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성의 기저, 도시계획과 필지 관리 – 「서울 도시건축 현상과 쟁점」에 답하며
김성홍
분량10,125자 / 20분
발행일2023년 9월 11일
유형비평
포럼 시리즈 ‘당선작들, 안녕하십니까’는 공공 영역에서 추진, 시행되는 개별 단위의 건축물을 다룬다. 시리즈를 지속하며 인지하게 되는 사실 중 하나는, 공공 건축 프로젝트가 국토나 도시 단위의 미래를 그리는 거대한 계획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가들이 건축과 도시 사이의 다양한 역학 관계나 제도와 시스템의 문제를 경험하고 이에 천착하지만, 단일 프로젝트에서 비롯한 동력으로는 전체를 파악하기에 한계가 있다.
올해 초, 대도시 서울의 문제를 쟁점으로 다룬 건축 분야의 책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북 포럼: “서울의 문제를 묻다” 『서울 어바니즘』과 『서울 해법』에서 이러한 갈증을 해소할 기회가 있었다. 두 권의 책 모두 큰 틀에서 서울의 도시 현상과 도시건축, 정체성을 다루고 있는데, 문제 의식과 해결 방안은 상이하여, 서울 도시건축에 대해 다각도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래 이어지는 글은 김성홍(『서울 해법』 저자, 서울시립대학교 교수)이 포럼 직후, 이상헌의 『서울 어바니즘』에서 『서울 해법』을 다룬 부분과 박인석의 『건축과 사회』 기고글에 대한 답으로 전한 것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형성과 형태, 공간 개조 등에 관한 폭넓은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그의 글로부터 우리는 공익, 균형, 상생의 가치와 개별 (공공) 건축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북 포럼: “서울의 문제를 묻다” 『서울 어바니즘』과 『서울 해법』
- 일시: 2023년 2월 28일(화) 저녁 7:30
- 장소: 정림건축문화재단 라운지 + 줌
- 저자: 이상헌(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김성홍(서울시립대학교 교수)
- 토론: 박인석(명지대학교 교수)
- 진행: 박정현(건축 비평가)
- 공동주최: 새건축사협의회, 정림건축문화재단
새건축사협의회와 정림건축문화재단이 공동 기획한 ‘서울의 문제를 묻다’에 필자를 초대한 기획자들에게 감사드린다. 도시건축 담론에 불을 다시 지핀 이상헌 교수에게도 감사드린다. 15년 동안 서울을 읽고 글을 써왔던 필자는 짧은 서평이나 추천사 이외의 깊이 있고 예리한 비평 혹은 화답은 받지 못한 터라, 박인석 교수와 기획자의 표현대로 이번 포럼이 “도시-건축 담론을 향한 치열한 논쟁,” “건축가론과 작품론에 치우친 건축 담론의 확장”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이상헌의 『서울 어바니즘』을 현대건축론을 도시론으로 확장하는 시도로 이해한다. 그는 필자의 삼부작 『도시건축의 새로운 상상력』(2009), 『길모퉁이 건축』(2011), 『서울 해법』(2020)의 많은 부분을 인용(동의) 혹은 비판하고, 다른 관점과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박인석이 지적한 것처럼 서울의 도시건축 현상을 읽는 데에는 많은 부분 일치하지만 동시에 실천 방향과 과제에 대한 견해 차이가 뚜렷하다. 이번 포럼에서 다양한 쟁점을 모두 다루기 어렵기에 박인석의 기고문, ‘서울 도시건축 현상과 쟁점 – 김성홍의 『서울 해법』(2020)과 이상헌의 『서울 어바니즘』(2022)’(건축과 사회, 37호, pp.12-26.)에서 던진 질문을 중심으로 답하고자 한다.
서울의 형성과 변화를 읽기 위해 이상헌과 필자 모두 선행 도시 연구, 보고서, 자료 등의 일차 사료를 재해석하는 방법을 취했다. 원석을 ‘발굴’하는 역사 연구라기보다는 발굴한 원석을 현재 건축의 눈으로 ‘가공’하는 공시적 연구에 가깝다. 즉 ‘서울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무엇이 문제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질문의 두 축이다. 박인석은 서양 도시건축 모델의 속박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산출해낸, 한국 도시건축 연구의 중요한 성과를 인정하면서, ‘누가’ ‘어떻게’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것인가를 집요하게 묻고 있다. 건축의 사회적 실천을 최우선의 화두로 삼아왔던 박인석의 당연한 질문이다.
요지는 『서울 어바니즘』과 『서울 해법』이 서울의 현상을 읽어내는 성과는 이루었지만, 대안을 향한 구체적인 실천 전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인석은 필자의 ‘중간건축’ 중심의 건축적 전략을 비판하는 이상헌의 도시계획(설계) 전략 역시 주체와 구체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필자가 건축설계적 실천에 치중하게 된 이유는 실천 전략과 목표가 선명한 중간건축과 달리 도시 단위(이상헌이 정의한 블록 단위)의 확장에 대한 김성홍의 기대가 크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점 단위의 ‘건축 중심적’ 전략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 점에 동의한다.
필자가 고밀도 저층 도시건축의 필요성(2009), 중간건축 개념(2011)을 제안한 이후 15년이 지났다. 기대했던 블록 단위의 ‘가로주택정비사업’이 2012년 「도시정비법」에 추가되었고, 2017년 「소규모주택정비법」이 제정되었다. 서울시는 평면계획에 머물러왔던 지구단위계획을 입체적 계획으로 바꾸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필자는 2012년 이후 4년간 서울시 도시건축공동위원회에서 지구단위계획의 입안과 실행의 과정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지구단위계획은 「국토계획법」 위계 상 ‘도시기본계획’ 아래의 대표적인 ‘도시관리계획’이다. 법적 구속력을 가진 법정 계획이지만, 실행 수단까지 가진 것은 아니다. 개발 주체인 정부와 지자체가 예산을 투입하여 사업을 하거나 민간이 자금을 확보하여 사업에 뛰어들 때 비로소 지구단위계획은 효력을 발휘한다. 다시 말해서 서울의 기성 시가지에 수립된 대부분의 지구단위계획은 최소의 건축행위를 규제하는 계획에 머물거나, 지구 내의 부분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용되기도 한다. 서울시 시가화 면적의 약 30%를 차지하는 지구단위계획의 엄연한 현실이다.
기대했던 가로주택정비사업이 모습을 하나둘씩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건축계가 기대하는 연속적인 가로경관과 집합적 질서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각종 대규모 정비사업의 양상은 말할 것도 없다. 남향, 조망, 프라이버시,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하면서 최대 용적률과 최고 높이를 달성해야 하는 아파트설계의 공식 앞에 시각 공간적 질서를 회복하자는 주장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 비유할 수 있다.
박인석은 지구단위계획이 ‘상세한 도시계획’과 ‘도시공간 형태 관리’ 기능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행정 관료, 도시계획 기술사, 도시계획 학자들이 전자를 주도하는 가운데 건축계(건축사, 건축학자)의 몫인 후자는 방치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도시계획계와 건축계가 풀어야 할 숙제이자 논쟁의 해결을 도시계획-도시설계의 분리로부터 시작하자는 제언을 한다. 필자는 박인석의 주장에 원론적으로 동의하지만, 면 단위의 ‘위-아래’보다는 점 단위의 ‘아래-위’ 방식에 기대를 건다.
서울에는 택지개발사업처럼 공공이 주도하여 블록 혹은 지구 단위로 계획-설계-시공할 수 있는 서울시 소유의 땅이 거의 없다. 2017년 개정한 「도시정비법」에 따른 각종 정비사업을 섬세하게 조율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다. 문제는 복잡한 정비사업 관련 법과 제도를 이해하고 지난한 과정에 참여할 의지가 있는 건축가(전문가)가 드물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사업 모델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전히 도시계획 엔지니어가 이를 주도하고 건축사사무소가 이를 보조하는 것이 현실이다.
2009년부터 서울시가 운용하고 있는 지구단위계획 사전협상제도가 그나마 도시공간을 재구조화할 수 있는 수단이다. 민간사업이지만 공공이 계획과 설계를 주도하는 도시 단위의 사업이다. 하지만 공공성을 추구하는 서울시와 개발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민간 사이에서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여러 분야와 소통할 역량 있는 건축가는 협상 테이블에 없었다. 서울시 총괄건축가 제도가 도입된 2014년부터 2020년까지 6년간 서울시 부시장이 주관하는 도시건축공동위원회에 총괄건축가가 당연직으로든 위원 자격으로든 참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건축가의 상징적 위상과 실질적 역할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잘 보여준다.
이상헌이 합리적 지구단위계획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이렇다. 그는 책의 전반에 걸쳐 집합적 도시형태와 질서에 방점을 두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맞벽건축, 건축지정선, 건축양식의 일관성을 통해 가로공간의 연속성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공간, 상업공간, 자연, 강 등에 관한 제언도 있지만, 핵심은 형태 질서와 원리다. 참조하는 대상은 그의 표현을 인용하면 ‘서양의 도시’다. 르네상스 이후 형성된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의 도시이다. 책의 제목 ‘어바니즘’이 함의하고 있듯이 서울을 위한 이론, 계획, 전략의 핵심은 ‘인식 가능한’ 시각적 질서와 원리라는 것이다.
기하학적 원리가 건축설계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이상헌의 주장에 동의한다. 대학의 건축설계 교육의 바탕에는 이것이 깔려 있고, 이것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공간, 형태, 구조를 통합하는 ‘안에서 밖으로’의 건축 생성 원리는 땅, 밀도, 법과 제도, 비용 등 ‘밖에서 안으로’ 가해지는 도시의 외적 힘과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서울 해법』에서 두 대립 항의 모순, 갈등, 타협, 전복을 다루고자 했다. 서두에서 썼듯이 겉으로 무질서해 보이는 서울의 모습 뒤에는 여러 주체의 치밀한 싸움의 전략과 전술이 숨어있다. 다자간에 합의한 절충점은 한 개인이 깨거나 바꾸기 어렵다. 법과 제도, 경제적 상황, 사회문화적 조건이 흔들리거나 세대가 바뀌지 않는 한 지속하는 관성이 된다는 것이 나의 관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계와 관성을 창의적으로 반전하는 젊은 건축가들의 시도는 값지다. 그들의 작업을 “개인 방언의 모음” 정도로 치부, 냉소, 깎아내리는 안팎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는 타자(비유럽)가 만든 것을 방언과 토속으로 내려다보는 유럽 중심 인식의 연장선에 있다. 이를 부정할 필요도 외면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 반대 지향점은 서울에서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헌이 책에서 중간중간 언급한 무질서, 혼잡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문제이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한국의 새로운 세대 건축가들의 작업 방식이 지속가능한 모델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거대자본과 건설산업이 주도하는 틈새에서 이들의 두터운 풀(pool)은 한국 건축의 희망이다.
이상헌과 박인석이 각기 다른 관점에서 지적한 중간건축 도시 단위의 효용성, 주체와 실천 전략의 모호함에 대한 필자의 답은 이렇다. 삼부작 사이에 공동 집필한 『The FAR Game(용적률 게임)』(2016)에서 필자는 한국 건축의 전선에서 나타나는 중간건축의 가치와 의미를 네 가지로 보았다.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건축가들에게 기회(건축), 회복력 있는 점진적인 도시재생(도시), 중소규모 건축사업과 작은 경제(경제), 중소규모 복합건축을 통한 도시 안의 소셜믹스(사회)이다.
도시형태를 규제하는 도시설계가 서울에서 어려운 원인은 법과 제도, 도시-건축의 대립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다. 땅의 가치가 건물의 가치를 압도하는 현실이다. 개발을 전제로 한 사업의 경우 건물값은 매기지 않는다. 서울에서 건축은 땅의 적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땅(필지)의 경계가 없어진 정비사업(특히 주택 재개발사업, 재건축사업)은 개별 필지의 권리를 집단 이익의 분배로 치환해 버릴 뿐이다. 건축을 땅에 얹힌 부산물로 보고 땅의 소유권과 개발 가능성을 신봉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것이 과연 보편적인 현상인가? 이상헌이 책에서 참조한, 서유럽 도시의 질서정연한 가로경관은 어떤 맥락과 상황에서 가능했을까?
서유럽에서 땅은 크게 ‘임차권(leasehold) 토지’와 ‘자유 보유(freehold) 토지’로 나누어진다. 임차권 토지는 일정 기간(30년, 50년, 99년 등)만 건물을 짓고 사용할 수 있다. 반면 자유 보유 토지 소유자는 땅과 건물의 권리를 모두 행사할 수 있다.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 공공주택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임차권 제도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대규모 사업에 이러한 제도가 사용되기도 한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는 모든 토지가 국가에 귀속되어 있고, 영국 일부와 싱가포르에서도 999년간 토지 권리를 부여한다.1 ‘자유 보유 토지’를 소유하더라도 런던에서는 인접 도로의 관리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심층 비교연구가 필요하지만, 서유럽 도시의 블록 단위의 집합적 건축은 로마 제국 이후 이어져 온 토지-건물의 권리를 분리한 이러한 제도 때문에 가능했다. 즉 토지의 공개념이다.
우리나라에서 토지 소유권이 법제화된 1912년 이후 100년이 지났다. 서울 대부분 땅은 국가 소유에서, 친일파와 새로운 권력층, 미군정, 민간자본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제 서울시가 공공사업을 할 수 있는 땅이 거의 없다. 개인이든 법인이든 130만여 개 필지를 소유한 주체는 땅-건물을 하나로 묶어 절대적 권리를 행사하고자 한다. ‘토지 공개념’은 헌법을 건드려야 할 만큼 민감한 이념 문제와 맞닿아 있다. 민간 땅에서 벌어지는 집합적 건물의 배치, 형태, 양식을 지구단위계획으로 규제하자는 논리는 도시계획계에서조차 완전한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 대안으로 종종 거론되는 혁신적 국제 건축설계공모는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기도 한다.
국토교통부 산하 건축분쟁 전문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5~2018년 4년간 발생한 분쟁 중 인접 건축물 공사로 인한 건축물 피해 분쟁이 가장 많았다. 1999년 건축법 개정으로 도시미관을 위해 특별히 정한 지역에는 맞벽 건축을 허용했다. 하지만 법 개정 이후 서울에서 실제 지어진 맞벽 건축은 거의 없다. 또한, 서울시가 인접한 두 개 이상의 필지를 하나의 대지로 합쳐서 개발할 경우 인센티브를 주는 공동개발 지정 및 권장제도를 지구단위계획에서 10여 년 넘게 시행해 오고 있지만 실행된 경우가 거의 없다. 오히려 지정되었던 공동개발 필지들을 지구단위계획에서 해제하는 추세다. 땅을 나누고 합치는 것은 최대 난제다. 자신이 소유한 땅의 지적선을 배타적 경계로 여기는 서울에서 타인과 개발을 같이 한다는 것은 이상론에 가깝다.
건축설계 시장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다음과 같이 분화될 것이다. 첫째, 건축생태계 피라미드 맨 아래다. 익명의 집 장사, 영세한 시공업자에 종속되어 최소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네 건축사들이다. 둘째, 효율과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대형사무소다. 셋째, 앞의 두 층이 진입할 수 없는 스타 건축가들의 리그다. 넷째, 전문성과 창작 의지를 갖춘 피라미드 중간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홀로서기를 하지 못한 층이다. 과연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도시설계를 주도할 역량 있는 전문가들이 피라미드의 어떤 층에서 나올 수 있을까?
박인석은 비평 말미에서 변화는 건축계의 내적 노력보다 외부로부터 올 것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전후 고도성장기를 맞이한 1960년대 일본의 건축가들은 국가의 지원으로 거대 건축 실험을 했다. 1990년대 초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불황과 침체에 이은 저성장 시대를 맞았다. 일본 건축은 작고 정교하고 섬세한 것으로 바뀌었다. (프리츠커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1990년 이후 이 상을 받은 일본 건축가 7명의 주요 작품은 필지 단위의 작은 건축이다.)
필자 역시 개별 필지에서 해결해야 하는 주차 규정을 블록 단위로 확장하고, 용도지역지구제를 유연하게 하는 새로운 도시설계의 필요성을 역설했었다. (2011) 소형 주거공간은 부족하고 상업공간은 공급과잉인 문제를 풀기 위한 전제에서다. 지금 서울이 당면한 최대 도시건축 현안은 저출산, 저성장 시대에서 심화되고 있는 도시 안의 불평등과 용도의 불균형이다. 그 해법의 지향점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청년층과 자녀를 키우며 일하는 신혼부부가 서울에 들어와 살고, 일하고, 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이미 만들어진 공간을 재구조화, 재프로그래밍하는 것이다.
「도시정비법」 기준대로라면 1990년대 이후 지은 서울의 다가구·다세대 주택의 대부분은 이제부터 어떤 방식이든 부수거나 고쳐 써야 한다. 그 방식은 서유럽 도시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도시와도 다를 수밖에 없다. 질서와 무질서, 합리와 비합리가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새로운 모델이 되어야 한다. 작은 건축의 개선과 혁신, 섬세한 도시설계의 결합은 이때 비로소 빛을 발할 것이다.
박인석이 제기한 토론 쟁점 중 소고에 담지 못한 대답은 아래에 덧붙였다.
한양의 형성과정이 <선건축-후계획>이라면 유럽 도시는 <선가로계획-후건축>이라고 할 수 있는가? 농업경제사회에서 형성된 유럽의 마을-도시구조는 <선필지(집터)-후가로>가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도시건축의 새로운 상상력』에서 기술한 ‘선건축-후계획’은 한양의 뼈대(현재 세종대로, 종로, 남대문로)와 궁궐, 주요 공공건축물이 자리 잡은 뒤 품계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다른 집터가 들어서면서 주요 가로와 집터를 잇는 2차 가로망(막다른 골목길)이 생겼다는 내용이다. 즉 격자형 가로망과 필지(집터)가 동시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선건축-후계획’이라고 표현했다. 한양이 점진적으로 형성된 도시가 아니라, 수도로서 짧은 기간에 계획된 도시라는 점은 고대 동아시아 도시의 전형인 중국의 장안, 일본의 교토와 차별되는 특징이다. 또한, 시전이 격자형 블록에 갇혀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송의 카이펑의 상점가로 모습에 가깝다.
필자의 연구 주제는 아니지만, 중세 유럽의 상업 도시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주요 결절점, 강변, 항구에 시장과 공공건물이 들어서면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로를 따라 필지가 채워지되, ‘2열 배치’의 블록이 아니라 한쪽만 형성된 예도 있었다. 이보다 밀도가 낮았던 자연발생적 마을에서 <선필지(집터)-후가로>는 닭과 달걀의 관계가 아닐까 한다. 길의 한 면에 건물이 들어서더라도 필지는 종심으로 나누어졌다는 점은 시전이 들어섰던 종로의 횡장형 필지와 대비된다.
대로변에서 블록 내부로 가면서 밀도, 용도, 건축유형이 급격히 전이되는 구조는 문제인가? 특히 안팎 밀도의 비균질성은 문제인가?
역사도심, 들쑥날쑥한 구릉지, 격자형 주거지로 구분해서 접근해야 한다. 이중구조의 문제는 밀도의 비균질이 아니라, 용도의 불균형과 열악한 도시 인프라다. 『서울 해법』에서 지적했듯이, 첫째, 주택 공동화를 겪고 있는 역사도심은 문화유산에서 주거와 산업 생태계로 목표를 전환해야 한다. 둘째, 도로와 공용주차장을 개선할 수 없는 열악한 강북의 구릉지는 공공주도로 정비사업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도시 인프라가 양호한 강남의 격자형 주거지는 점진적 도시재생을 해야 한다. 지난 10여 년간 서울시 정책 기조는 반대였다.
아파트/다가구 다세대 주택의 저층부를 가로공간과 접속하는 건축유형으로 바꾸어 가는 것을 지향하는가?
법령에 따라 민간에게 주택재개발・재건축사업의 시행 권한을 준 서울시와 자치구는 아파트단지의 폐쇄된 경계부를 열고, 보행 진화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정비계획을 주도적으로 수립해야 한다. 한편 대지 안에서 주차 기준을 충족하는 유일한 해법이 필로티 주차장인 다가구・다세대 저층부를 지구단위계획으로 바꾸는 수법은 한계가 있으나, 필로티 구조를 쓰되 새로운 디자인으로 가로와 친화적인 공간을 만드는 고무적 사례가 생겨나고 있다. (‘필로티 주차장’, 『서울 해법』, p.235)
도시형태 관리제도로 특별건축구역 제도, 특별가로구역 제도의 강화・확대가 실효성 있는 목표 아닌가?
현재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하여 수준 높은 도시건축과 경관을 유도할 수 있는 수단은 대규모 유휴부지 대상의 사전협상제도다. 민간사업자는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자체적으로 국제 설계 공모를 하기도 한다. 문제는 대규모 개발사업과 정비사업의 마지막 단계에서 품격과 품질을 마무리하는 건축가들의 참여 여부다. 좋은 계획을 물리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건축설계 도면을 협상 전제조건으로 의무화하고, 협상 테이블에 타 분야를 설득하고 소통할 수 있는 다면적 브리콜뢰르 건축가가 참여해야 한다. 서울시 총괄건축가, 공공건축가. 마을건축가 풀에서 이들이 나와야 한다.
(후기) 이 포럼은 투병 중이었던 박철수 교수가 박인석 교수와 동네 산책을 하면서, 묵직한 집필, 비평, 논쟁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아쉬워하며 구상했다. 치열한 연구자, 교육자로 살았던 학문적 동료 고(故) 박철수 교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김성홍
한양대학교에서 건축공학사, 버클리대학교에서 건축학 석사, 조지아텍에서 건축학 박사를 받았고, 현재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다. 주요 저서로 『Megacity Network』(2007), 『도시건축의 새로운 상상력』(2009), 『길모퉁이 건축』(2011), 『The FAR Game』(2016, 공저), 『서울 해법』(2020) 등이 있다. 2007~2010년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탈린, 바르셀로나, 서울에서 열린 〈한국현대건축전〉을 기획했고, 2016년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 〈용적률 게임〉의 예술감독을 맡았다. 2012년 이후 싱가포르, 애틀랜타, 도쿄, 샤먼, 예카테린부르크, 수라바야, 베이징, 취리히, 리히텐슈타인, 파나마시티, 자카르타의 대학과 기관 초청으로 서울의 도시건축에 관한 특강을 해왔다.
공공성의 기저, 도시계획과 필지 관리 – 「서울 도시건축 현상과 쟁점」에 답하며
분량10,125자 / 20분
발행일2023년 9월 11일
유형비평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모든 텍스트는 발췌, 인용, 참조, 링크 등 모든 방식으로 자유롭게 활용 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의 출처 및 저자(필자) 정보는 반드시 밝혀 표기해야 합니다.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이미지의 복제, 전송, 배포 등 모든 경우의 재사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