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주택 정책과 대안으로서의 윔비 프로그램
배윤경
분량5,719자 / 12분 / 도판 5장
발행일2015년 1월 15일
유형해설
네덜란드 주거 관련 예술기획과 정책 _ 거주 공간은 안전함과 편안함을 지향하며 지루한 공간이 무한 반복된다. 대부분은 사적이고 보수적인 공간에 거주하고, 이에 불안을 느끼는 이들은 최소한의 사회적 발언의 계기로 삶의 공간을 실천의 무대로 삼는다. 하지만 대안적이고 자율적인 삶의 공간의 등장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 있는 현대미술 및 디자인 연구소인 카스코Casco의 최빛나 디렉터 인터뷰와 건축 칼럼니스트 배윤경의 글을 통해 몇몇 주거 관련 프로젝트의 교훈을 들어봤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2006년에 그의 저서 『행복의 건축The Architecture of Happiness』 출간과 동시에 3부작 다큐멘터리 <완벽한 집Perfect Home>을 제작하여 당시 영국의 주택 시장을 비판한다.1 영국은 향후 10년에 걸쳐 주택 1백만 호 공급을 선포하였는데, 에식스주 근교에 지어진 2,000가구는 흡사 미국 표준화 주택의 대명사 레빗타운Levittown의 연장과 같았다. 네오 조지안 양식은 여전히 중산층의 로망이었고 시장은 어떠한 위험을 떠안을 필요 없이 수요자가 원하는 대로 공급할 뿐이었다. 작가는 암스테르담의 신도시 에이뷔르흐에 이어 헤이그의 신도시인 위펜뷔르흐를 방문한다. 공군 기지를 재개발한 이곳은 MVRDV의 하흔아일랜드 단지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건축가는 벽과 지붕이라는 구분을 무시하고 단일 재료로 균질한 외피를 갖는 유형을 다수 계획했다. 재료 선택에 따른 다양한 변주는 카탈로그에 빼곡한 공산품처럼 소비자의 눈앞에 펼쳐졌다. 알랭 드 보통은 단지를 걸으며 불과 비행기로 30분 떨어진 곳의 삶이 어찌 이리도 다른지 의아해 한다. 궁금증을 해소하는 역할은 네덜란드 건축협회NAi의 수장인 애런 베츠키가 맡았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네덜란드인은 일찍이 땅을 간척하고 홍수와 싸우던 역사로 인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에 익숙하다. 사실상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그들의 손으로 만들어 낸 인공 풍경이며 조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낯선 환경에도 빠르게 적응하며, 다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정체되어 물이 썩는 상황보다는 나을 것이라 여긴다. 새로움에 대한 내성을 믿고 선보인 과감한 형식의 주택들은 이내 『Super Dutch』의 스펙터클로 이어졌다. 하지만 ‘플라잉 더치맨’의 이러한 영광도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서서히 침몰하고 있으며 다름 아닌 신도시 풍경은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한다.
알랭 드 보통이 방문한 신도시들을 일컬어 비넥스VINEX라 한다. 정부는 1960년부터 약 10년에 한 번 국토 개발 정책 보고서Nota를 발간하는데, 비넥스는 4차 보고서에 해당한다.2 이 결과 지어진 다수의 신도시가 보고서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국가 정책 보고서는 일종의 가이드로서 건축에 구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노버 엑스포에서 MVRDV가 선보인 국가관은 각기 다른 프로그램을 갖는 지형들이 적층된 구성을 띄는데, 이는 국가가 장려하는 압축적이고 입체적인 도시 점유와 일맥상통한다. 정부는 1994년에 발행한 보고서를 통해 2005년까지 75만 호의 주택을 공급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알렸다. 산맥이 없기 때문에 전 국토에 걸쳐 도시가 흩어져 있는 네덜란드는 신도시의 사업 범위 역시 그렇다는 뜻이다. 분명 란드스타트 주위의 신도시는 전도유망하다. 대도시의 열악한 주택 공급을 보완하고, 젊고 유능한 건축가의 다채로운 디자인들로 인해 건축 전시장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소도시에 인접한 곳들은 백인 중산층의 획일적인 인구 구성과 함께 더 이상 확대되길 원치 않는 교외 단독주택단지들로 영국의 사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네덜란드의 전통과는 관계없는 미국의 포스트모던 건축을 이제야 수입해서 역사적인 마을처럼 치장한 뒤 상업성을 높이는 계획도 더러 있었다. 어떤 작은 마을은 임의로 스스로를 비넥스 단지로 세탁하기도 했다. 이러한 혼란은 중앙 정부가 주택 공급에 관한 결정권을 지방 자치단체와 민간 기업에 위임한 탓이다. 80년대 90%에 이르렀던 정부보조 주택의 비율은 90년대 중반에는 30%로 급격히 감소했다.3 대규모 건설 현장의 축제 속에서 집은 늘어나지만 저소득층의 살길은 더욱 여의치 않아졌다는 게 현실인 것이다.

비넥스에 드러난 중산층의 은근한 욕망에 즐거워하고 있을 무렵, 지금까지와는 다른 도시 재건 활동이 로테르담 인근 호흐블리트Hoogvliet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백지 상태의 개발만 보았던지라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도시의 사연과 함께 윔비WiMBY!(Welcome into My Back Yard!)라는 슬로건의 내용이 궁금해서 2007년에 필자가 직접 방문한 적이 있다. 호흐블리트는 본래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제방을 쌓아 만든 작은 시골 마을에 불과했다. 본격적인 도시로서의 성장은 로테 스탐 베이세가 전원도시 운동의 영향을 받아 1947년에 작성한 밑그림에서 비롯된다. 북쪽의 마스 강을 따라 정유회사 쉘Shell의 공장이 들어서고, 로테르담의 위성도시로서 전후 도시재건을 위한 주택 공급이 가능하므로 시작은 꽤 희망적이었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연이어 일어났다. 1968년 쉘 공장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여 인근 주택가 또한 손해를 입었다. 주민들은 공장을 위협적인 대상으로 인식했고, 안전 때문이었는지 쉘은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 결과 한때 7,000명의 직원을 둔 다국적 기업은 30년간 문을 닫았고 1999년에 남아있는 고용인은 고작 100명에 불과했다. 70년대에는 두 번의 석유 파동이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다. 대형 컨테이너선이 내륙으로 입항할 수 없어 북해 연안으로 항구가 이전하면서 관련 시설과 일자리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호흐블리트에 대한 계획은 절반도 이루어지지 못했고, 여전히 중심 서비스 지구가 상실된 채로 남겨졌다. 항만 노동자가 되기 위해 남부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직장을 잃거나 이웃과의 교류에 실패하여 소외되었다.
건축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크림슨과 저널리스트이자 정치가인 펠릭스 로텐베르흐는 2001년에 다시 호흐블리트를 주목했다. 미완의 도시 속에서 열패감을 극복하고자 하는 거주민들의 노력과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는 다문화 소외 계층의 간절함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또한 어디에서든 잘 적응하고 저렴한 집을 택하려는 젊은 창작인과, 자신을 보살펴 줄 수 있는 이웃이 있는 곳이라면 집을 팔고 다시 세입자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는 노년층에게서 도시 재건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사회적 지위, 인종, 연령대, 취미, 기호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면 대도시에 버금가는 시너지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윔비의 많은 사업들은 관계자들의 다각적 개입을 토대로 진행된다. 예산은 주정부, 지방정부, 민간 개발사가 지원하는 가운데 프로그램 진행자들과 건축가들은 주민들과의 워크숍을 가지면서 실질적인 요구들을 디자인에 반영한다. 계획 또한 다양한 층위에서 이루어지는데 시민들의 의견이 반영된 24개의 도시계획 제안부터, 캠퍼스 설립, 저학년들의 다채로운 활동을 지원하는 야외 교실, 여가를 위한 공원과 서비스 시설, 치안을 위한 야간 조명까지 도시의 전 영역이 사업 대상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특히 주거에서는 로테르담에 살고 있는 중산층을 유입시키기 위한 노력이 활발한데 직업, 취미 활동, 사상이 비슷한 사람 중 조금 더 여유로운 개인 공간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로 하나의 코하우징 공동체Co- Housing가 형성된 사례를 실현시켰다.
한편, 극빈층 가운데 사회적으로 소외된 편모 가정에 대한 주거가 프로그램의 취지를 가장 잘 표방하므로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윔비를 통한 다양한 건축적 축복 속에서 편모 가정이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이들의 출신에서 기인한다. 2001년 당시 호흐블리트에는 편모 가정이 2,243세대에 달했으며 총 3,700명의 아이들이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 대부분은 네덜란드 식민지인 앤틸리스 제도나 수리남에서 건너왔는데, 이들은 불과 14~24세로 매우 어리지만 아이를 양육하느라 학교에 가거나 직장에 나가 일을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다수의 워크숍을 통해 파악한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집이 아니라 아이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주변 환경이었다. 주최 측에서 물색한 곳은 주택 공급 물량에 힘썼던 1960년대의 복층 아파트이다. 대부분은 40년도 못 버틸 정도로 오래가지 못했으며, 빠른 시간 낙후되는 까닭에 동네가 슬럼이 되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유형이었다. 마씨엘 판 도르스트의 연구와 건축가 하르멘 판 더 발과 뒤잔 두펠스는 이러한 복층 구조가 편모 가정의 안락한 거처가 되는 동시에 이 기회를 빌려 건축적 오명을 날려버릴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건축가는 새로운 입주자들을 위해 세 가지 장치를 두었다. 우선 왕래만을 위해 존재하던 기능적인 복도의 폭을 2m로 넓혔다. 또한 부분적으로 창을 돌출시켜 복도를 확장시키고 아이들이 집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의도했다. 이러한 접근은 스미드슨 부부가 골든레인아파트 공모전에서 선보였던 공중 가로를 연상케 한다. 두 번째는 유닛 평면상의 변화이다. 공공 영역과 사적 영역이 나뉘는 부분에 1.5m 깊이의 전이 공간을 두었다. 복도와 맞닿은 쪽의 미닫이문을 개폐하는 과정에 따라 더 넓은 야외공간이 될 수도 있고, 그냥 창고로 사용하거나 현관이 될 수 있어 거주자의 선택에 따라 쓰임이 결정되는 혼성의 영역이다. 마지막으로 1층의 상가들을 공용 공간으로 할애했다. 이들은 탁아소, 오락실, 컴퓨터실, 공용 거실 등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러한 주거 형식에는 아이를 갖지 않은 젊은 창작자들도 환영하며, 때로는 아이를 대신 돌보고, 때로는 아이의 어머니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노년층도 입주를 희망했다. 하지만 섭섭한 소식은 이 계획 역시도 아직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불씨는 엉뚱한 곳에서 날아왔다. 2005년 로테르담의 정권을 획득한 중도 정당은 접안지역의 홍등가를 몰아내기로 결정했고, 당분간 재활을 위해 사회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직업여성들이 머물 곳으로 앞서 언급한 복층 아파트 인근을 지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여성들은 호흐블리트로 이주하지 않았고, 주거 환경을 염려하던 기존 거주민들의 심기만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편모 가정을 위한 지원 또한 덩달아 반대 여론에 맞닥뜨린 것이다. 6년 이상 윔비를 외치고 있었지만 결국 사람들의 우려를 완전히 걷어내기란 사회보장시스템이 발달된 땅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네덜란드 사회는 지속해서 늘어나는 인구, 핵가족화, 그리고 맞벌이로 인한 경제적 풍요가 새로운 주거를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이미 정부는 대부분의 결정을 시장 논리에 맡겼으며 그로 인해 집을 소유하는 비율은 해마다 증가한다. 주택은 더 이상 함께 가꾼 공공재가 아니며 일종의 투자 대상이 되었다. 1990년대에 사회주택이 40%에 달했다면, 2012년에는 30%로 줄었다. 비넥스의 등장과 길을 잃은 주택법은 네덜란드 주거의 앞날을 더욱 혼란케 한다. 이러한 난항에도 불구하고 윔비 프로그램이 선례를 남겼다. 작고 꾸준한 노력들은 그 옛날 둑을 쌓고 간척지를 만들던 시절의 기억을 환기시키며 동시에 공동체의 존재 이유에 답한다. 터전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우리를 구속하기도 하고 거꾸로 해방시키기도 한다는 교훈으로 읽힌다.
배윤경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네덜란드의 베를라헤 인스티튜트에서 수학했다. oddaogisadesign d’espacio architects에 몸담고 각종 매체에 건축 관련 칼럼을 기고하며 단국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건축설계와 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암스테르담 건축 기행』(스페이스타임, 2011)과 『어린이를 위한 유쾌한 세계 건축 여행』(토토북, 2012)이 있다.
길 잃은 주택 정책과 대안으로서의 윔비 프로그램
분량5,719자 / 12분 / 도판 5장
발행일2015년 1월 15일
유형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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