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환대의 공간으로 만들기
박은선
분량4,788자 / 10분 / 도판 4장
발행일2015년 1월 15일
유형오피니언
광화문을 바쁘게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보통 어떤 표정도 읽히지 않는다. 기쁨이나 슬픔 등의 감정을 드러낼 틈 없이 하루하루 생존하기에도 바쁜 곳이 서울이다. 높은 실업률과 비정규직 비율, 직장인과 취업준비생들 모두 ‘불안’이라는 단어와 함께 산다. 높은 강도의 노동을 서로에게 요구하며, 모두가 지쳐있음을 확인하는 재미로 사는 도시. 그러나 이런 여유 없는 삶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서울을 떠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서울에는 일자리가 있고, 거의 모든 문화 기반이 몰려 있으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을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아무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살 수 있는 익명의 공간이 서울이지만, 때로는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어떠한 공공의 가치에 목이 말라서 수만 명의 사람이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점거해 전혀 다른 문맥의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원래 살아가던 삶을 멈추고 장시간 공간 점거를 지속하는 사람들도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일상의 리듬을 유지하려는 자들의 눈을 끈다. ‘저 자들은 대체 누구일까?’ 점거는 공간의 원래 용도를 전유專有하기 때문에 ‘반 건축’적인 동시에, 공간 자체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행위이다. 잠정적으로 폐쇄된 공장이나 회사에서 해고된 노동자는 다시 그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어하고, 잘려 나갈 위기의 산허리를 지키려는 사람들, 바다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점거는 공간과 그 소유, 인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광화문광장에는 세월호 가족과 연대자들의 텐트가 있고, 광장 건너 서울신문사 위의 전광판에는 C&M 케이블TV 해고 노동자 두 명이 올라가 있다. 대한문에는 쌍차 노동자들의 농성장이 있고, 환구단에는 재능교육 해고 노동자 텐트가 있다. 서울 이외의 공간에도 지속적인 점거 형태의 농성장은 여러 군데가 있다. 구미 스타케미칼 공장 해고노동자 차광호가 180일이 넘도록 굴뚝에 올라가 있고, 내성천 영주댐 공사현장에는 지율스님과 내성천 친구들이 수몰 예정지 안에 텐트를 치고 살고 있으며, 밀양에서도 할매들은 여전히 컨테이너와 천막을 지킨다. 7년 전 해고된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들도 부평 공장 앞 텐트에서 생활 중이다. 유독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시민 불복종 운동이 분야를 불문하고 ‘점거’의 형식을 띠고 있다. 권력의 부당함에 불복종하는 주체들이 이런 극한 상황에서 점거를 하는 이유와 그 의미는 무엇일까? 어쩌면 점거는 일시적 자율공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 수도 있고 타자를 맞이하는 환대의 공간의 가능성도 지닐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점거라는 행위가 갖는 의미와 그 장소가 만들어내는 가능성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점거의 정의
점거는 영어로 싯인sit-in protest 혹은 스쾃squat이라고도 하며, 시간에 따라 크게 ‘일시 점거’와 ‘장기 점거’로 나눌 수 있다. 일시 점거는 2008년의 촛불집회처럼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형태이고, 장기 점거는 한 장소에 계속 머무는 형태로,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는 금융위기 이후 공간을 전유하는 직접행동이 끊이지 않는다. 뉴욕의 오큐파이, 아랍의 봄, 터키의 게지공원 점거운동, 홍콩의 우산 시위 등 그 촉발의 원인은 조금씩 상이하지만, 공통적으로 ‘금융 자본주의 중심의 신자유주의 시스템’ 혹은 ‘비 민주적 행정권력’에 대한 불복종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에이프릴 카터April Carter는 『직접행동Direct Action and Democracy Today』에서 “공간의 점거는 직접행동의 한 방법으로, 통상적으로 민주주의 결손 그리고 시민이 느끼는 좌절감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1 점거의 정확한 사전적 의미를 추려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보통 점거는 전략적인 장소에 머물러 그들이 강제 퇴거될 때까지 혹은 그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그곳을 지키는 형태로 나타난다.2
그러나 그 결과가 늘 효과적일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일시적 혹은 장기 점거가 늘 유의미한 결과를 갖는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Franco Berardi는 오큐파이 월스트리트의 점거 전술을 높이 평가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보기에 기호자본주의 통치성은 물리적 공간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즉 신자유주의의 권력이 영토를 벗어나 기호와 언어 숫자로서 우리 삶을 착취하고 있는데, 기호자본에 대항하는 오큐파이 운동이 부르주아지 시대의 권력의 장소인 주코티 공원이나 거리점거로 표현된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금융화capitalization이고, 금융권력은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 되었으며 금융자본에 대항하기 위하여 거리나 건물 점거의 방식보다는 기호의 알고리즘 점거하는 것이 유효하다는 것이다.”3 그의 분석은 설득력을 지닌다. 지난 뉴욕과 유럽의 오큐파이, 2008년 한국의 촛불, 최근의 터키의 집회는 비포의 분석대로 근본적 변화를 일으켰다고 평가하기엔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점거는 왜 끊이지 않는가?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공간의 점거가 끊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항주체와 국가나 기업과의 대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한진 중공업, 용산과 두리반의 철거문제, 쌍용자동차, 세월호 어느 하나 국가가 해결하려는 일은 없었으며, 기업과 국가가 가진 문제를 해결할 역량 있는 정치인이나 정당의 역할도 상실된 상황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나 활동가들은 가장 높은 곳, 상징적인 곳에 머물며,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직접 문제를 해결하려 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정부의 무관용법칙zero tolerance은 대화 대신에 벌금과 공권력 투입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궁지에 몰리는 노동자들, 철거민들 활동가들은 더욱 극한 상황으로 몰리게 되고 마지막으로 가장 위험한 곳에 올라 점거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들의 점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준다. 부패한 신자유주의 국가에게 국민은 중요한 존재가 아니며 오로지 기업의 이익만이 중시된다. 현재 지속적 점거 운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쌍용자동차, 스타케미칼, 콜트콜텍, C&M, 코오롱스포츠등의 노동자들은 모두 가짜 회계를 통한 불법구조조정, 위장폐업등 무책임한 경영 방식과 싸워왔다. 즉 고질적인 신자유주주의의 병폐인 국가+기업의 결탁과, 무 계획적인 금융개방 시장개방으로 인한 부도덕한 외국자본의 먹튀 행각 등의 피해는 노동자들이 고스란히 지게 된 셈이다. 피해자도 노동자이고, 해결해야 하는 자들도 노동자 당사자이다.
점거의 의미와 가능성
점거는 기본적으로 (공통) 공간의 소유권이 누구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도시의 거리, 강과 산은 물론 집단 지성의 결과들은 개인적으로 소유되어서는 안 되는 공동의 자산이다. 노동의 결과물인 공장과 회사들도 비단 사주만의 것이 아닌, 그 회사를 만들어간 노동자와 모든 구성원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로 이런 것들을 ‘공통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공동의 재산을 국가나 시 혹은 개인의 소유로 주장하는 순간 그 균형이 깨진다는 점이다. 프랑코 베라르디의 주장대로 신자유주의의 권력은 영토가 아니라 숫자와 기호의 알고리즘에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지리적인 문제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시초始初 축적을 비단 자본주의의 초기 단계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하나의 일관된 현상이라 했듯이, 신자유주의 시스템에서 공통재 수탈을 통한 축적은 강화되고 있다. 더군다나 국가는 대기업들과 함께 물, 하수도, 도로, 의료보험 등 공공재의 민영화를 빠르게 추진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이윤은 극소수에게 돌아간다. 점거운동에서는 우호적인 시민 지지자들을 만나는 일보다 적대적인 시민을 만나는 일이 더 많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의 도시는 사실 강한 이익공동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에는 무조건 반대하며 자신만의 이익공동체, 다시 말해 폐쇄적인 공동체gated community를 만들어왔다.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점거나 거리에서 타자를 만나는 방법을 좀 더 사유해야 한다. 비단 건물주나 시의 소유권에서 벗어나 다양한 이야기들을 환대하고 나눌 수 있을 때, 소수의 이야기를 열린 시선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도시 공간은 활기차진다.
점거의 공간은 새로운 정치를 실험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그 공간을 지키고자 하는 다수의 의지에 의해 자발적인 공동체가 생겨나는데 이들 사이에서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되기도 했다. 우리는 그러한 해방의 공간을 역사에서 그리고 근래에 목격했다. 촛불, 오큐파이 뉴욕 등 커다란 공간에서부터 두리반, 마리처럼 적어도 그 안에서는 평등과 자율의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때로는 예술과 결합하고 때로는 요리와 결합하며 어떤 때는 세미나나 전략회의가 되기도 한다.
2008년 촛불시위를 기점으로 용산, 두리반, 두물머리, 마리, 희망버스, 콜트콜텍, 밀양, 강정 등의 점거공간에서 예술이 특이하게 작용했다. 이들은 단순히 걸개그림이나 시위의 스펙타클을 위해 이미지를 생산하는 주문 생산의 방식, 타자를 도와주는 착한 시민의 역할이 아니라, 운동주체로서의 역할을 하고,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구분 없이 그 안에서 감수성의 정치를 해왔다. 그러나 비단 점거만이 해방을 위한 공간이나 환대하는 공간의 유일한 생성 방식은 아니다. 그러한 자율적인 정치의 모델들이 일상이 되도록 작은 단위에서 지속적으로 문화를 실험해 나가는 일, 그리고 점거의 공간에서 만나는 타자들을 환대하는 일은 우리가 처한 도시의 비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을 제시할 것이다.

리슨투더시티의 모바일 갤러리인 스페이스 모래. 두리반 뒷마당에서의 스쾃, 2011 / 사진: 박은선 
두물머리에서 물리적인 강제퇴거에 저항하는 한 농부, 2012 / 사진: 박은선
박은선
리슨투더시티www.listentothecity.org에서 여러 가지를 담당하고 있으며 수유너머N 회원이기도 하다. 현재 대학에서 현대예술론과 드로잉 등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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