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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것, 두 개의 스레드

김상호

기술(art)과 이야기(story), 삶것에는 두 개의 스레드가 상시 작동한다. 삶것의 기술은 건축술(technology)이 아니라, 건축술을 구현하는 기술을 고안해내는 기술이다. 건축을 구상하는 방식으로서의 기술에 대한 원리적인 접근은 자연스럽게 프로젝트의 과정과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일반화시켜 말하면 ‘다이어그램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프로젝트에서 어떤 결과(결론)를 만들어내는 다이어그램(기계)을 고안해 프로젝트(를 생각하는 머리) 안에 집어넣고 가동시키는 것이다. 직관과 통찰에서 나오는 이 다이어그램은 분석적인 기계가 아니라 생성적인 기계다. 일단 스위치가 켜지면 기계는 자율적(기계적)으로 돌아가고, 그것의 고안자는 기계가 움직이며 그려내는 경로를 추적, 관찰한다. 최종적으로 도달한 결과물이 마음에 들면 취하고, 그렇지 않으면 기계를 업그레이드하거나 다른 것으로 교체한다.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기술은 삶것의 특기로 잘 알려진 컴퓨테이션이나 알고리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손에 잡히는) 조작 가능한 레고 블록식 모형, (더 통념적인) 그래픽 다이어그램, (더 직설적인) 프로젝트의 조건이 투사된 윤곽선, (더 개인적인) 영감을 받은 일상 속 이미지나 장면 등등 어디에든 들어 있다. 나열한 예시들이 뒤로 갈수록 기술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느낌이겠지만, 그것은 생각을 밖으로 꺼내 설명하기 위해 시각적으로 볼 수 있고, 떠올릴 수 있는 연상물로 표현하고,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는 저마다 보이지 않는 기계가 돌아가고 있다. 

삶것의 건축 속에 들어있는 이런 기술에 대한 묘사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인상이다. 실제 삶것의 설계 방법이나 프로세스가 어떤지 모른 채로 해보는 짐작이다. 내 짐작이 어느 정도 맞다면 삶것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의 모습들이 종잡을 수 없는 연유이기도 할 것이다. 건축설계의 도구인 다이어그램 자체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차이를 만드는 지점은 그것이 얼마나 더 생성적으로 쓰이느냐, 얼마나 더 프로세스의 앞단에 놓여 있느냐, 얼마나 더 엔지니어링되어 있느냐다. 삶것은 현업 건축계에서 독보적인 컴퓨테이션에 대한 이해도와 경험치를 바탕으로 다이어그램적으로 건축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이 설계사무소 삶것이 오래 전에 체득한 원천 기술이고, 흔히 언급되는 밋밋한 보통 명사의 다이어그램과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건축을 개념화, 정보화하고, 계산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생각보다 침투성이 강해서 한번 체화되고 나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동으로 돌아간다.

또 하나의 삶것만의 특별함은 이야기(스토리텔링)다. 우리가 SF에 매료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곧바로 깨닫게 된다. Science는 혼자 두면 거기 몸담은 전문가가 아니고는 유별난 덕후에게나 관심을 받을 뿐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난해하고 복잡하고 지루한, 그래서 마냥 피곤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Fiction으로 감싸지는 순간 많은 사람이 Science에 빠져들게 된다. (SF가 순전히 Fiction만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이 지점에서 SF와 판타지가 완벽하게 갈린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이야기의 힘을 빌리면 과학을 쉽고 빠르게 이해하게 되고, 급기야 나중에 그것을 직접 공부하는 지경에 이른다. 기술적인(서술적인) 설명은 금세 기억에서 사라지지만, 이야기는 뇌리에 깊이 새겨진다. (양자학이나 평행우주론처럼 그 자체가 ‘왠지 모르지만’ 매혹적인 경우는 예외로 하고) 이야기의 힘은 내용(사실)의 힘을 뛰어넘는다.

삶것은 설계 작업을 크고 작은 스토리로 구성하고, 스토리텔링으로 작업에 마침표를 찍는다. (얼마 전 개편된 홈페이지에서는 거의 사라졌지만 이전 웹사이트는 그 자체가 이야기 모음집이었다.) 강한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스토리텔링은 팀 내에서든 클라이언트에게든 프로젝트를 이해시키고 공유하고 설득하는 데 매우 유용하고, 효과적일 것이다. (요즘은 클라이언트에게 일종의 영상편지도 띄운다.) 건축의 과정이든 결과든 그것이 잘 전달되려면 ‘건축적인’ 설명이나 주장만으로는 부족하고 그것을 이야기 속에 담아야 한다는 것을 삶것은 진작부터 알고 의식적으로 실천해왔다. 많은 설계사무소들이 프로젝트 ‘설명’을 열심히 한다. 어렵사리 얻은 잡지 지면에 게재하고,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하게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고, 방방곡곡 부지런히 강연과 발표를 다닌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이야기’로 들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건축을 이야기로(이야기에) 녹여내는 것이야말로 건축을 회자시키고 유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SF가 과학을 그렇게 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결국, 이야기와 기술, 이 둘은 연결되어 있다.

지금도 인상에 남아 있는 예를 몇 개만 들어보면 이렇다. 아모레퍼시픽의 공원관리소는 건물을 둘러싸는 외벽을 캔틸레버 구조로 들어 올린 것이 설계의 핵심이다. 시설에 필요한 기능을 좁은 땅 안에서 해결하기 위한 조치다. 이 개념을 ㄱ자로 꺾인 핸드레일 위에 택배 상자를 올려놓았던 일상 속 장면과 그것을 다시 다듬은 블록 모형을 가지고 이야기로 푼다. 프로그램을 색으로 구분한 블록 모형은 평창동 주택 겸 갤러리 설명에도 등장한다.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공간을 한 건물에 경제적으로 소화하기 위해 주택과 갤러리의 계단을 꽈배기처럼 꼬아 넣은 것이 중요한 전략이었는데, 언뜻 머릿속에 그리기 어려운 계단실의 구조를 모형으로 쉽게 설명한다. 움직이는 블록 장난감 같은 이런 모형은 건물 인형극의 인형 같은 것이다. 코스모40의 모형은 훨씬 건축적(통념적)이지만, 그것이 전달하는 설계 개념은 매우 단순명쾌하고 그래서 강력하다. (프로젝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복합적인 조건의 리모델링 과정과 복잡한 요소로 가득한 건물에 담긴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나 이 와이어프레임 모형의 질서정연한 그리드 속으로 수렴된다.

삶것의 첫 ‘건물’인 남해 소솔집은 이야기 덩어리다. 유가 폭등과 운송 파업, 도시의 먹거리와 라이프스타일, 귀촌과 자족적인 삶, 넷 제로 에너지와 태양광 발전, 건물 단열과 친환경 건축 등 2012년 무렵 소솔집의 건축주와 건축가가 마주했던 세상 이야기가 60평짜리 시골집에 다 들어 있다. 소박하고 평범한 집을 설계하고 짓는 동안 있었던 온갖 생각과 일들이 건물 완성과 함께 하나의 스토리로 패키징되어 다양한 매체를 타고 퍼져나갔다. 소솔집을 짓기 전까지의 삶것(더 리빙)은 더 순수한 스토리텔러였다.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리빙 라이트는 도시의 대기 상태를 시민들과 재미있는 방식으로 주고받는 공공예술 작업이었다. 리빙 라이트를 비롯해 비슷한 시기에 진행했던 일련의 프로젝트: 뉴욕 이스트강의 물고기와 시민과의 문자 대화를 시도했던 앰피비어스 아키텍처, 건물과 건물의 대화를 통해 숨쉬는 파사드를 만든 리빙 시티도 건축가보다는 괴짜 기술자의 실험물과 예술가의 설치 작업 사이에서 무엇으로 규정짓기 어려운 작업들이었다. (이번 포럼에서 양수인은 여기에 ‘약간 건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이디어 트리, 여보세요, 이야기 스윙, 원심림 등 건축의 경계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작업들이 환경, 생태, 사회의 이슈를 정보통신기술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엔지니어링한 ‘이야기들’이라는 점이다.

‘약간 건축’(스러운 것)으로 시작한 삶것은 이제 기업의 사옥을 짓는 ‘몹시 건축’스러운 팀이 되었다. 10여 년 전 양수인은 ‘양 소장이자, 양 작가이자, 양 사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적이 있다. 호칭은 상대방이 부르는 것이지 자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며, 그 호칭 속에 자신을 부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담겨 있다고 했다. (매우 와닿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건축계에서는 양 소장이었고, 미술계에서는 양 작가였고,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양 사장이었다. 건축계는 예나 지금이나 건축(가)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구분 지으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것은 점점 더 묘연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 그는 양 작가도 양 소장도 양 사장도 아닌 양 대표가 되었고, 삶것은 아틀리에를 벗어나 ‘회사’를 향해 가고 있다. 사실 삶것의 가장 큰 변화는 이 부분인 것 같다. ‘약간 건축’의 DNA를 품은 삶것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진화하게 될지 궁금하다.

김상호 건축신문 편집장

삶, 것, 두 개의 스레드

분량4,021자 / 8분

발행일2023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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