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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공동주거 사례

편집팀

Ⅰ. 유토피아의 열망: 19세기 유럽과 북미

19세기에는 정치, 노동, 재산, 결혼, 종교 등 기존의 질서에 의문을 던지고 새로운 사회를 열망한 이들이 많은 유토피아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들 공동체는 당시의 사회를 비판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이기도 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산업혁명과 함께 평등사회(egalitarian)를 위한 움직임 중 하나로 공동사회 계획들이 일어났으며, 미국에서는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앞서 유럽에서 시도했던 계획을 보완하는 형태로 새로운 개혁을 추진했다.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는 주거 유형의 변화뿐만 아니라, 구성원 안에서 사회적 관계가 새롭게 정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➊ 유럽

① 팔란스테레 / 19세기 초, 찰스 퓨리에

19세기 초반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물질문명은 발달하였으나 삶의 질은 더욱 피폐해졌다. 기계화로 인한 실업률 증가로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에 유토피아 지향적 이론가였던 찰스 퓨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는 자본주의의 모순, 특히 산업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봉건제도를 비판하며 팔란스테레(Phalanstère)를 설계하면서 농업을 기초로 하는 공산주의적 생산협동제를 제안했다.

팔란스테레는 외부와 단절된 전원도시로, 퓨리에는 이상적인 커뮤니티 규모를 400명 단위의 4개 그룹이라고 보았다. 총 1,600~1,800명 규모의 이 커뮤니티는 주식제로 운영되며, 구성원은 커뮤니티에 기여한 자본만큼 점유율을 갖게 된다. 경제활동은 농업과 산업활동이 3:1 비율로 이뤄지며, 그 선택은 구성원 각자의 자율에 맡긴다. 이익은 전체를 12 등분으로 나눠, 4/12는 각자 지불한 점유율에 따라, 5/12는 각자의 노동에 따라, 나머지 3/12는 기술자 혹은 전문가에게 분배한다는 계획이었다.

팔란스테레는 베르사유 궁전과 비슷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이는 노동자들 또한 궁전에서 일하며 생활하게 하고 다양한 혜택을 누리게끔 하려는 퓨리에의 바람을 반영한 것이다. 팔란스테레의 시설로는 공동주방, 공동식당, 학교, 유치원, 극장, 펜싱장, 정원, 도서관 등이 있고, 외부인에게는 입장료를 받아 커뮤니티 운영비로 사용할 터였다.

퓨리에는 당시 신문에 광고를 내 자본가 및 교양 있는 계급의 참여를 바랐지만, 기대만큼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아 팔렌스테레 건설은 계획서로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1840년대에 미국에서만 30여 개의 유사 커뮤니티들이 생겼는데, 이들은 모두 팔란스테레를 참고로 한 것들이었다. 퓨리에의 계획안을 참고한 이들 커뮤니티는 ‘퓨리에리스트 커뮤니티’(Fourierist Community)라 불린다. 이처럼 팔란스테레는 공동주거 역사에서 중요한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팔란스테레 / 자료 출처: Charles Fourier, The New Industrial World, 1829

② 파밀리스테르 기즈 / 1858~1883, 장 고댕

파밀리스테르 기즈(Familistère Guise)는 퓨리에리스트 커뮤니티 중 하나로, 사회 개혁가이자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장 고댕(Jean Baptiste Andre Godin)이 앞서 살펴본 팔란스테레 기획안을 참고하여 만들었다. 이 무렵 프랑스 노동자의 주거 환경은 산업혁명의 폐해로 매우 열악했고, 이들의 자녀 또한 피폐한 환경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프랑스대혁명을 겪은 부르주아들은 노동자를 감시하기 위해 사회적 공간을 최소한으로 축소했는데, 가령 노동계급의 집이 서로 마주하지 않도록 배치하는 것 따위다. ‘가족주의’라는 이름 아래에 사람들을 가족 단위로 공간을 나누어 밀어 넣고, 그 외의 사회 활동은 단절시키고자 한 것이다.

고댕은 1842년 퓨리에의 팔란스테레 설계안을 접하고 감명을 받아, 이를 토대로 노동자들이 함께 일하며 생활하는 공동주거 모델인 ‘사회 궁전’(le Palais social)을 계획한다. 프랑스의 북부 기즈(Guise)에 실현한 고댕의 파밀리스테르(Le Familistère)는 그의 공동주거에 대한 프로그램 내용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고댕은 이에 대한 생각을 저서 『사회적 해결(Social Solutions)』(1871)에 자세히 서술했다.

“퓨리에는 인류가 노동과 과학 그리고 예술을통해 공공복지를 이루어야 할 운명이라고 믿었다. 퓨리에에 따르면 건강한 환경을 만들기 위한 사회혁명의 첫 번째 조건은 협회이며, 첫 번째 노력은 주거의 개혁이다.”

파밀리스테르 기즈는 노동자 협동조합과 협회에 의해 운영되었다. 고댕은 협동조합과 협회 회원 간의 연대와 노동자의 자본 보장을 약속했다. 또한, 커뮤니티 안에서의 민주주의 활동을 장려해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다. 협동조합과 협회는 노사 간의 화합을 위한 노사 대표를 민주적 선거 방식을 통해 선출했고, 퓨리에리스트 커뮤니티답게 사유재산 및 소유권을 인정했다.

고댕은 공동주택을 통해 그 안에서 함께 살며 노동계급으로서 누리기 힘든 교육, 문화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주택, 의복, 신선한 공기, 빛, 녹지 공간, 그리고 공중위생 등을 보장받으며 살 수 있도록 했다. 파밀리스테르 안에는 공장과 더불어 세 채의 주거동, 탁아소와 유치원, 학교, 극장, 세탁장, 목욕탕, 수영장, 체육시설 등을 건설하였다. 이 모든 시설의 관리 및 운영은 노동자들이 직접 했다.

중앙부가 개방된 중정형 건물로 지어진 주거동은 10m마다 칸막이벽으로 나누어져 2개의 공간이 하나의 기본 유닛을 이루는데, 각 유닛은 곧 하나의 가족 단위를 의미한다. 고댕은 위생을 중시해 환기와 배수를 충분히 고려해 설계했다.

파밀리스테르 기즈에서는 교육을 새로운 사회 구성원을 육성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 당시 유럽 현실은 노동자 가족의 경우 부모가 모두 일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양육에 소홀할 수밖에 없어 유아사망률이 매우 높았고, 어린이 교육의 여건도 열악했다. 고댕은 자신의 사회 궁전 안에 탁아소, 유치원, 학교, 체육시설, 극장 등을 설립해 영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무료로 지원했으며, 각 주거동의 중정과 극장에서 구성원의 다양한 문화 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양육과 교육은 공동체의 생활 방식을 가르치는 첫걸음으로서, 부모들이 공동으로 맡아 진행했다.1

파밀리스테르는 1878년에는 350개 유닛에 1,200명 노동자가 모여 살았을 정도로, 19세기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실험한 공동주거 모델 중 가장 성공한 예에 속한다. 하지만1968년 공장이 운영난을 겪으며 협동조합이 해산됨에 따라 파밀리스테르 또한 해체되었다. 파밀리스테르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건 공업 중심의 생산 활동을 통해 공장이 어려워지기 전까지는 운영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었으며, 구성원의 다양성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입주민은 가족을 중심으로 각각의 주거를 소유했으며 그에 따라 각 가족의 독립과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파밀리스테르 기즈 계획도 / 자료 출처: Jean Baptiste Andre Godin, Social Solutions, 1871. Familistère Collection of Guise

Ⓐ 3개의 주거 동 Ⓑ 공동육아를 위한 탁아소와 유치원 Ⓒ 학교와 극장 Ⓓ, Ⓔ 고깃간, 공동조리장,식당, 카페, 카지노, 마구간, 제과점, 작업실 등 공공시설
파밀리스테르 기즈 단면 / 자료 출처: Jean Baptiste Andre Godin, Social Solutions, 1871. Familistère Collection of Guise

➋ 북미

① 셰이커 커뮤니티 / 18세기 중반~, 마더 앤 리

셰이커 커뮤니티(Shaker Community)는 1774년 영국에서 건너온 마더 앤 리(Mother Ann Lee)가 뉴욕에 창설한 신흥 종교 공동체이다. 마더 앤 리는 풍요로움을 거부하며 출산의 고통과 영아 사망으로 인한 슬픔으로부터 여성을 구원한다는 믿음으로 독신주의를 주장했다. (당시 산업혁명으로 많은 어린이가 위험한 환경에서 자랐으므로 이 역시 산업혁명의 결과라 볼 수 있다.) 셰이커는 사실상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공동체 운동이라 볼 수 있다.

셰이커 커뮤니티는 독신과 남녀평등, 공동 소유, 금욕과 청빈을 강조했다. 공동체 안에서는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미 결혼한 가족도 셰이커 교도가 되면 가족 관계는 해체되고 각자의 생활을 하게 된다. 부모가 없는 아이를 입양해 돌보았으며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셰이커의 교육 시스템은 외부인도 인정할 만큼 체계적이어서, 주변 지역의 주민들이 자신의 자녀를 셰이커의 학교에 입학시킬 정도였다. 셰이커 교도가 세우고 그 이념을 기반으로 한 사립학교들이 아직도 미국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종교적 색채는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셰이커 커뮤니티는 남성보다 여성의 수가 2배 정도 많았으며, 20~45세 여성이 주로 참여했다. 독신주의를 따르는 공동체였기 때문에 개종 혹은 입양만을 통해 그 수를 늘릴 수 있었던 탓에, 남북전쟁 이후 공동체는 쇠퇴하였다. 하지만 셰이커 교도는 다른 종교 공동체와는 달리 주변 마을로부터 공동체를 격리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든 생활용품 등을 판매하며 이웃과 지속적인 교류를 유지했다. 본래 성격은 상당히 퇴색했으나 아직 미국 곳곳에 셰이커 교도들이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쉐이커 종교활동 / 자료 출처: Frank Leslie’s Popular Monthly Vol. XX July to December 1885

② 뉴하모니 / 1825~1828, 로버트 오웬

영국의 기업가이자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은 노동자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동조합을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역사적 인물이다. 당시 오웬은 자신의 사회주의적 사상의 실험장이었던 방직공장을 확장하려 했지만, 사유재산, 종교, 결혼 제도를 배척하던 그의 입장 때문에 영국의 정치인과 세력가들로부터 견제를 받자, 1825년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애나주에서 뉴하모니라는 공동체를 건설한다. 일종의 조합 공동체였고, 누구나 마을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뉴하모니는 ‘행복, 계몽, 기술, 협동을 통한 새로운 도덕적 세계’라는 슬로건 하에 2,000명 정도가 모여 살 수 있는 공동체 마을로 건설되었다. 그 후 1826년에는 ‘평등, 협동, 자유로운 발언권, 건강, 지식을 통한 뉴하모니 평등공동체’라는 슬로건을 새로운 비전으로 삼아 체제를 정비한다. 공동체 건설 초기부터 마을은 자체적인 법체계를 수립했다. 뉴하모니의 계급제도는 연령에 따랐으며 장년층이 평의회를 구성한다. 아이는 세 살이 되면 부모 곁을 떠나 전문 교육자와 육아 담당자에게 맡겨 양육된다.

퓨리에의 팔란스테레가 주식제로 계획되었던 반면, 오웬의 뉴하모니는 집단 공동소유제를 채택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일한 만큼 받은 크레딧을 마을의 가게에서 사용할 수 있으며, 일하지 않아서 크레딧을 받지 못한 사람은 크레딧을 현금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제도는 현실 속에서 문제를 드러낸다. 일한 자들과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간에 크레딧을 둘러싼 불화가 시작되었고, 늘어난 인구에 비해 물품이 부족해 자급자족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몇 번에 걸쳐 잘못된 점을 개선하고 일을 세분화해 뉴하모니의 재구성을 도모하였으나, 시스템의 혼란으로 사람들은 점차 마을을 떠났다. 또한, 공동 소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불만이 날로 커지자 결국 1828년 부터 뉴하모니는 사유재산을 인정했다. 사유재산의 인정 이후 마을은 점차 본래의 성격을 잃은 채 주변 지역에 흡수되어 갔고 결국 오웬은 1928년 영국으로 귀환한다. 나중에 그는 “여러 다른 종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마을, 즉 급진주의자, 원칙주의자, 자유주의자, 게으른 이론가들, 그리고 그 외의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 뉴하모니 공동체는 실패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뉴하모니의 초기 개념도. 평행사변형(Parallelogram)의 뉴하모니 공동체는 2,000명을 대상으로 계획되었다. 공동식당과 유치원, 학교, 도서관, 운동시설이 있으며 개인 공간은 최소의 공간으로 소박하다. 오웬은 가족의 개념을 새로이 정의하기 위하여 어른과 아이들의 주거 공간을 분리했다. / 출처: Engraving by F. Bate, London 1838

① 체육시설 ② 화원, 온실 ③ 목욕시설(남녀 각 4개씩) ④ 주방 및 식당 ⑤ 유아, 아동 및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 지층은 어른들을 위한 회의실 ⑥ 도서관 등 오피스 ⑦ 무도회장 및 음악실 ⑧ 극장, 전시실, 실험실, 작은 도서관 ⑨ 박물관, 도서관, 자료실 ⑩ 빵을 굽거나 음식을 제조하는 곳, 빨래방 ⑪ 어린이 식당 ⑫ 시계 탑, 조명 탑, 관측소, 굴뚝 ⑬ 어른 기숙사 ⑭ 미혼자 및 어린이 기숙사 ⑮ 자연길 산책로 ⑯ 다듬어진 보행로 ⑰ 아케이드와 테라스: 모든 건물이 이어져 있다 ⑱ 서비스 도로: 주방 및 다른 곳으로 물품 이동 통로

③ 오네이다 커뮤니티 / 1841~1881, 존 험프리 노이스

로버트 오웬은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종교와 가족을 장애물로 보고 이를 배제하였지만, 오네이다 커뮤니티(Oneida Community)의 창립자인 존 험프리 노이스(John Humphrey Noyes)는 종교와 대가족 제도를 통해 이기주의를 억제하고자 했다. 노이스는 이것이 사회주의 공동체를 설립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기본배경이라고 보았다. 노이스는 종교 없이는 사회주의 실현이 불가능하며, ‘대가족’ 제도가 이기주의를 없애는 동시에 이 같은 생활방식의 실용성을 입증할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오네이다에서는 남편과 아내를 공유하는 ‘복합결혼’을 실행했고, 우생학에 근거해 우월한 사람들로 하여금 출산하도록 했으며, 공동육아를 통해 자녀-부모의 유대 관계를 없애고자 했다. 최대 포용 인구는 300명으로 한정했으며, 사유재산도 인정하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마을 회의를 통해 서로에 대해 비판하며 본래 이념을 지키고자 하였다. 1877년부터 식기류 공장을 운영하였고 그에 따른 수입으로 공동체를 유지했다. 존 노이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테오 노이스(Theo Noyes)가 지도자가 되었으나 그는 공동체에 대한 신념이 부족했다. 지도자를 잃은 공동체는 여러 번의 개혁과 분열 후 해체되었고, 남은 70명의 멤버들은 1879년 공동체 대신 오네이다 리미티드(Oneida Ltd.)라는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오늘날 오네이다는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금속 식기류 회사의 브랜드 이름으로 남아 있다.

오네이다 커뮤니티의 공동식사 / 출처: The Syracuse University Library 1961

④ 아덴 빌리지 / 1900~, 프랭크 스티븐, 윌 프라이스

아덴 빌리지(Arden Village)는 단일세를 주장한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추종자들이 모여 설립한 예술인 마을이다. 조각가 프랭크 스티븐(Frank Stephens)과 건축가 윌 프라이스(Will Price)가 주축이 되어 만든 아덴 빌리지는, 토지로부터 얻는 세금과 그 가격 상승에서 얻는 이익금이 공적인 목적으로 이롭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아덴의 토지는 크게 하나로 구획되어 토지신탁에 의해 운용되고 면적 단위로 개인에게 임대된다. 토지 위의 건물은 임대자 소유이나 토지는 매매할 수 없으며, 99년의 갱신 가능한 임대계약을 통해 사용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임대 토지를 가꾸어 토지 상태를 개선시킬 수 있지만, 땅의 가치는 상승하지 않는다. 신탁은 토지 임대료만으로 마을 재정을 충당할 수 있도록 해 단일세가 실현되는 마을을 만들어 나간다. 읍민회와 가정토론회 등이 열리며 연극 등 여러 가지 커뮤니티 활동 및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아덴 빌리지는 단일세 실현을 위해 만들어진 예술인 공동체였으나, 이후 새로운 세력인 사회주의자들이 들어오면서 더는 예술인 공동주거 지대라는 의미는 없어졌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여전히 마을 내에서 단일세를 유지하며 여럿의 토지신탁을 통해 마을의 주택, 농장, 관리, 교육 등을 각각 전담하여 운용한다. 2010년 센서스에 따르면 아덴에는 439명이 거주한다. 단일세를 바탕으로 만든 공동주거지인 아덴은 이후 이웃에 유사한 성격의 공동체인 아덴타운(Ardentown, 1922)과 아덴크로프트(Ardencroft, 1950)가 세워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덴 빌리지 전경

II. 새로운 삶의 형태를 위한 장치: 20세기 러시아와 스웨덴

20세기 공동주거는 범국민적 사회 개혁의 도구이자 정치적 장치였다. 1920년대 러시아는 사회주의 국가운동의 일환으로 공동주거를 선전하고 의무화시켰다. 반면 그즈음 북유럽에서는 현대적 사고와 생활을 위해 여러 시민단체가 공동주거를 연구했다. 실용주의자들은 일상의 현대화와 가사노동의 단순화를 이룩하기 위한 주거 형태로 공동주거의 다양한 형태를 모색했고, 이후 공동주거에 대한 꾸준한 연구 및 홍보 활동을 통해 정부의 적극적인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➊ 러시아

① 코뮤날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러시아에서는 부르주아를 향한 노동계급의 반발이 일렁이기 시작하며 이와 함께 사회주의를 향한 사상들이 일어난다. 1902년 크로포트킨(Pyotr Alekseyevich Kropotkin, 1842~1921)은 『상호부조론(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1902) 등의 저서를 통해 아나키즘을 주장한다. 그는 인간이 상호부조를 통해 경쟁 안에서 협동하며 살아간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런 협동은 지배 구조가 만들어지는 대규모 사회보다는 소규모 사회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소규모 마을 안에서의 공동소유, 공동생산, 필요에 의한 분배를 강조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후, 레닌은 부동산의 개인 소유권을 폐지, 부르주아의 대주택을 몰수하고 재분배를 시작하여 노동계급에게 주택을 보급했다. 이와 동시에 주택을 통해 국가가 사람들의 삶 깊숙이 개입하고자 했다. 혁명 전에 지어진 대규모 공동주택을 ‘코뮤날카’(Kommunalka)라고 했는데, 이렇게 몰수된 주택은 국가의 소유가 되며, 입주자의 계급이나 배경과는 관계없이 1인당 정해진 주거면적(9㎡)의 기준에 따라 분할되어 배정받는다.3 이로써 가족 혹은 가정의 의미는 축소되고, 한 지붕 아래 다양한 가족이 모인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 안에서 일상적인 가사 활동이 분담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가족인 동시에 타인이었으며, 불가피하게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기도 했다.

주택의 국유화를 통해 주거가 무상으로 지급되면서 주택시설관리가 어려워지자 사람들의 주거 환경에 대한 불만도 커져갔다. 결국, 1922년 주택의 사적 소유권이 일부 허용되어, 국유화된 주택을 ‘주택임차인조합’에게 공동소유권의 형태로 넘겨주었다. 1953년 스탈린의 죽음 후,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점차 높아만 가는 ‘삶의 질 개선, 한 가구 주택, 사생활 보호’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개인 아파트의 건축을 허가했다. 하지만 이 또한 결과적으로는 주택의 질보다는 양을 늘리는 데 집중되어 주변 환경이나 교통 시스템의 개선 없이 주택만 만들어내면서 곧 슬럼화로 이어졌다.

② 사회적 응축기

‘사회적 응축기’(Social Condenser)는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적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한 도구로 고안된 개념이다. 프랑스 건축가 아나톨 콥(Anatole Kopp)은 사회적 응축기를 “기존의 습관을 변형시키고, 자본주의 체제하의 산물이었던 인간을 ‘새로운 인간’으로 변형시키는 건축 메커니즘으로서, 거주자에게 새로운 생활 방식을 위한 사회적 습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건물, 복합 시설 혹은 도시 전체를 의미한다”4고 서술했다. 소련은 이를 통해 개인 활동을 제한하고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를 주장하면서 이러한 이즘이 일상생활에 편이를 가져오며 여성들은 가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선전하며 사회 변화를 부추겼다.

③ 돔 코뮤나

코뮤날카와 달리 공동아파트인 돔 코뮤나(Dom Communa)는 개인을 공산주의적 단위로 전환시켜 사회주의적 인간을 형성하고자 한 사회적 응축기의 대표적인 예이다. 돔 코뮤나라는 명칭은 정부에서 지정한 용어로, ‘주택 공동체’를 말한다.

혁명 후 소련 정부는 산업화 운동과 도시화 운동을 집중적으로 선전했다. 이에 곧 도시의 인구 밀도는 높아졌고 정부는 주택난을 해결하고 당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실현을 목적으로 공동아파트 계획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돔 코뮤나는 편복도형 아파트가 대부분인데, 일반적으로 지층에 커뮤니티 시설이 있고 상층부에 거주 시설이 있다. 돔 코뮤나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무아제 긴즈버그(Moisei Ginzburg)는 복도가 ‘사회의 집합적 교환의 장’이 되길 기대했다.5

1920년대 돔 코뮤나에 대한 다양한 제안이 나왔는데, 가령 쿠츠민(L. Kuzmin)은 가족용 아파트를 해체하고 집단을 연령별로 나눠 각자의 방은 침실만 있고 대부분은 공동의 문화센터에서 지내는 공간을, 라브로프(V. Lavrov)는 사람의 활동을 여덟 가지로 분류해 십자형 블록을 만들었고, 삽소비치(L. Sbsovich)는 가족 개념을 넘어 부부 혹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무시하고 2,000~3,000명이 집단으로 살면서, 1인당 3.5mx2.3m의 공간을 주는 계획을 만든다. 한편 쿠츠민은 인간의 모든 생활은 조직적으로 제어되어야 한다는 개념 아래 노동자의 생활 패턴을 정확한 시간표로 작성하고 그것에 맞추어 평면이 시계 방향의 형태로 이루어진 돔 코뮤나를 계획하기도 한다.

“집단화의 결과 2~3년이 지나면, 우리는 […] 수만 명의 대규모 개별 농민경영을 가지게 될 것이다. […] 우리는 몇 개의 복합 공장에서 일하는 농업인구를 한데 모으는 새로운 거주센터를 건설할 것이다. […] 그러한 도시의 인구는 4~6만 명이 될 것이다. […] 사회주의 도시에서 거주 콤비나트는 노동자의 일상적, 문화적 요구를 사회적으로 완전히 보장해야 한다. 그런 집에는 개별 부엌, 개별 세탁장 등이 있어서는 안 되며, 그 안에는 개인의 방도, 공동의 방도, 가족의 방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집에서 노동자는 각자 개별적인 작은 방을 가져야만 한다. […] 방은 주로 숙면을 위해 주어져야 하므로 크지 않아야 한다. 이런 방은 사는 것이 아니라 잠만 자는 것이어야 한다.”6

주택의 국유화와 공동주거는 1955년 스탈린 정권에서 니키타 흐루시초프 정권으로의 교체와 함께 흔들리기 시작한다. 극심한 주택 공급의 불평등, 공동주택의 부실 관리, 예산 문제 등으로 흐루시초프는 국가 주도 주택 건설이 아닌 개인 주택 건축을 장려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자신의 돈으로 주택을 마련할 길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주택 배분’에 관한 개념이 과거와 달라지기 시작했고, 주택 부족을 해결하고자 정부에서는 ‘주택 소유권’을 인정하기에 이른다.7 이후 공동아파트들은 점차 없어지거나 슬럼화되었다.

➋ 스웨덴

1835년 스웨덴의 작가인 칼 요나스 로베 알름크비스트(Carl Jonas Love Almqvist)는 프랑스의 찰스 퓨리에의 아이디어에서 영향받은 에세이, <유니버설 호텔>(1835)을 발표한다. <유니버설 호텔>의 주인공인 카를은 여성 또한 돈을 벌고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모든 집안일이 공동으로 분담되는 집을 상상한다. 이는 가정 내 사랑과 평화를 위한 첩경이 공동가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903년 코펜하겐을 비롯해 스톡홀름, 베를린, 함부르크, 취리히, 프라하, 런던, 그리고 빈에서는 아파트 유닛 혹은 공동 중앙 식당 프로젝트가 생겨났다. 1905~7년 스톡홀름에서는 60개의 개인 주방이 없는 아파트가 지어졌다. 아파트들은 지하층에 주방을 두고 작은 음식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각 유닛으로 전달되게끔 했다. 이는 당시 여성의 사회참여를 위한 공동가사 활동이라기보다는 중산층 시민들이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누릴 수 없지만, 공동으로 비용을 부담하여 도우미 서비스를 누리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것으로, 시설에서 일하는 직원은 외부에서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1932년 사회학자인 알바 뮈르달(Alva Myrdal)과 건축가인 스벤 마르켈리우스(Sven Markelius)는 공동주거에 관한 계획을 발표했다. 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새로운 형태의 주거를 통해 사람들이 논리적이고 민주적인 새로운 현대 시민으로 거듭나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이들이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고, 스포츠와 레저활동을 통해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뮈르달과 마르켈리우스는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식당과 도서관, 유치원, 클럽방이 있으며 공동주방과 음식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를 계획하였으나 한편에선 ‘가족을 해체’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1932년 사회학자인 알바 뮈르달과 건축가인 스벤 마르켈리우스가 직업여성클럽(Profession Women’s Club)에서 공동주거에 관련된 프로파간다를 발표하였다. / 자료 출처: Swedish National Association of Cohousing, Kollektivhus NU

1934년 스웨덴 건축가 협회의 전시 《집과 가정용품의 표준화(Standard for home and household goods)》에서 그들은 ‘공공미술을 통한 개인 문화’(individual culture through public art)라는 슬로건 아래 맞벌이 부부를 위한 가사의 간소화를 주장했다. 1935년 마르켈리우스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소규모 코하우징 아파트를 짓는다. 이후 1938년에는 여성노동협회와 함께 미혼 여성 직장인을 위한 콜렉티브 아파트가 건축되면서 점차 코하우징에 대한 아이디어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공동주거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늘어남에 따라 이에 호응하는 움직임도 커졌지만, 한편에선 ‘아내는 가정에서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는 입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보수적이며 가부장적인 남성들 대다수가 공동주거에 반대했는데, 그들은 콜렉티브 하우스가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 일하는 기회를 더 많이 부여함에 따라 여성의 사회참여와 발언권이 높아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공동주거에 관한 아이디어는 1968년 청년층에 의해 다시 이슈화된다. 그들은 모두가 가사 일을 나누고 시설을 공유하며 남녀가 평등하게 가사와 육아에 책임을 지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1970년대부터 공동주거는 스웨덴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는다. 1970년대 후반, 전문인들로 구성된 BIG(Boi Gemenskap: ‘커뮤니티에서 함께 삶’이란 뜻) 그룹은 스웨덴 빌딩 리서치 위원회의 후원으로 새로운 코하우징에 대한 리서치인 ‘함께 일하기 모델’ 리포트를 발표했다. 그들은 그전까지의 공동주거의 목적이었던 ‘가사의 최소화’가 아닌 ‘가사의 협력화’를 목표로, 모두가 함께 일할 때 더욱 의미 있고 유익하며 시간도 절약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BIG 그룹은 기존 콜렉티브 하우스에 불필요한 서비스가 많다며,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찾아 추려내고자 했다. 

1980년부터 1990년 사이에 50여 개의 공동주거가 생겼다. 이중 대부분이 BIG의 제안을 따랐으나, 새로운 실험도 있었다. 가령 콜렉티브 하우스와 노인을 위한 서비스 주거가 합쳐진 형태가 한 예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인생 후반’(Second Half of Life)이라는 이름의 코하우징 모델이 나타났는데, 이는 가정에 아이가 없는 40대 이상을 위한 모델이다. 2006년, 스웨덴 정부 조직인 콜렉티브하우스 NU(Kollektivhus NU, 1981~)이 스웨덴 전역의 공동주거를 조사한 결과, 모두 43채의 공동주거 건물이 남아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 결과 이들 중 26채만이 본연의 아이디어를 이어 가고 있으며, 나머지 17채는 원래의 공공 서비스를 축소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스웨덴의 콜렉티브 하우스는 삶에 대한 다양한 요구가 낳은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스웨덴은 1인 혹은 2인 가구가 많다. 젊은 사람들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부모에게서 독립하며, 이혼율도 매우 높고 고령화로 인해 노인 인구도 매우 많다. 2012년 한 조사 논문에 의하면 지난 25년간 스웨덴의 1인 가구 수는 두 배로 늘었고, 현재 스웨덴 인구의 약 75%는 1인 혹은 2인 가구라고 한다.8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콜렉티브 하우스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는 가부장적인 사회가 보내는 반대 시선과 콜렉티브 하우스들이 가족을 해체해 인간의 삶에 해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 저변에 콜렉티브 하우스에 관한 정보와 이해가 부족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9

① 욘 에릭손스가탄 / 1930, 스톡홀름

욘 에릭손스가탄(John Ericssonsgatan)의 공동아파트는 18채의 스튜디오 유닛, 35채의 2개 침실 유닛, 그리고 4채의 복층 유닛으로 되어 있다. 가사활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동 주방, 레스토랑, 유치원 등을 갖추었고, 공동주방으로부터 음식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아파트 유닛 또한 최소한의 필요 면적으로 지어졌다. 기획 초기 단계에 의도했던 것과 달리 아이가 있는 가정보다 지식인들이 주로 입주했다.

② 스타켄 / 1969, 베리셴

스웨덴 밀리언 프로그램(Sweden Million Programme)에 의해 아파트로 지어졌으나, 1970년대 후반에 입주율이 낮아지자 정부에서 공동주거로 성격을 바꾸는 동시에, 평면 또한 공동주거에 맞게 변환시켰다. 2002년 입주민들은 협동조합을 만들어 건물을 정부로부터 사들여 건물에 대한 자치권을 갖게 된다. 현재 80명이 살고 있으며 모두 조합을 통해 아파트를 관리하고 있다. 아파트의 지층에는 워크숍 공간 및 사진현상실, 창고, 세탁실, 사우나, 카페, 자전거 창고 등이 있고, 5층에는 공동 주방과 식당, 육아시설, 작업장과 응접실 등이 있다.

스타켄 공동아파트 / 자료 출처: Swedish National Association of Cohousing

③ 페르드크네펜 / 1993, 스톡홀름

스웨덴은 현재 인구의 17.8%가 65세 이상이다. 1950년대 이후, 인구 고령화 문제가 이슈화되었고 이에 정부는 노인복지주택, 요양원, 양로원 등의 다양한 형태의 노인 복지시설을 도입했으며 체계적으로 제도화하였다. 이후 정부는 노인을 위한 아파트를 계속 늘려 2009년 33,000곳에 이른다. 매해 3,000~4,000개의 노인주거시설이 증가하는 추세이며 이중 2/3은 정부가, 1/3은 민간기업이 운영하고 있다. 2010년부터 스웨덴 정부는 노인주거 문제에 대한 연구에 다양한 지원 및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9 최초의 인생 후반(Second Half of Life) 프로젝트인 페르드크네펜(Färdknäppen)에는 45~89세까지 51명의 입주자가 살고 있으며, 이들 중 25%가 남성이고 75%가 여성이다. 지층과 지하층에 공용 공간이 있으며 입주자를 위한 여러 활동이 이루어진다.

III. 자본주의와 생존주의: 21세기 북미와 일본

1990년대 세계화 이후 신자유주의, 그리고 2000년대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21세기에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다양한 형태의 공동주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 개념의 가족 단위 해체, 부동산 문제, 여러 가지 경제 및 사회적 조건에 대응하기 위해 1인 가구와 핵가족 단위가 모이는 것이다.

➊ 북미

북미에서 공동주거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 이후 급증하기 시작했다. 70년대부터 80년대 초반,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 세대가 성장하면서 세대교체에 따른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그에 따른 대안으로 다양한 형태의 공동주거들이 나타났다.

미국은 1970년대 후반 이후 80년대에 부동산시장 거품으로 인해 잇따른 주택 문제를 겪게 된다. 가령 70년 이전에는 베이비붐 세대의 주택 구입이 활발했다. 그들은 교외화 정책(suburbanization)의 중심에 있던 세대로서 교외의 큰 집을 선호했고, 그에 따라 교외의 개인 주택이 굉장히 많이 지어졌다. 70년대 후반 이후 집값 상승에 따른 주택난을 타계하기 위해 정부는 저가형 주택공급을 위해 공동주택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노인 인구에 대한 대책도 70년대 이후 논의되었으며,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한 관심과 이해 또한 요구되었다. 1964년 이후 베이비붐 세대를 부모로 둔 이후 세대의 출산율이 점차 줄어들어 인구가 급감했고10, 급격히 늘어난 이혼율과 한 부모 가정의 증가에 따라 자녀 양육이 사회적 키워드로 급부상했다. 고령화 문제의 대안으로 혼자 사는 노인들이 양로원이 아닌 한 집에 모여 생활하거나, 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노인과 주택을 살 여력이 없는 젊은 세대가 한지붕 아래에 사는 형태도 생겨났다. 또한, 한 부모 가정 혹은 이혼 가정이 모여 살며 아이들을 돌보고 가사를 분담해 직장 생활도 가능하게 하는 집들도 나타났다.

2000년대에 미디어가 쏟아낸 기사를 분석해보면, 1인 가구, 특히 질 높은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미혼 여성과 그들의 주택에 대한 관심을 다룬 기사가 상당히 많다. 또 혼자 사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커지는 외로움과 소외를 다룬 기사가 많고, 그에 따라 이웃과 공동체의 중요성에도 관심을 둔다. 사람들은 경제적 여유와 높은 삶의 질을 추구한다. 자연스러운 귀결로 많은 사람이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면서, 그런 사람들이 모여 계획부터 설립까지 본인들이 참여하는 코하우징이 늘어나게 된다. 코하우징은 마을 형태로서 개인의 주택이 있고 중간부에 공동주방, 라운지, 운동시설, 게스트하우스 등의 공공시설이 있으며 환경보호 등의 소목적을 추구하는 커뮤니티도 있다.

2010년대 후반에는 공유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공유경제, 공유지식 등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네트워킹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산업이 등장한다. 주거 역시 하나의 네트워킹 도구로서 함께 살며 지식과 경제를 공유하는 공동주거 형태가 등장했다.

➋ 일본

① 라이프스타일로서의 셰어하우스

1980년대 이후 일본에서도 ‘전형적인 가족’의 비율이 줄고 1인 가구의 비율은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2005년 일본 총무성 통계국 조사에 의하면, 일본의 1인 가구는 전체 인구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노년층의 증가만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함에 따라 다양한 가구 형태가 등장했기 때문이다.11 이에 따라 혼자 사는 이들을 위한 여러 성격의 주거 공간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셰어하우스가 그중 하나다. 일본 사회의 특징이 반영된 셰어하우스는 한국에서도 부분적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의 셰어하우스 산업은 또 다른 형태의 부동산 사업으로 인기몰이하며 발전하고 있다. 셰어하우스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새로운 주거 양식을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으며, 도심의 원룸에 비해 임대료가 비교적 저렴하여, 지방 출신 혹은 싱글들의 초기 독립 비용으로 상대적으로 적게 든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빈번한 이동을 수반하는 도시 생활에 편리한 측면도 작용하는 듯하다. 여기에, 기존 주택 보유자 혹은 부동산 업계는 중고 부동산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셰어하우스의 열풍을 반가워한다.

셰어하우스 전문 중개업자인 ‘히츠지 부동산’은 공간을 알선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주거 문화를 리서치하기도 하는데, 이곳의 자료에 따르면, 2013년 3월 기준 일본에서는 1,378개의 셰어하우스에 19,208가구가 거주한다. 이 수치는 지난 3년 동안 약 2배가 늘어난 것인데, 그 증가율은 매년 30% 정도에 달한다.12

일본의 셰어하우스는 특히 외국인의 이용률이 높은데, 체류 외국인은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일본 현지인과의 교류를 통해 빠른 언어 습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 <테라스하우스>(후지티비, 2013), <셰어하우스의 연인들>(니폰티비, 2013)에서는 셰어하우스 안에서 맺어지는 다양한 관계들에 대해 다루는데, 한국에서도 셰어하우스를 테마로 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늘어나는 것은 변화하는 주거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반면, 라이프스타일로서가 아닌, 자연재해 혹은 빈곤 등 사회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만들어지는 셰어하우스도 있다. 도시형 콜렉티브 하우스를 중심으로 연구 및 제안을 하는 ‘대안주택프로젝트연구회’, 새로운 관계 속에서의 마을 만들기를 연구하는 ‘ALCC’(Alternative Living Challenge City), 그리고 민간비영리조직 NPO의 ‘콜렉티브하우징’ 등 다양한 조직들이 이런 흐름의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② 자연재해에 의한 공동주거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인해 고베 지역에는 공영주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콜렉티브 주택이 지어졌다. ‘언제든 누군가를 만날 수 있고 또 언제라도 혼자가 될 수 있는 생활, 가끔 대가족처럼 모여서 식사할 수 있는 주택’이라는 컨셉으로 불가항력의 자연재해로 집, 마을, 이웃을 잃은 사람들, 특히 독신 노년층을 위해 공동주거 형태를 선택한 것이다.③ 후레아이 주택운동

계속되는 일본의 경제 침체로 2008년 말부터 2009년 초,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는 프리터와 실업자들이 모여 텐트를 치고 시위를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실업과 주거 빈곤 문제가 수면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프리터란 비정규직을 일컫는 프리랜서와 아르바이트를 합쳐놓은 일본발 조어로 1987년 일본의 부동산 붕괴와 함께 처음 등장했으나, 2000년대 들어 프리터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며 더욱 빈번히 사용되는 추세다.

일부 프리터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활동을 펼친 사례가 보고되고 있으며, 그중 주목할만한 프로젝트가 바로 ‘자유와 생존의 집’과 같은 주택 제공 사업이다. ‘자유와 생존의 집’ 프로젝트는 집세가 높게 책정되는 것을 막고자 조합원들이 직접 주택을 보수하고 관리할 수 있게 지원해주며 별도의 보증금과 사례금은 받지 않는다. 보증인 또한 따로 요구하지 않아 입주 절차를 편리하게 하였으며, 입주 후에는 아직 일자리를 얻지 못한 입주자를 위한 다양한 지역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입주자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14

해외 공동주거 사례

분량17,822자 / 40분 / 도판 19장

발행일2015년 2월 10일

유형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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