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황 진단
서승모
분량2,859자 / 6분
발행일2023년 4월 18일
유형인터뷰
건축이라는 학문
일본에서 건축은 학문이다. 건축 일의 시기와 단계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학교에서 배운다. 건축가들 사이에서든 학생들 사이에서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면 무시를 당하기도 하고, 그렇기에 알아야만 하는 것들을 찾아서 익힌다. 한국에서는 주로 ‘디자인’을 가르치는데, 가르치는 사람의 ‘취향’을 배우는 느낌이다. 그래서 건축을 배운다는 개념이 별로 없고, 학문으로 성립이 잘 안 되고, 그러다 보니 비평도 안 되고, 업계에서도 판단 기준이 없다. 신인들이 우후죽순 나왔다가 사라진다. 그저 유명해지는 것이 건축을 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요즘 1년에 한두 번 『공간』 편집부의 요청을 받아 피어 리뷰 자리에 가는데, 마땅한 이야기거리가 없다. 이쁜 작업은 많이 보지만, 건축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보이는 건 별로 없다. 건축 작업에서 뭔가를 읽어내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모아놓은 것들 중에 그런 게 별로 없다 보니 재미가 없다. 점점 더 학문이 아닌 영역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학문으로서의 건축을 회복하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한국에서는 건축이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직원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 다들 ‘디자인’부터 하려고 든다. 자꾸만 디자인을 하려고 달려드는 직원을 붙잡아 앉혀서 틀을 먼저 잡아주려고 한다. 학문으로서의 건축을 안/못 배웠기 때문에 그 생각의 구조를 처음부터 세워줘야 한다.
예를 들면, 근린생활시설(근생) 설계를 진행할 때인데, 근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고, ‘가까운 이웃의 생활 편의 시설’을 왜 ‘그렇게 디자인’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리고나서 ‘디자인’하지 말고 ‘틀’부터 잡으라고 했다. 근생의 가장 쉬운 공략점은 계단실이라서, 계단에 대한 스터디를 집중적으로 주문했다. 근생과 그 계단이 그 동네에서 어떻게 작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질문은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학교에서 학생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한두 시간 준다. 결과물이 안 나오면 사례 조사를 추가로 시키거나 내가 직접 개입하는 식으로 진행한다. 마냥 시간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 같은 상황을 나도 잘 몰랐고, 당연히 알고 있겠거니 생각했었다.
지금 젊은 건축가
예전의 젊은 건축가들이 에너지를 쓰던 방식은 지금의 젊은 건축가들과 달랐다. 지금은 상대적으로 좀 더 가볍고, 매체를 활용하려는 습성이 강하고, 작업의 건축적 설명에는 큰 관심이 없다. 2020년에 원오원 20주년 기념 자리에 초대받아서 원오원 직원들과 짧은 토크 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젊은 직원들이 소위 기획과 브랜딩에 관심이 높아 보였다. 설계 일만으로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 어떻게 독립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요즘 브랜딩을 겸하는 작은 사무소도 꽤 있다. 그런데 결과물을 보면 말이 브랜딩이지 별로 전문적이지 않다. ‘회사’로서 할 일의 수준이 못 된다. 그런 걸 보면 ‘건축가는 무엇이든 다 잘 할 수 있다’ 혹은 ‘무엇이든 건축가가 만들면 다르다’는 순진한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동네에서 라면, 떡볶이, 김밥이 맛있기로 유명한 분식집도 결국은 동네 분식집일 뿐이다. 파인 다이닝 같은 수준 높은 레스토랑은 될 수 없다. 잘해야 스쿨푸드다. 동네 분식집을 하려는 사람과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하려는 사람은 처음부터 생각이 다른 것이다. 지금 건축 설계 업계에 남아 있는 건축가는 말하자면 모두 처음부터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생각했던 사람이다. 작게라도 가게를 열어서 라면, 떡볶이, 김밥을 열심히 만들려고 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동네에서 집장사보다 조금 나은 설계비를 받고 조금 이쁘게 만들어서 건축가의 사회적 소임을 하겠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렇게 라면에 만두 넣고 고춧가루 넣는 식으로는 어림없다. 유능한 셰프가 햄버거를 만드는 것과는 다르다. 그 햄버거는 메인 메뉴가 아니고 수익을 맞추는 도구다.
10년 전에 우리가 관심 있게 봤던 건축가들 중 그때보다 조금씩 나아지거나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는 건축가의 수는 분명 줄어들었다. 먼저, 생각의 끈을 잡고 있느냐 않느냐에서 차이가 생긴다. 맞고 틀리고는 그다음 문제다. 그리고 건축설계 집단이 되어 있느냐 안 되어 있느냐도 중요하다. 혼자 일하거나 너무 소수로 일하면 고인 물이 되기 쉽고, 사람들이 볼 때 작업에 발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기준을 하나 더 놓고 보면 그 수는 더 줄어든다. 시대는 변하는데 10년 전 생각과 10년 전 조직으로 더 나은 건축을 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각 분야의 뛰어난 사람들과 만나서 생각을 부딪쳐가며 자기 건축을 키워나가야 한다.
코로나를 지나며
일본에서는 ‘one floor’, 즉 큰 하나의 층, 효율적인 수직 동선, 강제 배기 장치로 이루어진 모더니즘 상자에 대한 비판이 코로나를 계기로 크게 일었다. 겐고 쿠마를 필두로 해서 작은 상자로 분산되어야 하고, 외기로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 일본 학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떨어져 흩어지는 도시가 가속화되는 것 같다. 그는 ‘유토리 세대’의 등장으로 1인 가구 수가 늘어나는 것을 이야기했던 것인데, 코로나와 함께 시작된 일터의 변화와 함께 앞으로 5~10년 동안 이런 변화가 더욱 가속화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편, 일하는 방식의 변화를 피해갈 수 없는 곳 중에 하나가 건축설계업이다. 좋은 인재들이 모여서 재택근무를 하지 않고 야근을 해가며 일하는 사무소는 소수만 살아남을 것이다. 즉, 야근을 피하기 어렵고 재택근무도 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계속 일하면 직원들이 다 그만둔다는 뜻이다. 그래서 많은 설계사무소가 약해질 것이고, 소수의 강자만 더 강해질 것이다.
인터뷰이 서승모 / 인터뷰어 김상호 / 원고화 및 편집 김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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