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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청년의 경험과 빈곤

조문영

*이 강연은 공저 『정치의 임계, 공공성의 모험』(혜안, 2014) 중 「글로벌 빈곤의 퇴마사들-국가,자본,그리고 여기 가난한 청년들」에 토대를 둔 것이다. (강연: 2014년 7월 2일)

보이지 않는 가난들

반갑습니다. 문화인류학자 조문영입니다. 요즘 국제개발 진영에 경제학자나 인류학자들이 많이 참여합니다. 실제 주민들을 만날 때 인류학의 역할이 매우 크기 때문에 국제 개발기구에서 경제학자와 인류학자가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측이 논쟁을 벌이는 경우도 많고요. 경제학자가 복잡한 세계를 단순 명료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인류학자는 어떤 면에서 그 반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양자가 화합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이 어렵습니다. 경제학뿐 아니라 사회학의 경우에도 현상을 일반화, 추상화하는 경향을 많이 발견할 수 있죠. 전 그런 스타일의 강의를 듣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사회에 대해 단언을 내리는 것을 여전히 주저하는 편입니다. 많은 사회, 지역을 연구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어떤 사회에 대해 쉽게 단언을 내리기 힘듭니다. 그래서 생기는 취약점이 있다면 문화인류학자들이 보수화되기가 쉽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의 입장을 다 헤아리고 경청하는 과정에서 내가 어느 순간에 결정을 내리고 비판적 입장을 취해야 할지 주저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 청년에 관해 이야기할 텐데, 아마 여러분들 대부분 실제로 청년이고 저보다 오히려 토해낼 이야기가 많을 듯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어떤 부분에 대해 단언을 내리기보다는, 조각을 맞춰나가는 작업을 여러분과 같이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먼저 짧게나마 사진을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인류학 석사 논문을 쓴다고 드나들었던 한 현장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1960년대의 난곡이라는 곳입니다. 이곳은 구로동이나 청계천 등지에서, 도심이 재개발되면서 사람들이 이주해 온 곳입니다. 이때가 1970년대 초반인데 정부에서 구획을 나누어 금만 그어 준거죠. 봉천동, 신림동 일대가 다 비슷합니다. 다음으로 제가 현지조사를 갔던 2001년도의 난곡은 서울의 마지막 남은 달동네라고 해서, 당시 굉장히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2003년도에 본격적으로 철거되면서 달동네의 그 많던 집들이 사라졌어요. 2011년 귀국한 후 그곳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지금은 일부 임대아파트를 포함해 주공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습니다. 사실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에 벌어진 재개발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싸우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막후 접촉이 훨씬 많았던 재개발이었고, 그래서 전통적인 철거운동 진영에서는 타협이라며 비판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산동네 아래쪽이 ‘국회단지’라고 제가 연구할 당시 꽤 잘사는 마을이었는데, 2011년에 다시 가봤을 때는 오히려 이 곳이 슬럼화되기 시작하고, 윗동네와 아랫동네가 완전히 역전이 되었더군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1960년대 말부터 반세기도 안 되는 시간에 한 공간에서 엄청난 변화가 생겼습니다. 굉장히 짧은 시간 동안에 사람들의 삶이 급변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곱씹게 됩니다. 과거의 난곡은 빈곤의 실체가 확연히 보이는 지역이었습니다. 현재의 난곡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되었는데, 그럼 그 많은 주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일부는 더 싼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고, 일부는 반지하로 가거나, 다세대 주택에서 한 방을 임대해 공유하면서 갈기갈기 쪼개지기 시작하죠. 그나마 이 사람들의 빈곤이 드러나는 순간은 매달 갚아나가야 하는 공과금이 밀리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전에 보았던 굉장히 가시적인 빈곤이라는 것이 이제는 별로 보이지 않는 거죠.

신자유주의 시대 빈곤의 가장 큰 특징으로 논의되는 것이 ‘비가시적 가난’입니다. 가난이 존재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제가 궁금했던 것은 누구나 다 가난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단언하는데 가난에 맞서 싸우는 활동가들은 왜 충원되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2001년 당시 난곡지역은 서울의 전형적인 달동네로 알려져 있었고, 관악구 봉천동, 신림동 일대는 한국 빈민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었던 곳이기 때문에 많은 운동단체가 병립했고 지금도 활동 중입니다. 의아스러운 점은 제가 2001년에 만났던 활동가들을 2014년까지 계속 보고 있다는 겁니다. 활동가들이 더는 충원되지 않아요. 그래서 청년이라고는 하지만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긴 분들이 여전히 활동가로 남아 한 달에 80~120만 원을 받고 일하시죠. 한국 사회에서 흔히 청년의 빈곤에 대해 그렇게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는데, 이런 변화가 청년 활동가까지 사라지게 한 것인지 궁금했어요. 저는 주로 대학에서 중국 사회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하고 있지만, 한국 사회의 이런 부분들이 궁금해서 오늘 이 주제에 대해 여러분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노동이 잉여가 된 사회

현재 한국의 청년세대가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흔히 세대라고 할 때 이전에 유신세대, 386세대, 신세대, X-세대, 서태지 세대 등이 있었죠. 이는 한 세대가 공유하는 라이프스타일이 있고,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경험이나 기억에 따라 세대를 명명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현세대에 대해서 3포 세대, 스펙 제너레이션, 88만원 세대라고 이야기할 때는 좀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88만원 세대가 88만원짜리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한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그보다는 이 세대가 가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 맥락이 무엇이냐, 즉 자본주의 질서의 재편 속에서 이 세대가 지금 어떤 문제, 위기에 처해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이미 그 배경에 대해 많은 학자가 이야기했기 때문에 저는 간단히 짚고만 넘어가겠습니다.

지금 청년 빈곤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로 글로벌 정치 경제가 어떤 변동을 경험했는가가 많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흔히 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하지요. 학생들에게 자신이 경험하는 불안의 출처가 어디인지 물으면 죄다 ‘신자유주의’를 얘기합니다. 모든 게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거지요. 그만큼 많은 사람이 이 문제에 몰두해 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전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죠. 신자유주의에 관한 최근의 저서들이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재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기본적으로 많이 강조하는 부분은 이것입니다. 과거에 자본과 노동 간에 맺어졌던 암묵적 타협이 더 이상 유지되고 있지 못하다는 거예요. 1950~60년대 서구 자본주의를 생각해볼 때, 자동차 회사 포드의 사장이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말을 남겼죠. “나의 꿈은 우리 공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포드 자동차를 소유하고, 포드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이라고요. 그러한 사장으로서의 야심이 정말로 실현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노동이라는 부분을 자본이 무시할 수 없는 환경이 있었고, 이것은 냉전체제 때문에 훨씬 더 견고해진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제3세계, 한국도 당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이 냉전 체제하에서 공산 진영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규모의 인위적 차관이나 원조가 진행되었고, 이런 산업자본주의하에서 사람들의 노동은 어느 정도 중요한 취급을 받았죠. 노동자들에게는 ‘너의 노동이 사회에서 중요한 부분이고 실제로 잠깐 해고된다 해도 언젠가는 다시 고용될 거다’라는 희망이 있었죠. ‘당신의 노동에 대한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고, 당신의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사회적 책무가 존재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복지국가라는 정당성이 획득될 수 있었죠. 그런데 현재 가장 힘든 문제는 대부분의 청년들이 더 이상 맑스적 의미의 산업예비군이 아니라 ‘잉여’가 되었다는 겁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야기했듯 더 이상 나의 노동을 사회가 원하지 않는 시대가 되면서 지대한 변화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시간적 불안’의 정체

1970년대 말 이후 자본주의 질서의 재편에 대해 여기서 장황하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런 것 같아요. 제가 대학에서 학생들과 이야기해보면 부모님과의 갈등이 굉장히 심각하더라고요. 부모님이 386세대인데, 부모가 살았던 80년대 한국 자본주의와 지금이 너무나도 사정이 달라진 거죠. 그래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아요. 가령 부모는 전라도 구례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굉장히 힘들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서 어렵게 아르바이트하며 생활하고, 그 와중에도 사회에 대한 책무를 잃지 않고 데모도 열심히 하고, 졸업해서 취직하고, 결혼해서 자식들 먹여 살리고, 과외도 시켜주고, 학원도 보내고 해서 결국 대학까지 보냈는데 그 자식은 (부모 입장에서) 어쩜 그렇게 무기력하냐는 거죠. 사회에 대한 관심도 없고, 고민도 없고, 줄창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온라인 게임만 하고 있으니 부모는 자식이 너무 한탄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한테 굉장히 모멸감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내가 진짜 못난 인간인가 하면서 죄책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살았던 80년대 한국의 자본주의와 지금의 자본주의 환경이 너무나 달라졌다는 점이죠. 끊임없이 나오는 이야기가 ‘고용 없는 성장’인데, 현재 통계로도 극명히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기술도 계속 발전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가 금융질서로 재편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변화 중 하나죠. 사람을 고용하고, 물건을 생산하는 제조업 위주의 자본주의가 여전히 주요한 부분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돈이 돈을 생산하는 사회, 창출된 이윤이 생산을 위해 재투자되지 않는 금융화 흐름 속에서 노동하는 개인이 사회에 그다지 유용한 인력으로 등장하지 않게 되죠. 그나마 생산의 부분마저 계속해서 중국이나 다른 세계로 아웃소싱(outsourcing)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의 노동이라는 것이 굉장히 쓸모 있고, 그래서 사회가 너의 노동을 지켜주고 보호해줘야 한다는 복지국가의 기본적인 전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업률’이나 ‘실업자’를 여전히 공론화하는데, 실업이라는 말을 이제 굳이 쓸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실업이 정상(norm) 상태가 아닐까요.

지역의 차이나 문화의 다양성에 주목하는 문화인류학자들은 문화기술지, 혹은 민족지라고도 하는 에스노그래피(ethnography) 작업을 진행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들을 인터뷰하거나 장시간 참여관찰을 해서 기록과 해석을 남기는 일이죠. 현재 문화인류학자들의 에스노그래피 작업에서도 실제로 공통성이 발견됩니다. 내가 인도의 청년에 대해 현지조사(fieldwork)를 하든, 아니면 세네갈을 가든, 에티오피아를 가든, 혹은 중국에서 연구를 하든지 간에 현재 전 세계 청년들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비슷한 주제를 보여줍니다. 그중 하나가 ‘시간적 불안’(temporal anxiety)에 관한 것입니다. 개별 지역의 젊은이들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시간적 불안의 정체가 뭐냐는 거죠. 예를 들어 인도의 대학생들에 관한 한 에스노그래피의 저서 제목은 ‘Time Pass’(2010)입니다. 우리말로 ‘시간 땜질’로 번역할 수 있겠네요. 그 글에서 보여주는 풍경은 끊임없이 수다를 떨면서 몰려다니는 남학생들의 모습이에요. 실제로 딱히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죽치면서 기다리는(waiting) 것 자체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굳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 책에서 인류학자가 했던 이야기는, 이 청년들에게서 이제는 연대기적인 시간(chronological time)이라는 것의 의미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흔히 유아기가 있고, 아동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등으로 생의 주기를 나누고, 제도나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이러한 단계 구획에 따라 작업을 했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니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을 다니고 하는 기본적인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러한 연대기적인 시간 규범을 가지게 되고, 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니까 거기에 맞는 주택제도나 사회제도를 만들어 낼 수 있었지요. 그런데 현재 청년들의 모습은 그런 연대기적인 시간 자체가 완전히 붕괴해버렸음을 보여줍니다. 계속해서 질질 끌죠. 제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휴학을 3년까지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거의 2년은 기본으로 하는 거 같아요. 유예 상태가 지속되는 거죠.

제가 읽은 또 다른 에스노그래피는 세네갈의 청년들 이야기인데 제목이 ‘Killing Time’입니다. 학술 논문의 제목이 ‘시간 죽이기’인 거죠. 세네갈에는 ‘아타야’(attaya)라고 하는 차를 따르는 풍습이 있습니다. 차를 우려서 서로 나눠 마시는 과정이 굉장히 복잡해요. 이것을 젊은이들이 모여 앉아 8시간 이상을 하는 겁니다. 잎을 고르고, 따고, 나누고, 빻고, 어떤 식으로 우려내고 하는지가 다 복잡한 방법과 절차가 있어요. 20대 청년들이 모여서 그것을 하는데, 이들은 “나는 차를 마신다”고 안 하고 “요리한다”(cook)고 말해요. 이 시간 때우기가 거의 예술의 경지까지 간 거죠. 청년들이 돈도 없죠, 그런데 시간은 남아도는 거예요. 당장에 직장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몰입해서 차를 우려냅니다. 

신자유주의의 축소판, 대학

외국 청년들에 관한 에스노그래피를 접하면서, 그럼 한국도 이와 똑같은가 하고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아까 언급한 연대기적 시간과 관련하여 (물론 공유하는 부분도 많지만) 제가 가장 결정적으로 다르게 느끼는 것이 있어요. 한국 청년들은 무진장 바쁘다는 겁니다. 요새 대학에 갓 들어온 교수들에게 주어지는 이상한 책무에 대한 소개로 이야기를 시작할게요. 그 책무 중 하나는 멀쩡한 한국 사람인데 영어로 강의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영어강의 못 하면 채용이 안 되는 거죠. 채용 공고에 등장하는 ‘영어 강의자 우대’라는 문구로 국내 박사 출신을 자연스럽게 배제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3년 간 매 학기마다 영어강의를 한 과목씩 해야 했어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수업 자체가 인류학 현지라고 할 수 있죠. 우리가 이 괴기스러운 난장판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 직접 볼 수 있기도 하고요. 어쨌든 흥미로운 것은 그 덕분에 아주 많은 외국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연세대는 약 200개 학교와 자매결연이 되어서 많은 국가에서 학생들이 옵니다. ‘글로벌 학교가 되자’, ‘The Global, The Best’, 이런 게 학교 구호죠. 이런 경로로 미국 출신의 교환 학생들을 종종 만나는데 이들은 한국이 신자유주의 사회라는 주장에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도 신자유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지만, 자기들은 한국이 신자유주의 사회라는 인식이 전혀 안 든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신자유주의 사회냐, 이건 그냥 공포 사회지. 이건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사회인 것 같다고 이야기해요. 한 미국 학생이 홈스테이를 했는데, 자기 또래의 그 집 자식들이 영어 학원 가야 한다, 취직 준비, 유학 준비 해야 한다 하면서 거의 방에 처박혀 안 나온대요. 그러다가 아예 작심하고 조용한 환경을 찾겠다고 고시원으로 들어가버리고. 그래서 결국 자기와 그 집 부모님만 남았답니다. 즉, 한국의 젊은 세대는 시간을 땜질하면서 그냥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스스로 ‘나는 잉여야’라고 단언하지만, 이렇게 바쁜 잉여가 없는 거죠. 끊임없이 잉여라고 자처하지만, 끊임없이 무언가를 되새기고, 반복하고, 열중하고, 무언가를 계속해서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않아요. 그래서 어찌 보면 훨씬 폭력적인 장면들이 연출되지 않나 합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대만에 관한 에스노그래피도 좀 비슷한 경향을 보입니다. 20세기 후반에 찬란한 개발의 서사가 쓰여진 곳들이죠. 외국에 가면 자국에 냉소적이었던 사람도 애국자가 되어 돌아오는데, 실제로 너무나 떠받들어 주는 거예요. 새마을 운동을 수출한다는 것이 우리가 봤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창피한 일이지만, 실제로 아프리카에 다녀온 친구들은 애국자가 되어 돌아오곤 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다 그 새마을 모자를 쓰고, ‘새벽종이 울렸네’라고 합창하고 있고, 그러면서 정말 그렇게 짧은 시간에 찬란한 경제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굉장히 궁금해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찬란한 개발의 서사가 쓰였던 곳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적인 시간성이 돌아가고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근대적인 시간성, 개발주의적 시간성이 같이 맞물리고 있습니다. 진보와 개발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냉소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계몽주의적 이상을 버리지 못합니다. 거기에 계속 보조를 맞추고 있고, 초고속 경제성장을 통해서 빨리 서구와의 시차를 극복하고 싶다는 거죠. 그것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 대학입니다. 빨리 따라잡고 싶다는 근대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열망이 한편에 계속해서 똬리를 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가 너무나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하게 돌아가니, 이 불확실성에 어떻게 템포를 맞춰갈 것인가 고민합니다. 서동진 선생이 저서에서 이야기했듯 ‘자기계발적인 주체’로 나를 계속해서 키워내고 연마해야 한다는 책무를 자발적으로 끌어안고 있죠. 한국 사회는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서 더 폭력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떤 학자들은 포스트-미라클(postmiracle) 시대에 드러나는 동아시아 청년들의 주체성(subjectivity)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어제보다 내일이 더 나았으면 좋겠는데, 실제로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까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다는 거죠.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교육제도는 경쟁에 발 맞추기 위해 훨씬 더 폭주기관차처럼 돌아갑니다.

경제적 빈곤 바깥의 빈곤

제가 엘리트 학교에 있다 보니 이런 문제를 더 적나라하게 보게 됩니다. 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면, 유아 때부터 영어학원을 다니거나 교습을 받고, 심지어 초등학교 때 해외 자원봉사를 떠납니다. 면접을 하면 이런 내용을 자기소개서에서 발견하곤 해요. 어떤 식으로든 메뉴얼이 있겠죠. 심지어 그것을 대행해 주는 여행업체도 있다고 들었어요. 오지에 찾아가서 현수막을 걸어놓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은 뒤 해산하고, 엄마 아빠 손잡고 놀러 가는 거죠. 그런 과정을 죽 거치고, 인생에서 단 한 번의 삐끗함도 없어야지 명문 대학에 입성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조한혜정 선생님은 그런 학생들을 ‘스펙 제너레이션’이라 지칭했습니다. 그들의 특징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경쟁 속에서 살았다”, “시장에서 팔릴 만한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스펙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또 “우리 엄마, 우리 아빠를 굉장히 자주 언급한다”라고 말씀하셨죠. 자신의 행동반경이 좀처럼 넓혀지지가 않는 겁니다. 돌이켜보면 90년대까지도 대학에서는 부모 운운하는 걸 경계했던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강남에서 온 친구는 대부분 강남 좌파의 운명을 타고났는데, 너무 잘 사는데 그 이야기를 친구들 앞에서 하는 것이 괜히 미안한 거죠. 죄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자신의 계급성을 숨기는 문화가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엄마 아빠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합니다. 수시 보고 편입시험 볼 때도 면접실 밖에서 부모님이 기다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학생들이 타인과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현지답사를 가면 더 잘 느낄 수 있는데 뉴욕의 타임스퀘어에 떨구어 놓으면 훨씬 더 잘 살 친구들이, 한국의 농촌에 가면 어찌할 줄을 몰라 합니다. 활동 반경은 좁아져 있고, 일정한 방식으로 미리 구획되어 있고, 어쨌든 힘든 과정을 통해 대학에 왔는데, 사실 결정된 게 하나도 없잖아요. 목적지라고 생각해서 왔는데, 너 이제부터 시작이야, 라고 하면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겠어요. 배신감은 우울증이나 공황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나마 유복했으면 덜 미안한데, 너무나도 없는 살림에 그렇게까지 밀어줬으니 죄책감에 시달리죠.

저는 제가 만난 연세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이런 시공간적으로 압축된 근대화 과정 속에서 어쨌든 폭주기관차처럼 경쟁을 뚫고 자식을 엘리트 학교에 보낼 수 있는 계층은 예전보다 훨씬 더 제한적입니다. 모든 학과에서 서울 출신 학생의 비율이 압도적이죠. 그나마 지방 출신 학생들도 대부분 도시에서 옵니다. 농촌에서 온 친구들은 정말 손에 꼽아요. 그중에서 일부는 또 농어촌 특별전형이고요. 이 친구들은 또 그런 것에 콤플렉스를 많이 느끼죠. 학교 내에서도 서열이 있고요. “저는 연대 다녀요”라고 이야기 안 하고, “저 연대 경영학과 다녀요”, “연대 의대 다녀요”라고 말해요. 그래야만 인정받는 것 같고. 이렇게 같은 학교 내에서도 끊임없이 서열을 매기기 때문에, 실제로는 세대 안에서의 분화가 훨씬 극심해지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현재 빈곤의 모습을 어떤 식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저는 ‘빈곤의 인류학’이라는 학부 수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빈곤을 연구하는 사회학자, 사회복지학자, 인류학자라고 했을 때 우리가 흔히 연구했던 빈곤은 주로 경제적인 빈곤의 모습이었죠. 저 역시 물질적, 경제적인 빈곤만 중요한 게 아님을 느끼는데, 사실 이 문제를 가장 절절하게 느끼는 집단이 청년이에요. 이들은 나의 빈곤은 다르다고 외치고 있고, 나의 빈곤을 제대로 이해받기를 원하고 있죠. 나의 빈곤은 단지 경제적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고 강변하고 있고, 실제로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프랑코 베라르디 등 이탈리아 자율주의 학파들의 책이 많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특히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Franco Berardi ‘Bifo’)가 『노동하는 영혼』이라는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빈곤의 모습은 실존과 소통의 빈곤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영혼마저 노동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일부 인용을 하면, “영혼을 노동하도록 배치하는 것, 이것이 소외의 새로운 형태이다. 우리의 욕망하는 에너지는 자기기업(self-enterprise)이라는 속임수의 덫에 걸리고 우리의 리비도적인 투자들은 경제적 규칙들에 의해 규제되며, 우리의 관심은 가상적인 네트워크들의 불확실성에 포획된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것과 관련해 최근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람은 지그문트 바우만 같습니다. 바우만이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시대에 개인의 자기 건설적인 노동의 목적지가 그 특유의 치유 불가능한 미결정 상태라는 것. 경주의 지속, 경주에 참여하고 있다는 만족스러운 자각이 진정한 중독이 되는 것이지, 결승점에 닿을지도 모를 극소수의 사람들을 기다리는 어떤 특별한 상에 중독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서 뛰고 있는데 이 머신이 애초에 스톱 사인이 없는 것이죠. 누군가 그것을 누른 순간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지고, 오히려 뛰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그나마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거죠. 궤도를 이탈하는 것,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이 상황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잃은 것과 가진 것

실존과 소통의 빈곤을 언급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 마이클 하트안토니오 네그리는 같은 자율주의 학파이긴 하지만 조금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조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데, ‘더 이상 구원이라는 것은 찾아 볼 수 없다’라는 현실 인식을 뒤집어 보길 제안하는 거죠. 『다중』, 『공통체』 등 일련의 작업에서 하트와 네그리는 “결국 우리에게 남은 대안은 러닝머신 위에서 쓰러져 죽는 거밖에 없는 것인가”라고 되묻고, 빈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제안합니다. 빈곤을 결핍으로 정의하는 순간 부정의 언어로 출발하는 건데 이것을 오히려 뒤집어서 비어있음의 가능성, 어떤 새로운 창조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라며 긍정의 화두를 던집니다.

이 화두는 마오쩌둥이 오래전에 했던 이야기를 상기시킵니다. 굉장히 인민주의적인 접근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우리 중국의 10억 인민은 가난하다”고 강조하면서 이를 재해석합니다. “가난이라는 것은 백지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 백지 상태라는 것은 한편으로 그 위에 새로운 언어, 새로운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라고 말이죠. 마찬가지로 하트와 네그리 역시 빈곤이라는 것을 가능성의 측면에서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빈곤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빈자다’라는 것이며, ‘the poor’에 ‘s’를 붙여서 ‘the poors’라고 실제로 쓰면서 “We are the Poors”를 정치적 슬로건으로 가져가자고 이야기합니다. 20세기에 우리가 무언가 싸우고 투쟁할 가장 주된 장소, 가장 큰 헤게모니를 가진 장소는 공장이었는데 이 장소는 이제 유효하지 않다고 보는 거죠. 오히려 이들은 디지털 테크놀러지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습니다. 인간들이 끊임없이 수많은 사회적 관계를 동원해서 인터넷을 통해 뭔가를 생산하는 자리는 전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각종 블로그, 거기서 생산되는 감정과 새로운 연계들, 또 거기서 뭔가 의기투합해서 벌이는 활동들과 같이 ‘생산’의 범위를 확장시려는 시도는 과거에는 주로 페미니즘 영역에서 이루어졌죠. 예컨대 가사노동은 임노동화 되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생산의 영역인데, 이것이 임노동과 무임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적 구분 속에서 굉장히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어 온 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죠. 현재는 이 가사노동뿐만 아니라 너무나 많은 다양한 삶정치적 생산들이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트와 네그리는 지금 이 사회와 이 세대가 사회적 협력과 신체·욕망의 상호작용을 통한 정동(情動, affects) 등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전 과정에 굉장히 많이 관여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또 소통과 협력, 정동적인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한 비물질적 노동이 실제 큰 헤게모니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 빈자’들은 경제적인 통계로 봤을 때는 가진 것이 없고, 사회학적으로 봤을 때도 통상 배제된 것으로 간주되지만, 실제로는 삶정치적인 생산의 전 지구적 리듬 속에 완전히 들어와 있다는 거죠. 인터넷 테크놀로지의 역할이 이 점에서 중요합니다. 빈곤에 대한 개입의 측면에서 살펴보죠. 예전에 ‘자선’이라 하면 우리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구세군 냄비, 고아원, 양로원 정도였죠. 요새는 네이버 해피빈이라던가, 게임을 즐기면서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각종 인터넷 서명운동을 통해 인도에서 벌어지는 여아살해나 성추행에 전 세계가 관여를 하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변화이죠. 인터넷을 통해 전 지구적 모금, 서명운동이 가능해지고, 창업도 가능해지고, 누구나 다 소설가, 기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거죠. 그러면서 임노동과 임노동이 아닌 것 사이의 구별이 흐려지기 시작하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많은 것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이 시대가 또한 너무나도 많은 것을 가지게 된 시대가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 있는 겁니다.

프로젝트의 일상화

새로운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예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생산이라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가 왔습니다. 이런 가운데 무언가 낙관적인 전망을 제기하고 싶었던 하트와 네그리의 논지는 이미 (여러분들이 짐작했겠지만) 많은 학자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제가 ‘빈곤의 인류학’ 수업 마지막 시간에 학생들과 『공통체』를 읽었는데, 학생들이 수업 때 다룬 수많은 논의 중에 이 책을 가장 매력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 논의가 무언가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해주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전히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에 관심을 갖는데, 문제는 가능성이 큰 만큼, 이 가능성을 현재의 시장이나 국가의 어법으로 재편하는 힘 또한 한국 사회에서 굉장히 폭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봤을 때 한국 사회의 빈곤, 특히 청년세대가 겪는 빈곤의 슬픔 혹은 고통의 큰 부분은 너무나도 많은 가능성이 주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폭력을 경험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능성의 포획’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보자면, 첫 번째로 ‘프로젝트화된 삶’이라는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현재 시대는 정의, 연대, 도덕과 관련된 문제, 감정적인 소통의 문제가 굉장히 전시화된 형태로 출현합니다. 어떤 장이든, 대학의 연구든 건축가의 전시든 주민운동가의 자활사업이든 전부 단기적 계약에 의한 프로젝트로 수행되고 있습니다. 난곡의 경우 IMF가 터지고 활동가들이 처음으로 프로젝트란 걸 수주했는데, 이게 실업극복 국민운동이었어요. 긴급구호의 차원에서 만든 거였는데, 이런 지원이 상시적인 프로젝트로 등장하게 된 거죠. 그전까지 빈민운동의 장에서는 국가나 기업이 맞서 싸워야 할 적이었고, 적군과 아군의 구분이 (철거투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됐죠. 하지만 프로젝트라는 장에서 ‘복지운동’이 등장하고, 민관 파트너쉽을 통한 활동이 범람하면서 그 대립은 모호해지기 시작했어요. 내가 빈민과 연대해서 정부나 기업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 과거의 기본적 구도였다면, 이제는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파트너쉽을 맺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주민들은 연대해야 할 동지가 아니라 무언가를 베풀어줘야 할 클라이언트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활동가가 컴퓨터 앞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세상이 시작됩니다. 90년대 말에 난곡에서 현지조사를 하면서 운동이라는 화두와 복지라는 화두가 만나면서 갖게 되는 긴장, 충돌, 우왕좌왕하는 과정을 석사논문에서 기술했어요. 논문 발표 이후 일부 활동가들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 역시 착잡했고, 아무튼 아주 비관적인 논문처럼 보였지요. 그런데 당시 새로운 테크놀로지로 봤던 ‘프로젝트’가 십여 년이 지나 이렇게 모든 분야에서 ‘일상’이 될 줄은 사실 저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정상(norm)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최근 기업의 사회적 공헌이다, 공정 무역이다, 적정기술이다, 사회적 기업이다, 협동조합이다 하는데, 오늘 여기 오신 분들은 이런 것에 관심이 좀 있으시고, 참여해보기도 하셨겠지요. 하지만 일련의 프로젝트가 남발하면서 ‘사회’라는 말이 범람하는 이 시대가 또한 많은 이들이 ‘사회의 죽음’을 떠드는 시대란 점, 이 공허함, 부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프로젝트화된 삶’이 모종의 연루가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동강댐과 밀양의 경우

두 번째로 나타나는 경향은 ‘소통과 연대의 자기회귀적 성격’이라고 명명해 봤어요. ‘타자의 비극을 소비하기’라고도 할 수 있고요. ‘빈곤의 인류학’ 수업에서 한 학생이 밀양에 대해 굉장히 좋은 글을 썼습니다. 그 친구가 “타자의 비극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각을 공유하고, 당사자의 시간의 깊이를 헤아려보는 시도들이 공통적인 것의 가능성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라는 말을 했어요. 저한테는 굉장히 와 닿는 구절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타자의 비극을 소비하는 것이 만연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상황이라는 점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점이 밀양과 그보다 1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동강입니다. 2000년도 초반에 큰 사회적 이슈였던 동강댐을 혹시 기억하세요? 김대중 정부가 영월, 정선 지역에 동강댐을 건설하기로 했지만 시민단체들이 반발하고 정의구현사제단과 환경운동연합이 와서 시위를 벌이고 전국민적 공감대를 얻으면서 결국 댐 건설을 철회했습니다. 시민운동 진영에서는 아직까지도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억이 되요. 정말 시민들이 힘을 합쳐 정부의 결정을 철회한 거죠. 하지만 당시 저는 관련 연구의 연구보조원으로 현장에 들어가 농민들을 만났기 때문에 시민사회와 기층민중의 괴리를 절절히 느꼈습니다. 동강댐은 90년대부터 10여 년을 끌었던 사건이에요. 밀양도 거의 7년 이상을 끌고 있고요. 그 과정에서 보상의 문제가 불거지죠. 예를 들어 당장 댐이 지어지는 줄 알고 농사를 포기하고 대출을 받았는데 계속 늦어지는 거죠. 3,000만 원이던 빚이 4억, 5억이 됩니다. 결국, 언론에서 큰 이슈가 되지는 못했지만, 동강댐이 철회되고 나서 제가 알기에는 5명의 농민들이 자살했어요. 당시 현장의 한 농민을 만났을 때, 그 분의 절규가 당시 환경운동연합 대표 이름을 대면서 “나는 그 사람이랑 같이 죽었으면 죽었지, 억울해서 나 혼자 못 죽겠다”는 것이었어요. 농민들에게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자신들에게 어마어마한 폭력을 가져다준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었죠. 시민운동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가장 밑바닥에 있던 약자들과 연대하지 못했던 매우 가슴 아픈 치부이기도 한 거죠. 동강을 사랑하는, 환경을 사랑하는 서울의 의식 있는 중산층 서민과는 연대할 수 있었겠지만, 가장 절박한 가난에 시달렸던 사람들과 연대하는 데 실패했던 사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014년의 밀양은 그런 점에서 많이 다릅니다. 물론 비슷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죠. 보상을 받아서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분들도 굉장히 많고, 마을이 갈기갈기 찢어지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현재는 확실히 시민운동하는 사람들이 이 농민들의 아픔에 대해서 굉장히 공감하고 함께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분들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연대하기 위해 다양한 집단이 나서고 있어요. 건축하는 분들, 미술하는 분들, 사회학자, 인류학자도 들어오고, 각자 자기가 지닌 장기로 밀양에 대해 고발하고 표현하고 목소리를 외칩니다. 계속해서 기사화되고 있고, 이제 밀양에 대해서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거죠.

그런데 결국에는 이것이 해결될 수 있는 싸움이냐 하는 지점에서 저는 좀 비관적인 게 사실입니다. 누구나 밀양을 알고, 그래서 밀양을 갔다 오고, 다녀와서 기말 리포트를 쓰고, 기사를 쓰고, 예술작품을 만들고, 학술논문이나 책을 쓰는데, 이것이 다시 자기의 스펙이 된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묘사지만, 어쨌든 결국 내 삶에서 내가 사회를 위해 긍정적인 고민을 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하나의 일시적 기회로 흘러가고, 나의 삶은 무언가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지속이 된단 말입니다. 밀양이 가져다준 가능성도 크지만, 타인의 고통을 이벤트식으로 소비하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해봅니다. 그런 부분을 제가 ‘소통과 연대의 자기회귀적 성격’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동 중’인 한국의 청년들

다음으로 큰 문제는 ‘빈곤에 대한 개입에 있어서의 분절적인 성격’입니다. 분절적 성격이라는 것은 경쟁사회를 살아온 나의 실존적 빈곤이라는 화두가 너무 크기 때문에 나 자신의 빈곤에 대한 관심이 일차적으로 크고, 한편으로는 나와 거리가 먼 글로벌 빈곤이라는 문제에 대해 관심이 무척 크다는 것입니다. 90년대 대학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흥미로운 지점이죠. 제가 맨 처음에 난곡에서 청년 활동가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럼 그 청년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요? 제가 찾은 곳 중 하나는 국제개발의 현장이었습니다. 한 시민단체에서 국제개발협력에 관한 워크숍을 해서 갔는데, 100여 명 청년이 강당을 꽉 메우고 있더군요. 정말 놀랐어요. 와, 여기 다 있구나. 아프리카의 기아를 내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정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인데, 한편으로는 쌍용차 문제나 용산철거 문제에 대해서는 괄호로 묶어두는 거죠. 나의 실존적 빈곤에 대한 관심도 참 깊고, 한편으로 글로벌 빈곤, 전 세계적 가난에 무언가 하나의 씨앗이 되겠다는 결단도 엿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문제는, 나와 동시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가령 대학에 들어오지 못한 친구들은 어디서 뭘 할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거의 답할 게 없다는 겁니다.

제가 볼 때 한국의 청년세대는 계급을 막론하고 전부 다 이동 중인 것 같습니다. 모빌리티가 굉장히 강해서 누구나 이동의 서사를 가지고 있어요. 가장 가난한 청년들 같은 경우는 이 편의점에서 저 편의점으로, 저 베스킨라빈스에서 다른 프랜차이즈 상점으로 끊임없이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이동 중인 친구들이 한편에 있어요.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이 프로젝트에서 저 프로젝트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나의 삶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이동의 서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 두 집단이 별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거죠.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는 끈이라는 게 희미해 보입니다.

‘빈곤의 인류학’ 수업에서 받는 리포트는 통상 두 부류입니다. 하나는 나 같은 청년세대의 빈곤, ‘나 같은’ 청년이라고 하면 어쨌든 대학을 다니고 있는 집단을 말합니다. 아니면 ‘글로벌 빈곤’에 관한 겁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 수출된 새마을 운동의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에 대한 리포트를 씁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를 주제로 리포트를 쓴 한 학생은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이 친구의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학자가 지금까지 사회가 유동적인 상황일수록 연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존재하고 있는 현상들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식의 논의들에 대해서 우리는 현존하는 새로운 형태의, 물론 강력한 형태의 연대는 아닐지라도, 어떤 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친구는 <리그 오브 레전드> 마니아입니다. 등급도 꽤 높은 것 같아요. 이 친구는 20페이지가 넘는 기말 리포트에 <리그 오브 레전드>를 통해 실제로 그(녀)의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회복되고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게임이 놀랍기는 하더라고요. 나 혼자 잘나서는 안 되고, 같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게임 안에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더라고요. 이 친구의 주장은, 예전에 『우리는 디씨』라는 책을 쓴 이길호라는 인류학자의 주장과 상통하는데, 인터넷이라는 세계가 단순한 가상이 아니라 똑같이 중요하게 취급받아야 할 실재라는 겁니다. 나의 사회적 관계, 즉 내가 타인과 협력하고 소통해야 하는 기술을 이 게임을 통해서 배웠다는 겁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리포트였어요.

잠깐 쉬는 의미에서, 제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중국 사회의 맥락에서 이런 과정을 살펴보죠. 중국의 청년세대에 대한 담론에서 많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호강한 세대, 황태자, 엄마 젖을 못 뗀 대학생, 여피족, 콜라 마시고 햄버거 먹는 세대 등, 또 ‘컨라오주’라고 ‘부모 물어뜯는 족속’이란 의미로 더는 자립할 수 없는 세대에 대한 논의가 많죠. 어느 정도 공부도 많이 했기 때문에 웬만한 직장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에서 계속해서 부모에 기생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배경을 보면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급격히 소비사회로 접어든 현 사회와 과거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기 사이의 간극이 한국보다 훨씬 큽니다. 또, 한 자녀 낳기 정책 이후 대부분 도시 가정에서는 자녀가 하나 아니면 둘입니다. 개혁·개방이 시작될 무렵인 1978년에 여성 한 명당 5.8명의 아이를 낳았었는데, 2012년에는 1.54명으로 떨어집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대학생 아닌 젊은이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는데, 중국의 도시도 90년대 후반 국가에서 고등교육 정책을 확대하면서 1998년에 108만 명에 불과했던 대학 모집 정원이 2010년에는 660만 명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대학 재학생 수도 1998년도에 340만 정도에서 2010년 2,230만 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요. 사실 중국 청년세대의 경우 일자리가 희박한 건 아닙니다. 한국이나 많은 서구 사회가 아웃소싱하는 공장이 모두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 밀집해 있기 때문에 ‘세계의 공장’ 중국이 제공해 줄 수 있는 일자리가 있다고 봐아죠. 10시간 일해서 한 달에 40~50만 원 벌 수 있는 일자리입니다. 그런데 비극은 내 나라가 제공해 줄 수 있는 일자리와 대학까지 나온 내가 원하는 일자리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표류합니다. 한국과 비슷한 상황인 거죠.

한편, 공장에 다니는 청년들, 중국에서는 ‘신세대 농민공’이라고 표현하는 이 친구들은 21세기 잊혀져 가는 공장 노동을 수행하면서 한편으로 포스트-포디즘 사회에서 새롭게 등장한 라이프스타일을 동시에 추구하기 때문에 그 딜레마 또한 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공장 노동자로서의 온전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3개월 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음 4개월은 어느 백화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어요. 그게 또 여의치 않으면 베이징 외곽의 공장 노동자로 돌아갑니다. 많은 사회학자들이 고민했던 노동자 계급으로서의 정체성, 노동자로서의 정치적 주체성을 쉽게 예단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든 중국이든 가장 큰 문제는 나의 빈곤과 우리의 빈곤이 종국에는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연결성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는 조건들이 상당히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한 연결성을 어떻게 재발견하고 자본에 온전히 포섭되지 않는 공감의 계기를 확장해 갈 것인가 하는 부분들이 제가 고민하고 있는 화두입니다. 또 공동체에 관심 있는 건축하시는 분들이 고민할 수 있는 화두이겠지요.

요새 이것을 어떻게 해볼까 생각하다가 지난번에는 수업 기말 보고서 중 하나로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굉장히 다른 인생을 산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인생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친구’를 정해서 인터뷰로든 참여관찰로든 한 학기 내내 만나면서 그 친구와 자신을 연결해 볼 수 있는 에스노그래피를 써보라고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던 일부 학생들이 자기를 탈 자연화시킬 수 있는, 좀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연습을 하게 되었어요.

아까 <리그 오브 레전드>를 썼던 친구가 이 수업에서 또 다른 글을 (다른 학생 한 명과 공동으로) 썼는데, 이 친구가 택한 대상은 같이 태어났지만 거의 말을 섞지 않았던 자기 동생이었습니다. 이 동생은 고등학교도 안 마친 상태에서 ABC마트의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한 가족이지만 자기와 너무나도 다른 삶이죠. 그 친구가 썼던 부분을 인용해볼게요.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수도 없이 타인들과 맞닥뜨리지만 실제로 타인과 나의 삶이 엮여 들어가는 순간은 많지 않다. 자본주의가 극대화된 사회에서 우리는 A와 같은 사람을 점원으로, 나에게 무조건적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사람으로 만난다. 화폐를 매개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동생과 이야기를 하는데, 가령 한진 중공업 사태를 넌지시 동생에게 언급하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그의 반응을 살폈다. 이에 대한 대학생들, 그리고 나의 생각을 전달하면서 솔직하게 그의 생각을 물어봤다. 그리고 A는 대체로 이야기되는 담론이나 민주주의, 정치, 정의 같은 단어들에 대해 상당히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솔직히 맞는 말이긴 한데 되게 재수없다는 것이 대답이었다. 나와 같이 인터뷰를 했던 친구는 여기에서 대학생들이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일종의 상징자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언사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집단은 어떻게 보면 많지 않을 수도 있다, 라는 것이 이 친구가 새롭게 자기를 볼 수 있었던 맥락이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나는 불안하지 않다”라는 동생의 선언이었어요.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어 봤냐, 라고 묻자, 그런 책은 들어 본 적도 없다, 라고 했으며, 그 뒤에 힘들다는 것은 핑계가 아니냐고 나에게 되물었다. 물론 등록금 등으로 인해 정말로 힘든 사람도 있겠지만 정말로 대부분이 그러냐는 것이다. 뒤이어 그는 일상이 즐겁고, 막연한 미래 계획이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 없이도 불안하지 않다고 말했다… 여기서 특히 20대는 불안을 느끼지만, 성공적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존재들로 가정되기 때문에 담론의 주요대상이 된다. 그러나 A는 담론의 대상도 아니고 생산자도 아니다. 많은 자본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고, 여기에 협력해서 불안의 담론에 가지치기를 할 필요성을 가지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는 사회의 담론에서 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라고 썼습니다.

열린 비판을 위하여

또 다른 곳을 인용하면, “스펙 제너레이션의 청년들이 꽤나 유약한 존재로 묘사가 된다면, A는 그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가령 ABC마트에서 일하는 그는 손님이 다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더라도 잘 대처해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에게 부여된 점원으로서의 정체성,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친절해야 하는 정체성을 벗어 던지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손님에게 대응하는 점, 때론 경미한 정도지만 손님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냐면, 신발이 들어 있는 창고에 들어가서 ‘슈바’라고 외친다.” 또 슈바라고 외쳤을 때 가게 동료들이 자신의 말을 복창하면서 일종의 파이팅 구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자기는 굉장히 즐겁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리포트에서 글쓴이도 강조했지만) 이 말을 했다고 해서 공부를 많이 한 애들만 불안에 잠식되어 있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불안하지 않다고 단언하는 것 또한 비약이겠죠. 다른 종류의 불안이 있을 테죠. 

이 수업에서 한 학생은 기말과제로 동성애자인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친구 왈, 예전에는 동성애자라 하면 괴물 취급을 받곤 했는데, 오히려 요새는 신자유주의에 앞장서는 다국적 기업이 동성애자를 일부러 고용하는 일도 있답니다. “자유로운 사고를 할 줄 알고, 발상의 전환이 뛰어나고, 유연하기 때문에” 실제로 신자유주의의 인적 자원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대요. 그래서 “나는 지금이 더 편하다. 나는 오히려 더 평등해진 것 같다”라고 이야기하는 친구를 만나면서 고개를 꺄우뚱거리고 고민을 더 밀고 나가는 학생도 있었어요. 그런 과정에서 조금은 열리게 되는 거죠. 내가 가지고 있는 빈곤을 넘어서는 세상의 다른 종류의 빈곤을 목격하기도 하고 연결지점을 찾기도 하고 비판의 외연을 확장하기도 하고요. 이런 부분들을 우리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또 다른 예로 보여주고 싶은 것은 최근에 일본을 다녀온 경험인데요. 한편에선 수업을 통해 다른 삶을 엿보게 하면서 연결성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다면, 또 한편에선 학생들을 교실 바깥으로 데려가 다른 체험을 하게 합니다. 저희 과에서 글로벌 액션 리서치로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교실’이란 프로그램을 몇 년간 진행했습니다. 교실은 대학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세상에 널려 있는 많은 다양한 교실을 찾아 다녀보자, 그러면서 정말로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해보자는 것이죠.


Q. 강연 서두에 중국의 청년 빈곤에 대해 주로 연구한다고 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A. 저는 현재 중국의 선전(深圳, 심천)지역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는데요, 1970년대 말 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이곳의 풍경은 현재 상하이를 방불케 합니다. 한국도 찬란한 개발의 서사를 썼다고 말했지만, 중국의 급작스러운 변화는 더욱 놀랍죠. 선전은 1990년대 초중반에 매년 3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보였습니다. 1979년 인구 31만이던 도시가 2010년에 유동인구를 포함해 1천만을 훌쩍 넘겼습니다. 제가 선전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3,000년의 중국을 보고 싶으면 시안에 가라. 1,000년은 베이징, 300년은 상하이에 가라. 30년의 중국을 보려면 선전에 가라.” 실제로 ‘선전 속도’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어요. 눈 깜짝할 사이에 건물들이 솟아나는 거죠.

중국의 선전(深圳, 심천)

그런데 이 도시는 호적인구와 유동인구의 차이가 엄청나게 커요. 중국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와 닿지 않으실 텐데, 예를 들어보죠. 만약 내가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는데, 서울에 와서 취직한다면 당연히 서울시로 주민등록을 옮기죠. 중국은 그게 법적으로 안 됩니다. 중국에는 호구제도가 있는데, 가령 호구를 서울시로 바꾸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특수한 경제·교육적 자본을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거의 바꿀 수가 없어요. 그래서 호적인구와 유동인구 차이가 특히 대도시에서 심합니다. 선전이라는 곳은 인구 30만에서 시작한 이민도시이기 때문에 그 괴리가 더욱 크죠.

선전은 제가 예전에 연구했던 중국 동북의 하얼빈과 여러모로 다릅니다. 신중국 성립 이후 동북은 노동자 계급의 성지였어요. 중국이 사방으로 고립되어 있을 때, 유일하게 기댈 곳은 구소련 뿐이었고, 소련으로부터의 원조나 대규모 프로젝트들이 대부분 동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옛 만주국 당시 세워졌던 철도나 공장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재건이 더 쉽기도 했죠. 사회주의 공업도시로서, 특히 노동자 계급의 요람으로서 동북이 가졌던 지역적 중요성은 굉장히 컸습니다. 그런데 개혁개방 이후, 노동자 계급이 몰락하면서 동북도 따라서 몰락하게 됩니다.

당시 저의 연구 주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거쳤던, 스스로를 국가의 주인이라 호명 받았던 노동자들의 빈곤이었어요. 이 노동자들은 당시 대부분 40대, 지금은 거의 60대죠. 이들의 다음 세대, 즉 청년 세대의 빈곤에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되었는데, 하얼빈에서 계속 연구를 한다는 가정하에 이곳의 대학생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어요. 이 학생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으로 학자금 대출을 받고 있었는데, 한국 학생과 공통점이 많아요. 예를 들어, ‘‘취직이 안 되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한국과 중국이 모두 “대학원입니다”인 식이죠. 한 가지 다른 대답이라면, 한국과 중국의 스케일이 달라서, 중국 학생들은 “남방으로 갈 거예요”라고 곧잘 대답해요.

중국이 1970년대 말 개혁개방을 시작했을 때, 나라 전체가 일제히 개방된 게 아니었어요. 특히 사회주의 계획 경제 하에서 정부 관리가 훨씬 더 촘촘했던 동북 지역의 경우 국가에서 끝까지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홍콩 및 대만과 가깝고 화교 자본의 유입이 용이한 남쪽에서 먼저 개혁개방이 시작된 겁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지역 격차로 이어졌죠. 동북이나 내륙의 가난한 청년들은 남쪽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잘 모릅니다. 거기로 가면 무엇인가 다를 거라는 막연한 기대로 이주를 하죠. 줄기차게 남쪽으로 내려오기 때문에 저도 이들을 따라서 선전에서 조사를 하게 되었고요.

처음에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면서 취한 정책은 ‘특구’를 만들어 감세와 같은 우대 정책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의 특구는 이곳 관내 지역에만 해당되었고, 초기의 특구 지역(관내)과 외곽 지역(관외)이 병합된 후에도 양자의 경제적 차이는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관내 지역에는 외국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 있고, IT 기업이나 금융 쪽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엘리트 청년들이 밀집한 반면, 관외 지역에는 공장 노동자들이 모여 있죠. 이는 개혁개방이 심화되면서 ‘세계의 공장’이라는 수식어가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기 시작한 것과도 관계됩니다. ‘폭스콘 사태’가 대표적이에요. 공장에서의 연쇄 자살로 난리가 났죠. 세계의 공장인 중국을 일으킨 주역이라고 떠드는 게 더 이상 선전이라는 도시의 자랑이 아니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계속해서 공장을 특구 바깥으로 옮깁니다. 안쪽은 금융, 인터넷, IT 등 더욱 환경 친화적인 사업으로 재편했죠. 여기 선전만의 고유한 풍경이 있어요. 중국에서는 보통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여 회식을 하는데 이곳은 휴대폰을 보거나 이어폰을 꼽고 혼자 밥 먹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마치 기숙사 식당 같은 모습이죠. 제가 지금 연구하는 곳도 나중에야 특구로 편입된 도시 외곽 폭스콘 공장 지대입니다. 관내와 달리 중국에서 가장 열악한 여건의 청년들이 모이는 곳이어서, 계급이 완전히 공간화되는 풍경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지요.

중국 언론에는 ‘컨라오주’(啃老族), 즉 분가할 나이가 되어서도 부모를 물어 뜯는 족속이라 칭하는 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 배경에는 ‘한 자녀 정책’이 있죠. 1990년대 이후 중국의 인구 정책이 그 성격을 달리합니다. 처음에는 무조건 낳지 못하게 했는데, 90년대 이후에는 하나만 낳되 ‘어떻게’ 잘 키울 것인가, 즉 소질의 문제를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성과주의적인 주체를 국가가 독려하고, 양육의 문제가 첨예한 화두로 등장하는 것이죠. 청년들이 몰려들면서 도시는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어요. 그래서 도시 주변부에 거주하는 농민들이 방이 아닌 침대를 임대하기도 합니다. 침대 한 자리를 단위로 판매하는 거예요. 하나의 방에 10개의 침대가 놓여있어요. 눈 뜨고 일어났을 때 옆에 있던 사람이 바뀌기 쉽죠. 이런 친구들을 중국에서는 ‘개미족’이라고 부릅니다. 중국의 이러한 지역 격차, 도농 격차는 상상 이상으로 심각합니다. ‘베이징의 침대 한 장이 외지의 방 한 칸 보다 낫다’면서 끊임없이 대도시로 몰려들고 있죠.

선전 내 관내(关内) vs. 관외(关外)

폭스콘 공장 지역은 외지에서 온 가난한 청년 노동자들이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으로 가득한 곳이에요. 이런 청년들이 사는 지역에서 현장연구를 진행하면서 제가 느낀 것은 말 그대로 분노였습니다. 지역도 일회용이고, 인간도 일회용으로 취급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도대체 이 지역의 한시성을 누가 만들었냐는 거죠.

저는 중국은 21세기에 잊혀진 공장 노동과 포스트-포디즘의 세계가 모순적으로 결합된 지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일회성 도시를 만든 첫 번째 주범은 언제 떠날지 모르는 다국적 기업 폭스콘입니다. 폭스콘이 언제 떠날지 모르니 가능한 한 오래 붙잡아 두기 위해 온갖 비위를 다 맞춰줘야 합니다. 두 번째는 지방정부이고, 세 번째는 지역의 토박이 농민들이죠. 한적한 농촌에 폭스콘이 들어오면서 외지 청년들이 유입되다보니, 많은 주택이 지어지고 각종 상점과 식당의 임대도 늘어났죠. 갑자기 떼부자가 된 농민들 입장에서도 폭스콘이 언제 떠날지 모르니 있는 동안 최대한 돈을 긁어 모으려 했습니다. 생태환경은 절대 안중에도 없었죠. 이런 부재지주의 모습은 지역에 사당으로만 남아있어요. 자기들이 번 돈을 기부해서 사당을 짓고 더 큰 부를 기원합니다. 끝으로, 외지 청년들의 경우에는 지금 선전에 있다 해도 시의 호구를 받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폭스콘 공장에서 일하지만 명절 때 고향에 갔다가 ‘베이징의 아무개 공장 급여가 더 많다’ 하면 떠나는 겁니다. 자신들이 정주한 곳에 애착을 가질 수가 없죠. 이들이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되었습니다. 관리가 사실상 불가능해요. 지역의 한시성은 이렇게 총체적 결과로 드러나지요.

Q. 제가 참여하는 것 하나가 한일 포럼인데, 얼마 전 한일 간의 ‘니트’(NEET, 일하지 않고 그 의지도 없는 청년 무직자 계층) 문제를 비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양국 간에 니트끼리 교류를 해보면 어떨까?, 당사자 간에 논의할 수 있는 게 있을까? 하는 관점에서 일본 분을 만났는데, 그들은 견해가 달랐어요. 당사자끼리 논의하는 단계와 정부가 참여하는 단계를 구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은 지금 어떤 프로젝트를 만들지도 못하고 생각만 있는 단계인데, 그 단계를 다 건너뛰고 문제 해법을 말하는 것은 부작용만 있을 거라고요.

A. 저는 별로 단계가 있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제가 프로젝트에 대해서 느꼈던 고민을 일본 사람이 같이 느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역사적 맥락이 굉장히 다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많이 우려가 됩니다. 예를 들면, 마을 만들기라던가, 사회경제에 관한 많은 모델, 협동조합, 특히 의료협동조합이나 이런 영역에서 최근 일본 모델을 많이 차용하고 있잖아요. 저는 일본 연구자가 아니라서 사실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제가 봤을 때 기본적으로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 그리고 사회 속에 나를 규정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 보입니다. 특히 지역의 중요성, 지역을 중심으로 한 로컬 차원의 운동의 경우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는 굉장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역사와 비교해 볼 때 한국의 독특한 점은 개발 자체가 굉장히 국가 중심적으로 이루어졌고, 그에 대한 반발이자 대응으로서 가시화되었던 민주화 운동 역시 국가에 대항하는 역사 쓰기의 작업이었지요.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국 사람이 봤을 때, 일본에서 프로젝트 단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역 운동에서 배울 점도 많아요. 지역의 공무원들이 진짜 열심이죠. 감탄도 했어요. 일본 시가 현 방문 때 봤는데, 귀촌 지역 청년들을 도와주고 이들의 정착을 장려하기 위해 공무원이 3년 프로젝트를 세웁니다. 처음 1~2년은 집이나 관련 자원을 제공하고요. 3년 차가 되면 공무원이 일대일로 붙어 이 청년이 무슨 일을 하면서 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같이 고민하면서 방법을 모색합니다. 민간협력의 전통이라는 것이 특히 일본에서 지역 안으로 들어갔을 때 굉장히 견고해 보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일본의 지역중심 운동이 과연 자립을 추구하는 건지, 고립에 빠져드는 건지 혼동되더군요. 자립이 고립이 되는 우를 범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부분을 일본에서 운동하는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면 자민당 십수 년 독재하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고 자조하듯 반문합니다. 수십 년에 걸친 독재를 경험하면서 이미 중앙 정치에 나서서 발언한다는 것 자체를 포기한 듯 보였습니다. 농촌 길가에 전시된 자민당 포스터를 보면 굉장히 우스꽝스러워요. 사진 속의 청년은 양복 입고 넥타이 끝까지 메고 정말 모범생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 청년도, 그 지역 주민도 서로한테 무관심해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위험한 건 바로 자기네 동네 옆에다 국가가 원전을 짓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은 지역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지역에선 유기농 채소 재배하고 자연농 열심히 하고 있는데, 옆에서는 원전을 다시 짓고 있는 거죠. 근데 이것에 개입할 수 있는 통로가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어차피 이야기가 나왔으니 글로벌 액션 리서치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교실’로 다녀왔던 일본의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많이 생기고 있죠. 빈집도 많이 생겨나고. 여기는 보니까 청년들이 한 7명 정도 사는데 한 달에 1만엔 정도를 내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는 도축도 해요. 빈집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장터가 열리고요. 보통 직접 만든 효모 빵이라던가 우엉밥 등을 가지고 와서 교환하고 팔기도 하는데 이런 장터가 굉장히 많더군요. 그리고 이 장터에서 요가나 마사지도 해줍니다. 피자 화덕 트럭도 있어서 장터에 맞춰 들릅니다. 공정무역 커피 거래하시는 분도 있고, 우리도 팔찌를 만들어서 교환하기도 했는데 이 난민들 직업이 참으로 다양한 거예요. 우리나라 미사리 카페 같은 곳에서 노래 부르시던 분도 있고, 사진작가였던 분도 있고, 실제 원전 기술자였던 분도 있고, 직업이 다채로워요. 그러니까 정말 흥이 납니다.

이곳에 사는 후치몽이라는 사람은 당시 시의원에 출마했습니다. 실제로 녹색당 출신으로 이전에 한국 국토순례를 했다고 합니다. 국토순례를 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께 사과도 하고 한국의 시민운동가들도 만났대요. 그러고 나서 자기가 배우고 경험한 것을 일본에 돌아가서 어떤 식으로 펼쳐볼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여전히 정치를 팽개쳐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래서 직접 시의원으로 출마했는데, 밤에 이 셰어하우스 장소로 마을의 주민들을 모시고 와, 자신이 시의원이 된다면 이토시마에서 펼쳐 보이고 싶은 정치가 무엇인지 차근차근 이야기하더군요. 셰어하우스가 공청회장이 되는 순간이죠. 후치몽 씨의 출마선언을 듣고 저희도 유세에 동행했어요. 지역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땅을 디뎌보고, 지역의 향기도 맡아보고, 사람들을 느끼고 공간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겠다 해서, 선거에 뛰어든 사람들이 일주일 내내 일종의 순례를 하고 있더라고요. 저희도 하루 따라다녔는데, 셰어하우스 말고 또 다른 조직의 사람들이 함께했습니다.

이토시마 거주민인 후치몽 씨. 녹색당 출신으로 시의원에 출마했다.

‘세븐스 제너레이션’이라고 일본의 스님들이 몇 분 있었어요. 이분들은 미국의 인디언들과 교류가 많더군요. 미국의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무언가 계획을 세울 때 일곱 세대 앞을 내다보고 세웠다고 합니다. 살림살이든 대외 정치든 늘 일곱 세대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될 지를 상상한 후 행동했다는 거죠. 인디언들의 사고를 본받아 ‘세븐스 제너레이션’을 만들었는데, 우리는 이분들과 함께 주술도 읊고 북도 치면서 순례를 다녔어요. 순례에 동행한 또 다른 조직은 후치몽 씨를 후원하는 사람들이 만든 ‘도토리 정치 연구회’였습니다. 굉장히 조그마한 공간을 임대해서 정치적 토론을 진행합니다. 연세대 학생들도 참여해서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교류해나가야 할지 이야기했지요. 또 다른 커뮤니티는 자기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와쿠와쿠 보육원’이에요. ‘와쿠와쿠’는 일본말로 가슴이 두근두근, 심장이 두근두근이란 뜻이에요. 선생님, 아이들, 부모님들 누구나 다 여기에 오면 두근두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겁니다. 배공 기술자였던 분이 아이들을 너무 사랑해서 자기 집 한편에 만든 보육원인데 자기 자식들도 여섯이나 되더군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일본은 매뉴얼 사회입니다. 굉장히 촘촘해서 이것도 하면 안 되고 저것도 하면 안 되고 하니까 이곳은 일부러 인가를 안 받았어요. 날것도 먹어야 하고, 산에도 올라야 하고, 위험한데도 필요하다면 가야 하니까요. 이러한 입장에 공감하는 부모들이 와서 아이를 맡기고, 어머님들 아버님들이 일 없을 때 와서 파트타임으로 애들을 돌보고요. 또 비혼자들이 적당한 페이를 받고 아이를 돌보기도 합니다. 비혼자라 해서 아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런 사람들이 함께 보육원 살림을 해나갑니다. 이 보육원은 프로그램이 거의 없어요. 오전에 모여서, 뭐 할래, 어디 갈까? 하고 물어서, 아이들이 바다가요, 하면 바다 갑니다. 비계획이죠. 세상 살면서 이렇게 해맑은 얼굴을 본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또 귀촌한 일부 사람들은 정말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축산회사에 다녔던 한 분은 어느 날 ‘내가 왜 이렇게 월급을 많이 받고 있지?’ 반문하고 자기 월급을 꼼꼼히 따져보기 시작했대요. 그걸 따져보면서 깨달은 것이 일본이 사료를 100% 수입하고 있더라는 거죠. 그러면서 이러한 수입 구조가 낳은 환경오염에 관해 일일이 분석을 해보았답니다. 자신이 얼마나 생태계를 착취하면서 살아왔는가 뼈저리게 깨달은 다음 자연농을 하기로 결심했대요. 자연농이라는 건 정말 퇴비를 안 쓰는 거잖아요. 이런 사람들이 모여 느슨한 공동체를 맺는 건데, 그럼 지금까지 이야기한 공동체가 몇 개죠? 아까 세븐스 제너레이션, 도토리 정치모임, 셰어하우스팀, 자연농하는 팀 등등 아주 느슨하게 연결이 되요. 너는 어느 조직에 있느냐는 말은 거의 의미가 없지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관계성이 계속 발전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한테 공통적인 건, 어쨌든 우리는 서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의 연결, 어떤 식의 새로운 관계성을 맺어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거죠. 그런데 저는 이 와중에도 반신반의했습니다. 이게 과연 우리의 대안일 수 있을까?

저는 94학번입니다. 95년에 광주민주화운동 시위를 하면서 실제 무언가 바뀌는 걸 봤거든요. 사회가 바뀌고 정치가 바뀌고 하는 것을 제 두 눈으로 봤는데, 그런 의미에서 동행했던 제 학생들은 경우가 다릅니다. 함께 갔던 15명의 학생은 이토시마의 모습에 저보다 훨씬 더 매료되고 있었어요. 대학 와서 반값등록금 시위도 하고, 이것저것 투쟁도 해봤다지만 기실 상당한 고립을 경험했던 친구들이죠. 왕따가 된 기분이고, 정말로 용기를 내지 않으면 이렇게 주변적으로 하는 운동마저 유지하기도 힘들고, 그런데 중앙 정치가 바뀔 가능성은 점점 더 보이지 않고, 그래서 이런 친구들한테는 확실히 이토시마가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이토시마에 가기 전에 함께 모여 원전 사태에 대한 영화도 보고 이야기도 나눴는데 15명 대부분 너무나 우울하고 냉소적이었어요. 아는 건 참 많아요. 그런데 그렇게 우울했던 애들의 표정이 바뀌더군요.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 친구들하고 이야기를 해요. 그때 당시 우리를 그렇게 매료시켰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누구는 돌아와서 다시 쳇바퀴 일상으로 복귀하고 또 누구는 그때 받은 영감으로 자치 도서관 운동을 하기도 하죠. 그렇게 보자면 아까 제가 ‘이동의 서사’라는 표현을 썼는데 A라는 곳에서 B라는 곳으로 이동하는 게 그냥 의미 없이 무한 반복하는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Q. 강연에서 언급하신 일본 분들은 정부나 지방정부의 지원 없이 그냥 순수하게 자체적으로 운영자금을 내서 운영하는 건가요? 지속가능한지도 궁금합니다.

A. 저희가 이 글로벌 액션 리서치를 매년 진행했는데 그 전에 갔던 일본 시가 현의 경우 정부의 지원을 많이 받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한국하고 비슷한 흐름이 많이 보였는데, 이토시마는 정말 난민들이 모인 곳이에요. 이 사람들은 정말 절박했습니다. 내가 인생을 정말로 다시 살아야겠다, 정말 다시 살아내야겠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했고. 프로젝트를 간간히 받기는 하지만 얽매이지 않을 정도로만 하겠다는 의지가 강했고, 실제로 거의 받지 않았어요. 가난하게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인 거죠. 그래서 사무실 뭐 이런 것들을 애써 두지 않고 참여한 많은 청년이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었어요. 생활 패턴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그게 더 가능했다고 볼 수 있죠. 일본 내에서도 차이가 많이 보였습니다. 한국도 물론이지요. 제가 아는 빈민(주민) 운동 단체들도 일부 단체들은 굉장히 재정에 허덕이긴 하는데, 그럼에도 지원금의 상한선을 정해 놓더군요. 몇 퍼센트 이상은 절대 프로젝트 신청하지 말자, 하는 식으로 다짐하고 합의하는 모습도 종종 봤습니다.

Q. 저는 대학생이고 선생님을 수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수업 때 내주신 과제로 자기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찾아 연구해보라는 게 있었잖아요? 그때 학생이 ABC마트에서 일하는 자기 동생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약간 의외라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저도 대학생이지만 나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대상은 같은 학교 같은 과일 지라도 저와는 완전히 다른, 부모님께 증여를 받을 수 있는 중산층 이상의 학생들이 저와는 완전히 다른 학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은 대학 재학 중이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한 학생들과 만날 기회가 없을지라도, 그건 단지 ‘지금’ 불가능한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결국, 다 만나고 연대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더 이상 만날 일이 없는 학생들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의 도움으로 창업할 수 있는 배경이 있거나, 일을 하지 않더라도 노후가 걱정되지 않는 친구들이 아닐까요?

A. 굉장히 좋은 지적입니다. 제가 보여드렸던 사례는 소위 엘리트 학교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쨌든 결국 굉장히 다른 길을 갈 것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주입을 하는 학생들도 많고, 그래서 NGO에 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대학의 편차에 따라, 이야기해 주신 것처럼 어떻게 보면 평생 파트타임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고, 그러므로 학력 차이가 크지 않을 수도 있죠. 그러한 사례는 ‘청년 유니온’의 활동을 통해 종종 봤습니다.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청년 유니온 회원으로 활동하는 친구와 서울의 아주 평범한 대학을 나와 학원강사를 하는 친구가 같이 연대하는 모습 말이죠. 근데 이야기해주셨던 것처럼 정말 이들과는 이미 다른 궤도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이 있는 거죠. 그 친구들은 처음에는 제 수업에 들어오기도 했어요. 근데 소문이 나더니 그다음 해부터는 별로 없더라고요. 그 친구들이 작성하는 리포트는 글로벌 빈곤에 대한 것이 가장 많았습니다. 본인은 그다지 불안을 느끼지 않았고, 하지만 주변의 친구들이 불안을 이야기하니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하고, 불안을 느끼지 않는 나는 무언가 지식이 없어서, 이론적인 결함이 있어서 그런 건가 스스로 자책을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런 친구들의 경우 졸업 후 이미 어느 정도 정해진 커리어 루트가 있더군요. 물론 부모가 정해 놓은 길하고 자기의 길이 달라진다면 또 다른 문제가 되겠죠.

Q. 희망적인 이야기도 하셨지만 저는 지금 상황이 어떤지를 분명하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 마을 만들기 사업을 굉장히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전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아요. 특히 마을 만들기 사업에서 작은 도서관이란 말을 대개 많이 쓰는데 작은 미술관 얘긴 안 하면서 왜 항상 작은 도서관이라고 하고, 복지관의 개념을 자꾸 도서관에 집어넣는데 그것 자체가 굉장히 좀 그로테스크하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서관을 단순히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책을 잠시 맡아두는 장소로 축소시켜 버리는데, 마을 만들기 하시는 분들이 도서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셨겠지만, 사업을 할 때 그렇게 접근을 해버리면 각 개인이 잃을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거든요. 완전히 같은 입장은 아니지만 말씀하실 때 과연 저런 자립이 약간 고립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일단 저희 역사가 워낙 짧으니까 그런 걸 만들 때마다 작은 게 아름답다는 식으로 그게 어떤 이상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A. 동감하지만, 그래도 저는 인류학자를 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늘 현장을 봐야 하고 늘 경험을 조각조각이라도 살펴야 하고 이 조각조각을 꿰매는 연습도 해보고, 또 역사 속에서 간혹 어떤 희망의 조각을 발견하기도 하기 때문이죠. 지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들 굉장히 공감하고, 제가 2001년도에 난곡에 대해 논문을 쓸 때도 쓰고 나니 정말 비관적인 논문이 되었어요. 근데 그때 굉장히 많은 욕을 먹어가면서 복지운동이라는 화두를 처음 들고 나왔던 조직이 있었어요. 당시 95년도에 많은 비판을 받았죠. 웬 복지? 우리가 언제 복지하고 친했다고? 그런데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풀뿌리 민중들이 활동을 해나가고 판을 벌려 나가는 유일한 조직 중에 하나가 되었어요. 그 팀이 내년에 20년이 되는데 그런 걸 보면서 좀 다른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호흡을 좀 길게 가져가면 무언가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제가 말했던 이동의 서사라고 하는 것이 그냥 의미 없는 무한 반복으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지점에 대해 더듬어 볼 수 있는 자극들은 계속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그런 절망을 가장 많이 보는 사람들이 사실 필자고, 말하는 사람이고, 화자가 되고, 담론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이 담론 권력이라는 것이 일정한 실제를 만들어 간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랬을 때 아까 ABC마트 친구가 이야기했듯이 난 불안하지 않은데, 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런 부분을 저는 계속 좀 고민을 하고 싶습니다.


조문영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서울대 언론정보학과(학사)와 인류학과(석사)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인류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봉천동 철거지역에서 공부방 교사를 했던 계기로 인류학 초년생 시절 난곡에서 가난과 빈민운동 지형의 변화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후 중국의 빈곤으로 시야를 확장해서 ‘사회주의 국가의 주인’에서 ‘시장 경제의 낙오자’로 전락한 도시 노동자의 경험과 이들 ‘인민’의 유령이 빈곤의 통치를 배회하는 과정을 살폈다. 최근에는 중국, 한국 청년 빈자의 문제로 세대를 이동해서 ‘불확정성의 시대’로 요약되는 전 지구적 위기담론과 역사적 지층, 개인적 삶의 경험이 교호하는 현장을 다니고 있다. 저서로 『The Specter of “The People”: Urban Poverty in Northeast China』(Cornell University Press, 2013) 외에 「중첩된 시간성과 벌이는 협상: 중국 동북지역 저소득층 대학생들의 속물성에 대한 인류학적 변명」, 「공공이라는 이름의 치유: 한 대기업의 해외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본 한국 사회 ‘반빈곤’과 ‘대학생’의 지형도」, 「사회복지의 일상적 연행을 통해 본 중국 국가의 구조적 폭력: 선전 폭스콘 공장지대를 중심으로」등 여러 논문이 있다.

동아시아 청년의 경험과 빈곤

분량35,151자 / 70분 / 도판 13장

발행일2015년 2월 10일

유형강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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