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기 쉬운 현수막: 실체의 이미지를 위하여
최영환
분량2,648자 / 5분 / 도판 3장
발행일2015년 1월 15일
유형에세이
이미지는 원형, 즉 실체를 보다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도구다. 특히 예술 안에서 ‘이미지화 과정’은 그 실체를 ‘재현’하는 일반화된 방식이다. 예술가는 시각 언어 또는 문학 언어 특유의 상징과 은유적 수사를 통해 실체의 본질에 접근한다. 이후 그 실체를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관객이나 독자들은 특정인의 시각에서 조명되어 재현된 이미지를 통해 그 본질을 이해하게 되는데, 이 과정 중 우리는 때때로 이미지를 실체로 오인하는 오류를 범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북동에 관한 이미지는 무엇인가? 언뜻 드는 생각으로는 ‘비둘기’이고 다른 하나는 ‘부촌’이다. 전자는 김광석 시인이 인간의 막무가내 식 개발에 의해 밀려나게 된 비둘기의 고달픈 삶을 노래한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로부터 기인한 것이고, 이와 대비되는 ‘부촌’의 이미지는 부잣집 귀부인의 삶을 단골 소재로 삼는 일일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이 가지게 된 선입관이다. 그러나 이 양단의 이미지 모두 현재 성북동에 거주하는 대다수 주민들이 경험하는 실제의 삶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들 대부분은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빈자도, 그렇다고 그 수혜의 당자자인 드라마 속 주인공도 아니다. <사라지기 쉬운 현수막> 프로젝트는 이 같은 이미지의 허상을 넘어 주민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담아내는 무언가를 그 주민들이 직접 만들어 보자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몇 해 전부터 성북동에 불어 닥친 재개발의 광풍은 이 지역 거주민들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오랜 기간 삶의 터전을 공유하며 끈끈한 유대를 맺고 있던 지역민들은 ‘찬성’과 ‘반대’라는 선택을 강요받았고,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이들의 인격은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의 이분법으로 환원되어 이해됐다. 여느 재개발 지역의 상황과 다르지 않게, 이해를 달리하는 이 두 집단은 극단적인 대립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붉은 색 현수막은 거대자본에 맞서 재건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자기표현 수단처럼 인식되며 가가호호 내걸리게 됐다. 변화된 주민들의 일상을 암시하듯, 성북동 풍경이 가지고 있었던 고즈넉함은 이 붉은 물결에 덮여 오간 데 없어 졌다. 다만 우리는 현수막 위에 새겨진 ‘죽음을 불사하며 내 집을 지키겠다!’는 격정적인 문구에서, 거주민이 처한 상황의 절박함과 문제 해결의 시급함을 절감할 뿐이다. 동시에 이 절규의 문구들이 새겨진 수많은 현수막들은 당사자는 물론 주변 이웃들의 일상마저도 투쟁의 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사라지기 쉬운 현수막> 프로젝트는 2년 전 재개발과 관련해 지역의 주민들이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던 시기에 기획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일터와 집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 주민들이 예술을 매개로 자신의 삶을 조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근 주민들 간의 ‘개발과 보존’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잦아들고 재개발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해지면서 주민들이 느끼는 집단적 위기감 또한 진정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성북동 주민들은 그 현수막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들에게 이 작은 천 조각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자기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 이로 말미암은 무력감을 잠시나마 잊고,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도구인 셈이다.

그래서 <사라지기 쉬운 현수막>은 주민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자기표현 수단을 제안했다. 원색조의 현수막은 건축물의 일부처럼 설치된 조형물로 대체되었다. 작은 거울 조각들로 이루어진 이 조형물은 태양빛을 반사해 만들어내는 빛의 조합을 통해 주민 각자가 생각하는 ‘내 집의 의미’가 담긴 짧은 문구를 주변 도로 위나 담벼락에 드리운다. 그 ‘빛의 현수막’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며 그 존재를 드러내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삼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가끔 이 집에 놀러 오시나요”
“아름다워라 삼대가 사는 이 집”
“폭염세월 견디고 곱게 물들 성북동”
(성북동 주민들이 쓴 글)

사실 재개발로 비롯된 사회적 갈등이 공동체 내부의 반목만 초래한 것은 아니다. 그 대가로 우리는 그간 돌이켜보지 못한 개개인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삶의 가치를 스스로 바라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성북동 주민들이 쓴 이 글들은 그 ‘반추’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 글들은 태양 빛이라는 가변적이고 영속적인 전생태계적 자원에 의해 완성된다. 이 자연적 매체는 거창한 개발의 역사 속에서 너무도 쉽게 지워져간 ‘사적 공간’에 관한 자기 기록이 가진 연약함을 표현함과 동시에,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르듯이 그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소시민의 저항을 상징한다.
<사라지기 쉬운 현수막>은 문학적 이미지와 미술적 이미지가 결합된 작업이다. 문학이나 미술이 모두 이미지의 표현을 통해 실체를 형상화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밀접한 공통성을 지니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장르를 넘어서고 통합하는 이러한 작업이 가능하고 또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한 축을 주민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만들었다는 점은 객체화된 예술작품이 가지는 한계, 즉 그 예술품이 만들어 낸 왜곡된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그 실체에 가깝게 가져갔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최영환
시각예술가로 영상, 퍼포먼스,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도시화와 새로운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인식 간의 관계에 주목하며, 도시공간과 건축물들을 어떻게 현대문명의 역사를 반영하는 암시적 실마리로서 맥락화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라지기 쉬운 현수막: 실체의 이미지를 위하여
분량2,648자 / 5분 / 도판 3장
발행일2015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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