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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한국 건축과 건축 저널리즘

김상호, 박성진, 정귀원 × 박성태

건축 저널리즘은 생기를 잃을 것이고, 건축 저널리스트는 곧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할 것으로 전망되어 왔다. 이러한 격랑 속에서 『와이드AR』, 『공간』, 『다큐멘텀』 등 국내의 건축 저널은 자신만의 차별성을 유지하며 거센 바람에 맞서고 있다. 해외발 건축 프로젝트 소개 웹사이트의 붐 속에서도 종이 잡지의 생명력을 잃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고군분투하는 이들 매체의 편집장을 초대해 현재 건축 저널의 상황과 고민, 그리고 한국 건축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지난 한해를 돌아봤다.


김상호 국민대학교에서 건축 설계를 공부했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설계 과정을 구조주의 관점으로 분석한 논문으로 석사를 받았다. 건축이 우리 사회에서 접근 가능한 문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매체 일을 시작했다. 『공간』 에디터로 일했고, 현재 『다큐멘텀』 편집장을 맡고 있다.

박성진 현재 『공간』의 편집장 대행을 맡고 있다. 국민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스페인 국립 마드리드공과대학에서 건축역사이론을 공부했으며, 저서로 『모던스케이프』와 『언젠가 한 번쯤, 스페인』, 공저서로 『궁궐의 눈물, 백년의 침묵』, 엮은 책으로 『집 더하기 삶』 등이 있다.

정귀원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건축에서 건축 실무를 익혔다. 『공간』, 『건축인 POAR』 등의 건축 전문지를 거쳐 현재 『와이드AR』 편집장으로 한국의 건축과 도시를 ‘와이드’하게 바라보고 있다.

진행 박성태 본지 편집인


한국 건축의 주요 현상, 젊은 건축가

박성태 올해 한국 건축계에 사건이 많았죠. 주목할 현상이나 인물이 있다면?

박성진 건축계 안에서 일어나는 ‘젊은’이라는 수사의 사회적, 형식적 소비 현상이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이슈였다고 생각해요. 이전에 《건축신문》에서 세대론을 다룬다고 해서 내심 기대가 컸는데, 《건축신문》의 비판적 시각이 뚜렷하지 않아 흐지부지된 것 같아 아쉬움을 남겼죠.

정귀원 경기 위기 때문이든, 극복할 대상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든 젊은 건축가들은 확실히 이전 세대와는 다른 태도를 견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어려운 여건 속에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활로를 모색하는 것에 응원을 보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존’이 화두가 되는 상황이 과연 좋기만 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그것 외에 건축이 지향하는 바를 뚜렷하게 보여주지 않아서 비판받는 측면도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성진 요즘 젊은 건축가들은 사유 방식과 그 층위가 전과는 확연히 다른 것 같아요. 과거 ‘사유’라는 것 자체가 건축을 지나치게 무겁게 만들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끌고 가지 않았을까요? 건축을 개념으로 바라보던 2000년대 초반과는 다르게 지금은 많은 젊은 건축가들이 언어화된 자기 개념보다는 하나의 분명한 사실로서, 혹은 주어진 상황으로서의 건축에 좀 더 집중하고 즐기는 편이에요. 예전에는 자기 언어에 대한 강박이 있었죠. 근래에 젊은 건축가들은 그 언어에 대한 강박보다는 상황에 맞게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유연성을 갖추었고, 자기 언어에 대한 고민이 깊진 않더라도 상황에 대한 분석과 수용력이 좋아진 것 같아요. 그런데 매체들이 젊은 건축가를 다루는 방식에는 좀 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해 보여요. 일간지만이 아니라 건축 전문지에서도 어느 순간 경쟁적으로 젊은 건축가를 다루고 있는데 많은 기성 건축가들이 이런 현상에 불만을 갖고 있어요. 아직까지 자기 언어가 확립되지 않은 젊은 건축가를 작가인 것처럼 다루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죠. 젊은 건축가의 이미지가 흡사 후기 산업사회의 문화적 상표처럼 지나치게 소비적으로 유통되고 사용되는 분위기입니다.

정귀원 열심히 사는 모습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겁은 나지만, 이론이나 규범에 의존하지 않고 상황에 집중하는 건축가라는 것이, 좀 비약하자면 건축가 스스로가 80~90년대엔 저평가했던 생계형 건축가와 뭐가 다른가 싶을 때가 있어요. 아주 세련됐다는 것 빼곤 말이죠.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렇고 아니고를 떠나서 젊은 건축가의 작업을 워낙 일방적으로 응원하거나 띄우는 분위기라서…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나중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수가 있겠죠.

김상호 저는 한 사람의 작품 세계를 논하기 이전에 한국 건축의 평균 수준을 높이는 것이라고 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원래는 소위 허가방 건축가와 작가 건축가 사이에 중간 층위가 많이 얽혀 있었어야 하는 건데, 한국이 유난히 그 격차가 크다 보니 그런 잣대가 생겼다고 봐요. 이제서야 중간 지점이 많이 채워지고 있는 것 같고요.

정귀원 저는 일간지에서 젊은 건축가를 띄우는 것에는 긍정적이에요. 파급력만 보더라도 일간지는 건축이 대중과 만나는 굉장히 중요한 소통 창구니까요. 그보다는 박성진 편집장의 말처럼 전문지에서는 어떻게 다뤄야 하나를 고민해야 하는데, 사실 딱히 다른 얘기를 끄집어 낼 수 없다는 게 문제예요. 그러다보니 결국 크리틱 대신 리포터의 글 정도가 따라붙는 거고요.

김상호 너무 이른 걱정이라고 봐요. 당장은 이런 건물이 어떻게 매체에 소개가 되나 싶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장도 매체도 어떤 식으로든 필터링할 거라고 생각해요. 취재하다 보면 고민이 많이 되는 건 사실이에요. 어젯밤에는 게재할 생각이었는데, 아침에 다시 보면 생각이 바뀌기도 해서 한 달 넘게 결정을 못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럼에도 결국 싣게 되는 것은 저희 잡지가 보내는 관심의 표현이자 응원이에요. 건축가의 초기 작업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아요.

박성진 나이가 적다고 해서 젊은 건축가는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이 젊은 건지, 건축이 젊은 건지 재문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요? 저는 건축이 젊어야 한다고 봐요. 일군에서 새로운 조형과 재료적 실험을 보여주고 있지만 설계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고민과 새로운 건축의 생산 방식에 대한 탐구는 제대로 이뤄지는 것 같지가 않아요. 오히려 연세가 많지만 유걸 선생님이 ‘청년 유걸’이라는 별명답게 젊은 사고를 보여주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분은 클라이언트 없는 건축, 기능이 배제된 건축, 맥락이 배제된 건축 등 자신의 고착화된 생각과 행동방식을 갱신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시잖아요. 변화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젊은 건축가가 기성 건축가가 고민하지 못했던 건축을 실현해나가고 그 속에서 구체적인 현실탐구와 자기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서는 지금 많은 젊은 건축가들이 이미 기성화 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정귀원 그런데 우리나라는 젊은 건축가가 건축을 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죠. 그러다 보니 설계에 집중하기도 바쁜데 스스로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일까지 떠안을 수밖에요. 공공 건축과 관련된 문제들도 그렇고 설계비나 설계 감리, 또 저작권 문제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김상호 ‘젊은’ 이라는 용어의 정의가 모호한 것 같은데 좀 더 정직하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제안하자면, 젊은 건축가는 신인 건축가와 신진 건축가 정도를 아우르는 말이 되어야 하는 것 같고, 현재 젊은 건축가 범주에 포함된 건축가 중에 어느 정도 작업이 쌓여서 디자인 경향이 보이는 이들은 중진 건축가로 구분해서, 그 모호함을 좀 덜어내면 좋겠어요. 이런 구분의 기준은 또 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적어도 신인은 명확하잖아요. 독립 후 처음 작업을 발표하는 경우니까요.

그리고 건축의 개념과 건축 공간의 철학에 빈곤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박성태 선배가 주장해 온 세대론의 또 다른 측면일 수 있어요. 그건 지금 세대의 문제라기보다는 이전 세대 건축가들이 너무 그런 식의 건축만 이야기해 온 거예요. 허가방이나 집장사라는 말이 계속 오르내리는 이유는 그동안 ‘건물’의 퀄리티에 대한 이야기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고요. 생활의 질이라든지 시공 수준에 대한 얘기는 없고, 그저 작가냐 집장사냐로만 나누었던 게 문제였죠. 지금의 젊은 건축가들이 이제서야 그 빈 틈을 채우고 있는 거죠. 현행 제도의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선배들이 챙기지 못한 것들을 이제와서 바로 잡으려니까 힘든 거죠. 서울시 공공건축가 같은 제도에도 그런 문제가 있어요. 젊은 건축가에게 공공 건축에 참여할 기회를 준다는 명분으로 지명 현상이나 자문을 맡기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잘못된 제도와 시스템부터 고칠 엄두가 안 나니 땜질만 하고 있거든요. 다들 젊은 건축가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 것 같아요.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의 명과 암

박성태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서 건축가 조민석이 황금사자상을 받았습니다. 여기 세 분 모두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했지요. 현장의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박성진 매우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던 건 맞아요. 『공간』 입장에서도 비교적 쉽게 해외 필자들을 섭외하고 글을 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황금사자상은 한국관의 전시기획을 높게 평가한 것이지, 한국의 현대건축을 평가해 상을 준 게 아니라는 거죠. 큐레이팅에 주는 상인데 이것이 한국 건축의 브랜드로 이어지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전시 큐레이팅이라는 기획의 측면이 한국 현대건축이라는 주체적인 브랜드로 발전되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자면 민간의 힘도 분명 필요하겠지만 공공에서 조직적으로 활용해야 하는데, 수상 이후 공공에서 리액션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김상호 너무 일찍 받은 것 같아요. 한두 회 뒤에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해요. 갑자기 최고상을 받긴 했는데 이를 추진력 삼아 이어갈 다음 주자나 전략이 없으니까요. 우리 건축계는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특출난 한 건축가가 마치 김연아 선수처럼 혼자 세계 경기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온 형국이죠.

정귀원 제가 아쉬웠던 점은, 한국 건축계에 문제의식을 제시하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거나, 북한 건축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다거나, 아니면 리서치 작업의 중요성을 첨예하게 드러낸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적 성과가 좀 약했다는 거예요. 곧 귀국전을 하게 될 테니, 그때 또 다른 이야깃거리들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기대해 봐야죠. 전시를 지면으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다를 테니까요. 한국 건축에 뭔가 메시지를 던지는 자리가 될지, 아니면 다시 한 번 건축가 개인의 큐레이팅 능력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인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요.

박성진 베니스에서 수상 소식이 전해졌을 때 단순하게 환호만 했을 게 아니라 한편에서 공공에서는 별도의 TF 팀을 준비하고, 그다음의 실행 전략은 무엇이어야 할지 고민했어야 했다는 거죠. 우리는 오로지 환호하는 데 열을 올려 그 이후에 대해선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황 같아요. 지금 플라토 미술관에서 건축가 조민석의 전시가 진행 중인데, 그것과 적절히 섞여서 새로운 형태의 기획이 이루어졌다면 베니스에서 얻은 성과와 공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슈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을 거라는 겁니다.

김상호 그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최근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는 건축전시과 건축상인 것 같아요. 수상 당시 반짝 기사가 나오고 나서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한동안 조용했어요. 그러다가 지자체와 단체마다 너도나도 전시와 상을 새로 만들기 시작했죠. 면면을 보면 한숨이 나오는 게 많아요. 황금사자상은 이런 식으로 호도되기에는 아까운 기회죠.

눈에 띄게 늘어난 건축전시와 아카이빙

정귀원 베니스 비엔날레를 비롯해서 올해는 유난히 건축전시가 많았던 것 같아요. 올 가을에만도 14개 건의 건축전시가 열린다고 하더라고요.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만도 두 건이 진행되고 있어요. 《장소와 재탄생- 한국근대건축의 확장과 충돌》과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조화-김종성》 전이 그것인데, 학술적 전시라고 할 수 있는 이 들은 아카이브 자료를 기반으로 하지요. 하지만 이제 막 자료들을 아카이빙하기 시작한 현실에서는 이 전시들이 빈약해보일 수밖에 없어요. 자료가 탄탄하게 축적된 상태에서 자료를 선별하는 기획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찾고 모으고 만드는 일에 매달려야 하는 거죠. 아카이브가 잘 구축되어 있으면 건축가협회의 전시도 한국 건축의 단면을 보여 주는 기획 전시가 가능할 테고, 지금보다는 완성도를 높일 수 있겠죠. 다행히 국립현대미술관이나 목천문화재단이 아카이빙 작업을 하고 있고, 건축 큐레이터나 아키비스트 같은 전문 직종도 생겨나고, 또 들은 얘기지만 이들의 국제적인 네크워크에 한국 건축 전문가들이 참여하기도 하고… 이처럼 뭔가 새로운 기운들이 형성되고 있어서 내년에는 좀 더 나은 건축전시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상호 건축전시 유행도 황금사자상 수상과 같은 문제를 갖고 있어요. 준비는 안 돼 있는데 건축이라는 콘텐츠가 뜬 거죠. 그래서 부랴부랴 아카이브도 하고 전시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양쪽을 강행하니 기획도 어렵고, 준비 과정에서 손발도 안 맞는 거죠. 게다가 부랴부랴 수집한 전시품들을 전시 후에 관리할 시스템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요. 건축 자료를 기존 미술 아카이브 포맷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문제고요.

박성태 건축전이 올해 수십 개가 된다면 내년에는 수십 개 플러스 알파일 거 아니에요? 아마 진척이 있으려면 관련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프로세스나 결과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나 어떤 것들이 계속 만들어서 축적해야겠죠. 건축 전문지의 아카이빙도 해야 하고요.

정귀원 2013년 10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미술연구센터가 개소했어요. 아카이브의 수집, 정리, 보존, 서비스 등을 과제로 삼고 있는데, 물론 건축 부문을 포함하고 있고요. 2014년 12월에는 소장자료 원본 열람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해요. 여기서 일하는 아키비스트 6명 중에 건축 아키비스트가 한 명 있더라고요.

박성진 아카이브가 행위만 지칭하는 게 아니라 기록물이 모인 장소와 공간이 먼저 마련되어야 하잖아요. 그러니 엄밀히 말해 국내에 건축 아카이브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선뜻 그렇다고 할 수 없는 거죠. 먼저 물리적인 공간이 확보되고 그 공간을 운영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인력이 있어야 하는데 민간에서는 사실 엄두를 못 내죠. 목천건축아카이브는 너무 작아 지속성에 의심이 생기고, 세종시 지어질 도시건축박물관 정도가 아카이브 기능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는데 그것도 실행이나 구현, 완공이 묘연한 상태고요. 눈에 보이진 않지만 미술관이나 작가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것이 수장고잖아요. 보이지 않지만 엄청나게 거대한 작품들의 콜렉션이 보관되고, 전시되고 다시 보관이 되는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중추적 공간요소인데, 우리 건축계에는 그런 공간이 부족하지 않나 해요.

정귀원 국립현대미술관은 아카이브 전용 수장고를 확보한 것 같고, 목천건축아카이브는 아는 바가 없지만, 어쨌거나 아카이브가 중요한 만큼 공간과 전문 인력 모두 앞으로 지속적으로 보완되어야 하는 부분이겠죠.

김상호 미술과는 다르게 건축은 아카이브 만으로도 전시가 가능하고, 그래야만 하는 분야예요. 그런데 아카이브 자체가 없으니 문제죠. 건축을 미술처럼만 전시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예요. 매번 전시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 정작 전시에 참여하는 건축가는 프로젝트에 쏟아야 할 자원으로 전시물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되풀이 되고 있어요. 건축가가 관심이 있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야 문제 없지만, 미술관이 나서서 건축가를 작가로 섭외할 때는 미술 전시와 다른 접근이 필요해요.

박성진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에 가보면 도시의 대표적인 박물관과 도서관이 있잖아요? 그러면서 아카이브도 그에 버금가는 위상과 규모로 도시의 핵심적인 입지에 자리하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상징적으로 그 도시를 대변하는 지식의 보고로 작동하는데 한국에는 건축을 떠나서 그런 장소가 부재하죠. 자연사 박물관이나 현대미술관처럼 보여주기 식으로 급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아카이브는 제대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건축 전문 비평과 저널리스트의 질과 양

박성태 한국 건축계에서는 비평가 혹은 건축 저널리스트의 존재감이 약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정귀원 한국 건축에 비평이 없었던 건 사실이죠. 하지만 지금은 조금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비평을 하는 사람도 없고, 또 그것을 듣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게 큰 딜레마였어요. 듣는 사람이 없는 건 차치하고, 일단 누구에게 글을 맡길 것인가가 굉장히 어려운 숙제였죠. 늘 거론되는 몇몇의 이론가•비평가•역사학자에게 부탁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결국에는 같은 건축가에게 글을 청탁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건축가의 크리틱 작업을 싸그리 무시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주례사 비평이나 함량 미달인 글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래도 서로에게 힘은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또 이게 우리의 현실이라며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재작년인가에 현대건축연구회라는 게 생겼잖아요. 목천건축아카이브와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을 주제로 포럼을 열기도 했죠. 한국 건축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이 꽤 되더라고요. 또 한 건축강독 모임에서 건축 이론을 전공한 사람들을 몇몇 알게 됐는데, 이들도 대부분 1970년대 생으로 각자의 관심 분야에서 깊이 있게 공부한 사람들이었어요. 글도 좋고요. 이밖에도 다른 경로로 통해 알게 된 이론가/평론가들이 있는데, 조만간 이종건 교수가 준비하고 있는 책 『건축평단』을 통해 이들의 생각을 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요. 건축 저널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반가운 일이에요.

박성진 저는 정귀원 편집장 생각과 조금 다른데요, 비평은 한국 건축계 안에 늘 있어왔다고 생각해요. 비평이라는 것은 사유의 방식이지 어떤 직능과 특정한 지식인 계층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거죠. 그러 의미에서 건축가들에게 비평을 맡기는 것을 저는 어느 정도 지지하는 편이에요. 비평가라는 사람도 직업이나 자격에 의해 명명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유형에 따라 분류되는 것이라고 봐요. 자신의 지식과 소양이 부족하더라도 비평이라는 행위는 할 수 있죠. 하지만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 그것은 비평이 아니라고 재단하면서 그 사람들의 발언 경로가 차단되는 현상이 저는 오히려 우리 건축을 건강하게 만들지 못하는 풍토라고 생각해요.

정귀원 대학에서 설계 시간에 크리틱을 받기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비평을 접하게 되는 건 맞는 것 같아요. 또 누구나 다른 사람의 작업을 평가할 수 있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비평가, 평론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비평은 예술 행위라고 하지요. 독자적이고 새로운 생산 활동인 거예요. 그것을 직업으로 삼아 활동하는 사람을 비평가라 하고요.

박성진 『공간』은 간혹 건축가에게 다른 건축가의 작업에 대한 비평을 맡깁니다. 이는 한국에 비평가가 없어서라기보다 분명 그들이 갖는 시선의 차이가 전문 비평가와는 다른 새로운 평가와 가치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여전히 많은 건축가가 비평을 통해 다른 이들과 건전하게 생각을 주고받는 문화에 익숙지 않아요. 하지만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은 다른 나라에서는 오히려 실무를 겸하고 경험했던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비평가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죠. 건축가라는 직무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와 경험이 동반될 때 진정하다라고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하는 것이죠. 한국은 이론적 사유와 실천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큰 것 같아요.

정귀원 사실 건축가들이 다른 건축가의 작품을 들여다볼 기회가 많지 않잖아요. 그런 측면에서는 건축가의 작품 크리틱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글을 잘 쓰는 분도 많고요. 그런데,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비평가가 존재하느냐에 관한 것이니까…. 또 비평가의 건축 설계 경험에 관한 문제는, 비평가 중엔 설계 경험을 토대로 대상 작품 속에서 또 다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겠죠. 하지만 건축 역사학자나 순수 이론가의 비평도 필요한 부분이에요. 어떤 측면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상호 저는 중립적인 입장이지만, 처음에 『다큐멘텀』의 편집 방향을 잡을 때 별도의 비평을 배제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런 부분이긴 했어요. 그런데 지금 이야기를 들으면서 젊은 건축가 발굴하는 것만큼이나 젊은 비평가를 찾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정귀원 네. 새로운 비평가들을 계속 찾아내고 또 그들의 일을 만들어 내는 것 또한 매체의 역할이라고 봐요.

박성태 우리가 비평은 비평대로, 설계하는 건축가는 건축가대로 각자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나 합니다. 그래야 건축 비평가나 큐레이터, 저널리스트 등이 설 자리도 생기고요.

박성진 그래도 미술 분야에서는 시장의 논리에 따라 ‘말하는 사람’과 ‘그리는 사람’의 이해관계가 형성되어있잖아요. 미술만 하더라도 비평가의 발언이 작가의 몸값과 작품값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비평가로서 발언권과 영향력이 형성되는 것이고, 건축에서의 비평은 창작 그 이후에 덧붙여지는 작업으로 그 건물의 재산 가치 형성에 어떤 기여도 하고 있지 못한 것이죠. 그래서 다른 예술 분야보다 비평의 파급력은 적은 것 같아요. 문학만 하더라도 비평가가 발언하면 책이 많이 팔리고, 영화는 관객들을 더 불러모으죠.

정귀원 앞서도 언급했지만 비평은 새로운 생산 활동으로서 독자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학에서 평론이 하나의 장르인 것처럼, 요원해 보이긴 하나 건축 비평도 건축에서 하나의 장르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요즘 비평가, 이론가에게 자신의 작품평을 듣고자 하는 건축가의 목적은 미술이나 문학과는 약간 다른 듯해요. 이를테면 좀 더 나은 작품 활동의 선행 작업으로서 작업 자체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혹은 자기 생각을 보다 명확하게 정리하기 위해 비평가나 이론가의 도움을 받는 거죠. 이상헌 교수님도 『대한민국에 건축은 없다』에서 국제무대의 주목을 받으려면 이론적 소통이 필수라고 이야기하셨는데, 감각과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론을 동반하지 않으면 이국 취향 이상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거예요.

건축가 조민석의 경우도 작품이 완성되면 이론가, 비평가를 초청해서 얘기를 따로 듣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건축가 최욱의 경우는 오랫동안 건축 매체에 작품 발표를 안 하다가 올해 초 『와이드AR』에 작품 3제를 게재하면서 그동안 다져온 자신의 건축 어휘를 이론가를 통해 정리한 바 있죠. 건축가가 자신의 건축 언어를 비평가, 이론가와의 대화를 통해 정립해 나간 사례는 굉장히 많아요. 국내에서는 김수근 선생님이 그랬고요 간혹 젊은 건축가 중에도 자신의 작업을 신랄하게 논해 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박성진 너무 신랄하면 다들 싫어하더라고요.

김상호 두 분의 관점 차이는 따지고 보면 비평의 독자가 누구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영화 평론은 영화 자체가 대중적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글 자체가 매력이 있어서 대중적으로 소비가 되니까 생명력이 있어요. 건축 비평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비평 당사자끼리 주고받는 데서 그쳤던 거죠. 그런 측면에서는 지금 『공간』이 비평가의 폭을 건축가까지 넓힌 것은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어요. 비평의 틀과 논점이 적절하냐에 대해서는 저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어쨋든 독자의 폭은 넓어진 셈이니까요.

건축은 있다, 혹은 없다

박성태 비평이 없다는 게 한국 건축의 좋고 나쁨을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올해 초 두 권의 ‘건축은 없다’ 책이 나왔습니다. (『대한민국에 건축은 없다』(이상헌), 『건축 없는 국가』(이종건)) ‘무엇’이 없다는 것일까요? 분명한 건 ‘우리’ 건축에 대한 고민이라는 거죠. 우리다운 것이 무엇인지는 저널이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정귀원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제, 하지만 끊임없이 얘기해야 하는 문제이죠. 선생님들은 뿌리가 없고 서양 학문의 파편들이 맥락 없이 산재한 현실에서, 특히 학문으로서의 건축은 늘 원점을 맴돌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쉽게 결론 내거나 성과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건축가들은 스스로를 다잡게 되고, 또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문제 혹은 실마리가 나올 수도 있고요.

박성진 결국 이것이 일부 스타일에 관한 문제라면 외부의 타자화된 시각에서 규정되는 것도 있지만, 전략을 통해 내부에서 생성되는 부분도 있을 거예요. 일본이 현대건축의 조류 속에서 ‘메타볼리즘Metabolism’이라는 자기선언적 이슈를 가졌던 것에 반해, 우리나라는 그런 공동 의식과 접근이 부재했죠. 그런데 지금 여기서 모더니즘이니 정체성이니 발언하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워요. 왜냐하면 잡지에서 이런 것을 다룬다는 것은 굉장히 큰 모험이며 막막한 부분이 있어요. 이미 앞에서 다 얘기해서 결론이 나지도 않았는데 이걸 어떻게 새로운 어젠다로 끌어와서 새로운 담론을 형성해갈 수 있을까요?

정귀원 부담스럽긴 하죠. 그런데 이 땅에 집을 지어 거기에 문화적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부담스러운 주제를 고민해야만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되는 거예요. 튀어나오는 개념들이 죄다 서양에서 가져왔는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우리 나름의 언어를 고민하여 한 번 걸러서 받아들이느냐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박성태 이게 저널리스트의 고민일 수도 있어요. ‘건축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개념이 없다, 잘 만들려는 것뿐이다, 조건이 있어서 만든 것뿐이다’ 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전달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전할지를 생각하려면 언어화 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김상호 어떤 개념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가까이 있는 것들을 흡수하는 식의 담론이나 이론은 학자나 연구자들한테는 유용할 것 같아요. 하지만 다양한 문화로 접근해야 할 매체에서는 그것은 오히려 피해야 할 블랙홀이라고 봐요. 의도했든 안 했든 어떤 틀을 만들어서 현상을 유형화시키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면 매체 자신도 그 틀에 갇히게 되고, 그게 비평으로까지 넘어가면 독이 되기도 하죠. 건축가도 자신의 건축을 어떤 개념 안에서 말하려고 하면 사고가 그 안에 갇힐 것 같고요.

박성태 그런데 건축 저널리스트나 건축이론가들은 판을 멀리 봐야 하는 거잖아요. 한국 건축에서 한국 건축의 지형을 보고 그 지형 안에서 뭔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거나 새로운 건축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작업을 건축가가 할 수 있고 또 대부분이 하고 있지만, 건축 저널리스트가 더 열심히 해야죠.

김상호 ‘한국 건축’이라는 전제를 뺀다면 그런 논의를 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여러 지형이나 화두가 있겠죠. 비슷한 성향의 디자인을 한다거나, 비슷한 사고방식이나 디자인 전략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은 분명 있을 거예요. 잡지가 그런 관점에서 기획 기사를 꾸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게 우리나라 상황에서 얼마나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런 논의가 곧 ‘한국 건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봐요.

정귀원 건축 저널에서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고, 논의의 장을 만드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뭐든 물고 늘어지는 게 필요한데 우리는 또 그런 훈련이 잘 안 되어 있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을 언어로 규명하는 것도 어렵고 낯선 작업이고요.

2015년 건축 저널의 전망과 기대

박성태 내년은 어떻게 보세요?

박성진 한국 설계산업과 설계사무소의 체질이 변하고 있고, 대형설계사무소의 생존논리와 구조조정이 건축 전반에 영향력을 미칠 것 같아요. 제 주변에도 대형설계사무소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와 개소한 사람이 많거든요. 근데 이런 것이 길게 보면 건축계에 약이 되는 현상 아닌가 해요. 지금 한국 설계산업의 구조는 그들로 인해 기형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김상호 큰 회사들은 점점 어려워져 자연스럽게 정리될 거라고 봐요. 예전 같은 대형 프로젝트도 없고, 아파트도 계속 줄 테고, 그러고 나면 사실 대형 사무소를 운영할 수 있는 일거리가 없거든요. 그러면서 작은 사무소가 많이 생기고 전반적으로는 오히려 탄탄해질 기회가 되겠죠.

정귀원 그러면 자기 어필이 가능한 행사나 전시가 더 많아지겠네요. 그리고 여전히 젊은 건축가의 활동에 주목하겠죠. 그 가운데서 정말 내실 있고 진정성 있는 건축가를 찾아내는 일이 숙제가 될 거고요. 개인적으로는 선생님들을 꾸준히 찾아뵈려고 해요. 현재로선 어떤 형태로 기획되고 기사화될지는 모르겠지만, 단 몇 마디라도 새겨들어야 할 말씀은 분명 있으니까요.

박성태 건축 저널에서 60대 이상의 건축가를 게재하고 인터뷰하는 게 거의 없죠?

정귀원 그렇죠. 누군가 건축가의 조로 현상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너무 일찍 작업에서 손을 떼시는 것 같아요. 그분들의 새로운 작업을 얘기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요.

박성진 저희가 그 선생님들께 설계를 해달라는 게 아니라 건축계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사회적 목소리를 조금 더 내달라는 거죠. 창작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더라도 건축가로서의 사회 참여적인 직능을 이어가실 수 있을 텐데 그런 부분들이 건축가로서의 은퇴와 더불어 사라진다는 거죠.

김상호 또 그분들과 마주앉아 의견을 주거니 받거니 할 말 상대 자체가 매체 쪽에 많지 않은 거죠. 어떤 특별한 사안을 준비해서 취재하는 형식으로 만나지 않는 이상, 저희 세대에서 그분들을 만날 자리나 기회는 사실 없는 거죠.

박성태 2014년 한 해는 건축 저널리스트로서 어떤 생각을 주로 했나요?

박성진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건축 저널을 비판하는 주요 시각 중 하나가 종 다양성의 결핍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봐요. 『공간』, 『와이드AR』, 『다큐멘텀』, 『C3』는 각자 콘텐츠의 차별성을 확보한 상황이죠. 비평 중심의 건축잡지도 창간을 준비한다는 소식도 들었어요. 출판 시장과 건축계의 침체와 더불어 건축 저널도 양적으로는 축소되었지만 그 토양은 오히려 비옥해지지 않았나요?

정귀원 맞아요. 몇 종의 건축 매체들이 나름의 색을 가지고 열심히 하고 있죠. 그런데 그게 건축계 안팎에서 평가를 받고 신뢰를 회복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요. 바닥을 한번 치고 올라가고 있긴 한데… 더구나 SNS, 전자책의 등장으로 종이 매체가 위기라고 하잖아요? 별 수 있나요. 열심히 달릴 수밖에.

박성태 저는 한국 건축 저널이 막다른 길을 마주해 전망이 없어 보여요. 대부분의 전문지가 자립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하지만 막다른 길 끝까지 가보면 거기에서 새로운 길이 나올 것이라고 믿고 묵묵히 가는 수밖에 없겠죠.

정귀원 그래서 선배들은 후배들이 좀 더 치열해지길 바라죠. 이런 환경에서 뭐 어떻게 더 치열해지나 싶긴 하지만, (웃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래도 방법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흐트러지는 자신을 추스리면서 나아가는 거죠.

김상호 작년 이맘 때였던 것 같은데, 『다큐멘텀』 창간을 준비할 때 박성태 선배가 요즘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매체든 수명이 있는 것 같다고 했어요. 잡지가 꼭 10년, 20년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니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매체의 존재 가치는 그 매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있는 것이지, 발행 햇수에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이제 겨우 1년이 지났는데, 한 호 한 호를 내면서 한 마디 한 마디를 붙여 가는 기분이에요. 좀 더 지나면 문장이 채워지고, 또 언젠가는 이만하면 할 이야기를 충분히 했다는 생각이 들 날이 오겠죠.

박성태 건축계가 어려워지면서 건축 저널도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저널리스트로서의 비전이 있어야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요.

정귀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동시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록하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함께 가는 거야’, 이런 마음으로 일하고 있어요.

김상호 얼마 전까지는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별로 안 들었어요. 다들 연배가 높고 수년이 지나도 나이 차는 변함없으니까요. 근데 요즘 들어 비슷한 또래의 건축가들을 심심찮게 만나는데 기분이 이상해요. 지금은 그들을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좀 거창한 비전이라면 건축이 우리 사회에서 접근 가능한 문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박성진 김수근 선생이 발행인으로 계셨을 때 이런 담대한 문구가 항상 『공간』 앞을 장식했어요. “ 『공간』은 예술•환경•건축의 문제에 대한 전통과 역사를 되새기고, 한국인이 더욱 한국을 알도록 하고, 현대의 상황을 기록-정리-비평하며 바람직하게 있어야 할 미래를 지향한다. 『공간』에 담기는 내용들은 지금 당장 조금씩이라도 현대를 사는 한국인의 정신을 윤택하게 하고, 한국인의 삶에 기품을 돋우어 더욱 윤기있게 하며, 먼 훗날까지도 가치있는 기록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 되도록 한다.”

현재의 잡지가 대단한 사상적 운동을 이끄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기록-정리-비평’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신들만의 역할과 언어를 찾고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자면 『다큐멘텀』은 기록에 충실하고, 『와이드AR』은 비평을 지향하고 『공간』은 이 기록과 비평이 조우하는 곳에 있고요. 이 세 가지 중에 어디에 방점을 두느냐가 매체의 성향을 가늠한다고 봐요.

정귀원 건축 저널의 역할 중에는 창작된 건축의 이야기를 재가공해서 또 다른 얘기를 만드는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거기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면서 한국 건축의 각 지점들을 아카이빙해 가는 거죠. 그러니까 각 매체가 어떤 재료, 어떤 방법으로 이야깃거리를 만드느냐에 따라 색깔도 달라지겠죠.

오늘날의 한국 건축과 건축 저널리즘

분량16,052자 / 30분

발행일2015년 1월 15일

유형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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