 나뉠 텐데, 하나는 자신의 라이프 패턴을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기술로 극복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고, 우리가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려면 일종의 ‘후퇴’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얼마나 가능할지 고민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욕심을 덜 부리고 사는 사회로 갈 수 있을까, 불편을 감수하면서 에너지를 덜 쓰는 생활이 가능할까 하는 고민이다. 개인적으로는 ‘we will be doomed’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에 흥미로운(?) 사건을 접했다. 러시아가 가스관을 잠갔더니 반대편에서는 샤워 시간을 5분으로 제한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에너지를 덜 쓰고 살아가는 것을 경험하고 목격하면서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지않아 우리 모두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전통대로라면 기술로 극복하려 들겠지만, 이번에는 어려울 것이다. 라이프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 옷은 두껍게 입고, 물은 덜 쓰고, 식사량은 줄여야 한다. 그런 상황이 장기화하면, 사회 체계가 바뀔 것이고, 지역을 넘어선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런 문제를 서구 유럽이 먼저 맞닥뜨렸고 그들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가 흥미로운 지점이다. 세계 건축의 새로운 담론도 거기서 나올 것이고, 또 그것이 세계에 ‘유통’될 것이다. 아직은 그들이 문화적 헤게모니를 점하고 있으니.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의 생활 방식을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위기의 잉여 문화
장영철 가라지가게를 하면서 산업 박람회를 많이 나가게 되는데, 박람회에 대한 회의감이 자주 든다. 크게 보면 엑스포나 비엔날레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무엇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쓰고 버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 박람회에 참여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어떤 ‘잉여’의 것에 뭔가를 계속 투자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먹고 사는 것이 어느 정도 해결되기 시작한 산업혁명 시대 이후 지금까지 세계는 기관차처럼 달려왔다. 멈출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잉여를 통해 수요를 만들어냈고, 건축도 그랬다. 건축은 잉여 시스템의 최상부에 놓여 있는 것 같다.
페어나 엑스포가 발전한 이유는 단순하다. 어떤 물건을 대량으로 만들 준비는 되어 있는데 그걸 시장에 내다 팔려면 많은 사람과 만나서 물건을 알려야 한다. 처음에는 물건만 갖다 놓다가 나중에는 구조물도 만들고 콘텐츠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페어에 갈 때마다 ‘내가 이걸 왜 하지’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물건을 내놓고 알리면 사람들이 많이 구매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 맨 밑바닥에는 대량의 에너지를 값싸게 쓸 수 있는 산업 구조가 형성되어 있어서 이런 잉여의 문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재화나 물질이 점점 귀해지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현재 상황만 봐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사비가 엄청나게 오르고 있다. 원인은 여러 가지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건축 산업의 모습을 바꿔놓을 것이다. 당장은 어떻게 하면 싸게 지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출 텐데, 그것이 건축의 내용까지 바꿀 것 같다.
가장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예를 들면, 공사하는 면적을 줄이는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 라이프 스타일이 설정해놓은 면적은 너무 넓다. 개인이 점유하는 면적도 넓고, 공공건축에서도 쓸데없이 많은 면적을 요구한다. 이와 함께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제도도 더 만들어질 것이다. (한편, 그것은 규제의 형태로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먹거리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 그 누군가에 의해 정책적으로 더 드라이브가 걸릴 가능성도 있다.) 반면, 건축가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입지는 좁아질 것이다. 비용과 기술의 압박이 심해질 테니. 그래서 나는 요즘 지금의 건축을 비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하이-테크 vs 로우-테크
전숙희 장 소장님의 진단과 예측에 맞는 부분이 있지만, 총체적 비관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전체적으로 양극화될 것이라고 본다. 질 낮은 건물을 더 빠르고 싸게 짓는 방법은 계속 고안될 것이다. 사회적 필요가 있고, 정치의 속성상 거기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시방편적이고 주먹구구식 정책은 계속 나오고 건축 산업도 거기에 따라갈 것이다.
장영철 하지만 더는 철근과 콘크리트로는 집을 짓지 못하는 시기가 올 수 있다. 벽돌 건축도 이제 힘들어졌다. 뭔가 새로운 (경제적인) 공법이 나오고 그에 따라 디자인도 변화가 생길 거로 생각한다.
전숙희 거기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이다. 뉴욕에서는 보편적인 건축 공법이 아예 달랐다. 우리나라라면 당연히 철근콘크리트로 설계할 건물을 그들은 철골이나 PC로 설계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인건비 때문이었다. 철근콘크리트를 현장 타설 방식으로 쓰려면 거푸집을 짜야 하는데, 북미에서는 그 인건비가 비싸고 숙련도가 부족하다. 그래서 공장 생산 방식의 공법이 보편화되었다. 앞으로는 그것이 더 발전해서 랩 베이스(로봇 중심) 시스템으로 갈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인건비가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낮은 인건비의 숙련도가 떨어지는 외국인 노동자를 쓰고 있다. 그마저도 구하기가 어려워서 인건비는 계속 올라서 결국 품질은 떨어지고 비용은 높아지는 상태가 됐다. 세계적인 현상이다. 품이 많이 드는 기존의 현장 시공 방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 어떻게든 현장에서의 시간과 노동을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스위스 ETH 연구실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3D 프린팅으로 장식적인 콘크리트 기둥을 만드는 기술을 테스트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바닥 판과 보까지 프린팅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는데, 우리가 익히 아는 형태가 아니라 자연의 나뭇잎 구조를 모델로 삼았다. 나뭇잎을 자세히 살펴보면 굉장히 잘 만든 캔틸레버 구조로 되어 있다. 가느다란 잎사귀 줄기 하나로 커다란 잎을 지탱하는 방식이다. ETH가 프린팅한 실험체는 그것을 크게 뻥튀기한 것이다. 산학 협동 프로젝트로 이뤄지고 있어서 잘 진척되면 실용화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언젠가 그 방향으로 법과 제도가 바뀔 거로 본다. 인건비와 자재비는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랩 베이스 설계를 통해 구조체를 공장에서 생산하고 현장으로 옮겨 조립하는 방식에 건축의 미래가 있다.
장영철 기술적 대응의 또 다른 방법은 로우-테크(적정 기술)다. ETH 연구실에서 하는 유의 작업은 기계를 보살펴줘야 하는 부분이 생각보다 너무 많다. 고양이 집사라는 말이 있듯이 그 분야에서는 ‘로봇 집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로우-테크는 쉽게 수급과 조립이 가능한 재료와 공법을 찾아서 숙련된 기술 없이도 뭔가를 잘 만들 수 있는 방식이다. 나무가 대표적인 예다.
사람들이 옛날에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에어컨, 보일러 없을 때는 어떻게 살았을까. 다 같이 참을성을 발휘해서 다시 춥게, 덥게 지낼 줄 알게 되면 로우-테크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몇 년 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이토 도요가 로우-테크의 비전을 잘 보여줬다. 로우-테크는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과도 잘 맞는다. 건축가들이 자주 놓치는 것이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이해다. 건축가는 보통 자신이 설계한 건물에 사람들이 맞춰서 살 것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그런 건축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라이프 스타일을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각종 취향도 일종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전숙희 어느 쪽이든 한쪽으로만 진행되지는 않을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요즘 쓰고 있는 방식이 2020년대 이후에도 동일하게 쓰이기는 어려우리라는 것이다. 이미 자연적, 사회적 변화를 크게 겪고 있고, 그에 대한 변화나 대응은 결국 양극화될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래서 나는 기후변화가 몰고 오는 거대한 변화의 방향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도 기존의 방식을 강화하는 방향에 더 관심이 많았지만, 지금은 외부 요인들에 의해서 더 이상 그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A라는 방향으로 가고 싶지만 그쪽에는 더 이상 길이 없다.
인터뷰이 전숙희, 장영철 / 인터뷰어 김상호 / 원고화 및 편집 김상호
변화하는 세계
분량6,240자 / 12분
발행일2024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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