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어가는 신체가 해방하는 것
이치무라 미사코 Misako Ichimura
분량6,930자 / 14분 / 도판 3장
발행일2015년 1월 15일
유형오피니언
공공공간에서 나 자신의 신체는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가. 그리고 그 신체는 어떻게 신자유주의와 가부장제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주체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이 땅은 그 신체의 면적이나 생활 공간에 의해 점거될 수밖에 없다. 홈리스는 도로에서 지낸다. 살아있는 신체를 존재시키기 위해 그들은 그곳을 점하고 있다. 생존 앞에서 공과 사를 나누는 것은 사실상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홈리스는 ‘공공장소 점거’라는 이유로 생존에서도 배제 대상이 된다. 배제나 비판이 없는, 담보된 개별 존재의 생활공간은 권위를 띠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쉬는가 하는 것에 스스로를 묶는 힘도 있다고 기대한다. 사적 영역으로 여겨지는 공간도 문화나 테크놀로지 같은 정치권력에 의해 구성되고, 다양한 생활을 하면서 내면화, 신체화되어, 동일화되는 것이다.
공공공간에서 생활하는 나의 ‘신체’는 그 존재 자체가 그 공간의 부조화(위화違和)로 나타난다. 나는 이 도쿄 한가운데에 있는 블루텐트촌에 산 지 10년이 지났다. 삼림공원의 숲 가운데 있는 텐트촌에는 현재 30채의 임시 건물과 텐트가 있다. 나는 살기 시작했던 애초부터 같은 텐트촌 주민인 코가와 아저씨와 텐트 앞의 물물교환 카페 에노아루와 그림을 그리는 모임을 시작했다. 에노아루 카페는 무엇이든 어떤 물건을 가져와 차나 커피를 마시는 시스템이다. 돈이나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길가의 꽃을 모아서 가져오면 카페를 이용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모임의 그림소재도 파기된 그림도구, 붓 등을 모아서 사용하고 있다. 이 모임에서 그린 그림은 텐트 앞에 있는 나무 등에 걸어서 물물교환품이 그 공간을 창조하게 되어 있다. 그곳은 ‘그림이 있는’ (발음이 ‘에노아루’-역자 주) 카페로서, 영업시간이 되면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언제나 여러 명이 하잘 것 없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모여든다.

여기 주민들은 본인이 어째서 이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보통은 더부살이하던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아파트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모든 홈리스들에게는 이 생활에 이를 때까지 각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직접 묻는다 하더라도 자기 인생의 작지 않은 전환의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입장이 만약 사회적으로 용인된다면, 지금 여기에 사는 것을 긍정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홈리스의 입장에서는 듣는 사람이 홈리스가 아닌 경우 그 사람에게 암암리에 ‘사회복귀’ 의지를 기대 받거나 이 이면에 있는 자기책임론에 호소 당하지 않도록 ‘좋아서 홈리스가 된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를 끝내서 상대를 어떻게든 이해시키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때때로 나는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 “당신은 본인의 선택으로 텐트촌의 삶을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홈리스와는 다르겠죠?” 분명 내가 살기 시작한 계기에는 복잡한 여러 이유와 타이밍, 형세가 있었지만, 거기에 (도대체) 어떠한 선택이 있었다는 것인가? 극단적으로 말하면, 나는 이전 생활보다도 텐트촌의 삶이 훨씬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해서 이 삶에 뛰어들었다. 더 말하면, 이전의 나를 둘러싼 환경은 보다 ‘위’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 성장해가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남녀평등, 여성의 사회진출도 그러한 가치관 안에서 실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랬다.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을 떨어뜨리는 듯한, 마치 미명 아래에서 타인을 먹어버리는 것 같은 방식으로 우열을 정해서 성장이나 생산에 편입되어 왔고, 이용해 온 경위가 있다. 그것을 ‘자립’이라고도 하며 자립은 세간의 법도로서 사회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한 위압에 나와 친구들은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졌다. 게다가 살아있는 사람들이 서로 인격적인 관계의 중심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되어 교환의 도구로 가정되면서 나는 나를 포함해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절망했다.
내가 텐트촌을 만난 것은 그때였다. 도쿄의 한가운데에 있는 텐트촌에서는 길에서 매일 대량으로 파기된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모아 서로 교환하며 다양한 궁리를 하며 사는 이들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비즈니스 거리가 있는 도쿄의 한가운데 있는 공원에서 큰 돈을 쓰지 않고도 살아가는 대안 커뮤니티를 실천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당시 이전에 내가 살던 삶보다도 그들의 삶이 훨씬 살아있다는 것으로 느껴서 이 텐트촌에 뛰어들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이곳의 삶을 시작했던 처음에는 보기 좋게 살아남겠다는, 부루퉁한 기분이 컸던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에 자신의 텐트를 세울 수 있었을 때는 고양감과 경계심, 불안이 섞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텐트촌의 다른 모든 주민이 나와 같은 경험으로 이 삶에 도달한 것은 아닐 것이다. 체력적, 정신적으로 지쳐 목숨만 겨우 유지해 이곳에 온 사람들은 작은 집을 만들고, 남은 음식물과 옷과 물건을 나눠 받아 지내면서 자신의 생활을 일으키는데, 그 과정에서 점점 건강해지는 사람들을 몇이나 만난 적이 있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는데, 돌이켜보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물론 홈리스들은 복지제도를 받을 권리가 있고, 복지과와 교섭이 잘 되면 생활보호비로 복지시설이나 아파트에서 산다는 선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돈에 기반을 둔 삶은 건강, 학력, 비장애인, 국적, 성적 취향(이성애자), 나이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살기 힘든 입장에 내몰리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곳은 스스로 창조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텐트촌 주민들은 왜 여기에 왔는가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보다 되도록 여기서 오래 사는 데 관심이 많다.
여기서 젠더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 홈리스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살기 어려운 면이 많다. 폭력과 성폭력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젠더 문제는 물론 홈리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가장 안정한 사적 영역인 집이나 가족 안에서조차도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들은 폭력이나 성폭력의 위험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가부장제에 기초한 가족은 성차별과 성폭력을 방치하고 있다. 그 ‘가족’의 중심에 인권침해는 가정 내 프라이버시라는 명목하에 은폐되고 있다. 한편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인 홈리스들은 ‘가족’의 보호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들에겐 성노동을 하거나 빈곤한 것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 억압적인 규범을 들이대기도 한다. 그러기에 공포나 아픔을 느끼는 이들 신체의 존재방식은 남성 홈리스와 전혀 다르다.
공원에 사는 것만으로 나의 신체는 완전히 혼란해졌다. 구체적인 폭력을 받지는 않지만,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이미 내가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들이 폭력을 당하는 것을 알고 있고, 일상적으로도 그 노출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감각적으로도 알기 때문이다. 이는 내 몸의 긴장과 공포로 나타난다. 일반 사회에서는 이성애 욕망에 기초한 사회제도(가족, 교육, 납세, 노동)가 성립하고, 남성이 여성의 신체를 욕망하는 것이 우선시된다. 그들은 예술, 광고, 매스미디어 등에 의해 강화되고, 그러한 영향 아래 나의 신체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노출되는 것이다.
이처럼 ‘질문받은’ 공원에서는 신체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상황과는 분류되어, 나의 신체 자체에 나의 것이 아닌 신체성이 나타나는 장소로서 구성된다. 그렇게 해서 나의 신체에 위화감이 생기는 것에 저항하거나 마비되거나, 응수하는 것을 시험해본다거나, 밸런스를 취하려고 한다. 그러한 생존은 동시에 사회의 이성애주의나 그들을 구성하는 제도나 테크놀로지 등의 정치권력을 나에게 내면화, 신체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의 신체’라는 것은 이미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한편 홈리스에 대해 갖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도 신체는 제약을 받는다. 공원이나 공공공간의 안전을 말할 때, “여성이나 아이들에게 공원은 홈리스로 인해 위험하다”고 하는데, 이는 공원에서 생기는 폭력문제를 면책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내가 “홈리스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원 내에서의 폭력 혹은 그런 폭력에 노출되는 상황들의 문제는 홈리스가 있든 없든 언제나 존재한다. 실태에서는 홈리스가 통행인이나 공원이용자를 습격하는 사건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고, 오히려 시민이나 청소년의 홈리스 공격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홈리스는 가해자라는 편견이 강하다.


정치적으로 각지에서 행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흐름 안에서, 공원이나 하천부, 역 주변의 공공성이 높은 공간에 사는 홈리스의 생활은 배제 1순위이다. 그렇게 노숙할 수 있는 장소를 점점 없애는 것은 홈리스를 보다 열악한 환경으로 몰아간다. 홈리스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나 그곳에서의 공동생활은 표상되거나 상상되는 것 없이 폭력적으로 배제되어 간다. 홈리스의 생활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은 먹는 것이나 겨울의 추위가 아니라, 사회의 홈리스나 다른 다양한 입장에 대한 차별과 편견, 그리고 공격이나 배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커뮤니티가 필요하고 그 연계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텐트촌의 사람들은 도시생활 속에서 신자유주의 사회의 능력주의를 보이콧하고 사유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분업형 이성애 가족을 선택하지 않은 채, 알지 못하는 사람들끼리의 커뮤니티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는 공포나 아픔을 동반한다. 우리는 도끼를 휘두르거나 화염병을 던지는 것도 아니고, 이 도시공원에서 온화하게 살아가기를 희망할 뿐이다. 이 장소에서 살아가는 것은 나의 신체를 나에게 돌려주려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인 모순이나 차별이 그 공간에 나타나는 이상, 공원에서 누구도 평등하게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상황에 입각하지 않고 공원안전대책을 고안하는 의론은 무용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원은 열린 장소다’, ‘모두의 공원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밀어붙여진 ‘안전’, 주어진 ‘안심’, 허가된 ‘자유’를 요구하지 않는다. 공공공간에서 우리를 분단하고 불신을 조장하는 모든 안전은 방해물일 뿐이다.
그러면 어떠한 저항 신체가 가능한 것일까? 위협에 노출되는 일상을 보내는 것은 권력에 충실한 태도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상업주의적인 길 만들기의 경과를 조금도 자신과 관계없다고 하는 사람에게 위협을 피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또한 온전히 폭력을 다가오지 않게 하는 것에 휘둘리거나 마비되거나, 상처받기 쉬움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 같은, 한층 더 폭력적인 시선도 있을 것이다.
글로벌기업, 개발자 그리고 행정과 하나가 되어 ‘거리 만들기’가 행해지고 있다. 권위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된 도시의 젠트리피케이션은 가속화되어만 가고 있다. 거기에 저항해서 다양한 항의활동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저항의 표상으로 그라피티나 태깅, 스케이트보드나 랩 같은 빈곤자의 투쟁 의지는 크다. 그러나 이들 거리문화의 이미지가 도리어 시장에 취약하게 먹혀버리는 사태는 안타까울 정도이다. 한편 ‘거리만들기’에서 사용된 이미지는 ‘평화, ‘자연’, ‘가족’, ‘애정’, ‘안전’, ‘건강’이다. 그것에 의해 위협은 완전히 숨겨진다. 감정적으로 미화되는 것이나 정념에 호소하는 것, 낭만주의적인 집단주의 등 반짝반짝 자극적인 스펙터클 도시는 사람들의 욕망을 제어한다. 도시에서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는 권력의 충실한 태도는 일상화되어 완전히 먹혀버리는 것이다.
노숙을 하는 나의 신체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도 익숙한 곳에 구조되어 역사, 문화, 테크놀로지에 의해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모순이나 차별을 개인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같은 위약한 입장에 몰려있다. 내가 아닌 주류의 사람들은 주체의 지위가 공고해질 때, 나의 생활은 아픔, 공포, 긴장 속에 놓인다. 나는 이 신체의 감각을 신호로 보내 그 유한한 공간을 절단하고자 한다.
도시 위에서 잔다. 사람들의 발 밑에 얽혀있는 소리, 날 것의 악취, 먼지 섞인 바람, 거리에 혼재하는 달콤한 향의 하수, 젠트리피케이션이나 신자유주의, 배타적인 내셔널리즘에 대항하여 이들 틈에 빛나는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촉감, 온도, 냄새, 소리, 색, 맛 등 모든 감각을 갈고 닦은 생활의 실천을 시험한다. 쫓기는 사람의 육성이 들리는 곳에서 표현의 자유를 빼앗길 수는 없다. 물론 여기서 사람과 사람이 생생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 다양한 대립이 생긴다. 그 공간에 공포와 긴장은 끊이지 않는다.
공원이나 노상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다. 그러나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 목적이 결정되어버린 특정인을 위한 공원의 합리적인 역할은 즐기고자 하는 자를 오지 못하게 하고,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게 하며, 조금이라도 불편한 신체가 있는 사람을 검열하는 곳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커다란 권력에 저항하지 않도록 관리되어 친밀함이 넘치는 좁은 바구니 속에 스스로 틀어박혀진다. 2020년 도쿄에서는 올림픽이 개최될 예정이다. 도시개발은 가속화되고, 도로는 스펙터클화 되어 권력은 사람들의 사상습관에 침투하고 있다. 이미 이 신체의 자유를 위한 싸움은 평화적, 자기만족적, 위선적이라는 쾌락에 다다르지 않는다. 건조한 것 없이 질퍽질퍽한 상처에 의해 나의 신체는 썩어가고, 이미 어떤 인격을 가진 물체로서 살아남아 도시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번역 허윤
이치무라 미사코 Misako Ichimura / みさこ いちむら
2003년부터 도쿄 공원에 있는 홈리스 코뮨 ‘블루텐트촌Blue Tent Village’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함께 거주하고 있는 테츠오 오가와와 함께 사람들이 모여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에노아루Enoaru, エノアール, 물물교환 장소, 아트센터를 꾸려 왔다. 2007년부터는 홈리스 페미니스트 그룹 ‘노라Nora’ 활동을 시작했다. 2010년에는 지역 아티스트와 사회 활동가의 도움으로 ‘아티스트 인 레지스탕스(A.I.R) 미야시타’를 만들었다. 이 그룹은 나이키가 공원을 재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또한 예술창작 활동, 에세이 쓰기, 페미니즘, 반자본주의, 안티 젠트리피케이션과 관련한 워크숍을 조직하는 일 등에 활발하게 참여해 왔다. 현재 이치무라는 2020년에 열릴 도쿄올림픽을 타겟으로 안티올림픽운동에 집중 중이다.
썩어가는 신체가 해방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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