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 정체성, 수행성
박정현
분량13,473자 / 27분 / 도판 10장
발행일2022년 9월 30일
유형강연록
한국성이 불거지는 조건
우선, 건축에서 한국성이 늘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성이란 이슈가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로 등장했던 것은 특정한 시대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적인 예로 김수근 선생과 강병기 선생 등 일본 동경대학에서 유학하고 있던 대학원생들이 1959년에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 참여했는데요. 현상설계 지침을 확인해보진 않았습니다만, 당선안으로 미루어보건대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임에도 ‘한국성을 어떻게 구현하라’든가 ‘전통을 어떻게 표현하라’는 요구 조건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회관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자리에 지어집니다. 이 역시 굉장히 기념비적인 건물이고, 타워 부분이 10층 정도 높이로 상당히 높은 건물이었죠. 광화문 앞 육조거리라는 장소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성을 어떻게 구현해내라는 이슈는 전혀 불거지지 않았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이 해방된 후, 기념비적 건축물은 규모가 크든 작든 하나둘 건립되었지만, 한국성이 문제 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1940~50년대는 한국이 미국 주도 아래 재편되는 전후 국제 사회 속에 어떻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느냐가 더 큰 문제였습니다. 한국 국가 예산의 90% 이상이 미국의 국가 원조로 이루어지던 시절에는 한국성이란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1967년이 되어서야 한국성이 건축계에서 문제가 됩니다. 이 시기에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부여박물관을 보면, 건축에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약간 ‘일본 건물 같은데?’라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서까래가 걸쳐 있는 부분은 일본 무사의 투구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 건물은 현상설계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국가 프로젝트이면서 김수근 개인의 프로젝트였다는 의미입니다. 이 건물이 거의 준공에 이른 시점에 동아일보에서 보도했습니다. ‘부여박물관 건축 양식에 말썽이 생겼다. 일본 신사와 같다’라고 기사1가 보도되자 김수근 선생이 여기에 기름을 붓는 일이 벌어집니다. ‘일본에 백제 문화가 건너가지 않았나? 백제 문화 고유의 것이다’, “신사 양식이 아니라 내 것이다”2 이런 식으로요. 이렇게 해서 부여박물관 문제는 건축의 문제를 벗어나는 큰 사건으로 확대됩니다. 신문 전체 지면이 8면밖에 안 되던 시절에, 동아일보가 건축 양식 문제를 2면이나 할애해 가며, 대대적으로 ‘왜색인가, 아닌가’ 논쟁을 벌이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죠. 이것을 철거할 것인가, 그대로 지을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집니다. 결국 허물 정도는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지금 가보면 1층 천장 마감을 해서 지붕 구조를 전혀 알 수 없지만, 당시에는 전체 내부 공간을 텄고, 중간에 중층을 만들어서 내부 전시실을 마련했었습니다.
그렇다면 1950년대 말, 60년대 초에는 아무 이슈가 없다가 왜 1967년도에 한국성이 문제가 되었을까요? 1965년에 있었던 한일수교협정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직접적인 배경이 됩니다. 일본과 수교가 없던 상황에서 1962년 박정희 정권이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시동했습니다. 본격적인 개발을 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냉전이라는 국제질서, 지정학적 위치 등의 이유로 일본과의 교류 없이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그래서 1965년 한일수교협정을 맺게 됩니다. 전쟁배상금을 비롯한 경제투자를 받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죠. 1945년 해방된 지 20년 만에 한일수교협정이 추진되니까 엄청난 반발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데모도 했고요.
부여박물관 왜색 시비 사건은 건축 양식의 문제를 떠나서 김수근에게 ‘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수근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본으로 밀항해서 군 복무를 하지 않았고, 일본에서 수학했고, 또한 부인이 일본인이잖아요. 그런 와중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김수근 건축가 개인에게 정체성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현대건축에 대한 불신과 콘크리트로 빚은 전통
비슷한 시기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집니다. 1966년 종합민족문화센터와 종합박물관이라고 하는, 당시로서는 가장 큰 국가 건축 프로젝트의 현상설계가 진행됩니다. 그런데 현상설계 요강에 “전국의 주요 유명 문화재 건물들을 모방해도 좋다” 그리고 “콤포지션”해도 좋다고 부추긴 현상설계 지침이 있었습니다. 이에 반발해 많은 건축가가 보이콧하기도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강봉진 선생의 안이 당선됩니다. 당선안에서 볼 수 있듯 1번부터 12번까지 건물 전각이 있는데, 전국 각지에 있는 유명한 건물들이에요. 영남루도 있고 진남각도 있고요. 12개 동을 짜깁기해서 현상설계에 당선이 됩니다. ‘계획도’는 정부 측에서 제시한 이미지 같아요. 건물 옆에 쓰여진 설명 중에 맨 위가 ‘기와’라고 되어 있고, 그 아래 세글자가 ‘콘구리’, 그러니까 콘크리트로 짓는 것을 처음부터 염두에 둔 것 같아요. 현상설계안을 조정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민속박물관이 건립됩니다.


1965년 당시의 경복궁 일대를 살펴보면 지금의 모습과는 아주 다릅니다. 당시에는 광화문이 없고 전 조선총독부 건물인 중앙청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경복궁 내에는 경회루를 비롯한 중요 전각 몇 동만 남아있었습니다. 20세기 한국은 굉장히 다양한 정치 체제를 겪었습니다. 20세기 인류가 겪을 수 있었던 모든 정치체제를 다 겪었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1910년까지 왕정이었고, 1910~1945년까지 식민지였고, 1945~1948년까지 위탁통치였고, 1950~53년까지 내전에 해당하는 국제전쟁을 겪었고, 건국을 하고 난 다음에도 독재정권이었다가 419혁명 때 1년간의 공화정, 1961년의 군사쿠데타와 함께 다시 독재정권을 겪습니다. 경복궁 일대는 이 모든 역사적 흔적이 묻어 있는 땅이므로 설계할 때 역사나 장소성 이슈가 불거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광화문을 새로 짓기로 했는데, 나무 대신 철근 콘크리트를 썼습니다. 이 역시 강봉진 선생의 작업입니다. 생각해보면, 공포를 거푸집에 부어서 만든다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지금 서울역사박물관의 마당에 가보시면 지금도 볼 수 있는데, 대단히 정교한 콘크리트 결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잡한 형태의 거푸집에 콘크리트를 한 번에 부을 수 없으니까, 여러 부재를 나누어 붓고 굳히는데 이 역시 나무로 된 부재를 본따 만들었습니다. 종합박물관과 같은 콘크리트로 목재 건축을 모방한 것이 바람직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잠시 제쳐두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1960년대 중후반에 국가를 상징하는 건물을 저런 식 말고 한국 현대 건축가들이 어떻게 지을 수 있었을까요?

간삼건축 설립자인 원정수가 이 종합박물관 현상설계 논란이 터졌을 때, 한 잡지사에서 진행했던 대담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교가 필요합니다.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시카고 트리뷴 현상설계3 당시 그로피우스는 순교를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몇몇 거인들의 순교가 없었던들 현대건축의 꽃은 피기 힘들었을 것입니다.”4 이때 한국의 건축가들은 현대 건축을 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던 것이죠. 원정수 선생이 지적한 것은 바로 한국 건축가들이 그로피우스를 본받아서 한국 현대 건축을 수호하기 위하여 일종의 순교를 해야 한다고까지 말씀을 한 것이고요.
이때 논의 구도는 양식의 문제였습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 양식이 어떤 것이야 하는가?’ 하는 이슈와, 또 하나는 ‘전통과 현대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이슈가 있었고요. 그로 인해서 ‘건축을 방해하는 관료주의와 관료주의 때문에 피해를 받는 건축가’라는 구도가 생겼고, 그것이 끊임없이, 심지어 최근까지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절충적인 건물, 전통을 모방하는 건물을 ‘시대의 양식’으로 이해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종합박물관 현상설계 심사위원장이었던 정인국 선생이 있습니다. 그는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ölfflin)의 말을 빌려 옵니다. 뵐플린은 고전주의 체계 안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양식 차이를 규명한 미술사가입니다. 그의 입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선적이고 평면적인 르네상스와 곡선과 깊이가 있는 바로크로 양분하는 것입니다. 이 이원적 구도를 정인국 선생은 인류 문화사 전체로 펼쳤습니다. 질서 있는 고전과 자유로운 낭만이 그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고전에 가깝고, 중세는 과도기였다가, 고딕 시절에 낭만으로 치우쳤다가, 르네상스 때 다시 고전으로 돌아가고, 바로크-로코코 때 낭만으로 넘어갔다가, 19세기 절충주의 시대는 과도기, 1900년대 초부터 1950년대까지 현대 건축(Modern architecture)은 고전이다. 그리고 1950년대 이후에 다시 낭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도식이었죠. 이 구도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은 낭만에 해당하니 종합박물관처럼 짓는 것이 오히려 시대에 적합하다는 해석이었습니다.

정체성의 문제와 네이션의 미디어
여기에 제가 한 가지 덧붙이고 싶었던 것은, 1960년대 한국 건축계의 상황을 국가와 국민 정체성의 문제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한국성을 양식의 문제로 이야기했다가, 관료주의와 건축가의 대결 구도로 이해했다가, 또 전통과 현대의 절충이나 조화 등으로 말하곤 합니다.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로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대목에서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책,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공동체란 ‘네이션(nation)’인데요. 한국어에서 큰 혼란이 빚어지는 이유는 네이션이 민족이면서 국민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등 일본 학자들은 네이션을 번역하지 않습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상상(想像)’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허구적인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한자어 그대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을 뜻하는데요. 영영 사전에서도 ‘어떤 대상에 대해서 머릿속에 그리는 상(a mental picture or impression of something)’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이 상상력이고, 이는 미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인간 정신 능력 중 하나입니다. 요컨대 ‘우리가 어떤 공동체를 상상할 때, 생각할 때, 어떤 매개 없이 가능한가?’하고 물어볼 수 있죠. 왜 대학생들이 과잠(학과 점퍼)을 입고 다닐까요? 그게 우리의 공동체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겠죠. 국가나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이런 매개 없이 어떤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이 공동체가 단순히 집단적 상상만으로 가능할까요, 종족적 공통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이 문제는 제가 그리고 이 자리에서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상상된 공동체』를 비판하는 입장도 상당히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한국은 서구와 달라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네이션이 형성됐다고 하는 국내 학자들도 있어요. 저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말이 무조건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무언가를 상상하기 위해서 필요한 매체로는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건축이 공동체를 상상하게 하는 매체로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1960년대부터 있었던 한국성 논쟁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성된 전통
1960년대에는 건축만이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전통을 재창안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곧 정체성 문제로 이어집니다. 1960년대 많은 학자는 일제 식민지가 설정해두었던 ‘한국은 정체되어있고, 스스로 근대화될 수 없었다’는 일본 식민학자들의 이론을 극복하는 것에 인생을 걸어야 했습니다. 대표적인 반론이 ‘일제가 아니었더라도 우리에게 내재적인 근대화의 씨앗이 있었다’라는 ‘내재적 발전론(내발론)’입니다. 내발론의 대표적인 예로, 경제 분야에서 김용섭이라는 학자가 1970년에 『조선후기농업사연구』를 씁니다. 조선시대 양안, 요즘으로 치면 토지등기부등본을 조사했는데, 이때 노비들이 짓는 농사만이 아니라 자작농들이 있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부르주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지요. 책이 나오자마자 문학평론가 김윤식, 김현 선생이 나중에 회고에서 “눈을 번쩍 뜨고”라고 표현할 만큼 충격을 받았고, 한국 문학사를 재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근대 문학사를 재구성하려면 임화라는 학자가 ‘근대 문학은 이식된 문학이다’라고 한 것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일제강점기 이전에 근대문학의 씨앗이 있었다는 것을 찾아야 했고요. 그래서 근대문학사가 조선 영・정조대부터 시작합니다. 경제사뿐만 아니라, 실학, 태권도 등 예전부터 있었던 것들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으로 모습을 갖추어 나갑니다. 일제시대를 괄호치고 영정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근대적 사상의 씨앗이 있었음을 입증해야 했던 겁니다. 여담입니다만, 태권도도 이런 맥락에서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국기원 건립 이전에 국제태권도연맹이 먼저 생겼어요. ‘태권도는 일본의 가라데와 다르다’는 것을 국제적 인정을 통해서 먼저 획득해야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어요. 타자의 인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죠.
여러 분야에서 이런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던 1960년대 중후반, 건축에서는 전통을 직설적으로 모방하는 과도기 같은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았어요. 다시 말해 이런 시기를 거치지 않고 현대 건축으로 곧바로 간 나라가 있을까요? 과거와 전통의 유령과 싸우고 대결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전통 건축에서 현대 건축으로 곧장,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넘어간 나라가 있을까요? 역으로 고찰해보면 극히 드뭅니다.
가까이 읽기에서 멀리서 읽기로: 유럽의 정체성 논쟁
우리나라, 일본이나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또한 정체성 논쟁이 있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던 계기는 이탈리아 출신의 영문학자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의 책 『그래프, 지도, 나무』, 『멀리서 읽기(Distant Reading)』 등입니다. 문학 텍스트를 좁고 깊게 분석하듯이 가까이에서 읽지 않고,5 멀리서 바라보면서 연구하는 방식을 소개합니다. 모레티가 언급하는 도표를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각국의 소설 시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시기가 언제인가를 살펴본 것입니다. 소설 시장이 폭발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우선, 하나의 언어권이 하나의 단일한 시장으로 엮여야 합니다. ‘근대소설이 네이션 형성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베네딕트 앤더슨 이론을 고려한다면, 나이지리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시기, 이탈리아가 잘게 쪼개져 있던 나라에서 처음으로 통일된 국민국가로 발돋움하던 시기와 소설 시장 성장기가 겹칩니다. 이러한 맥락을 건축으로 끌고 와보면 어떨까요? 세계 각국에서 ‘전통과 현대 기술의 결합으로 생긴 절충주의’가 언제 폭발적으로 늘어났는지, 또는 ‘정체성을 건축으로 표현해야 했던 시기와 네이션 형성기의 상관관계’ 등을 확인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프랑스에서도 프랑스 건축의 정체성이 문제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17세기 말 프랑스, 루이 14세 시절입니다. 루이 14세의 집권은 프랑스 절대왕정의 시작이고, 지금의 프랑스 국경선이 이 시기에 얼추 정해집니다. 이때 주목해야 할 국경선은 독일과 접경지역인 알자스로렌 지방의 스트라스부르입니다. 루이 14세가 이 지역을 획득한 뒤 파리 빅투아르 광장에 로마 장수 복장을 한 자신의 기마상을 세웠습니다. 프랑스가 처음으로 국민국가를 형성했음을 과시하는 것이죠. 국민국가의 형성에 필요한 조건으로 국경선의 확정, 중앙집권화된 행정체계, 그리고 단일한 언어 등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이 루이 14세 때 이루집니다. 국민국가를 형성했으니, 또는 형성하기 위해 건물을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루이 14세는 루브르궁 건설 계획을 세웁니다. 당시에 유명한 건축가는 대부분 이탈리아 출신이 많았습니다. 바티칸 일대를 설계한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루브르궁 동쪽 파사드의 설계를 맡기기 위해 루이 14세가 직접 공식 초청합니다. 베르니니는 이탈리아 바로크의 전형을 기반으로 미켈란젤로의 자이언트 오더와 오더 사이의 아치를 반복한 패턴을 적용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첫 번째 안부터 최종안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베르니니의 안은 채택되지 않습니다.


의사이자 아마추어 건축가였던 클로드 페로가 베르니니의 안들을 물리치고, 루브르궁 동쪽 파사드를 새롭게 설계했습니다. 1676년 장 마로가 작도한 그림을 보면, 벽기둥 대신에 독립기둥이 있습니다. 고전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가 기둥 간격이죠. 비례와 리듬, 건물의 성격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등간격으로 A-A-A 방식으로 세우는 것을, A-B-A-B로 변형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클로드 페로의 이중 기둥을 한국에서는 쌍주라고 합니다. 우리 눈에는 서양 건축이 모두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이 기둥 방식은 이탈리아 건축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양식은 프랑스 건축 풍으로 자리잡습니다. 루이 14세 때 설립된 에콜데보자르 같은 아카데미에서 ‘프랑스식 고전주의 건축의 전범(典範)’으로 인식됩니다. 그리고 프랑스라는 국민국가가 이탈리아의 예술로부터 독립해 새롭게 생산한 프랑스풍 건축 양식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낸 궁을 지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저택 입면을 만들 때 건물 양 끝을 돌출시키는 삼분할 기법을 사용하는데, 이걸 클로드 페로가 루브르에도 가져옵니다. 그러면서 단단한 벽을 독립 기둥으로 바꿉니다.

비슷한 시기 1653년 마크 앙투안 로지에가 『건축론』을 썼습니다. 고전건축의 폐허에 앉아서 나무를 가리키는 삽화에 보이듯, 고전주의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고전주의 양식이 다 허물어진 상황에서 다시 한번 건축의 근본적인 원리를 재정립시킬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이 그림 속의 사람이 4개의 나무 기둥과 페디먼트 형상의 나무 줄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이는 건축의 ‘상상된 기원’입니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 장 자크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쓴 것처럼 상상된 원시인을 간주하고 이로부터 새로운 원리를 도출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어요. 로지에의 글은 건축 분야의 예인 것이죠. 로지에가 기둥에 관해 말한 내용을 살펴봅시다. “기둥은 반드시 수직이어야 한다. 하중을 지탱하기 위해서 완벽한 수직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인상적입니다. “기둥은 반드시 독립기둥이어야 한다. 그래야 기둥의 목적과 기원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 외벽에 장식으로 쓰인 벽기둥이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기둥은 반드시 원기둥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에 사각형은 없기 때문이다.” 바로 프랑스식 고전주의 규범으로 자리잡는 내용입니다. 파리 팡테옹과 로마의 산피에트로의 차이는 독립 원기둥과 벽기둥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대략적으로라도 알고 나면, 비슷한 고전 양식 건축물의 사진을 보더라도 어떤 것이 프랑스식 건물인지 알 수 있죠.

우리는 기본적으로 서양 건축을 거칠게 서양 일반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랑스가 독립 기둥에 집착했다면, 독일 문학의 화신 괴테는 1773년 ‘독일 건축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아베[로지에를 일컬음] 씨, 그런데 제가 보기에, 당신은 벽에 박힌 기둥이 볼썽사나워 보였을 때나 현대인들이 고대 신전의 기둥 사이 공간을 벽으로 채워버렸을 때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습니다. 당신이 진실에 귀먹지 않았더라면, 그 돌들이 당신에게 설교를 했을테니까 말이에요. 기둥은 우리 주거에서 결코 자연스러운 요소가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 모든 건물의 특성과 모순적입니다. 우리 집들은 네 모서리의 네 기둥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네 면의 네 벽에서 발전했습니다. 벽은 기둥 자리에 있고 기둥을 없애버립니다. 기둥이 더해져있다면, 그건 불필요한 짐일 뿐입니다.”
프로이센 역사에서 독일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로 만들어준 대표적인 계몽 군주가 바로 프리드리히 대왕(재위 1740~1786)입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있었던 상수시(Sanssouci)궁 공식 언어, 전 유럽 대표적인 외교 언어가 프랑스어였습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어 교육을 받았고 독일어가 굉장히 후진 언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또 프랑스 루브르와 베르사유가 전 유럽 군주들의 이상향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재임 기간이 겹치는 이 시기에 괴테가 프랑스 건축으로부터, 그러니까 로지에가 설정해둔 구도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건축론을 이야기하려고 했다는 것이죠. 100여 년 후 독일에서 텍토닉 논쟁이 있을 때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가 ‘건축의 첫 번째 요소가 화덕, 두 번째 요소가 카페트다’ 라고 할 때, 다 이유가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듭니다. 독립된 기둥을 싫어한 괴테가 좋아했던 건물은 슈트라스부르크 대성당입니다. 괴테는 이곳에 1771년에 방문했고 2년 후에 앞서 소개한 글을 썼습니다. 슈트라스부르크는 923년에 신성로마제국에 편입되었다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1681년에 루이 14세에 의해 프랑스에 뺏기기 전까지, 근 700년 가까이 독일 땅이었어요. 그래서 괴테가 슈트라스부르크 대성당을 독일 건축의 전범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휩쓸고 다니면서 나폴레옹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서유럽 대부분이 프랑스 땅이 되었고, 프로이센 영토가 줄어들었지요. 이 전쟁은 전 유럽에 민족주의를 불어넣습니다. 당시에 프로이센 국민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았던 퀸 루이제(Queen Luise of Prussia)가 있었어요. 1807년에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게 굉장히 굴욕적으로 항복을 하는데, 1810년 루이제 왕비가 세상을 떠납니다. 나라가 나폴레옹에 의해서 굉장히 핍박받고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절치부심하던 분위기 속에서 돌아가신 거죠. 이때 루이제 왕비의 무덤을 칼 프리드리히 싱켈(Karl Friedrich Schinkel)이 지었는데, 과연 어떤 양식을 선택하여 지어야 했을까요? 당연히 고딕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예시도 칼 프리드리히 싱켈(Karl Friedrich Schinkel)이 지은 민족 돔(Nationaldom)인데요. 프로이센 사람들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빼앗겼던 땅을 되찾고자 했던 전쟁을 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기념비입니다. 국가 기념비 프로젝트에서 어떤 양식을 선택해야 했을까요? 역시 고전주의가 아니고 고딕입니다. 물론 이 고딕이 단순한 고딕 양식과는 다르고, 분석할 부분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19세기쯤 되면 모든 양식이 선택지로 주어집니다. 19세기를 흔히 절충주의 시대, 혼란의 시기라고 부릅니다. 그런 시기에 기념비적인 건물을 지어야 한다면 국가나 시민공동체는 어떤 양식을 선택했을까요? 그럴 때는 언제나 민족의 역사나 기억과 얽혀있는 것을 택했습니다.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서 초창기 철근 콘크리트의 대가이자 르코르뷔지에의 스승이었던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가 1913년 파리 샹젤리제 극장을 짓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고전주의나 전통적인 양식주의의 건물에서 현대적인 건물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있는 건물처럼 보입니다. 훨씬 더 단순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어떤 양식이 남아있는 것처럼요. 그런데 그때 알폰세 고세(Alphonse Gosset)라는 프랑스 건축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꽤 놀랍습니다.
“낭랑한 가창과 최면적 음악에 무척 민감한 독일인이 이런 종류의 격리된 공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해가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밝은 조명과 엘레강스의 열렬한 팬인 파리지앵들한테는 어림도 없다!”

간단히 말하면, 벽이 중심인 이 건물이 지나치게 독일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종의 패턴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특정 양식이 한 민족의, 한 네이션의 정체성과 결부된 일들이 유럽에서도 매우 많았습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1700년대부터 19세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서 그런 과정이 이루어졌고 그 가운데 산업 재료의 발전, 건축에 대한 생각과 미학의 변화 등이 서서히 진행됐습니다. 한국은 이 모든 게 압축적 근대화의 전형처럼 뒤범벅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성, 수행의 원동력
어찌 보면 20세기에 한국성이 국내 건축계 전반에서 거의 유일한 논쟁이자 담론이었습니다. 이것이 부정적인 영향도 있었던 반면에 많은 것들을 생산해내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성이라는 신기루 같은 성배를 찾아 나서면서, 그 과정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이야기, 도전, 결과물이 나온 것이죠.
한국 현대 건축에서 드러나는 한국성을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물론 이보다 더 많겠지만요. 그런데 이 카테고리의 개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안티테제입니다. 첫 번째가 과거에 한국성을 전통 건축 특정 양식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너무 과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공간, 비움, 마당’입니다. 이 세 단어 혹은 개념은 다른 갈래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한국 전통 건축의 외부 공간으로부터 이어지는 뿌리가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텍토닉’입니다. 모양, 형태는 가져오더라도 철근 콘크리트로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구조, 텍토닉과 결부된 것으로 풀어내는 계열이죠. 이들은 한국성을 찾으려는 시대가 여전히 조선시대나 전근대입니다. 세 번째 계열은 버내큘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세기 한국에서 일어났던 한국의 많은 일들, 그동안 수없이 지어낸 도시 환경이 오히려 한국적인 것을 찾는 밑바탕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세 유형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를 빌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고화 김보현 / 편집 심미선
박정현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을 비롯해 『김정철과 정림건축』(편저),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이하 공저), 『중산층 시대의 디자인 문화: 1989~1997』 등을 쓰고,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건축의 고전적 언어』 등을 번역했다.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Out of the Ordinary》(2015, 런던), 《Contemporary Korean Architecture, Cosmopolitan Look 1989~2019》(2019, 부다페스트) 등의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한국성, 정체성, 수행성
분량13,473자 / 27분 / 도판 10장
발행일2022년 9월 30일
유형강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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