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리미츠
김종서
분량9,969자 / 20분 / 도판 5장
발행일2023년 7월 6일
유형인터뷰
다양한 프로세스와 프로젝트
김종서 학부 시절, 최문규 소장님과의 인연으로 가아건축에서 인턴을 했는데, 당시에 최 소장님과 조민석 소장님의 협업 프로젝트인 ‘딸기가 좋아’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그 때 조 소장님을 처음 뵈었다. 그리고 대학원 재학 중에 조 소장님이 같이 일해보자는 연락을 주셨고, 매스스터디스 창립 멤버가 됐다. 막 시작하는 사무소였으니 조 소장님은 늘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 소장님이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에 나도 열과 성을 다했다. 그때 같이 일했던 멤버들에게는 지금까지도 의지하고 있다. 그렇게 한 3년 정도 계획 위주의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 현장을 향한 목마름이 생겼다. 그래서 원오원으로 옮겨 현장 중심으로 일했다. 1년 남짓의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사무소 운영 측면에서는 그때 경험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다가 다시 매스스터디스로 돌아가서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하며 사우스케이프를 비롯해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여럿 진행했다.
돌이켜보면 매스스터디스에서 배운 것들이 가장 인상이 깊고,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그때 배운 프로세스가 내 건축의 근간이기도 하다. 프로젝트 초기, 매스 스터디 단계에서 기본 방향을 찾을 때는 팀원 모두가 같이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다. 누군가의 취향이 들어가기 전 단계, 큰 덩어리와 틀을 잡을 때에는 모두가 같이 참여해서 사이트 같은 주어진 기본 조건들을 가지고 무한히 만들어보고, 가능성을 찾고, 점점 좁혀나간다. 그리고 각자의 생각과 의견을 논의하여 몇 가지를 추출한 다음 디벨롭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원오원 같은 경우는 많이 만들어보는 게 아니라, 하나에 집중해서 높은 퀄리티로 만들어간다. 두 프로세스를 다 경험하다 보니 장점을 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가 아이가 태어난 시점부터 현실적인 고민이 상당히 커졌다. 그동안은 가족들이 잘 버텨주었지만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던 차에 해안건축으로 옮길 기회가 생겨 매스스터디스를 떠나게 되었다. 떠나기 전 마지막 날, 조 소장님에게 ‘여기에 마음은 두고 간다. 그래도 가서 열심히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소장님도 ‘거기에 가서도 여기에서 했던 것처럼 하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게 큰 힘이 됐다.
통상 대형설계사에서 가장 꺼리는 부서가 바로 주택 본부다. 그런데 나는 해안의 주택 본부로 옮겼고, 공동주택 프로젝트가 아니라 해외사와 협업으로 진행하는 타운하우스 프로젝트를 맡았다. 그 일을 잘 마치고 나니 주택 본부 본연의 업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LH나 시공사 기반의 아파트 현상 설계 등 주로 계획 단계의 일을 했다. 그러다 디자인 랩으로 옮겨 현상설계나 뉴욕의 H 아키텍처와 협업하는 일 중에서 특히 디자인에 중점을 둔 파트를 담당하다가 제로리미츠를 열게 되었다.
꿈을 펼치기 위해, 독립
김종서 해안건축에서 윤세한 대표님, 김태만 대표님 등 좋은 분들을 많이 뵙게 되었고, 예전에 같이 실무했던 선배님들도 다시 만나서 일하며 좋은 경험을 했지만, 계획안을 그려내는 시간동안 공허함이 쌓여갔다. 한 해에 현상설계를 많을 때는 스무 건까지도 하다 보니 실현되는 일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이 일 자체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 회사의 배려로 디자인 베이스의 일을 할 수 있는 디자인 랩으로 옮겼지만 2008년 금융위기로 본부가 점차 축소됐다. 그러다가 해안 내부에서 아모레 퍼시픽 본사 사옥 로컬 팀으로 옮길 것을 제안받았는데, 그 일을 시작하면 독립이 요원해질 것 같았다. 한 일주일 정도 고민했고 ‘제대로 한번 망해봐야 건축가로서 뜻을 펼치겠다는 꿈을 포기할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무작정 퇴사했다.
주변 반대가 엄청났다. 굳이 왜 그만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때가 실무 10년차, 나이는 30대 후반이었다. 나의 의지와 에너지로 새로운 일을 벌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작더라도 내 생각대로 계획한 건물을 딱 한 채만 실제로 땅에 세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안식년처럼 딱 1년의 시간만 달라고 얘기한 뒤 사무소를 시작했는데, 6개월 동안 아무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할 수 있는 걸 했다. 웹사이트를 열고, 계획안 이미지와 설명문을 등록했다. 당시엔 지금처럼 소셜미디어가 활발하지도 않았기에 마냥 기다렸다. 자존감이 점점 내려가던 차에 첫 프로젝트가 들어왔다. 건물을 잘 지어보고 싶었던 건축주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다가 나와 연이 닿은 것이다. 그래서 그 일에 완전히 몰두했다. 건축주와 일산 사이트에도 가보고, 미팅도 하고, 그렇게 일곱 번을 만나고 나서야 일을 받았다. 그리고 두 번째 일인 제주도 프로젝트가 한 달 상간에 들어왔다. 그렇게 사무소를 제대로 시작했다.
제로리미츠라는 이름
김종서 사무소 이름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학부 시절 자코메티의 조각 ‘걸어가는 사람’을 놓을 전시 공간을 만드는 과제를 하면서 이 조각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이 조각에는 어디까지, 얼마만큼 덜어내어도 존재할 수 있는가, 혹은 본질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지점이 어디인가를 질문하는 과정이 숨겨져 있었다. 이 이야기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제로, ‘0’은 단순히 숫자일 수도 있지만, 사무소를 시작할 때 내가 생존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딜까, 또 궁극적으로 지켜야 하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에 대한 내 나름의 고민과 질문을 담은 모토였다.
하도리 돌집, 정발산 프로젝트
김종서 우리 기준에서 잘한 작업도 있지만,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업은 초기 프로젝트다. 물론 100% 만족하는 결과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노력했고, 또 지금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런 면에서 제주도 하도리 돌집과 정발산 프로젝트를 꼽고 싶다.
하도리 돌집은 여행사를 운영했던 분이 은퇴하면서 제주도에 땅을 구하며 시작된, 제주도라는 지역이 시작이고 끝인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제주’하면 흔히 떠올리는 바다, 바람, 돌, 그리고 거친 환경에 남아있는 기억, 아우라와 같은 것이 이 프로젝트에서 놓치면 안되는 콘텍스트라고 이해했고, 그 맥락에서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지로부터 출발했다. 처음에는 훨씬 인공적인 재료들, 금속이나 목재 마감을 생각했었는데, 현지 환경과 기후로 인해 건축 재료가 너무나 금방 상해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이 땅에 순응하고 공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살아남은 재료를 써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렇게 해서 집이 망가지지 않고 주변과 어우러지며 서서히 나이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그 과정에서 현무암을 마감재로 정했는데, 시공법도 제주 현지 작업자들이 알려주었다. 현무암으로 외벽을 감싸는 시도가 그때만 해도 흔한 일이 아니었고 가능한지조차 몰랐다. 그런데 현지 작업자가 자연스럽게 돌을 끼워서 마감하는 방식을 제안해주어서 해결됐다. 현지의 노하우를 채택한 또다른 아이디어는, 감귤 창고문에 쓰인 슬라이딩 도어 하드웨어였다. 건축주가 이 집의 거실에 최대 크기의 창을 원했는데 프라이버시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목공 작업자와 현지의 창고문 하드웨어를 활용해 루버 구조체를 만들었다.
이 집에서 건축주가 별도로 요구한 한 가지는 화장실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니, 특별하게 계획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심에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안을 냈다. 마치 외부 공간처럼 느낄 수 있도록 계획했고, 하늘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또한 나는 건물 구조물 일부가 가구 역할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해서 건물의 한 부분에 꼭 계획해 넣는데, 이 집이 그 시초가 되었다. 제주는 경관은 좋지만 건물에는 척박한 환경이다. 그래서 주변 건물은 매년 보수를 하고 외장재를 교체한다고 한다. 우리 건물은 초창기에 태풍으로 인한 탈락이나 약간 녹슨 것 이외에는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결국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가치를 만드는 것은 그 땅의 해석으로부터 비롯한다는 인사이트를 얻었다.
정발산 프로젝트는 주어진 환경이 열악했다. 그걸 디자인적으로, 계획적인 이슈로 해결하기 위해 많이 고민했었다. 일반적인 다가구 주택이 왜 열악한 환경에 놓일 수밖에 없는지를 고민해보니 창을 열 수 없고, 복도가 너무 좁고 어둡다. 이런 점을 개선하기 위해서 집마다 열 수 있는 창이 최소한 하나씩 있을 수 있게 계획을 했다. 또 복도에 폴리카보네이트 단파론을 써서 각자의 집으로 가는 길이 아늑하길 바랐다. 이 공간의 조명을 켜면 동네를 밝히기도 하니,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건축 계획, 찾아가는 과정
김종서 실무를 10년 하는 동안, 언젠가는 내 사무소를 열 거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기간 내내 관심가는 부분이나 새로 배우는 점이 있다면 어떻게 내 사무소에 접목할 수 있을지 늘 고민했다. 매스스터디스나 원오원, 인턴했던 가아건축 등 돌아보면 사무소마다 분위기나 일하는 방식이 달랐다. 또 해안건축은 큰 회사만의 특장점과 시스템이 있다. 아틀리에와 대형 설계사 모두를 경험했으니 각각의 장점을 수용해보고 싶었다.
초창기에는 혼자서 1~2년 작업했고 딱히 시스템이 없었다. 점차 직원들과 협업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이후로는 매스스터디스에서 아이데이션하는 방식으로 모두가 같이 스터디를 하고, 진행한다. 그래서 우리는 프로젝트 시작 단계에서 클라이언트에게 안을 보여 드리기까지 최소 3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린다. 내가 생각하는 ‘계획’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발명하는 일이 아니라 ‘찾아가는 과정’이다. 땅이 갖고 있는 조건이나 건축주가 요구하는 것들, 우리의 아이디어를 과정 속에서 계속 만들어봐야 된다. 그다음에 클라이언트의 조건과 현실적인 상황,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을 반영하여 다듬어가는 것이다. 초기에는 우리의 색깔이라는 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걸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이제는 축적된 결과물로 보여드릴 수 있고, 우리 생각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주택 설계는 심층 인터뷰로부터
김종서 주택 설계에 있어서는 나름의 방법론이 생겼다. 주택은 사람에 따라 어떤 집을 짓고 싶은지가 천차만별이다. 명확한 목표, 평면, 이미지를 가져오는 사람도 있고, 모든 게 희미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전략적으로 첫 인터뷰를 굉장히 오래, 자세히 한다. 어떤 취미가 있는지, 가족 구성은 어떤지, 어떤 사람들을 초대하는지, 어떤 물건이 많은지, 가구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을 정리해둔 인터뷰지를 따라 대화를 나눈다. 그 답변들로부터 방향을 찾는다.
요즘 대중들은 건축 정보를 대부분 이미지로부터 얻는다. 그 이미지와 인터뷰 답변을 비교해보면, 공간 크기나 원하는 기능이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미지상 거실이 큰 집을 원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는 주방이 커야 하는 집일 수도 있다. 또한 원하는 이미지가 대지 조건, 건폐율이나 용적률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처음에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이미지를 받긴 하지만 그걸 참고로 하는 게 아니라, 새로 지을 집에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먼저 파악하고 그로부터 설계를 시작한다. 거기에 클라이언트가 원했던 형태나 이미지를 더하고, 주어진 대지의 콘텍스트나 전체적인 분위기와도 맥락이 맞는 안을 두 가지 마련해 제안한다. 그중 하나는 우리의 의지가 더 강하게 담긴 것이고, 이쪽으로 설득하는 편이다. 그래야 설득을 할 수 있다. 간혹 우리에게 온전히 맡기겠다던 분들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 본인이 원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알게 됐다는 말씀을 주시곤 한다.
주택은 화장실 사이즈 하나, 문고리 하나, 스위치 하나까지도 클라이언트의 취향을 반영해야 한다. 특히 하루에 한 번 이상 사용해야 하는 하드웨어는 반드시 그들의 취향을 이해하고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 경험상 이런 부분을 집중적으로 디자인하면 사용자가 느끼는 만족도가 훨씬 높아진다.
그리고 가족 관계에 따라 주택의 공간을 구성하는 묘미도 있다. 부모와 결혼한 자식이 합가하여 함께 살기 위한 주택을 설계한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세대를 수평으로 나눌지, 수직으로 나눌지 공간 구조를 고민하는 이슈가 생겼었다. 그것도 앞서 얘기한 것처럼 클라이언트가 가져온 이미지나 형태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삶 그리고 원하는 삶에서 설계를 시작하면 되는 것 같다.
10주년, 조직의 전환점
김종서 2022년 현재 직원이 두 명, 인턴이 한 명, 나까지 넷이다. 많을 땐 여섯 명 정도까지 있었다. 우리가 소규모 건물을 주로 다루지만 일이 적진 않다. 업무량이 많아서 효율이 높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작업량을 좀 줄였다. 그리고 한 6년차쯤, 원오원 시절의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직접시공을 시도했었다. 그때 나도, 직원들도 무척 힘들어서 2년 만에 정리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나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10명 이내로 운영할 계획이다.
그리고 10주년을 기점으로 규모가 큰 일들을 해볼까 생각도 한다. 그동안은 생각 않다가 2021년에 현상설계에 한 번 도전했었다. 직원들이 작은 건물만 설계하다 보면 한계에 부딪히는 것 같다. 큰 규모의 건물 설계도 경험해볼 필요가 있고, 실무적인 측면으로 보면 어떤 부분은 주택에 비해 더 쉽기도 하다. 과거에는 현상설계 제출물이 너무 많았고, 그 시스템 자체에 불신이 있었는데, 요즘은 확실히 달라진 것 같다. 아웃풋의 양도 예전보다 줄었고, 직원들이 개념적인 아이디어를 훈련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어 괜찮은 것 같다. 물론 갑자기 안하던 일을 하니 직원들이 꽤 고생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계기를 만들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려 한다.

무한 경쟁 세대
김종서 과거 선배들은 닫힌 풀 안에서 안정적이고 안전한 기회들이 훨씬 많았던 것 같다. 지금은 그때보다 일이 훨씬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경쟁이 심하고 그 시대에 비해서는 전반적인 실력이 상향평준화됐다. 이건 내가 개소한 시점과 비교해도 많이 다르다. 클라이언트의 태도, 연령대도 바뀌었다. 가장 큰 틀에서는 건축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라졌다. 기회가 많아진 만큼 건축가의 역할도 더 늘어났고, 그만큼의 노력을 요구한다. 만약 내가 이 시점에 사무소를 시작했다면, 지금 모습처럼 일궈올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내 첫 클라이언트는 ‘소위 건축가라는 사람은 어디 있는지 도대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연락처도 알 길이 없다’고 했었다. 근데 지금은 포털 사이트 검색만 해도 수두룩하고, 건축가 스스로 소셜미디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너무 광범위하게 노출되어 있으니 우리 입장에서는 무한 경쟁할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시대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요즘은 2~3년 정도의 경력만으로 설계사무소를 빨리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건축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높아지는 만큼 클라이언트가 접할 수 있는 정보가 많아지다 보니까 경험이나 정보가 부족한 젊은 건축가가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클라이언트가 곳곳에서 이런저런 자료를 보고 들고 오는 경우가 많은데 소규모 건축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게 태반이다. 계약서만 해도 규모나 주체에 따라 내용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여러 사무소를 거치며 공공건축이나 큰 규모, 다른 용도의 건축을 경험했기 때문에 규모와 용도에 따라 적용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고, 이런 클라이언트에 대응할 수 있다. 근데 그런 경험이 없고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상황에서 까다로운 상대를 만나게 되면 엄청난 고난을 겪게 된다. 내 주변에서도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런 부분들은 기회가 독이 되는, 어두운 면이다. 예전에 비해 시작하는 건 쉬워졌지만, 살아남기는 훨씬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클라이언트의 등장
김종서 예전에는 주택이 자산의 개념에 가까웠다. 집값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주택의 어메니티나 하드웨어가 부족하더라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인식이 바뀌어서 주택을 삶을 누리는 공간으로 여기는 문화가 생겼다는 게 느껴진다. 특히 클라이언트의 나이대가 30대로 낮아진 영향이 있는 것인지, 그런 경향이 점점 더 강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젊은 세대가 자력으로 집을 마련하는 경우가 드물고 대체로 부모님으로부터 금전적인 도움을 받는데, 부모님이 함께 살지 않더라도 자신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대 간의 가치관이 부딪히는 경우가 꽤 많다.
그런 한편, 부동산 투자에 나서는 연령대도 낮아지면서 건물의 공간적 가치와 부동산적 가치를 모두 고려하는 일도 많이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거주 공간과 부동산 수익을 고려한 임대 공간을 같이 마련한다든지, 상가 리모델링을 하는 것이 그 예다. 이런 일은 내가 사무소를 시작할 때만 해도 흔치 않았던 유형이다. 그래서 이제 막 개소한 사무소 입장에서는 이런 측면으로 더 많은 기회가 생길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덩달아 예전에 비해 공격적인 제안을 수용하는 분이 더 늘어나는 것 같다. 그게 결국은 건축을 의뢰하는 세대가 젊어졌고, 정보가 많아졌고, 인식이 높아졌고, 그걸 할 수 있는 설계사무소도 많아지면서 시너지가 난 게 아닐까 싶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다들 상향평준화되고, 시공사의 역량도 같이 높아지는 것 같다.
이런 변화 속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우리의 일이 정량화되지 않기 때문에 업무 단가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대중의 인식이 높아졌다 하더라도 그런 게 실질적인 비용에 반영되지 않다 보니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작업 효율을 높이다 보면 딜레마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 지방 현장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감리를 가야 한다. 그런데 비용 때문에 가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훤하다. 그래서 더 자주 가게 되고, 그러다 보면 출혈이 생긴다. 이런 부가적인 지출을 클라이언트가 비용에 반영해주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그래서 요즘에는 계약서를 쓸 때부터 감리에 들어가는 비용을 이야기하고 반영하려 한다.
설계 교육, 본질을 강화해야
김종서 한동안 모교에서 강의를 하다가 지금은 쉬고 있다. 강의를 시작할 때 굉장히 큰 기대가 있었는데, 수업을 거듭할수록 5년제 인증 시스템에 단점이 분명히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과연 학교를 5년 다니는 것이 4년제 졸업 후 실무를 1년 더 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소장 입장에서 졸업생이 우리 회사 신입사원으로 온다는 가정을 했을 때, 수업 내용에 빈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보다는 시스템이 먼저인 분위기고, 학생도 시스템에 충족하는 걸 최우선으로 여기므로 가르치는 데에 한계가 있다. 설계 수업에서 계획안의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에 대한 것들을 강조해도 그런 게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학생들이 너무나 어려워했다. 한편으론 시각적인 아웃풋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물론 과제 결과물이 이미지로 만들어지고, 그것으로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 내에 공간적인 가치나 시퀀스까지 고민하고 완성도를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건축의 본질은 변하는 게 아니므로, 결국 실무를 하다 보면 그 문제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고, 현장에서 건축적 가치를 리마인드하는 별도의 교육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학교 교육에 아쉬움이 많다.
인터뷰 심미선 / 원고화 및 편집 심미선
제로리미츠
제로리미츠는 건축과 디자인의 가치를 유지하는 최소한의(minimum) 한계와 경계를 탐구하는 것을 지향한다. 넘쳐나는 것들로부터 소외된 곳(space), 삶(life), 필요(need)에 건축가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며, 좋은 건축과 디자인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의 소중함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디자인을 시작한다. 가치가 0(zero)이 되지 않는 최소한(limits)을 지켜내는 노력은 언제나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대표작으로 무주 오연재, 제주 하도리 돌집, 비아 인터내셔널 사옥이 있다.
김종서는 울산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매스스터디스, 원오원 아키텍스, 해안건축을 거쳐 2012년 제로리미츠를 설립했다.
- 개소 연도: 2013년
- 주로 활동하는 도시: 서울, 제주
- 현재 인원: 5명
- 프로젝트 수주 비율:
(현황) 민간신축 70%, 증개축 20%, 인테리어 10%
(희망) 민간신축 70%, 공공신축 30% - 웹사이트: https://www.zlarchitecture.co.kr
- 인스타그램: @zerolimits.architects
제로리미츠
분량9,969자 / 20분 / 도판 5장
발행일2023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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