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전환, 야심
서승모
분량6,103자 / 12분 / 도판 20장
발행일2023년 4월 18일
유형인터뷰
데뷔작: R아틀리에, grsg바
일본 유학 시절 나는 개곡선이라는 개념에 관심이 있었다. 선 하나로 일필휘지하고 분절을 통해 하나의 평면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당시 나의 핵심 키워드였다. 일본 건축도 다른 동양 건축들과 마찬가지로 조적조의 전통이 없고, 가구식 구조를 중심으로 한다. 가구식 구조에서는 구조체를 제외하면 전부 문이고, 벽은 없다. 그래서 일본에서 열린 건축 이야기가 많기도 했다.
서울집 리모델링: R아틀리에
서울에 와서 효자동에 자리를 잡았다. 작고 오래된 한옥을 한 채 구했는데, 단순한 형태의 집이었다. 리모델링하면서 안과 밖이 엮인 느낌을 내고 싶었다. 문간방과 대문간을 같은 레벨로 맞춰 하나의 공간인 것처럼 만들었고, 평면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단부를 없앴다(보이지 않게 했다). 그렇게 구조적 요소들을 정리한 뒤 나머지는 백색으로 지우다시피 마감했다. 두 가지 단순한 레벨 위에 여러 요소가 산재한 느낌을 만들고 싶었다. 당시에는 개념적 생각이 강했던 터라, 건축이 실제로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감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개념적으로는 ‘열린’, ‘풀어진’ 평면을 구현했지만, 시각적으로는 가분수 같은 모습의 집이 됐다. 그 작업을 통해 배운 것이 있었다. 일본 민가는 지붕이 가벼워서 기단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은데, 한국 민가(한옥)에서는 그 방식이 어색한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한옥에서는 지붕의 무거움을 기단으로 반드시 받아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중에 한옥을 고치는 작업들에서는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다른 방식으로 작업했다.

첫 상업 공간: grsg 바
2004년 한국에서 사무소를 열고 3년을 일 없이 보냈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서 친구 둘에게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보여줬다. 요리와 음식을 좋아해서 자주 다녔던, 그때만 해도 조용한 동네였던 가로수길 한켠에 같이 식당 사업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첫 상업 공간 설계를 하게 됐다. 2006년 무렵이었다. 이때도 풀어진 평면, 개방적 공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건축 경계선을 약간 침범하는 처마 같은 요소를 사용하고, 바닥에는 처마에 호응하는 단을 만들고, 그 위에 경계를 감싸는 ㄱ자로 꺾인 유리 벽을 세웠다. 그 주위에 조명과 인조 담쟁이를 배치해서 공간이 하나인 것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연속적인 분절’이라는 건축적 주제를 실내 공간에 풀어보려고, 평면적으로는 균일한 테이블을 놓고, 천장에서는 다른 형태의 공간감을 냈다.
인테리어 디자인에는 ‘재패니즈 다이닝’의 상징적 요소들을 사용했다. 바와 사케 진열대, 쌈지길 한지 공방에서 찾은 쪽빛 장판지, 답십리에서 구해온 장식품, 무인양품 제품을 한국인 체형에 맞춰 개조한 의자와 탁자로 공간을 꾸몄다. 또 기존의 바닥, 기둥, 천장 마감을 다 벗겨내 구조와 흔적을 드러냈고, 유리판 모서리를 45도 컷팅으로 이어붙여 유리벽을 최대한 투명하게 만들었다. 이후에 이 작업 덕분에 인테리어 일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게는 2년 뒤 꽤 큰 권리금을 받고 팔았다. (그때 팔지 않고 계속 갖고 있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건축일을 고생스럽게 하지 않아도 되는 부자가 되어 있었을 텐데.)


전환작: 3제
(특정한 전환의 시점을 잡기 어려워서 세 개의 작업을 골랐다.) 먼저, J스튜디오하우스, 연희동의 작은 집이다. 한 층 면적이 10평 정도로, 2개 층과 다락으로 구성된 집이다. 작은 집이라서 전이공간은 만들 수 없었고, 공간을 그냥 병치하고자 했다. 전혀 다른 두 공간이 같이 있을 때 어떤 긴장감이나 재미를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1층은 철근콘크리트구조에 내단열을 하고 콘크리트 치핑으로 표면 마감을 했다. 2층은 목구조로 풀었다.

두 번째 작업은 M하우스다. 2018년 『건축평단』의 ‘영 아키텍처 크리틱’ 자리의 주요 발표작이기도 했다. 1층에 대문간, 작업실, 회랑이 있고, 2층은 ㄷ자로 만나는 방 세 개와 중정이 있고, 3층은 LDK가 약간 꺾어진 ㅡ자 공간에 들어가 바깥 원경을 향해 열려 있는 평면 형태다. 이 세 층을 그대로 적층했다. 무량판 구조 위에 각기 다른 평면과 공간을 쌓은 집이다. J스튜디오하우스가 재료의 적층이라면, 이 집은 평면 유형의 적층이다. 조화보다는 적층(병치)에 중점을 두었다. 접지성이 떨어지는 3층에는 처마를 달고, 토심을 깊게 하고, 퇴를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외부공간을 만들었다.


세 번째 작업은 LCDC다. 기존의 ㄴ자 건물에 ㄷ자를 덧붙이면서 위로 한 층을 증축했다. 1층은 철근콘크리트구조, 2층은 철골구조로 되어 있는데, ㄷ자 벽을 철근콘크리트구조가 떠받치고 있는 구조다. 보통 중정은 건물의 배치를 통해 만드는데, 이 건물에서는 들어 올린 ㄷ자 벽으로 감싸서 중정 영역을 만들었다. ㄷ자 벽은 기존 입면을 가리기도 하고 사이사이에 테라스와 계단이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건물에서는 프로그램이 적층되어 있다. 이런 ㄷ자 벽을 만든 이유는 여러 가지다. 기존 입면을 리모델링하는 비용을 줄이기 위함이기도 했고, 번잡한 성수동 거리에서 뒤로 물러선 고요한 공간을 두기 위함이기도 했다. 한편, 기능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1층(카페)-2층(플래그십 스토어)-3층(복도식 상가)의 주 상업 공간을 수직으로 이동하는 원형계단과 엘리베이터를 넣었다. 보통 근린생활시설 건물에서 상점과 공용공간을 드나드는 통상적인 동선 방식은 단일 건물에서의 공간적 경험을 깨트리는 요인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코어 공간이 잘 디자인되어야 하는데, 리모델링에서는 그것이 매우 어렵다. 그래서 존재감이 강한 원형계단을 주 상업 공간 중앙에 삽입해서 적층된 공간들을 (점프하듯) 곧바로 오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야심작: 등가로 펼쳐진 것들
현재 진행 중인 작은 프로젝트인데, ‘등가로 펼쳐진 것들’이라고 이름을 붙여보았다. 앞에서 ‘건축의 위계를 없애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그것을 좀더 나만의 방식으로 뽑아낸 작업이다. 출발은 일반적인 근린생활시설이었는데, 각 층 내부 공간은 그대로 둔 채 엘리베이터와 계단실을 바깥으로 끌어내고 그사이에 발코니 비슷한 것을 넣었다. 온전한 형태의 내부 공간을 갖추면서 각 기능이 분리되는 식이다. 따로 혹처럼 튀어나온 부분이 내겐 중요하다. 이 부분을 도시로 펼쳐진 거실 같은 공간으로 만들려고 한다. 각 발코니 공간에는 테넌트의 색깔에 따라 어닝, 전등, 난간, 처마 같은 요소들이 툭툭 달릴 것이다. 그렇게 저마다 나름대로 그곳을 꾸며서 쓸 것이고, 길에서 보면 그것들만 보인다. 보통은 각 매장이 잘 드러나도록 만들지만, 그것을 뒤집은 셈이다.
전체적으로 건축 요소들이 분할되어 적당히 붙어 있는 느낌인데, 더 밀어붙여서 더 하위의 건축 요소들을 더 분절할 수도 있다. 조화롭게 보이진 않겠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더 재밌어질 것 같다. 건축 요소를 분절해서 도시 속에 등가로 펼쳐놓았을 때 도시 안에서 건축이 형태로 보이기보다 행위를 유발하는 요소로 작동하게 되고, 그래서 건축이 좀더 즐거워질 것 같다. 거실에 소파 하나 테이블 하나 놓는 것도 멋지겠지만, 테이블 위에 그릇도 쌓여 있고, 의자도 얼기설기 놓여 있고, 한켠에 비디오테이프도 쌓여 있는 생활감이 보일 때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근린생활시설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디자인하는데, 대부분 그 형태들이 내부공간 구성과 관계를 맺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용적률, 프라이버시, 중간영역에 대한 관습적인 건축 계획으로는 진정한 ‘근린생활’을 지원해주지 못한다. 그 문제를 이렇게 건축 요소들을 분할 배치하는 방식으로 해결해보려고 한다. 조용한 골목에 이 건물이 들어서면 거리의 풍경도 즐거워보일 것 같다. 무뚝뚝하지 않고, 현란하지도 않고, 자신을 뽐내지도 않는 건축이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숲에는 바위도 있고,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꽃도 있다. 그것들은 그릴 수 있지만 숲을 그리긴 어렵다”는 글을 어딘가에 쓴 적이 있다.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는 건축을 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이 프로젝트에서 보이는 것 같다. 각각 다 디자인이 되어 있지만 어떤 하나의 형상을 이루지는 않는, 개별 상가의 실내 공간에 붙어 있는 나머지 건축 요소들이 어렴풋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것이다.


에필로그
서승모 좋아하는 시를 하나 가져왔다. ‘Keeping Things Whole’라는 제목의 시다. 대략의 의미는, ‘내가 있던 장소는 어떤 곳의 부재이고, 내가 그곳에 있으면 공기와 바람이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이 온전히 들어올 수 있도록 내가 움직이고, 그렇게 전체를 보존하는 것이 내 목적’이라는 내용이다. ‘전체’라는 말은 일본어에서 물사로 표현된다. 이는 세상을 사물과 사건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와 비슷한 생각으로 건축을 하려고 한다.
같이 일했던 최재필 오헤제 소장이 언젠가 ‘풍경’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영어 ‘landscape’는 땅을 이야기하는데 풍경은 바람을 가리킨다. 미관지구를 일본에서 풍치지구라고 부른다. 풍경은 바람의 경치고, 랜드스케이프는 땅의 경치다. 랜드스케이프는 땅에 붙어 있는 굳건한 느낌이다. 그에 반해 풍경은 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건축은 굳건하고 단단하고, 한국이나 일본의 건축은 흔들리고 소통하는 느낌이다. 어느 것이 더 낫다는 것이 아니라, 형상의 반대쪽에서 생각하는 단초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재필 ‘등가’라는 개념에 대해 좀더 듣고 싶다. 등가 관계를 만드는 이유는 건축의 존재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건과 건축, 혹은 물건과 구조체를 등가로 놓는 순간 건축의 존재감이 달라진다. 그때부터 건축은 건물이라는 상자가 아니라 더 큰 환경 속 존재가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DDP 라이브러리 작업에서는 건물, 책장, 책의 위계를 다르게 설정했었는데, 책이 책장이 되고 책장이 건물의 구조가 되면 건축의 존재가 기존 위계에서 벗어나 더 옅어질 수도, 더 강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었다. 이번 작업에서도 건축과 등가로 놓고자 하는 어떤 대상이 있을 것 같고, 이를 통해서 건축의 존재를 어떻게 바꾸고자 하는지 궁금하다. 앞으로 이어질 작업에서 건축은 또 어떤 것이 될지 궁금해진다.
서승모 건축의 ‘존재’라는 표현은 건축의 ‘정의’에 가까운 말인데 아직 내겐 그걸 논할 만한 깊이가 없다. 내가 말한 ‘등가’는 바둑과 비슷한 것이다. 말 하나하나에 색깔이 있는 장기와 달리 바둑은 돌 하나하나에 색깔은 없고 그것들의 포메이션이 의미를 갖는다. 내가 해보려는 작업은 그런 비슷한 것이다. 직선계단, 원형계단, 엘리베이터, 발코니, 내부공간, 처마 등으로 이루어지는 구성은 다른 어딘가에도 얼마든지 있다. 나는 그 구성이나 배치를 좀더 바둑 두듯이 하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더 발전시킨다면, 기둥, 보, 바닥 같은 건축요소가 다 따로 노는 건물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건축요소들을 재미로 감각적으로 배치하는 게 아니라 건축의 존재감을 달리 하려는 생각으로 하게 되면 완전히 다른 성격의 작업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 건축 일을 해오는 동안 여러 가지 유행이 지나갔다. 그 흐름을 뚫고 지나온, 작은 끌개라도 계속 끌고온 건축가는 많지 않다. 분명한 건 내가 뭔가를 손에 들고 있으면 내 건축이 조금은 다를 것이다.

인터뷰이 서승모 / 인터뷰어 김상호 / 원고화 및 편집 김상호
데뷔, 전환, 야심
분량6,103자 / 12분 / 도판 20장
발행일2023년 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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