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겹의 여정
김상호
분량2,910자 / 6분
발행일2023년 11월 17일
유형서문
때는 바야흐로 코로나 팬데믹 시절 2년 차의 한중간, 우리는 모두 ‘여행’에 목말라 있었다.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에 시작된 코로나19는 언제나 당연히 열려 있던 세계의 문을 모두 닫게 만들었고, 우리는 집안에 갇혀 배달 음식들로 연명하며 2년을 보냈다. 2023년 5월말 공식적인 엔데믹을 맞았다. 그런데 세계는 2022년 여름부터 사실상 엔데믹이었고, ‘취향거처: 다름의 여행’도 그때 이미 공모전 세팅을 마쳤다. 그만큼 지긋지긋한 방구석을 떠나고 싶은 기운이 주위를 꽉 채우고 있었다. 참다못한 사람들은 그해 겨울부터 이미 앞다퉈 여행을 떠났다. 비행기표 값이 여전히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고, 모처럼 맛보는 이국의 풍경과 공기에 한껏 취해 돌아왔다. 그러기를 몇 개월, 해외여행의 열기는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금세 잦아들었다. 복합적으로 엮인 직접적인 요인들과는 별개로, 코로나 시절 반사적으로 급증했던 국내 여행의 경험이 기존 여행의 어떤 부분을 바꿔놓은 것 같다. 그 변화의 배경도 당연히 복합적일 것이다.
정림학생건축상 2023은 ‘취향 거처’라는 말로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달라진 여행을 다시 정의했다. ‘초개인화’ 시대 각자의 취향이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여행으로 발현되고, 그것이 공유, 확장, 소비되면서 일종의 장소적 팬덤이 형성하는 것이다. 어쩌면 오래전 최초의 여행이라는 것도 그랬을지 모른다. 까마득한 옛날에는 한 개인의 작은 여행은 다른 사람에게 이어지지 않았겠지만, ‘초연결’ 시대인 지금은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네트워크에 올려지고 단숨에 공유된다. 그래서 ‘다름의 여행’, 즉 각자의 여행이 계속해서 생성, 소멸되고, 그중 우연히(?) 많은 개인들에게 ‘공감’받은 여행은 소멸되지 않고 ‘상품’이 된다. 가까운 과거의 많은 여행 상품도 처음엔 그렇게 출발했을 것이다. 차이라면, 여행을 성립시키는 요소들이 더 크고, 길고, 많았어야 했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행 역시 ‘규모의 경제’, ‘글로벌’ 비즈니스였다. 그런데 ‘취향 거처’의 여행은 ‘페르소나’와 ‘로컬’이 핵심이다. 로컬은 자연스럽고(당연하기까지 한) 글로벌 시대의 반향으로서의 귀결이고, 페르소나는 ‘개취’와 ‘공감’이라는 양극을 하나로 잇는 초연결 시대가 열어준 귀결이다.
한편, ‘취향 거처’는 여행을 개인화하기도 했지만, 장소화하기도 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국지적 장소화, 혹은 점에서 점으로의 점프로 봤다. 여행은 당연히 장소를 향하지만, ‘여정’을 빼고 생각할 수 없다. 점과 점을 잇는 선 위에, 머묾이 아닌 움직임 속에 여행의 다른 절반이 들어 있다. 미지의 도착지까지 이르는 여정과 그곳을 베이스 삼아 다시 펼쳐지는 여러 갈래의 여정들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이다. 이번 공모전에서 이 여행의 속성을 담아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초기에 주제와 과제를 세팅할 때 이를 논의했었지만, 무게 중심이 개인화와 취향으로 옮겨감에 따라 여행의 여정은 설계의 사전 리서치나 프로그램 정도로 흡수되었다. ‘건축’ ‘설계’ 공모전의 관성이 주는 한계일 수도 있고, 모든 것을 다 포함하기 어려운 ‘공모전’의 한계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요즘 우리의 여행이라는 것이 더는 길 위에 있지 않고 공간 안에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작은 방에서도 우리는 클릭 한 번, 터치 한 번으로 어디로든 연결되고 누구든 만날 수 있다. 굳이 VR, AR 같은 특수한 기술을 빌리지 않고도 우리는 이미 가상과 증강의 세계에 둘러싸여 가상의 여행을 매일 떠날 수 있다. 우리의 세계는 이미 글로벌을 초월해 (이미 식상해진) 올드 소셜미디어와 릴스와 틱톡, 넷플릭스와 엑스박스의 세계로 한 차원 확장된 지 오래기 때문이다. 그러니 새로운 여행도 어쩌면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와 허브들 속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스테이라는 건축 유형은 이런 환경 속에서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공간에 취향을 담아 장소화한 것을 스테이라고 한다면, 그 스테이(stay)로 떠나는 여행의 본질은 그곳에 머무는(stay) 데 있는 셈이다.
팬데믹과 엔데믹, 새로운 여행과 스테이, 페르소나와 취향 같은 이야기들과 무관하게, 킥오프 미팅부터 연계 포럼까지 심사그룹과 함께한 1년이야말로 모처럼의 신나는 여정이었다. 공모전이라는 또 다른 종류의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심사그룹 내부 의견 조율 과정은 거의 끝장 토론 수준이었다. 기획회의 때마다 불타는 공방전의 전초전까지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짐작만 할 따름이다. 언제나 다음 회의 때는 이전 회의 때 갈렸던 의견들이 하나로 정리되어 있었다. 가끔 다 꺼지지 않은 잔불이 다시 올라올 낌새가 보이면 3초 안에 상황이 종료됐다. 세 사람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았고, 늘 그래왔던 마냥 그런 과정을 익숙하게 다뤘다. 심사그룹 내의 치열한 준비는 모두가 이번 공모와 심사를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저마다의 취향과 세태가 묻어나는 제출안 하나하나에 몰입했고, 그렇게 다 같이 300개의 여행 속으로 빠져들었다. 최종심사를 마치고 나서 심사위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너무 재밌는데, 한 번 더 할까요?’ 했다.
정림학생건축상의 주제는 해마다 거대 담론과 일상 담론 사이를 오간다. ‘지금, 한국성’(2022), ‘재난건축’(2016), ‘일상의 건축: 삶과 공간의 관계 회복을 위한 건축’(2013) 등이 대표적으로 전자에 해당하고, ‘취향거처, 다름의 여행’(2023), ‘밤의 도서관’(2021), ‘우리 동네 청와대’(2017) 등이 후자에 해당한다. 주제의 스케일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거대 담론이 거대해진 채로 끝나지 않고, 일상 담론이 일상에 머문 채로 끝나지 않게 하는 것, 다시 말해 큰 이야기일수록 현실에 발을 붙이게 하고, 작은 이야기일수록 그 너머의 세계를 향하게 하는 것이다. 몇 개의 단어, 한 줄의 문장을 갈고닦아 학생, 심사위원, 건축계가 함께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다운 주제를 벼려내는 것이 정림학생건축상의 출발점이고 도착점이다.
김상호 정림건축문화재단 실장
몇 겹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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